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02
(101)
게임기를 껐다가 갑자기 켰을 때처럼 눈앞이 환해졌다.
익숙한 천장,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곰팡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레안드로스가 날 떠났다.
유릭의 농간에 속아서 감옥에 갇혔다.
루셀과 함께 서부로 도망갔다.
루셀만 보내고 나는 혼자 남았다.
유인당한 유릭은 나를 대적자로 생각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르자,
나는 스스로 죽어서 세계를 리셋시켰다.
이게 네 번째던가?
조각상에 맞아 으깨졌던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머리만 아픈 게 아니었다.
온몸이 감기에 걸린 것처럼 아팠다.
눈물인지 눈곱인지, 눈에 덕지덕지 끼어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데다가 자꾸 콧물이 났다.
귀에서는 이명까지 들리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이지. 훌륭한 어른은 남에게 일을 미루지 않는 법이고.”
기왕 새롭게 리셋한 거, 이번에는 좀 더 안전하게 엔딩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유릭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엮이지 않으면서 레안드로스가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어났더니, 사방이 핑글핑글 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회귀 직후인데 이 정도야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차에 침실 문이 열리며 아른트가 들어왔다.
투박한 그릇을 들고 들어오던 아른트가 일어나 앉은 나를 보고 놀라서 주춤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깨어계시는 줄 모르…… 공작님, 공작님! 지금 얼굴이!”
내 얼굴?
혹시 심하게 붓기라도 했나?
난 회귀를 한 거지, 밤에 라면 끓여 먹은 게 아닌데.
금방이라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아른트를 보며 내 얼굴을 더듬었다.
자는 사이 눈물이라도 흘렸던 건지, 뺨이 온통 축축하긴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려다본 손바닥에는 온통 붉은색이 묻어났다.
순간 머리통이 박살나 죽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허.”
씨발.
살다 살다 오공 중 사공에서 피를 다 뿜어보고, 응?
인생 한 번 살다 볼 일이다.
아른트가 그릇을 내던지고 레안드로스를 부르짖으며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 * *
“외상은 없습니다만,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주의하고 말고 간에, 그냥 일어났는데 피가 나오고 있던 것뿐이라니까.”
레안드로스가 엄중하게 경고했다.
“피가 모자라 쓰러지신다면 저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공작님. 지금은 의원을 부를래도 부를 수가 없는 상황인 걸 잘 아시잖아요.”
레안드로스와 아른트는 나란히 잔소리해 댔다.
몸 보양을 해야 한다느니, 침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푸근해졌다.
꼭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걸.
……진짜 옛날로 돌아온 건 맞지만.
“그래, 그래.”
“그렇게 허허 웃지만 마시고요! 누워서 물이든 식사든 무조건 하셔야 합니다, 무조건!”
“그래. 알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면 아른트를 시키십시오.”
“손 씻는 것도…… 아냐, 그래. 알겠다.”
“레안드로스 경의 말이 맞습니다! 하다못해 코가 간지러우시더라도 절 불러주세요!”
“그래, 그……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침에 눈을 뜨시더라도 웬만하면 누워계십시오. 아른트가 이불을 걷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제가 음식도 씹어드릴까요?”
“되지도 않는 헛소리는 좀 관둬!”
이러다가 아주 그냥 숨도 대신 쉬어주겠다?
결국 언성을 높이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소리 한 번 질렀다고 벌렁거리는 심장이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요양할 테니까 두 사람 다 입 좀 다물어봐. 그보다 할 말이 있어.”
“네? 뭔가요?”
아른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천천히 답했다.
“내가 왕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팠지. 그리고 공작저에 와서도 한참 정신을 못 차렸잖아. 그렇지?”
“맞습니다, 공작님. 며칠 내내 열은 오르는데 정신은 못 차리셨습니다. 체온만 아니었더라면 공작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을 거예요.”
“그 시간 동안 계시를 꿨어.”
계시.
그 단어가 던져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계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른트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고, 레안드로스는 입매가 꾹 다물려 일자로 변했다.
“어, 어떤 계시입니까? 꿈에서 어떤 걸 보셨어요?”
“너무 길고 방대한 내용이라 다 기억은 나지 않아. 하지만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아른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레안드로스를 바라봤다.
“왕성이 무너졌어. 사방에서 마수들이 떼지어 몰려와 도망치는 사람들을 사냥하고 뜯어먹고 있었어.”
원작에서 나온 ‘세상의 멸망’에 대한 추측.
별이 올바른 위치에 정렬할 때,
인간이 사라지고 마수들이 들끓으며,
오랫동안 부재했던 신들이 눈을 뜬다.
나는 참혹한 광경을 계속해서 묘사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이 땅에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유일하게 남은 인간이 두 명 있었어.”
“그들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는 왕세자 전하.”
“유릭 덴 메나디아 왕세자가요!”
아른트가 비명을 질렀다.
반대로 레안드로스는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누굽니까.”
“내가 잘 알던 얼굴이었지. 혼자서 왕세자 전하를 막아서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너야. 레안드로스.”
원작 주인공을 갈아치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여기서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레안드로스.
아렌하이트 공작의 호위 기사이자,
지난 삶에서는 내가 하는 짓거리가 지쳐서 떠나버린 놈.
그는 내 말에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이걸 ‘계시’라고 불렀으니까.
레안드로스가 알기로, 계시는 확정된 미래를 보는 것.
그 미래에 다다르는 모든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예언과 차별을 둘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결과만 볼 수 있는 예언보다 계시 쪽이 미래를 바꾸기 수월하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계시를 꿈꾸셨으니 그러한 참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실 방법도 알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말했잖아, 엄청나게 긴 계시였다고. 그걸 다 기억할 수가 없어. 게다가 나는 아팠으니까.”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쩔 건데?
