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03
(102)
“고, 공작님을, 뵙, 뵙습니다.”
아멜리아는 불안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지금 내 앞에 선 그녀를 보자, 지난 회차의 슈첸페스트에서 마주쳤을 때는 어느 정도 회복을 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도 그만큼 회복해주면 좋겠는데.
나는 아멜리아를 이번 생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반겼다.
“먼 여행길에 피로가 쌓였을 듯합니다, 아놀드 남작 영애.”
“……남작, 저에 있어도 조, 좋았는데. 배, 배려를 해주셨다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 군요.”
아멜리아는 본인이 금화에 팔려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듯했다.
당장은 기분이 나쁘겠지만 슈첸페스트의 비극을 겪지 않고 아멜리아를 여기까지 데려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전 공작부인의 유품을 소중히 맡아준 값이라고 생각하시죠. 짐은 여기에 있는 게 전부입니까?”
“네, 에.”
“아직 성이 수리 중이라 조금 복잡합니다. 아놀드 남작 영애가 오시기 전까지는 끝날 예정이었는데, 중간에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하지만 지내실 방은 문제없을 겁니다.”
“…가, 감사합, 니다.”
“몸이 좋지 않은 듯하니 먼저 방에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른트, 영애를 방까지 모셔다드려. 그리고 영애의 시종은 짐을 안뜰에서 방까지 옮기는 게 좋겠군.”
아른트는 ‘제가요?’ 하고 눈으로 되물었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멜리아에게 팔을 내밀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성이 넓으니 걷기 힘드시다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아멜리아는 아른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의 팔에 손을 얹지도 않고 몸을 홱 돌렸다.
아른트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그녀를 쫓아갔다.
데리고 온 시종들도 안뜰에 세워둔 마차로 우르르 몰려갔다.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중정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홀에서 레안드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많이 기다렸지. 잠시 나랑 갈 데가 있어.”
“어디입니까?”
“가는 데에 얼마 안 걸려.”
나는 레안드로스를 데리고 성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이라고는 해도, 애초에 1층의 층고가 꽤 높은 편이다 보니 한국의 웬만한 3, 4층과 맞먹는 높이였다.
2층 복도, 커다랗게 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자 안뜰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낯선 사람들이 마차에 실린 짐을 부지런히 성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레안드로스에게 물었다.
“그거 알아? 하르트만 가문이 어떻게 해서 망했는지?”
“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공작님께서 건재하시지 않습니까.”
“끼니로 풀죽을 쑤어먹을 정도면 확실히 망한 거야. 어쨌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공작가는 왕국에서 왕실 다음으로 세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잖아.”
“맞습니다.”
“그렇게 강대한 가문이 하루아침에 망했을 리가 없잖아. 이유가 뭐였는지 알아?”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내부에 첩자가 있었어.”
레안드로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첩자라면, 설마.”
“집사장과 부집사장, 시종장, 그리고 하녀장. 측근들이 전부 뒤돌아서 정보를 빼내고 있었는데 망하지 않기가 어렵겠지?”
“당시 부집사장은 아놀드 남작 영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공작가로 불러들이신 겁니까?”
“반쯤은 맞아. 하지만 반은 아니야. 방금 말한 네 사람은 왕실을 위해 일했었지. 하지만 전부 자의적으로 왕실에 협력한 건 아니었거든.”
“선처하시렵니까?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한 배신자들을?”
늘 냉정하기만 했던 레안드로스의 검은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 속으로는 누구보다 깊은 증오를 왕가에게 품고 있는 인물이었지.
나는 바로 반박했다.
“선처가 아니야. 배신자라도 유용하게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뿐이야. 하지만 그러려면 밑 작업이 좀 필요해. 저기 남자 보여?”
레안드로스는 창문 밖을 흘긋 쳐다봤다.
저 아래에 있는 시종 중 검은 머리의 시종은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커다란 가방을 양손에 들고 있는 시종 말씀이십니까.”
“왕세자가 아놀드 영애를 감시하려고 심어둔 첩자야.”
