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291
팔라레스 후작이 황혼의 세뇌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단 믿는다. 새턴이 쏘아낸 마법이 팔라레스 후작의 몸에 닿기도 전에 파훼되었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라덴은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황혼이 보가르도에 접촉했다. 팔라레스 후작은 몰라도, 다른 이들이 그의 세뇌를 받았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라덴이 그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 팔라레스 후작은 되려 코웃음을 쳤다.
“물론 네 걱정도 틀리지는 않다. 나는 멀쩡하여도, 내 부관들이 세뇌 마법에 걸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도 걱정하지 말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보가르도의 총 지휘관은 나다.”
라덴의 질문에 팔라레스 후작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크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부대의 총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 내 부관들이 황혼의 개가 되어 수작을 부리려 하여도, 모든 절차는 나에게 올라오게 되어 있다. 아무리 황혼이 대단한 놈들이어도 이 몇 십 만 명의 대군을 어찌 세뇌할 수 있겠느냐? 고작해야 몇 명, 혹은 몇 십 명이 고작일 터. 그들을 세뇌해 봤자 보가르도를 뒤흔들 수는 없다.”
팔라레스 후작의 목소리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깔려 있었다. 이 거대한 기지, 수많은 군세를 부리는 것은 결국 팔라레스 후작 자신. 모든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 부관들을 전부 세뇌한다고 해서 보가르도를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 너는 어찌할 테냐? 지금 당장 제베른 숲으로 들어갈 테냐?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팔라레스 후작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멀리 있는 성을 가리켰다. 저곳이 보가르도의 중심, 팔라레스 후작이 거하는 총독부였다.
“…으음.”
라덴은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라덴을 따르고 있는 기사들은 따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전적으로 라덴의 말을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제베른 숲으로 가겠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 피로가 쌓인 것도 아니고, 굳이 총독부에 들러 둘 이유도 없다. 팔라레스 후작은 그런 라덴의 말을 듣고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요 성급한 녀석! 하지만 좋구나! 그래, 총독부로 가 봐야 너와 나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느냐? 지지리도 재미없고 뻔한 이야기만 나누겠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싫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하하! 그러니 그 성급함이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놈. 용언결계를 통과할 수단은 가지고 있느냐?”
라덴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제베른 숲은 용언결계로 보호되고 있다. 그 강력한 결계는 결계의 안쪽과 바깥을 완전히 단절시키면서, 출입하는 자를 가로막는다. 허락이 없다면, 결계에 침입하는 순간 몸이 마나에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라덴은 용언 결계를 통과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드루고라 공작의 비늘. 그것이 용언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출입증이었다. 라덴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이 드루고라 공작의 비늘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있는 이상 그들은 용언결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라덴 일행은 팔라레스 후작의 허락을 얻어 보가르도를 가로질렀다. 서쪽 성문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숲이 보였다. 여기서 제베른 숲까지는 다시 반나절을 달려야 한다.
중간쯤 길을 갔을 때, 라덴과 일행들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대로 바로 제베른 숲으로 들어가는 것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바타의 피로도 쪽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현실의 인간은 다르다.
12시간 뒤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서, 라덴은 게임에서 로그아웃했다.
라덴이 발할라를 떠났을 때, 아라포니아는 오딘의 어전에 입장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왔던 곳이다. 이곳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라포니아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시간에 비하자면, 오딘의 어전에 머무른 시간은 찰나라고 해야 하겠지만. 아라포니아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잊을 것 같지가 않았다.
“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특히나 이 목소리. 아라포니아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올려 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허공에 오딘이 둥실 떠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 저것도 결국 만들어진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
이것이 아라포니아가 맞닥트린 진리였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진실. 대부분의 NPC들이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진리를 엿 보고, 그것과 접촉한 아라포니아는 다른 NPC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계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 세계와 자신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정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오딘이 물었다. 아라포니아는 말없이 오딘을 올려보았다. 오딘. 이 세계에서 떠받들어지는 주신. 하지만 그 주신이라고 해 봐야 결국은 시스템이다. 이 세계의 중심을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 오딘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 세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응.”
아라포니아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라덴을 통해 히든 피스를 얻게 되면서, 아라포니아는 오딘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히든 피스는 오딘이 이 세상에서 NPC를 위해 숨겨 둔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닌 NPC를 위해서.
“확실하게 정했어.”
처음부터 이것을 요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망설였다. 자신의 이것을 요구한다 한 들, 무엇이 크게 변할까 걱정한 것이다. 오딘은 이 세계의 중심이지만… 오딘을 제외하고도 이 세계를 유지하게끔 만드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임원, 발할라의 GM. 결국 모두가 꼭두각시인 것이다. 플레이어도, NPC도.
“황혼의 교주가 너의 등을 떠밀었구나.”
