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7)
337
구출?
상투스의 말을 요약하자면 지극히 간단했다.
남제국 황궁으로 떨어진 옛 시대의 마법사가 남제국의 황제 자리에 마법사를 앉히려고 했고, 최소한의 명분을 챙기기 위해 황실의 혈통을 이은 자들 사이에서 마법사를 찾던 중 페리토드라는 황실의 피를 이은 마법사를 발견해서 다음 황제로 삼기 위해서 납치를 했다.
그 정보를 요약해서 우리에게 건네준 상투스는 늘 그랬듯이 나타날 때처럼 전조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상투스에게 들은 정보를 지젤에게 그대로 전달해주었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지젤은 잠깐 고민하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내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구하러 갈 거야?”
“흐음.”
전에 만났던 칼라게인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남제국 황실로 떨어졌다는 연옥에서 빠져나온 마법사도 사제라면 아주 질색을 하고 날뛸 게 분명했다.
거기다 지젤과 나는 그냥 사제도 아니고 사도 둘인 셈이었으니, 거의 그 마법사의 발작 버튼일 텐데. 남제국 황실로 페리토드를 되찾으러 가면 긴 세월 연옥에 처박혀있던 괴물 하나와 전면전을 벌이러 가는 셈이었다.
근데 이게 또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더 구하러 갈 이유가 없었는데.
나랑 페리토드가 서로를 구하러 목숨까지 걸 만한 관계인가? 아니,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 별로 안 친한데. 페리토드는 나에 대해 잘 몰랐고, 나 또한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딱히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한 사이도 아니었고. 애당초 동행하게 된 것도 레페와 페리토드가 친해져서 이렇게 된 것이었지.
오히려 진짜 내 관심은 지금 남제국 수도 전체에 눈을 뿌려대는 미친 사도놈에게 있었다. 그 녀석 머리통을 쪼개서 안에 든 사리를 꺼내야 내 계획을 완성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투스는 페리토드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 눈을 뿌려대는 사도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그가 의도적으로 내게 사도에 대한 정보를 숨긴 건가 싶다가도 또 생각해보면 상투스가 내게 사도의 정보를 숨길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아니, 애초에 상투스 녀석은 내가 오롯이 내 목적을 위해 사도들을 죽여 대는 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
결국, 짐작 가는 가능성은 둘.
첫 번째는 상투스가 의도적으로 내게 눈 뿌려대는 사도에 대한 정보를 누락 했을 가능성.
두 번째는 악마 녀석이 우리에게 거래에 대해 설명하면서 취한 첫 번째 빛가루, 거기에 사도에 대한 정보가 있었을 가능성이었다.
애초에 우리와 거래를 하기 위해 움직이던 악마가 흡수한 기억은 내가 찾던 정보와 연관이 있는 기억일 가능성이 컸고, 그 기억을 품은 채로 악마가 죽어버린 이상 그가 취했던 부분만큼 정보의 누락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상투스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냥 기억들에 사도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고 대답할 게 뻔해서 진실은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마르낙?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지젤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끊어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안 구하러 갈래. 들어보니까 딱히 해코지할 생각으로 데려간 게 아니잖아. 오히려 페리토드가 땡잡은 거지. 길 가던 사람 붙잡고 ‘당신, 황제 시켜드릴게요. 황제 한 번 하실래요?’하고 물어보면 거의 다 황제 한 번 해보겠다고 대답할걸?”
“하긴…”
짧게 답한 지젤은 자신이 황제를 해보는 상상을 해보는 듯 잠깐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시켜만 주면 황제 한번 해보고 싶은데.”
“거봐. 일단 돌아가서 레페랑 페르카한테 페리토드는 거기서 분명 행복할 거라고 말해주자.”
“그래.”
***
“네?!”
“네에에에?!”
지젤의 권능으로 열심히 남제국 수도를 향해 이동 중이던 지하요새로 돌아와 레페와 페르카에게 페리토드가 처한 행복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페르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페리토드는 이만 놓아주자. 페리토드는 앞으로 황궁에서 호화로운 잠자리랑 음식을 제공받으며 행복하게 지낼 거야. 분명.”
“형!”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녀석답게 페르카는 대번에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무엇보다 페리토드 누나, 본인의 의사가 중요한 거잖아요!”
“맞아요!”
