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59)
59화 꼬우면 네 상판을 갈아엎던가
하준이가 말했다. 내 비주얼 또한 블랙시즌의 강점 중 하나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노래나 춤 실력 못지않게 표정 연기도 중요하니까요. 지금은 그냥 잘생긴 바보 형이잖아요.] [바보 형은 좀……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공식 주제가 컨셉에 맞게,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처럼 거만하고 무례했으면 좋겠어요.] [그거 완전 문지호잖아.]나는 지호에게 물어뜯겨 가며 특유의 표정을 전수받았다.
상대 팀의 무대는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처음부터 승리를 확신한 사람처럼 미소 짓는다.
죄책감을 비우고 오만함만 남겼을 때, 목 피디는 마지못해 박수를 보냈다.
“다음은 광속보이즈 올라갈게요.”
나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며 멤버들의 등을 향해 속삭였다.
“나 어땠어? 괜찮았어?”
“바닥에 누워서 봤는데,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잘생겼더라고요.”
“……그거 칭찬 맞아?”
입술을 비죽 내밀며 걷던 중 병철이의 동그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병철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귓속말했다.
“병철이 너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어떻게 바로 커버 칠 생각을 했어?”
“그게 내 역할이었잖아. 서포트.”
병철이는 무척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서포트. 저마다 강점을 살릴 때 어떠한 역할도 도맡지 않은 병철이가 마음에 걸렸다.
혹여나 과거의 나처럼 기가 팍 죽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 꺼낸 말이었는데.
병철이는 진심으로 멤버들의 실수를 만회할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와는 확연히 다르다.
“잘했어.”
덕분에 무사히 무대를 마무리했지만,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광속보이즈의 무대가 남아 있었다.
광속보이즈 멤버들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제작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시작 안 해요?”
“음악이…….”
“아, 깜빡했네. 라이브 하는 줄 알았어요.”
곧바로 가이드 데모곡이 흘러나왔지만, 광속보이즈 멤버 중 두 명이 도입부 박자를 놓쳤다.
– 전쟁을 선포해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여왕의 간택을 받는 건 나
가이드 보컬에 맞춰 입술만 벙긋거리던 리더가 급작스레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상대 팀이 라이브를 한 게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충분히 목을 풀지 않았기 때문인지 끝 음이 부드럽게 올라가지 않았다.
– 심장 깊이 단숨에
찔러 넣지 못하면
나의 패배
역전은 없어
바로 그때, 리더의 가사 실수가 이어졌다.
‘너의 패배’를 ‘나의 패배’라 부르짖었다.
당황한 멤버들은 흠칫 어깨를 떨었고, 실수를 인지한 리더는 그 후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저지른 실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대를 끝까지 지켜보기가 곤욕스러웠다.
“두 팀 다 고생했어요.”
제작진과 각 소속사 대표는 미팅 룸으로 향했고, 우리는 다시금 대기실로 보내졌다.
대화를 나눌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휴대전화 화면만 멀거니 들여다보던 중.
광속보이즈 리더가 실성한 사람처럼 큭큭 웃었다.
“X나 부럽네. 누구는 고개 한번 까딱이고 박수받고.”
노골적인 저격이었다.
나는 내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도겸이 형의 팔뚝을 꽉 붙들었다.
그러자 다리를 꼰 채로 모바일 게임을 하던 지호가 심드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꼬우면 네 상판을 갈아엎던가.”
아차, 문지호 입을 막는 게 먼저였는데.
콧김을 씩씩 내뿜던 광속보이즈 리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얼굴이 못생겼으면 노래라도 잘해야지. 웃음 참느라 혼났네.”
“이 X발 새끼가!”
광속보이즈 리더가 대뜸 지호의 멱을 잡아 올렸다.
양쪽 멤버가 황급히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았다.
하준이에게 허리를 붙들린 지호는 성난 포메라니안처럼 으르렁거렸다.