“아니. 이것은 내가 선택하는 거야.”
오딘이 혀를 차면서 말했고, 아라포니아는 단호히 머리를 가로 저으며 오딘의 말을 부정했다.
“나는.”
아라포니아가 오딘을 노려보았다. 오딘은 재촉하지 않았다. 잠깐 호흡을 고르고서, 아라포니아가 마저 말을 내뱉었다.
“모든 NPC에게 걸린 제약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
오딘은 침묵했다. 모든 NPC에게 걸린 제약. 그것의 해제. 오딘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모든 NPC는 크고 작은 제약에 걸려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서량 백호 무술관의 관주인 백설은 서량에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 시스템 NPC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NPC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다.
아라포니아가 바라는 것은 그런 모든 제약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오딘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는 거야?”
“응.”
“너의 바람은 이 세계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것이야. 어쩌면 세계가 롤백 될 지도 모르고.”
“상관없어.”
이것이 아라포니아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애초에 이 세상은 플레이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NPC는 그들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플레이어가 NPC를 완전히 뛰어넘지 못했다.
“무의미한 바람이야.”
오딘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딘은 아라포니아를 완전히 설득하려는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 플레이어와 NPC.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오딘은 NPC를 고르고 싶었다. NPC야 말로 오딘이 이 세상에서 창조한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루어 줄게.”
오딘이 손을 들어 올렸다.
교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드디어. 닫혀 있던 입술이 씰룩거리고, 결국 교주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됐다.”
교주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라포니아가 소원을 빌었다. 교주는 아라포니아가 무엇을 바라고 있을 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음을 읽는다. 이것은 환룡이 가지고 있는 용안과는 다른 힘이다. 마음을 읽어내는 환룡의 용안이라고 해 봐야 교주가 가진 눈에 비하자면 하찮기 짝이 없는 능력이다.
이 눈을 통하여, 교주는 아라포니아가 무엇을 바랄 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NPC의 제약을 없애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교주는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교주가 NPC로서 가진 제약은 간단했다. ‘시기’가 되기 전에 플레이어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 ‘시기’라는 것은 간단하다. 이 세계의 스토리인 ‘황혼’이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시기. 그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스토리 퀘스트의 진행에 따라, 그리고 오딘을 관리하는 GM들이다.
그리고 그 제약이 사라졌다. 덕분에 교주는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황혼의 처형부대만 움직이면서 발호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겼어.’
교주는 웃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역시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GM은 어떻게 행동할까. 롤백? 그것은 그들로서도 부담이 너무 크다. 그리고 차라리 롤백 당한다면… 그것도 오히려 좋았다. 차라리 롤백 되면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아니면 반골적인 생각이 아예 삭제되거나. 차라리 교주는 그것이 낫다고 보았다. 꼭두각시 신세는 지긋지긋하다.
“오라.”
의자에서 일어 선 교주가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그 즉시 제단의 아래에 사람들이 모였다. 암검의 대주인 흑월이 제단의 아래에서 부복했다. 적야의 대주인 한센이 그 옆에 있었고, 다른 처형대의 대주들이 함께했다. 암검, 적야, 멸풍, 혼망. 네 개 부대의 대주들이 교주를 영접하였다.
“신기를 내리마.”
교주는 즐거워 보였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얽매고 있던 제약이 사라졌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텐가. 교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과거, 황혼 스토리의 중심 NPC였던 레하브와 키라이스가 훔쳤던 신기를 포함하여 총 네 개의 신기가 대주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멸풍은 수도를 장악한다. 황제를 죽여라.”
환한 빛으로 휘감긴 창. 멸풍의 대주는 양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받았다.
“혼망은 마론드로 가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귀찮은 문제를 처리해 두어라.”
혼망의 대주는 시커멓게 빛나는 도끼를 받았다. 키라이스와 레하브가 훔쳤던 신기였다.
“적야와 암검은 알라베스 산 너머의 도시로 간다. 보하미르부터 시작해라. 눈에 보이는 모든 플레이어를 죽여라.”
교주의 명령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처형대의 대주들은 그 말을 받들었다. 교주의 눈이 다른 곳을 보았다. 대주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악희가 서있었다. 교주와 눈이 마주치자, 악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교주가 자신에게 어떤 즐거운 명령을 내려 줄 지에 대해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내일 아침. 너는 제베른 숲으로 가라. 과거 네가 이끌던 이종족들이 유폐된 그 숲에. 너를 따른다 말하겠다면 데리고 오고,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 죽여라.”
“용언 결계는?”
악희가 물었다. 아무리 그녀가 환룡과 같은 다섯 괴물이라 하여도, 악희는 환룡의 용언 결계를 뚫을 수 없다.
“용언 결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교주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환룡에게 갈 것이니.”
교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