페르카가 단호하게 나서자, 레페도 페르카를 두둔하며 말을 거들었다.
“페르카 말대로 저도 이번 일은 페리토드 언니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느새 페르카와 레페 뒤로 불쑥 나타난 상투스도 둘을 두둔했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이 레페와 페르카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잠깐 동료였더라도, 동료는 동료. 그 정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상투스를 자칭하는 저 자식은 기이할 정도로 레페와 페르카를 좋아했다. 나는 오히려 가짜 상투스까지 둘을 두둔하자 더 구하러 가기가 싫어졌고.
“아니, 너희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페리토드를 납치해간 거,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니까? 아득한 고대시대에 봉인되었다가 최근 풀려난 완전 미친 마법사라고. 되게 위험한 놈이야. 그놈.”
“하지만 형은 다 이기잖아요!”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이 반짝인다. 페르카는 날 쳐다보며 더없이 눈을 반짝였다.
“형이라면 페리토드 누나를 납치한 그 마법사도 이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마법사들은 상성 상 내가 유리하긴 했다.
사도나 사제들은 신성으로 내 재생력을 억제할 수 있어서 내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지만, 마법사들의 마법은 내 재생력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그게 쓸데없는 싸움을 벌일 이유가 되진 않았지만.
“너희가 이렇게 걱정하는 와중에도 페리토드는 분명 엄청 푹신한 침대에서 뒹굴대고 있을걸?”
“형!!!”
페르카가 내게 매달리려 하는 걸 슬쩍 피해내자,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이 레페가 페르카의 뒤를 이어 나를 설득하려 시도해왔다.
“연 씨가 하신 말씀대로면, 페리토드 언니가 황제가 되어봤자 실권 따윈 없는 허수아비 황제가 될 뿐이에요. 언니를 납치한 마법사가 모든 실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겠죠.”
“황제는 허수아비 황제가 제일 좋아. 허수아비면 일 안 하고 놀기만 해도 되잖아. 또 혹시 모르지. 황제가 된 페리토드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서 실권을 얻어낼지도.”
레페의 연녹빛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페리토드 언니가 그렇게 계획적으로 긴 시간을 투자해서 권력을 얻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 페리토드 언니가?”
잠깐 내가 아는 페리토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딱히 머리가 좋다는 느낌이 전혀 없긴 했지. 계획적이기보단 충동적인 경향도 강했고.
지극히 논리적인 레페의 지적에 나는 내 억지스러운 가설을 철회했다.
“그건 그렇긴 해. 인정할게. 하지만 분명 페리토드가 별일만 없다면 황제로서 평생 놀고먹으면서 호의호식할 거란 것도 분명한 사실이야. 안 그래?”
“대신 평생 황궁에 메여서 살게 되겠죠. 그 언니 성격상 그렇게 가둬두면 답답해서 일찍 콱 죽어버릴걸요? 진짜예요!”
무슨 우리 크기가 부족한 애완동물도 아니고.
“적당히 해.”
끝없이 이어질 거 같던 우리의 논쟁을 끊어낸 건, 지젤이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당겨 날 끌어내더니 레페와 페르카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떼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직 애들이라 그런가? 지금 너희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이야? 너희는 너희의 그 알량한 정의감 하나를 위해서 지금 나랑 마르낙한테 목숨을 걸라고 강요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목숨은 이미 잘만 보장된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담긴 목소리. 지젤은 약간의 짜증마저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막말로 진짜 구해내러 간다고 쳐봐. 거기서 싸우는 건 누구야? 나랑 마르낙이겠지. 왜냐하면, 지금의 너희 둘은 지극히 약해빠졌으니까. 결국, 너희는 뒷짐 지고 서서 싸움의 결과가 나오기만 기다리다 우리가 이기면 페리토드인가 뭔가를 구해내고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겠지. 만약 우리가 패배한다면 눈물을 머금고 도망칠 테고. 왜?”
지젤이 뻗은 손가락이 레페와 페르카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녀는 지극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해빠져서 너희 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너희는 지극히 안전한 안전지대에서 너희의 도덕적 허영심만 충족시키고자 애처럼 떼쓰고 있는 거야. 남의 목숨을 가지고 베팅해대면서.”
“그만해. 지젤.”
