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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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첸페스트의 마지막 날.
하르트만, 늑대 하나, 멧돼지 하나, 숫사슴 하나, 메추리 둘, 토끼 다섯, 여우 셋,
유릭, 늑대 둘, 여우 셋, 오소리 하나, 곰 하나.
결과, 33대 36점. 곰이 치트키였다.
점수판을 보자니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양보해서 늑대는 그렇다 쳐도 곰이라고.
대체 어디서 나타난 곰인데!
“본의 아니게 하르트만과 왕가의 대결 구도가 되어버렸네요.”
“저쪽은 참가한 사람이 하나잖아. 우리가 압도적으로 패배한 거지.”
아른트의 말을 정정하며 저 멀리 있는 유릭을 노려봤다.
유릭은 자신을 숭배하는 젊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찬양을 받고 있었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배알이 꼴리던지.
나뿐만이 아니라 루셀과 레안드로스도 자존심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대체 뭘 하면 사람이 저렇게 숲을 싹 쓸어버릴 수 있는 겁니까? 전 상상도 못 하겠어요.”
“어디서 따로 동물이라도 풀었나 보지.”
“와, 비열한 수네요.”
적극적으로 투덜거리는 루셀에 비해서 레안드로스는 조용했다.
레안드로스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불쾌함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 못 했는데.
“레안드로스, 지금…….”
입을 막 열자마자 유릭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추종자들을 헤치고 걸어왔다.
“왕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하르트만 공작인가? 작위 수여식에서 보고 처음이군. 그간 잘 지냈나? 돌아가는 길에 크게 앓았다 들었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간 변고는 없고?”
평범한 안부 인사.
하지만 유릭 때문에 몇 번이나 죽어본 나에게는 가식적인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장단은 맞춰줘야겠지.
“성으로 돌아가니 새삼 일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선대 공작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다 하셨는지 참 놀라울 뿐입니다.”
“그대도 곧 익숙해질 걸세. 아, 뒤에 서 있는 건 레안드로스 경이 아닌가? 어제 사냥 중 훌륭한 실력을 봤다네.”
“……과찬이십니다.”
“왕가와 하르트만 공작가의 점수 격차가 거의 없어. 여우 하나 잡으면 바로 따라잡힐 숫자지 않나.”
여우는 3점이니 우리가 잡으면 그렇겠지.
유릭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고개를 일단 끄덕였다.
유릭은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사냥제 마지막 날의 흥을 돋우기 위해 한 가지 내기를 하는 것은 어떤가, 공작?”
“내기라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그야 사냥 내기지. 점수가 비슷하니 제법 유흥거리가 되지 않겠나? 내가 진다면 공작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왕세자의 이름에 걸고 하나 들어주지.”
유릭의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왕세자라는 자리를 걸고 빌 수 있는 소원.
작위든 황금이든 바라마지않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기회.
나에게도 무척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제가 진다면, 왕세자 전하의 소원을 하나 들어드려야겠군요.”
“그렇지. 혹시 부담이 큰가?”
하이 리스트 하이 리턴.
즉, 왕세자의 것을 뺏어올 수 있느냐, 혹은 빼앗기느냐.
최악의 경우 빼앗기는 건 이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예지든 뭐든 왕세자의 계획에 일조하게 되겠지.
거절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왕세자 전하께서 제안 주신 내용은 무척이나 기껍습니다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나는 유릭이 왜 이런 제안을 이런 타이밍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귀족 영애 및 귀부인들과 기사, 귀족 영식들.
그중 누군가가 속삭였다.
“하르트만 공작가에서 참가하는 인원은 두 명입니다. 왕세자 전하께서 너무 부담을 지시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수가 이렇게 차이 나니 그게 합당하다 판단하신 것이겠지.”
“하르트만 공작에게는 오히려 이득인 제안이 아닌가요.”
사냥제에서 우승을 거둘 수 있다고 감히 점친 대가인가.
여기서 물러나서 꼬리를 만 개라고 칭해질 수는 없었다.
유릭 이 새끼가.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응하겠습니다.”
“공작도 역시 남자로군. 호승심이 끓어 넘쳐.”
유릭은 빙긋 웃고는 ‘즐거운 내기’가 되겠다며 물러났다.
엊그제의 오찬에서 면식을 익힌 몇몇 귀족들이 몰려들어 내게 유릭과의 관계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답해줄 수가 없었다.
찜찜한 기분이었다.
유릭은 즉흥적으로 구는 법이 없는 캐릭터다.
그 어떤 도박도 하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견실하고 계획적인 설정이라고.
그런 유릭이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한다고?
분명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무엇을 예상할 수 있지?
유릭의 무엇을 예측할 수 있지?
마수, 빌런, 예지를 손에 넣으려는 욕망, 동부와 남부에 잠든 고대의 신화, 그리고.
“두려우십니까?”
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레안드로스가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두려운가?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너희를 지키고, 이야기를 써내려 가서 동생을 해방시켜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회귀를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맞다. 나는 두려웠다.
유릭이란 캐릭터는 속이 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죽음으로 인한 회귀는 끔찍했다.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고통이 아닌 것은 아니고, 슬픔이 슬픔이 아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나를 보던 레안드로스는 천천히 말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넌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 공작님께서는 제게 명령만 내려주시면 됩니다.”
레안드로스가 말하는 ‘늘 그렇듯이’.
공작가가 몰락하고, 왕성의 추격병을 피해 도망가야 했던 아렌하이트와 그를 끝까지 지켜서 성으로 돌아오게 해준 레안드로스.
두 인물의 사이에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아닌 ‘아렌하이트’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데도, 왜 나는.
“공작가를 위해 반드시 승리해서 돌아와. 명령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설 속 세상 속에서, 주인공에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까.