“일반인 중에서 뛰어나서 아이돌인 거야. 근데 넌 외모도 일반인이고 실력도 일반인이지. 대체 무슨 염치로 아이돌이 하고 싶은 건데? 인생 날로 먹고 싶냐?”
괜스레 목구멍 안쪽이 죄어 온다.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못했더라면 나 역시 광속보이즈 리더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운 좋게 구제받았지만, 저 사람은…….
“반나절 연습했는데 그 정도 실력이면 꼭 《아이돌 전쟁》이 아니어도 됐잖아! 우리한테 양보해 줬더라면……!”
“그럼 우리가 너희보다 한참 뒤떨어졌으면, 아이고 불쌍하다 하면서 양보해 줬을 거야? 아니잖아.”
말문이 턱 막힌 광속보이즈 리더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덕분에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대기실 안 공기는 우중충하기 그지없었다.
가시방석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하준이는 자꾸만 대기실 문 너머를 기웃거렸다.
“대표님이다!”
“진짜?”
우리는 대기실 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일렬로 고개를 내밀었다.
김 대표와 학종이 미디어 대표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대표님, 표정이 안 좋은데요.”
하준이의 말대로 김 대표는 딱딱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병철이가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아니야, 잘 봐. 미세하게 하체를 씰룩이면서 걸어오고 있어. 흥을 억누르고 있는 거야.”
“진짜다, 우왓!”
차곡차곡 쌓은 인간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김 대표는 대기실 바닥에 나뒹구는 우리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짐 챙겨, 고기 먹으러 가자.”
멤버들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번졌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다 말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돌아본 그곳엔 광속보이즈 리더가 죽일 듯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급히 표정을 굳히며 대기실에서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소속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저희한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저희 이대로 망하고 싶지 않아요.]방송국 복도 코너에 몸을 숨긴 채로 엿들었던 대화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우리 대신 광속보이즈가 《아이돌 전쟁》에 출연한다면 사정이 좀 달라졌을까?
‘아니, 똑같았을 거야.’
지난 7년간 연예계를 구르며 탑티어 아이돌뿐만 아니라, 웬만한 아이돌의 정보는 속속들이 꿰차고 있는 나였다.
만일 《아이돌 전쟁》을 통해 광속보이즈가 갱생했더라면, 분명 그 그룹명을 내가 알고 있어야 할 터.
그러나 머릿속을 정신없이 파헤쳐 봐도 광속보이즈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즉, 이미 수명이 다했다는 거겠지.
* * *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자 강변역 인근 무한리필 삼겹살집을 찾았다.
오랜만에 초식 공룡 신세 좀 탈피하나 싶었는데, 이건 삼겹살이 아니라 A4용지가 아닌가?
고기가 얇아도 너무 얇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가 비칠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멤버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고기를 먹어 치웠다.
“고기가 얇아서 그런지 몰라도, 입에서 살살 녹아요!”
“하하, 마치 허상을 먹고 있는 것 같아.”
“고기 다섯 장을 겹쳐서 먹으면 그제야 한 장 제대로 먹은 느낌이 나.”
“남병철 미친놈아! 먹는 입이 여섯인데 겹쳐서 먹으면 어떡해! 당장 벨 눌러서 고기 더 달라고 해.”
병철이는 지호에게 머리칼을 쥐어뜯긴 상태로 벨을 눌렀다.
그러자 종업원이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대패 삼겹살을 들고서 테이블로 다가왔다.
“주문하신 고기 나왔습니, 헉!”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매니저 형은 붙잡힌 노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형, 여기 취직한 거예요?”
“아니, 오늘은 친구 아르바이트 대타야. 지금은 대기업 원서 넣고 기다리고 있어.”
김 대표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토익 300점에다가 자격증은 꼴랑 파워포인트 하나인 녀석이 대기업은 무슨.”
와아악! 면전에 대고 꼽 주고 있잖아!
그것보다 매니저 형, 그 스펙으로 계속 대기업에 원서 넣고 있었던 거야?
그 정도면 중견 기업도 무리라고!