“첩자의 얼굴을 알고 계셨습니까?”
“계시 속에서 봤어. 긴가민가했는데, 남작가에 방문했을 때 바로 알아차렸지.”
레안드로스의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공작가로 불러들이신 겁니까?”
“영애가 이동하면 따라올 거로 생각했지. 계시에서는 저 첩자가 남작 영애를 죽이고 그녀에게서 검은 호각을 훔쳐서 달아나.”
“하지만 그 물건은 이미 공작님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지금은 나도 같이 위험해진 셈이겠지? 불시에 언제 찔릴지 모르는데.”
레안드로스는 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전 공작부인께서는 공작님의 안위를 가장 우선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맹세하겠습니다.”
“든든한 말이긴 한데, 그럼 남작 영애는?”
“……영애를 지키라는 임무는 없었습니다만.”
“하지만 남작 영애한테는 금화 1만 닢이 걸려 있잖아. 이대로 날 파산시킬 건가?”
그는 미묘하게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내가 한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작 영애를 지키라고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아, 아냐. 그러지는 않을 거야.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어떤 방법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남작 영애가 하르트만에 잘 도착했다고 아놀드 남작에게 알려주려고 했거든. 어쨌든 친딸을 여기까지 보내주었으니 남작의 믿음에 보답해야지.”
조금 웃음이 났다.
지금까지 저 시종의 얼굴을 세 번이나 봤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그가 아멜리아를 죽이는 걸 봤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가 내 상반신의 절반을 뜯어먹었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이번에는 내가 저놈을 사냥하려 한다.
“디켄터 산맥에서 내려가는 길도 제법 험한데, 며칠 전 비까지 왔으니 미끄럽겠지. 자칫하다가는 사고라도 나겠더군.”
“공작님.”
“만일 저 시종이 직접 남작가로 가는 길에 변고라도 당한다면? 끔찍한 상상이지?”
레안드로스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적고 덤덤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한참 만에 레안드로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공작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그를 호위하겠습니다.”
“아, 그럴래?”
“공작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공작저를 떠나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 남짓일 테니.”
“그래주면 든든하지. 남작에게 체면치레도 할 수 있겠고.”
“내일 떠날 수 있도록 채비하려 합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당연하지. 바쁠 텐데 어서 가봐.”
레안드로스는 고개를 숙이고서는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향했다.
내 기분 탓인가.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묘하게 들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멀어져가는 레안드로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스스로 되뇌었다.
이번 삶에서는 최대한 장애물을 제거한다.
그리고 가능한 주인공인 레안드로스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킨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에만.
그 외에는 철저하게 조연으로 남으며 유릭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 삶을 시작하며 새로 다짐한 결심이었다.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최선은 다해봐야지.
나는 손가락만큼 작게 보이는 첩자를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을 몰래 상상했다.
* * *
저녁 시간.
저녁 식사는 공사로 번잡한 식당 대신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다.
아멜리아는 몸이 좋지 않아 부드럽고 담백한 식사를 했고, 아렌하이트는 맑은 수프 한 접시만을 앞에 두고 있었다.
담소는 많이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가 끝날 때 즈음, 아렌하이트가 문득 제안했다.
“영애가 오셨으니 남작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작이 걱정하실 텐데요.”
“마음 써, 써주셔서 감사합, 니다. 가, 가능하다면 저, 전보를 부치려고.”
“전보를 부치려면 여기서 한나절은 걸리는 마을까지 가야 할 겁니다. 게다가 편지가 얼마나 빨리 도착할는지 가늠도 할 수 없고요.”
“그, 그렇다면.”
“차라리 영애의 시종 중 하나가 말을 타고 직접 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아멜리아는 냅킨으로 입가를 눌러 닦았다.
그녀의 접시는 반도 비워져 있지 않았다.
퀭하고 피곤한 표정을 한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문제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의미였다.
“그, 렇게 하겠, 습니다.”
“산맥의 길이 험하니 시녀보다는 시종이 나을 겁니다. 만일을 대비해 공작가의 기사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기, 기사요?”