내가 말을 부드럽게 끊어내자 지젤은 순순히 물러났다. 마치 내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이미 한번 그녀가 내뱉어낸 말들은 제법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레페와 페르카에게 꽂혔다.
어느 정도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아까와 달리 둘은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젤의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긴 했지만, 저 녀석들은 갓 성인이 된 녀석들이었다. 자신들이 구해낼 수 있었다면 내게 억지로 부탁하지도 않고서 직접 구하러 갔을 녀석들이었고. 녀석들은 녀석들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갈구했기에 무리인 걸 알면서도 페리토드를 구해낼 수 있는 내게 떼를 쓴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였다. 더욱이 저렇게 갓 어른이 된 녀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어른으로서 한 번 도와줄 수도 있는 거고.
어쩔 수 없나.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 페르카의 표정이 변했다. 무언가 결심하기라도 한 듯 녀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비겁하게 뒤로 빠져 있지 않겠어요. 저는 제가 걸 수 있는 모든 걸 걸겠어요. 페리토드 누나를 구하는 건 저 혼자 한 번 힘써 볼게요.”
“나도 도울게. 페르카.”
레페와 페르카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보고, 페르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 그 광경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여기가 남제국 황성 앞인 줄 알겠네. 내가 당장 여기서 너희 내려두고 가면 수도까지는 어떻게 가려고?”
페르카는 내 눈치를 슬쩍 보고서 말했다.
“태, 태워주는 것 정도는 형이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되면 내려서 걸어갈게요.”
“됐고. 둘 다 가서 무장이나 챙겨입고 와. 지금 바로 구하러 갈 거니까. 물론, 무리는 안 할 거니까 너무 기대하진 말고.”
내 승낙을 들은 페르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형!!!”
나는 달려드는 페르카를 슬쩍 피해내고서 말했다.
“감사의 포옹은 됐으니까 얼른 가서 장비나 챙겨와.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네!!!”
허둥지둥 페르카가 뛰어가고 자리에 남은 레페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됐고, 너도 얼른 무기나 챙겨와.”
“네.”
둘이 떠나고, 지젤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너, 쟤네한테 너무 약한 거 아니야? 페르카, 쟤 하는 짓이 5년 전 너랑 똑 닮긴 했어도 말이지.”
“혼자 결정해서 미안.”
“그러고 보니 그렇네? 너, 나랑 상의도 없이 결정했잖아?”
지젤이 나를 쳐다보며 짓궂게 웃었다.
“그럼 나도 다음에 한 번 똑같이 해도 되겠네? 안 그래? 그래야 공평하잖아.”
“흠. 그냥 혼자 구하러 갈까.”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일렁대고 지젤이 미소지었다.
“나 없이 수도까지 바로 갈 수 있겠어? 진짜로?”
“뭘 원하는데?”
내가 묻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젤이 본심을 드러냈다.
“남제국 수도에서의 일이 대충 끝맺어지면 흥청망청 돈 쓰면서 쇼핑해보고 싶어.”
“좋아. 디스펜스한테 말해둘 테니 원하는 만큼 가져다 써.”
“나 엄청 많이 살 건데?”
“사고 싶은 만큼 사도 괜찮아. 어짜피 돈 될만한 거라면 남아도니까.”
지젤이 새하얀 손바닥 두 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손바닥을 흔들며 말했다.
“진짜 잔뜩 살거라 나 혼자서 다 들고 다니기엔 힘들 거 같은데. 힘센 짐꾼 하나가 같이 가줘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 마르낙?”
대놓고 하루 짐꾼 노릇 해달라고 하는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항복했다.
“알았어. 짐도 들어줄게.”
“좋아. 그럼 약속한 거다?”
“그래.”
지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지 않고 여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상투스도 지젤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상투스를 향해 짧게 말했다.
“꺼져.”
그러자 그는 여느 때처럼 신기루 같이 사라졌다.
***
다시 돌아온 남제국의 수도.
우리는 거대한 황성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내 뒤에 선 페르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 왜 정문으로 온 거예요? 몰래 담을 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몰래 담 넘으면? 페리토드가 이 넓은 황궁에서 어딨는 줄 알고 찾아갈 건데?”
“그렇다고 정문돌파를 하는 건 그래도 좀 아니지 않을까요?”
“됐고. 보기나 해.”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황궁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을들 향해 외쳤다.