“적당히 하고 이만 사무실로 돌아와.”
“조만간 토익 시험도 다시 볼 거고 자격증 공부도 독학하고 있어요. 저한테도 꿈이라는 게 있단 말이에요.”
“월급 30만 원 올려 줄게.”
“갈게요.”
매니저 형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앞치마를 패대기쳤다.
그러곤 의자에 턱 걸터앉아 오만상을 찌푸렸다.
“여기 불판 빨랑빨랑 안 갈고 뭐 해! 이 집은 뭐 종업원이 하나도 없어?”
혹시 돌아이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가 종업원이었잖아요.
고깃집 사장님이 멀찍이서 텅 빈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지만, 매니저 형은 뻔뻔스럽게 고기를 구웠다.
“얘들아, 팍팍 먹어라.”
“매니저 형, 저희 《아이돌 전쟁》 나가기로 했어요.”
“그래? 거기 누구누구 나오는데?”
출연 팀을 묻는 매니저 형의 말에 우리는 일제히 김 대표를 바라봤다.
김 대표는 냅킨으로 입가를 눌러 닦으며 대답했다.
“사전에 공개하면 서로의 약점을 아는 상태로 만나는 거니까, 긴장감을 위해 라인업은 첫 촬영 날 공개한다더라.”
“에이, 김빠져요.”
“그래 봤자 대부분 신인급이겠지.”
“그렇겠죠?”
이럴 때 기적처럼 라인업이 딱 떠오르면 좋을 텐데.
7년 전, 그것도 뭣도 모르는 신인 시절 때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 기억이 날듯 말듯…….”
“형, 멸치조림이 기억력 향상에 좋대.”
“응? 방금 뭐라고 했, 와아압!”
병철이는 밑반찬으로 나온 멸치조림을 내 입에 그릇째로 욱여넣었다.
아아, 체내 나트륨 농도가 급격히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 * *
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A 본부.
《아이돌 전쟁》의 기획·제작 총책임자인 목 피디의 표정이 석연치 않다.
미팅이 끝난 후로는 내내 저 상태였다.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서브 피디가 슬쩍 운을 뗐다.
“광속보이즈 때문에 그러세요? 해체 직전인 애들이라서 사정이 딱하긴 했죠.”
“아니, 걔네 해체되는 걸 떠나서 점점 프로그램 제작 취지하고 어긋나는 것 같아.”
빛 한번 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돌을 다시 한번 하늘 위로 띄우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눈물 바람으로 귀가한 광속보이즈 같은 아이돌을 말이다.
“블랙시즌도 초소형 기획사에서 내놓은 아이돌이잖아요. 나름대로 괜찮지 않아요?”
“거기 비주얼 멤버 얼굴 못 봤어? 걔 혼자서도 5인분은 하겠더라.”
얼마나 잘났길래 칭찬이 자자한지 궁금했는데, 굳이 따지자면 화려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목구비는 또렷했으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어두침침한 느낌이 들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벼랑 끝에 선 어린아이처럼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 밑에 찍힌 눈물점 위로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와, 나 한 방 먹었잖아.”
스위치를 껐다 켜듯, 핍박받던 막내 황자가 순식간에 고고한 황태자로 돌변했다.
그러곤 한 번도 굴복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제작진을 발치에 두고 고개를 까딱였다.
목 피디를 포함한 세트장 안의 모든 사람은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소년은 오만하고 아름다웠다.
목 피디는 소년이 뿜어대는 아우라에 갇혀 한동안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최종 순위를 예측하자면, 블랙시즌은 몇 위할 것 같아요?”
“그야 당연히 5위지.”
“예? 거기 비주얼 멤버 혼자 5인분 한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라인업이 말이 안 되잖아.”
망해가는 아이돌을 위한 갱생 서바이벌을 만들고자 했는데, 돌아보니 세기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특히 얘네는 왜 출연한다고 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이미 정상급이면서.”
목 피디는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네임 카드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