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212)
212화 무영검각, 선우휘 (2)
능지평이 도경현에 내려와 찾은 것은 객잔이었다.
이전에 한 번 왔던, 명월객잔.
그는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차지해 앉았다.
객잔 이 층에 난 창으로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능지평의 어두운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찌푸렸다.
“독한 화주로, 하나 내오게.”
쭈뼛쭈뼛 다가오는 점소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식사는…….”
“입맛이 없어서…… 아니, 대충 아무거나 가져와.”
“예!”
점소이는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무림인을 보는 게 익숙한 도경현이었지만, 능지평의 외모에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근육이 우락부락하거나, 온몸이 흉터에 덮여 있는 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능지평은 깔끔했다.
그 묘하게 날카로운 눈매와 차가운 입매, 패용한 검만 아니었다면 유생으로도 보일 법했다.
하지만, 오늘 그에게서는 무척이나 우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점소이는 눈치껏 객잔에서도 꽤 독하고 비싼 술을 가져왔다.
아직 식사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능지평은 술을 따라 들이켰다.
목구멍이 불타는 듯하더니 뱃속이 뜨거워진다. 날숨에서 주정의 향이 느껴졌다.
능지평은 눈을 찌푸렸다.
술이 독하고 저급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화주(火酒)를 가져오라 했건만…….”
그가 원했던 것은 싸구려 술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능지평이었지만, 화주에는 각별한 기억이 있었다.
무영검각의 후기지수로 살았던 시기와 백씨세가의 빈객이 되었던 시기의 사이.
강호를 떠돌며 흑도인들을 피해 다니던 시기에나 맛보았던 싸구려 독주.
“…….”
술을 마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던 것일까. 능지평 스스로도 제 맘을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취할 수 없으면 또 한잔 더 마시면 된다.
능지평은 새로 한 잔을 따라 들이켰다.
임무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지 않을까.
무림맹의 명을 받아 무당에 찾아온 상황. 철혈무정 백류산이 그에게 내린 명은 무당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임무를 성공시킨 것은 이강과 금침의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능지평은 역할을 다했다.
그렇다면 이 죄책감은 무엇인가.
혼자서 몰래 화주나 들이키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자꾸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죽어 가던 사부의 얼굴.
다시 만나기로 약조했다가 영원히 만나지 못한 사형제들.
무당의 비급을 훔쳐 모든 일의 원인이 되었던 사숙, 무영투도(無影偸盜) 선우휘.
‘그 병신같은 사숙.’
선우휘가 무영투도라는 별호를 얻기 전에는 그저 평범하고 헌앙한 청년이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능지평을 무척 귀여워했던 것 같다. 성품이 온순하여 늘 미소를 띠고 다니는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밤이었다.
우연히 잠이 오지 않았던 밤.
측간에 가기 위해 나왔던 능지평은 어두운 밤 아래에서 사숙을 만났다.
선우휘는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능지평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디…… 가세요?”
그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윽고 포기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네……?”
그 표정이 몹시도 차가워 보였다. 여태까지 알았던 사숙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선우휘는 갑자기 빙긋 웃었다. 그 순간 능지평이 알던 사숙의 얼굴로 돌아온 듯했다.
“지평아,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
“아무도 믿지 말거라, 이 나도, 네 사형제도, 사부도, 그리고…… 사문도.”
그 온화한 사숙이 했다기에는 너무도 차가운 말이었다.
능지평이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선우휘는 담을 넘어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10년쯤 지났을까.
강호에 한 신투(神偸)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별호는 무영투도(無影偸盜). 무영검각을 떠났던 제자 선우휘로 추정되는 자였다.
그는 결국 무영검각을 멸문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과거에 발이 매여 있는가…….”
무당을 그리 원망하지는 않았다.
원망의 대상은 오롯이 사숙 선우휘에게 가 있었다. 사부님도, 사형제들도 그 선우휘를 탓했으니.
그래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당에서 오래 있을수록 과거가 떠올랐다.
적요일검(寂寥一劍) 능지평.
‘고요한 가운데 한 자루 검’.
별호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능지평은 고개를 푹 숙였다. 벌써 취기가 올라왔다. 그는 사실 술에 약한 편이었다.
“화주로군.”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숙한 말에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마시면 몸을 버리는데.”
철혈무정 백류산이 틀림없다. 무심코 그리 생각했다.
