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58
456화 입원 중입니다만 (3)
“깨어났어?”
하얀 가운 차림의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무엇보다도 주위에 그녀 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답 대신 하얀 총을 꺼내 여자를 향해 겨누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재차 주변을 살펴보았다.
병실은 분명 바뀌지 않았다.
“의심이 많네.”
“내가 수술받고 나왔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이 옆에 없을 리가 있겠냐.”
병원 근처에서 S급 던전이라도 터지지 않고서는 자리를 뜰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사태라면 내 옆에 낯선 사람만 서 있을 리도 없고.
“애들은 안정을 취하기 위해 내보냈다고 해도 말이야. 유현이는 있어야지. 지금 이거, 현실도 아니지?”
갑자기 의자가 나타나고 여자가 앉았다. 그녀의 손끝에 어느새 안경이 들리고 그걸 살짝 걸치듯 쓴다.
“휴전 기간이라며.”
나직하게 말했다. 총 쏜 놈도 그렇고 왜 자꾸 이 지랄이냐.
“나는 어느 쪽도 아니야.”
“…아니라니.”
“엄밀하게는 패륜아들, 쪽이긴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질되어 버렸잖아.”
지금은, 에 많이 변질이라면. 설마.
“말하는 게 좀, 옛날 사람 같은데.”
“응? 언어 패치는 최신으로 했는데 이상해?”
“아니, 지금은 변질되었다면서. 어르신, 어린 혼돈도 그 비슷하게 투덜거렸었어.”
“너무했다.”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돈보다는 내가 훨씬 더 젊은데. 하긴 너한테는 오십보백보겠지만.”
“그래서. 누군지부터 말해.”
“등대지기. 이쪽 단어로는 그게 제일 비슷해. 최초의 시스템 제작자들 중 하나지.”
등대지기가 말했다. 최초의 시스템 제작자.
“신입의 까마득한 선배쯤 된다는 건가. 그래서 왜 온 거지.”
“놀라지도 않는구나.”
“이제 와서 뭘 새삼. 알건 대충 다 알거든? 근원이 세상을 삼키려 들었고 그걸 막기 위해 시스템이라는 걸 만들었고.”
“처음의 시스템은 단순한 보조 역할이었지만 이제는 지도자 노릇을 하려 들고 있지.”
“지금이라도 시스템을 없애 버리면, 초월자들도 개입하지 못하게 되나?”
“그건 아니야. 게다가 네 세상은 시스템 없이는 무척 곤란해질걸. 던전이 사라지게 되니까.”
등대지기가 설명을 이었다.
“몬스터들이 곧장 우르르 튀어나와 버리는 거야. 엉망이 되겠지. 각성하더라도 하급은 쉽게 죽어 버리고 살아남은 중상급들도 무너진 사회 속에 버려지고 만다고. 누리던 문명이 일순 사라진다면 상급 각성자들이라 해도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어. 사기도 떨어지고 능률도 저하되고.”
말 그대로 아포칼립스화되겠구나. 던전의 존재만으로도 시스템의 유용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원이 존재하며 세상을 먹어치우려 드는 한, 기본적인 시스템은 존재하는 편이 좋아.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할 때까지만이라도. 요즘은 잘 지켜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원래는 10년 안팎으로 시스템도 사라지게 되어 있고.”
“그 말도 듣긴 했어.”
“그러니까 우리는 최선이었어.”
등대지기가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를 시스템에 갈아 넣었지.”
“…흔히 말하는 공돌이들 갈아 넣었다는 뜻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나는 심각한 버그나 예외 상황이 발생할 때에만 깨어날 수 있어. 지난번 이 세계의 시스템이 정지되었을 때도 한 번 깨어났었지. 정령의 알을 건네주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그때 일본 던전에서 예림이가 신입이 아닌 정장 차림의 여자를 만났었다고 했는데. 등대지기였구나.
“그럼 지금 또 버그가 생긴 거겠네.”
“이번에는 조금 복잡해.”
등대지기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던전이 세계화되었어.”
“…뭐?”
“임시로 만들어졌던 그 던전. 지성체라곤 단둘뿐인 그곳이 완전히 별개의 세계가 되었다는 거야.”
단 두 명의 사람뿐인, 임시 던전. 설마.
“회귀 전의 정보로, 만들어진… 던전이……?”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등대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과 무해의 왕, 그리고 또 다른 신입이 만들어 낸 던전은 폐쇄되었어. 보통 그렇게 폐쇄된 던전은 시스템의 보호를 벗어나고, 그럼 자연히 근원에게 삼켜지게 되지.”
던전은, 던전 속의 세계와 몬스터는 근원의 힘이다. 그러니 회수되는 거라며 등대지기가 말했다.
“시스템은 근원이 뻗어오는 힘을 던전이라는 포장지로 포장할 뿐이야. 아니, 우리나 수조 쪽이 걸맞을까. 커다란 어항으로 쏟아지는 물과 물고기를 담아내는 거지. 그것이 넘치기 전에 공략자들이 정리를 해주는 것이고.”