“이리 오너라!”
내 외침에 경비들은 눈을 끔벅이다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페리토드를 만나러 왔는데.”
“페리토드…?”
일순, 페리토드란 이름을 들은 경비의 눈 위로 보랏빛 광채가 스쳐 가듯 점멸하더니 선명한 보랏빛 문양이 경비들의 왼쪽 눈 위로 떠 올랐다.
표정이 딱딱하게 경비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그중 하나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과는 다른 목소리로.
“너, 아는 얼굴이군.”
날 알아?
파문처럼 번져가는 마력의 파동. 경비들의 옆으로 유형화된 마력으로 이뤄진 문이 생겨나고 붉은 로브를 푹 눌러쓴 자가 걸어 나왔다.
인상착의로 미뤄보아 저놈이 바로 페리토드를 납치했던 고대의 마법사겠지.
바로 본인 등장이라.
나는 조용히 절망의 손잡이 위로 손을 올리고서 언제든 그를 벨 준비를 끝마쳤다.
로브를 너무 푹 눌러써서 눈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나를 향해 말했다.
“칼라게인한테 얻은 정보대로 생겼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사제.”
칼라게인 녀석 역시 살아있었나.
의외인 점은 칼라게인과 달리 눈앞의 마법사는 사제인 내게 별다른 적의를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 적의가 없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의를 잘 숨기고 있는 거겠지만.
“페리토드를 만나러 왔는데.”
“만나서는?”
“본인이 원하면 데리고 가려고 하던 참이지.”
“데리고 가는 건 허락할 수 없다. 그녀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될 여인이니까.”
나는 절망의 손잡이를 쥐었다. 붉은 로브의 사내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지.”
딱하며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옆으로 새로운 마력의 문이 생겨났다. 그는 턱짓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문을 가리켰다.
“페리토드가 있는 방으로 이어진 문이다.”
순순히 만나게는 해준다고? 나는 이 의외의 상황에 조금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뭘 믿고 우리가 저걸 건너가. 저 뒤로 함정을 파뒀을 수도 있잖아.”
내 지적에 붉은 로브의 사내가 처음으로 웃었다. 로브의 그늘 너머로 보랏빛과 붉은색이 서로 뒤섞인 기이한 눈이 드러났다.
“겨우 너희를 상대하는 데 내가 함정까지 파둬야 할 거라 생각하나? 들어가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나야 알 바 아니니.”
그는 내게서 등을 돌려 자신이 나타났던 마력의 문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다만, 내가 허락한 건 ‘대화’까지만이다. 내 경고를 무시하고 그녀를 데리고 황궁을 떠나려 한다면 그때부터 너희를 내 적으로 규정하겠다. 웬만하면 신중하고 현명하게 행동하길 바라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력의 문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그가 들어간 마력의 문이 사라지고, 이곳엔 페리토드의 방으로 이어졌다고 말한 마력의 문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는데?”
우리는 짧게 대화를 나눈 끝에 일단은 한 번 로브의 사내가 열어둔 문을 이용해보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로 그 문을 이용하는 건, 문 뒤에 함정이 있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나였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불투명한 마력의 문으로 들어서자 짧은 부유감이 느껴지고 처음 보는 무척 화려하고 낯선 방이 나를 반겼다.
“얍.”
포도알 하나가 허공을 난다. 붕 떠오른 포도알의 착지점 끝에서 기다리는 건 쩍 벌린 입. 그 벌어진 입속으로 쏙하고 포도알이 들어가고 페리토드는 푹신한 침대 위에 기대서 달콤한 포도알의 맛을 음미했다.
“음음~. 역시 맛있네. 어차피 도망치긴 글렀고, 황제 이거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그녀는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탐스럽게 익은 새로운 포도알을 하나 떼어내서 또 한 번 허공으로 던졌다.
“흠흠.”
내가 소리를 내자 드러누워서 페리토드의 동공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포도알은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다시 한 번 페리토드의 입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나와 그녀의 눈이 서로 마주치고, 페리토드의 얼굴 위로 진한 당황이 번져갔다.
“…일단은 구하러 왔는데. 괜히 왔나? 역시 그냥 황제 할래?”
깜짝 놀란 페리토드는 말 대신 다른 것으로 대답했다.
“딸꾹!”
딸꾹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