백류산은 화주를 마시는 능지평을 보고는, 꼭 같은 말을 했었다.
능지평은 벌떡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당연히 백류산이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능 대협. 여기 계셨군요.”
어떻게 알았는지, 이강이 이곳까지 찾아와 있었다.
이강의 목소리는 젊은 백류산과 비슷했던 것이다.
“공자님…… 어떻게 여기에.”
“능 대협을 찾았습니다. 무당파에 계시지 않는 듯하기에.”
“……부끄럽습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능지평이 그리 자책했다.
허나, 이강은 능지평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추태가 어디 있었습니까. 앉으시지요. 아직 음식도 나오지 않은 듯한데.”
“공자님…….”
능지평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
주군의 아들인 이강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설마 이강이 고개를 숙이고 사죄할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능 대협.”
“공자님! 왜 그러십니까.”
“제 생각이 참으로 짧아 능 대협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무슨…….”
능지평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당황했다.
“능 대협께서 제게 검각의 무공까지 가르쳐 주셨는데.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웃고만 있었으니…….”
“과거의 일은 저도 잊었습니다. 지금은 백씨세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몸. 전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고개를 든 이강이 물끄러미 능지평을 응시했다.
그 유리알 같은 눈이 능지평의 가슴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거짓말이 들킨 것 같아서 능지평은 난처했다.
“…….”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의 전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무영검각의 일 말입니까?”
“예, 무당파와의 악연 말입니다.”
원래라면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먼 과거에는 유명했던 사건이지만 이젠 다들 잊고 있는 일이니.
장본인인 능지평이 알고 있는 내밀한 것은 절대 말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이강이 요구하더라도 그랬다.
“배우는 자세로 경청하겠습니다.”
하지만 술을 몇 잔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곳이 무당파이기 때문일까.
능지평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숙 선우휘.
문파가 천천히 멸망한 경과.
무당파의 대응.
무림맹이 무영검각의 맹적을 박탈한 것.
어느 순간부터 덤벼들던 흑도의 무인들.
무당의 비급을 내놓으라던 강도들.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당에는 이제 악감정이…….”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이강이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무영투도 선우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
“사문을 떠나고 한참 뒤 무당의 무공을 훔쳤다고요.”
“그렇습니다. 비겁하고 추한 자이지요.”
“그가 무영검각을 떠나기 전에도 그런 자였습니까?”
“…….”
“능 대협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능지평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사실, 사숙을 잘 따랐다고. 선우휘는 온화하고 선한 인간이라고 느꼈다고.
“그렇군요.”
“……사문을 떠났다면 곧 낭인입니다. 낭인으로 사는 세월은 인간을 바꾸기에 충분하지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지의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폐쇄된 채 무당 도인들이 구금했다고요.”
“그리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 무당파에 있을 수도 있겠군요.”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죽지 않았겠습니까?”
이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능지평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무당에 있던 내내 거북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쩌면 사숙이 근처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적어도 참회동에는 그런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강은 능지평을 찾기 전에 확인한 바 있었다.
참회동을 책임지는 집법당주에게 직접 물어본 참이었다.
이강은 턱을 긁적이며 고민하는 태도였다.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능지평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정확히 어떤 비급을 훔친 겁니까.”
“장삼봉의 신공이라고 했습니다.”
“신공이라면 무슨 신공인지는 모릅니까?”
“알 수 없습니다. 검법이나, 내공심법이 아닐까 싶은데……. 무당은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요.”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장삼봉의 비급을 도둑맞았더라고 해도 무당이 모든 것을 나불대지는 않을 것이다.
수치스러운 일이며, 동시에 비밀스러운 일이니.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무영투도의 행적이 유출된 것도 사고일 확률이 높았다.
“무림맹이 무영검각의 맹적을 박탈한 것은, 무당파의 공식적인 요구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니겠지만…….”
능지평은 약간의 초조함과 짜증을 느꼈다.
“공자님. 질문하시는 것들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강은 능지평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능지평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석연찮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여럿이요. 우선…….”
이강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무당파는 사지근맥을 끊고 단전을 폐하고 가두는 형벌을 하지 않습니다.”
“……예?”
잔혹하긴 하지만 의외로 자주 일어나는 형벌이다.
소림만 해도 참회동에는 그런 마인들이 많지 않던가. 목숨을 함부로 취하지 않으려는 불가나, 도가 문파에서 많이 쓰는 방식이다.