“그러니까, 시스템이 관리하지 않는 던전은, 힘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처음 보는 일이야. 모든 근원의 세계에서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세계는 무사하다. 하지만 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근원만이 가능한 일인데……. 하지만 단둘뿐인 작고 작은 던전이었던 힘을 대체 왜.”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어?”
“하나는 근원의 의지야. 근원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설도 있으니까. 갑자기 미니어처 세상을 만들고 싶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정말 뜬금없지만, 하고 등대지기가 말했다. 태도를 보니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여기는 듯했다.
“다른 하나는 근원의 힘으로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인데… 이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라.”
“결국 모르겠단 소리잖아.”
“정확한 이유를 알았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너는 뭐 아는 거 없냐며 등대지기가 나를 빤하게 쳐다봐왔다. 그렇게 보셔도.
“난 그 던전이 세계화되었다는 사실도 방금 알았거든.”
“잠깐 연결도 되었었잖아. 그 세계와.”
“…뭐? 꿈인 줄 알았는데.”
그게 꿈이 아니었다니.
“어쨌든 그 던전이, 세상이 무사할 거라는 거지? 초월자들이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막 태어난 세계는 손댈 수 없어. 세계의 막이 가장 강할 때라, 어린 혼돈이라 해도 최소 천 년은 지나야 뚫고 들어갈 수 있을걸.”
“잘됐네.”
그럼 나는 물론이고 누구든 영영 그 둘을 만날 수 없다는 거였다. 시원섭섭했다.
“하지만 넌 연결되었지.”
“그 안에 내가 있었잖아. 같은 존재니까 뭐, 일시적으로 혼선이 일어났다거나.”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킨 등대지기가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속까지 파헤칠 듯 샅샅이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확 쏴버릴까 보다.
“아무리 봐도 그냥 인간인데.”
“마침 병원이니까 유전자 감식이라도 해줄까.”
“존재가치는 무척 높아졌지만 근본은 평범해.”
“흔한 한씨 집안 첫째입니다. 둘째는 좀 특별하죠.”
그 밖에 성현제와 송태원도 태생부터가 특별하다. 송 실장님은 원하지 않을 특별이지만. 등대지기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뱉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상 현상을 이대로 내버려 둬야 한다니.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시스템 보수나 하고 다시 잠들어야겠네.”
“그럼 이야기나 좀 해주지 그래? 초승달이나 하얀새에 대해서. 특히 초승달 말이야, 사람 농락하며 가지고 노는 음흉한 짓거리나 하던데.”
내 말에 등대지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승달이? 그 반대라면 모를까. 초승달은 시스템에 대해서도 우려가 많았었어. 근원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었지.”
…동명이인 아니냐. 멀쩡한 사람 잡아다가 뺑뺑이 돌리고 있습니다만.
“보조라고 해도 시스템이 적용되면 사람의 한계가 정해지게 되는 거니까. 수년에서 십여 년 뒤에 풀어진다더라도. 간섭이 덜한 신탁 같은 류도 마찬가지야. 결국 초월자들이 보기에 뛰어나다 싶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게 되잖아.”
그래서 초승달은 꺼렸어, 라는 말에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뭐,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거지만 말이야. 너무 달라졌잖아.
“초승달도 처음에는 평범한 인간이나, 그런 종족이었겠지?”
“당연하지. 우린 다 그랬는걸. 자세한 거야 남의 정보니 말 못 해주지만. 초승달은, 누가 봐도 사랑스러웠지.”
해파리가 보여 준 회귀 전의 초승달을 떠올려 보았다. 사랑스럽다고… 음. 등대지기의 미의식에 문제가 있거나 아님 초승달이 아주 많이 변해 버린 모양이었다.
“깜찍하게 귀엽고.”
전자구만. 보는 눈이 남다르시네.
“반면에 하얀새는 알기 어려웠어. 말수도 없고 멍하게 혼자 서 있는 경우도 많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별다른 교류도 없었는데 갑자기 내게 찾아와 혼돈이 불에게 검을 주게 될 거야, 너는 어린 물을 만나게 되겠지. 라고 했어.”
불은 유현이일 거고, 물은 예림이인가?
“그리고 몇 가지 요구를 했는데 나는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왜냐면 미래예지종이잖아.”
등대지기가 손가락 끝으로 자기 뺨을 긁적였다.
“시스템에 몸 바치기론 했지만, 그래도 나를 잃는 건 조금 무서웠거든. 하지만 하얀새가 먼 미래에 어린 물을 만나게 될 거라고 했으니… 그때까지 내 자아가 무사하다는 소리잖아. 그 예언이 이루어진다면 말이야.”
그러니 협조할 수밖에. 등대지기가 말했다.