“레안드로스 경 말입니다. 영애와는 이미 구면이시죠.”
“아아.”
전 공작부인이 잠시도 옆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던 레안드로스.
아멜리아는 그게 기억났는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본 아렌하이트는 염려를 가득 담아 물었다.
“식사가 길어지니 힘드십니까? 그만 일어나죠. 남작가로 보낼 시종의 여행 채비는 공작가에서 준비할 예정이니, 영애는 마음 놓고 쉬는 게 좋겠습니다.”
“배, 배려에 감사…….”
아멜리아는 방전된 체력에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시녀 두 명에게 의존해 거의 실려 가듯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로 인해 다음 날 이른 아침, 공작저에서 두 명이 서부를 향해 길을 떠났다.
검은 머리의 시종과 아렌하이트가 손수 붙여준 호위 기사였다.
그러나 그날 오전부터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저녁이 되자 아예 장대비로 변해 마구 쏟아졌다.
아멜리아의 시종들은 서부로 향한 사람들이 잘 가고 있을까 걱정했지만,
정작 그들의 주인인 아멜리아는 다 빠지지 못한 약 기운에 끙끙 앓기만 했다.
정신을 차리다가 반복하는 와중에 여행자들의 안전을 빌어줄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여행자들이 성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의 저녁이었다.
아멜리아와 아렌하이트가 막 응접실로 들어서는 순간, 아른트가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공작님.”
“무슨 일이지? 그렇게 다급하게.”
“레안드로스 경이 돌아왔습니다.”
“……뭐? 하지만 그는 서부로 갔지 않나. 내가 아놀드 영애의 시종을 보호하라고 했을 텐데. 내 명령을 어겼단 말인가?”
“아닙니다, 공작님. 그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명을 드리기에는 여기가 부적절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어째서 부적절하지?”
아른트는 아멜리아를 흘금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아렌하이트가 막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쾅!
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다들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 몇몇 사람들이 작게 놀라서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섞였다.
이윽고 응접실로 걸어오는 이는,
“레안드로스 경.”
아렌하이트가 그를 불렀다.
레안드로스는 침착하게 아렌하이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옷과 망토는 젖은 후로 말리지 못했는지 축축했으며, 몸에서는 진흙과 숲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레안드로스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공작님.”
“서부까지 다녀왔다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어째서 혼자 돌아왔지?”
“도중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르트만 영지를 벗어나던 중,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 있던 탓에 남작 영애의 시종이 변을 당했습니다.”
레안드로스의 설명에 공작의 옆에 서 있던 아멜리아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자, 잠시만. 제, 제 시종이 지금 어떻게 되었, 다고.”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돌아가는 길을 제안드렸습니다만, 서둘러서 가야 한다며 무리하게 강을 건너는 바람에. 말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런. 어째서……!”
아멜리아가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시녀가 서둘러 부축했다.
아렌하이트가 다시 물었다.
“건져내지 못했단 말인가?”
“유속이 빨랐습니다. 공작님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으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아렌하이트는 레안드로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었다.
-짝!
매서운 소리와 함께 레안드로스의 얼굴이 돌아갔다.
아렌하이트는 다시 손을 들었다.
-짝, 짜악, 짝!
몇 번이고 내리치는 사이에도 레안드로스는 그저 조용히 인내했다.
레안드로스의 뺨이 붓고, 아른트의 낯이 눈에 띄게 겁에 질리자 겨우 손찌검이 멈췄다.
아렌하이트는 아멜리아에게 돌아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제 불찰입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급히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제 기사가 옆에 있었음에도 일어난 사고에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립니다.”
“사, 사과요?”
“비가 내리는 시기가 지나면 남작가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빈 일손이 불편하시다면 기꺼이 저희 쪽에서 시종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멜리아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가문의 기사를 벌하고,
공작이 직접 배상과 함께 사과를 전달했으니.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하이트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아멜리아를 응접실 안으로 다시 안내했다.
그들이 전부 응접실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레안드로스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레안드로스와 아렌하이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기 직전.
아렌하이트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