레안드로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공작님.”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해보겠지만 장담은 못 해. 설령 내가 기적적으로 전부 떠올린대도 하르트만은 옛날과 다른 상황이니,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잖아.”
“계시를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공작님.”
“알아. 아는데, 나는 전대 공작부인처럼 능숙하게 계시를 활용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레안드로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분명 여기서 더 말하면 내게 잔소리하는 꼴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른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계시를 갑자기 꿈꾸시게 된 이유라도 있으실까요.”
“나도 잘 몰라.”
“전 공작부인께서는 계시를 원하는 대로 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 계시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뭐, 유릭이나 레안드로스나 회차를 거듭해서 나와 많은 관계를 쌓기는 했지.
내가 어깨만 으쓱하자 아른트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레안드로스를 흘긋 쳐다봤다.
“나쁜 미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요.”
“10년 뒷일 수도 있고, 내일모레의 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네? 그게 뭡니까?”
“우리는 당장 오늘 저녁에 먹을 게 없다는 거.”
몇 번을 돌아와도 이 시점의 하르트만은 여전히 궁핍했다.
낟알 몇 톨이 둥둥 떠다니는 물 죽을 먹으면서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 다 연회홀을 열고 금박 장식 좀 떼와. 아른트, 너는 홀에 들어가더라도 촛불 밑에는 얼씬도 하지 마. 레안드로스, 금박을 모아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다 싹 다 내다 팔아버려.”
“네? 연회홀을 망가뜨리시려고요?”
아른트는 펄쩍 뛰었지만 내가 눈을 부릅뜨자 낑낑거리며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모은 금박은 고스란히 여행 여비가 되었다.
얼마간의 현금이 손에 들어온 이상 해야 할 일은 당연했다.
첫 번째, 서부에 가서 기도원을 빙자한 불법 도박장을 털어 자금을 마련한다.
두 번째, 그 돈으로 말끔하게 옷을 갖춰 입고 아놀드 남작 영지를 방문하고 전 공작부인의 유품, 검은 호각 반쪽을 아멜리아에게서 회수한다.
그리고 세 번째.
“……그래서, 가능하다면 아놀드 영애를 하르트만 공작가로 모시고 싶네만.”
“내 딸을 공작가로 보내달란 말입니까? 안 될 말씀이십니다. 그 애는 지금 너무나 병약해 먼 길을 여행할 수 없습니다.”
아놀드 남작의 말에는 거만함이 풀풀 묻어났다.
그야 당연했다.
지난 삶에서 아멜리아의 거처를 두고 논의했을 때는 하르트만 공작가가 제법 알려진 후였고, 지금은 아니었다.
잘 쳐줘봤자 허울만 남은 쓸모없는 공작가겠지.
그러니 아놀드 남작이 내게 예의를 갖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겠지만.
“그렇군. 하르트만 공작저는 디켄터 산맥과 밀접해 여기보다 훨씬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깨끗한 공기 정도야 여기에도 얼마든지 있지요, 공작님. 그러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제안은 그만두시고.”
“금화 1만 닢은 어떻지?”
“……예?”
남작이 순간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옆에 서 있던 남작가의 시종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 일렀다.
시종이 서둘러 가져 온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가며 대답했다.
“금화 1만 닢 말일세. 아놀드 영애가 하르트만 성에 도착한 지 1년 안에 병환에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즉시 남작가로 귀환시키고 금화 1만 닢을 지불하겠네.”
“아니, 무, 무슨.”
“그만큼 하르트만은 아놀드 영애의 가치를 높게 사고 있다는 말이지. 게다가 나도 그녀에게 가능한 한 잘해 주고 싶거든.”
순식간에 써 내려간 임시 계약서를 남작 쪽으로 내밀었다.
아놀드 남작은 그걸 선뜻 집어 들지도 못하고 나를 쳐다봤다.
“무슨 계획이십니까, 공작님?”
“아무런 의도도 없네. 사람의 선의를 곡해하지 말게나.”
내 꿍꿍이를 너한테 말해주겠냐.
들어봤자 이해도 못 할 거면서.
남작은 금화와 자신의 자존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갈등에 빠진 남작을 보다가 툭 던졌다.
“내가 우연히 들은 건데 말이야. 아놀드 영식을 해외로 유학 보낼지 생각하고 있다며.”
“그걸 어떻게?”
“어떻게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 돈이 있다면, 아놀드 영식의 유학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지.”
이전 회차에서 아멜리아와 잡담을 나누다가 잠시 동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동생은 아멜리아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데다가 집안의 유일한 남자라 가문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귀한 아들에게 남작 부부는 뭐든 해주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형편만 된다면 해외로 보내고 싶어 하셨어요. 신성 제국과 하이퍼도리아의 무우 돌란, 코모도리엄에서 유학하는 귀족들은 드무니까요. 하지만 마땅히 하고있는 사업도 없고. 유학은 돈이 많이 드니까 어쩔 수 없었죠.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남작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공작저에 가서 제 딸아이의 병이 낫는다면야…….”
저번이나 지금이나 자기 딸을 팔아먹는 건 여전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남작의 말대로 아놀드 영애가 먼 길을 이동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테니, 가능하면 성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시종을 붙이는 게 어떻겠나?”
“공작님께서 배려해주시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영애의 곁에서 시중을 들 시녀 말고도, 급한 상황에서 영애의 신변을 보호해줄 수 있는 이 말일세.”
떡밥은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계약서에 적힌 ‘금화 1만 닢’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놀드 남작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부에서 공작저로 돌아온 지 한 달.
내부 보수와 수리에 한창 열을 올릴 시기에,
아멜리아가 시종들과 함께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종 중에는 기묘하게 창백하고 하얀 얼굴을 한 시종도 함께 섞여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