“단전을 폐하긴 해도 사지근맥을 끊지는 않지요. 그럴 바에 아예 죽일 겁니다.”
“확실합니까?”
“예. 확실합니다.”
아무리 이강이라고 해도 무당의 문규를 어떻게 확신할까. 능지평은 그것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강은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무당이 어찌 사람의 사지근맥을 끊어 놓는다는 말이오. 그것은 무당의 방식이 아니외다!」
장삼봉이 불쾌하다는 듯 열변을 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무당의 방식이 뭔데요.’
「저 명계로 보내 하늘의 뜻에 심판을 맡기겠지. 특히 사문의 무공을 훔쳐 간 투도를 잡았다면.」
능지평이 들은 소문이 사실일 확률은 적다는 뜻이다.
혹, 장삼봉이 죽고 문규가 바뀌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삼봉의 무공을 훔쳤다지요?”
“예…….”
“장삼봉은 무당에 비급이나 구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내공심법이나 검법도, 전혀요.”
“…….”
이것도 본인에게 들은 것이다.
「내 유일하게 남긴 것이 상천무였는데. 이 또한 꽁꽁 숨겨 두었소. 어찌 비급을 훔쳐 달아났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강은 세 번째 문제점을 말했다.
“무엇보다 무당이 그렇게 간접적으로 나선 이유를 모르겠군요. 맹적을 박탈하여 검각을 말라 죽게 한다니…….”
“선우휘가 검각을 떠난 뒤, 그를 파문한 지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무당도 명분이 없었기에…….”
“그랬다면 아예 무영검각을 건드리지도 않았겠지요.”
능지평은 침묵했다.
몇 가지는 능지평도 한때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고, 몇 가지는 이강이 제시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생각할만한 여지가 있는 문제였지만…… 능지평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지난 일입니다. 따져 무엇하겠습니까.”
행동에 나설 거라면 진작 나섰어야 했다. 검각이 멸문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물었어야 했다.
능지평은 진한 허무함을 느꼈다.
“……그저 제가 잊으면 될 일입니다.”
“아니요.”
그때, 이강이 일어섰다.
“저도 능 대협으로서 무영검각의 맥을 조금이나마 이은 몸. 따져 물어야겠습니다.”
“예에?”
능지평은 당황했다.
이강이 흥분한 것인가 싶었지만, 얼굴을 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몹시도 냉정한 눈빛이었다.
“따지다니 누구에게 따집니까.”
“무당 장문인이지요.”
“무슨…….”
어찌 멸문한 문파의 무인이 무당 장문인에게 과거사를 따져 물을까.
“저는 지금 가 볼 겁니다만.”
하지만 이강은 아니었다.
능지평은 이강에게서 왜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깨달았다.
이강은 제 아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냉정한 태도로, 해야 할 일은 한다는 마음가짐.
“능 대협도 동행하실 겁니까?”
능지평이 거절한다고 해도 이강은 분명 명원에게 가서 과거의 일을 물어볼 것이다.
그것이 본인이나 무당에게도 난처한 질문이라고 해도 그렇다.
“저는…….”
능지평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따르겠습니다.”
그 예전, 철혈무정 백류산이 쫓기던 능지평에게 손을 내민 순간.
이십 년도 더 지나서 그때가 재현된 듯했다.
능지평은 일어서서 이강을 따랐다.
* * *
이강은 거침없이 자소전으로 올랐다.
검제에게 상천무를 전수받은 이강은 더 이상 완전한 외부인이 아니었다.
무당의 전설적인 무맥을 이은 독특한 입지로서, 이강은 무당 무인들의 묘한 시선을 받았다.
“장문진인을 뵙고 싶습니다.”
외부인으로서는 이 거침없는 태도에 공분을 살만했다.
하지만 자소전을 지키던 일대 제자는 화를 내지 못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장문인에게 이 갑작스러운 기별을 전했다.
“들어가게나.”
“감사합니다.”
이강은 자소전에 들어갔다.
명원이 무슨 일이냐는 듯 이강을 반겼다.
“여쭙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일인가?”
그리고 이강이 과거의 일을 말했다.
명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참으로 난처한 질문이구만…….”
이강은 묵묵히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참으로, 난처한 질문이야.”
그 시선에, 명원은 결국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