“내 욕심으로. 미래예지종이란 그런 존재야. 그래서 대부분의 미래예지종은 수명이 짧았지.”
침묵하는 하얀 새. 그런 것치곤 일을 많이 쳐놓았다만. 하긴 워낙 오래 살았으니까 몇백 년, 몇천 년에 한 번 입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등대지기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희미한 빛무리가 번져 나왔다.
“분명 너와 관련이 있을 텐데 조사해 보기엔 시간이 없어. 내 능력이 닿을지도 모를 일이고.”
“차라리 신입에게 물어봐. 난 진짜 휘말린 것뿐이라니까? 심지어 채터박스가, 초월자 놈들이 날 엿 먹이려 드는 판인데 근원이 어쩌고 할 능력이 있다면 걔들부터 처리했다.”
“확실히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더라? 다시 만날 일 없기를 바라지만. 음, 사실 또 봤으면 좋겠네. 이렇게 자주 나오니까 너무 좋은걸. 그러니 하나 말해 줄까. 채터박스는 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인 모양이야.”
시스템 살펴보다가 살짝 엿듣게 되었다며 등대지기가 말했다. 가장 강한 사람이라니, 설마 성현제 말인가? 안 그래도 사이비가 접근해 오긴 했었지. 쉽게 넘어갈 인간은 아니다만 불안해지네…….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며 등대지기가 사라지고 눈이 떠졌다. 이번에도 병실이었지만 전과는 달리 유현이가 옆에 있었다.
“형, 괜찮아? 아픈 곳은 없고?”
“어… 멀쩡해.”
눈을 깜박거렸다. 아픈 곳이 없다 못해 한쪽 다리에 감각이 아예 느껴지질 않는데?
“진통제는 쓸 수 없으니 마비시켜 놓았다. 하루는 움직이지 못해.”
호연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무릎 위쪽까지 깁스 상태라 멀쩡해도 못 움직이지 싶었다.
“수술은 잘 끝났고 다리 마비시킨 거 외엔 다 멀쩡하지만 오늘은 죽 먹어라. 약도 먹고. 독 저항 안 통하는 종류도 있다더라.”
“감사합니다, 선생님.”
“깁스도 마비 상태 유지를 위한 거니까 내일 바로 풀어도 된다. 마비 풀린 뒤에도 일주일은 조심해서 걸어 다니고.”
이어 강경호 선생님이 내 다리뼈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주 예쁘, 아니 멀쩡하죠?”
정말 완벽하게 복구되었습니다, 하며 흐뭇해한다. 왼쪽 오른쪽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부상을 입었던 다리인지 구분도 못 하지 않겠냐면서 눈을 반짝였다.
“진짜 모르겠네요. 대단해요!”
“자리 맞추기 쉽진 않았지만 제 보조스킬이 있으니까요. 마치 퍼즐 판처럼 신체에 알맞은 자리를 보여 주는 스킬이죠.”
피부 봉합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단다.
“흉터도 크지 않을 겁니다.”
혹시 통증이 느껴지면 바로 벨을 누르라고 당부하곤 선생님들이 병실을 나섰다.
“죽 가져다줄까? 지금 먹을래?”
– 맞아, 아빠. 배고플 거잖아.
소파 쪽에 있던 결이가 침대로 날아오며 말했다. 피스는 침대 위로 올라오진 않고 아래에 앉아 있었다. 다른 애들은 내 다리를 건드릴까 봐 걱정되었는지 실내정원에 내보내 둔 채였다. 뿔여우가 유리벽에 딱 붙어 간절하게 피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별로 안 고픈데. 아, 유현이 너 낙서해 볼래?”
“응? 낙서?”
“깁스에 말이야. 많이들 하던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냐. 깁스 같은 거랑은 거리가 먼 헌터들이니. 중급만 되어도 포션 쓰고 말지. 유현이가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말이야, 여기. 빨리 나아라거나 파이팅이나 그런 낙서들 하거든. 해봐, 한번.”
조금 머뭇거리던 유현이가 인벤토리에서 펜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고민 끝에 내 다리 깁스에 글을 적었다.
[사랑해 형]…조금 민망하네. 어차피 내일 풀 거지만. 자기가 적은 것을 바라보던 유현이가 내게 물었다.
“더 적어도 돼?”
“물론 되지.”
[한유현 형]그렇게 적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걸 본 결이가 손을 뻗었다.
– 결이도 적으면 안 돼요?
“돼. 여기 펜 있네.”
요정용이 펜을 안 듯이 들고는 글을 적었다.
[아빠 건강해요]한글은 언제 배웠데. 삐뚤삐뚤하긴 했지만 틀린 글자는 없었다.
학교 마치고 병문안 온 예림이도 [아저씨 납치는 이제 그만!] 하고 적었다. 밤에 온 문현아는 [애 아빠 파이팅!] 하고 큼직하게 써 놓았다. 안 그래도 오해받을 판인데 너무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