레안드로스의 맹세와 함께 사냥제의 마지막 사냥이 시작되었다.
* * *
“기껏 왕세자 전하께서 슈첸페스트에 참가하셨는데, 하르트만 공작이 감히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실로 무엄하지 않습니까. 반역자들이 똘똘 뭉쳐서 음험한 생각을 품었던 것도 그럴진대.”
“왕세자 전하께서 어린 자식은 죄가 없다고 말씀하셔서 목숨이라도 부지한 것을. 지금 와서 납작 엎드리지 않고 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새 공작의 연치도 상당히 어려서 그런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왕세자 전하, 이번 사냥제에서 교만한 그 콧대를 눌러주셔야 합니다!”
슈첸페스트의 셋째 날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날.
여러 마리의 말들이 너른 숲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선 것은 훌륭한 위용을 자랑하는 검은 준마였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을 가진 고고한 흑마는 그 위에 올라탄 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자신이 소유한 아름다운 말의 갈기를 쓰다듬던 유릭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하나같이 비굴하면서도 결연한 얼굴들.
유릭은 오랜 시간동안 그런 얼굴을 많이 봐왔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선동에 휩쓸려서,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종자들.
어째서 인간은 몇백 년이 지나도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기 충분한 계기였다.
하지만 유릭은 용케 그런 생각을 숨기고 인자하게 타일렀다.
“하르트만 공작의 나이가 어리기는 하나 틀림없이 정당한 공작가의 후계자. 일국의 공작이라는 자리가 그리 쉬울 리가 없지.”
“왕세자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 젖내나는 어린 분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자리가 아닙니까?”
“공작이 공작의 역할을 하지 못하니 왕성에서도 공작령 반환에 있어 신중해지신 것이 아닙니까.”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닌 일개 백작가 후계자가 스스럼없이 ‘공작’이라고 하대를 했다.
과거 하르트만의 가세가 매서웠을 때는 공작이 없는 자리에서도 쉬쉬하던 이들이었는데.
하여간 재미있는 종이라니까.
유릭은 말없이 웃으며 이어지는 하르트만의 험담을 들었다.
험담이 꽤 길어져서 나중에는 소재가 떨어질 무렵, 유릭이 이끄는 무리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저희 사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금 동물이 많은 곳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듯합니다.”
그 소리에 무리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제대로 난 길도 없었다.
나무는 굉장히 울창해져서 햇빛을 죄다 가려버렸다.
졸지에 어두침침한 숲에 갇히게 된 이들은 유릭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세자 전하, 너무 깊게 들어온 듯합니다. 이쪽이 사냥 구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저쪽으로 가서 길을 보고 오겠습니다.”
“아, 좋은 생각이군. 왕세자 전하께서는 어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시지요. 하르트만 공작보다 더 사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릭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를 추종하던 무리를 마주 본 유릭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무사히 들어온 것 같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그대들이 정신없이 떠들어준 덕분에 나도 심심하지 않았어.”
귀가 아플 정도였으니 심심할 틈이 어디 있겠나.
나긋나긋한 유릭의 말은 이어졌다.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네. 그대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니.
“왕세자 전하?”
“짧은 시간 동안 즐거웠다네. 그럼 잘 가게.”
영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들이 일제히 유릭을 바라봤다.
다음 순간 작게 ‘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 괜찮으신……?”
그 옆에 서 있던 귀족 영식이 옆을 돌아봤다.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다른 가문에서 온 이가 있었는데.
지금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머리가 없는 몸뚱이였다.
“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무언가가 수풀 속에서 뛰쳐나와 그의 머리를 덮쳤다.
그로 인해 그 역시 영원한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히히히힝!
“아, 아아악!”
“이게 뭐, 무슨, 이건!”
“대체 이것들은 뭐, 으아악!”
“수풀에서 멀어져, 떨어지라고! 떨어, 져, 으아아!”
흰색 물체가 수풀 속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아우성과 비명은 놀랍도록 빠른 시간 내로 잦아들었다.
바닥에 널부러진 몸뚱아리 사이를 기어 다니는 것은 사람 머리만한 벼룩이었다.
새하얗고, 작은 피막 날개를 달고 있으며, 굳센 뒷다리 한 쌍과 수십 개의 앞다리를 단 기괴한 생물.
유릭은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다리가 없는 거대한 투명한 지렁이였다.
다만 길이가 몹시 짧고 몸 가운데가 크게 부풀어 있었는데, 그 밑으로 짧은 솔 같은 점막체가 꾸물거리면서 몸을 이동시켰다.
대가리 쪽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지는데, 그 둥근 끄트머리에는 공허하게 뻥 뚫린 눈과 턱이 없는 입이 있었다.
너덜거리는 넝마 같은 입 구멍에서는 쉴 새 없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냄새를 맡듯이 유혈이 낭자한 자리를 한차례 훑었다.
그리고는 목구멍을 통해 방금전까지 살아있던 것들을 모조리 뱃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새끼는 머리를 먹고, 어미는 몸을 먹는다.
나름 맛있는 부분을 새끼에게 먼저 먹이는 건 모성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유릭은 피칠갑이 된 바닥이 말끔해지자 짧게 박수를 쳤다.
“새끼들이 더 커지기 전에 맛있는 걸 먹여주고 싶겠지? 밖으로 나가면 더 많은 식삿거리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어미’는 잠시 유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통통 튀어 다니는 새끼들과 함께 유릭이 온 길을 되짚어갔다.
그 다정한 모자지간의 뒷모습을 보던 유릭은 문득 중얼거렸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하르트만 공작이 죽으면 좋을 텐데.”
사냥제의 제 2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