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ime-Limited Leader Makes the Raid a Success RAW novel - Chapter (401)
제401화
#401. 당분간 정신이 좀 없겠어.
주세아는 그런 토마스의 생각을 대신 정리해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게이트 폭발 때 마나 유동이 심했다고 들었어요. 그냥 대기 중에 마나 농도가 짙은 건 약으로 버텼겠지만, 움직임이 빨랐다면, 몸에 영향을 많이 끼쳤을 거예요. 예전에 본 적이 있어서 알거든요. 강 단장님은 확실히 하려고 검사받으러 간다고 하긴 했는데, 진짜 별일 아니라면 저 일 중독자가 할 일 많을 때에 정기 검진도 아니면서 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주세아는 고블린 대모가 미지의 존재를 소환했을 때를 떠올렸다.
덕분에 마나의 빠른 유동이 강무혁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토마스가 말했다.
“좋진 않습니다.”
“얼마나요?”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고요. 이 정도까지만 말씀드리죠. 더 알고 싶으시면 강 박사님께 연락해 보십시오.”
주세아는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강무혁의 아버지인 강창수의 번화가 저장되어 있었다.
S랭크인 토마스를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길드에서 그의 연구를 후원하는 만큼 언제든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으나 이내 꾹 참고 스마트폰을 놓았다.
“됐어요. 때 되면 알려주겠죠.”
주세아는 강무혁이 말해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강창수의 연구에 투자한 것도 강무혁을 억제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주세아와 강무혁은 이미 운명공동체였다. 그 운명의 한쪽 축이 병마에 나가떨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주세아가 싱긋 웃으며 토마스에게 제안했다.
“그럼, 우린 차에 먼저 가 있을까요?”
“길마님과 둘이? 불편해서 싫습니다.”
“…….”
토마스와 친해지는 건 아무래도 먼 훗날이 될 것 같았다.
* * *
황룡 길드의 비원쥔은 분노했다.
“자오커지 작전부장. 관홍을 잃은 건 그 어떤 변명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실책이다.”
“미, 미라주와 본 길드의 연관성이 탄로날 위기였습니다. 저는 그걸 막기 위해… 허억!”
자오커지는 비원쥔의 살기에 숨이 턱 막혔다. 비원쥔이 무형의 기운을 그에게 집중하자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몸을 떨던 그는 비원쥔이 기운을 거두자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관홍은 너 같은 것 10명, 100명보다 뛰어난 자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설명해 끌어들이려고 공을 들이고 있었단 말이지. 미라주와 손잡은 게 아니라 이용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았으나 자오커지는 입을 다물었다.
“미라주에 대해 밝히면 당장은 반발해도 결국 우리 손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그걸 다 망쳤어. 그것도 내가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동안 독단으로 일을 처리했지. 다시 한번 묻지. 이번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네 사심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
“저, 절대로 제 사심은 티끌 하나 개입하지 않은 판단이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비원쥔은 처음부터 불신의 눈초리로 자오커지를 대하고 있었다. 그가 비웃으며 말했다.
“흥! 관홍이 사라지면, 그 자리가 네 것이 될 것이라는 욕심이 없었다고? 정말 그렇게 자신하고 말할 수 있나? 네가 관홍의 자리를 탐내 그를 대신하려고 몰아붙인 게 아니라고?!”
“저는…….”
다시 한번 살기가 자오커지를 덮쳤다. 자오커지는 입을 다물고 넙죽 엎드려 비원쥔의 노기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벌벌 떠는 자오커지의 모습에 비원쥔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압박을 풀었다.
“관홍은 이럴 때도 할 말은 다 하는 녀석이었지. 아깝군. 그런 녀석이 아이언윌에 가다니. 흠, 그냥 얌전히 내주긴 좀 그런데. 어찌한다?”
비원쥔은 관홍의 암살까지 생각했다. 아까운 건 아깝더라도 남의 손에 있는 건 봐줄 수 없었다.
게다가 관홍이 난장을 피우고 가는 바람에 황룡 길드는 미라주와의 스캔들로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구동존이 동맹을 중심으로 한 산둥 세력이 각 지역 언론을 이용해 비난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더해서 공산당 정부에도 로비를 시작하고 있으니 황룡 길드는 내부를 단속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관홍을 그냥 내버려 뒀다간 나중에 어떤 화를 몰고 올지 몰라.’
살심이 돋았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인데?”
번호를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전화가 울리다니.
순간 관홍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국과 엮이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비원쥔은 꼭 받아야 할 전화임을 직감했다.
“여보세요.”
-아이언윌 단장, 강무혁입니다.
“역시 그쪽인가?”
-관홍 헌터 건에 대해 합의를 요청합니다.
“우리가 합의 볼 게 뭐 있다고? 어차피 이제 우리 사람도 아닌데.”
-내가 당신이라면, 관홍을 죽일 거거든.
“…….”
-그쪽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식구니까. 이래도 합의를 볼 이유가 없을까요?
“듣던 대로 재밌는 자로군. 주세아를 믿고 까부는 건가?”
대답은 강무혁 대신 다른 이가 했다.
-뭣하면 다시 한번 붙든가.
낯익은 목소리였다.
“주세아…….”
-길드장님은 좀 빠지십시오.
-왜요? 비원쥔이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걸 보면 지난번에 나한테 져서 그러는 거라니까요.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도 듣는 사람 면전에 대고 말하면 예의에 어긋납니다.
-아? 그런가? 비원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이해해줘.
강무혁과 주세아의 목소리가 얽혀서 들렸다.
‘어디서 뻔한 수작을…….’
속내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분명 뻔한 속셈이었지만…….
비원쥔은 발끈했다.
“내가 언제 졌다고?! 너야말로 운이 좋은 줄 알았어야지!”
-그럼, 함 만나든가.
“좋다! 이번에야말로 네 목을 쳐주마!”
비원쥔이 승낙하자 강무혁이 냉큼 발을 들이밀었다.
-약속 장소는 신의주. 지난번 주세아 길드장님과 붙었던 그곳입니다. 시간은 내일 정오로 맞추죠. 그때 뵙겠습니다.
-안 나오면 쫄아서 튄 거로.
그리고 얼른 끊긴 전화.
비원쥔은 아차 싶었으나 무를 순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는 건 황룡 길드의 부길마로서 체면이 상하는 짓이었다.
게다가 약속을 엎었다간 저 간악한 주세아가 비원쥔에게 이겼다는 루머를 퍼트리고 다닐지도 몰랐다.
“이런 얕은수에…….”
너무 유치한 도발이라서 오히려 대응하지 못했다.
비원쥔은 이런 상황을 만든 자오커지를 째려봤다.
‘차라리 관홍을 죽이든가. 어설프게 쫓다가 놓쳐선 한국에 망명하게 두더니.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게 해?!’
비원쥔의 서슬에 놀란 자오커지는 목을 움츠리며 죽은 체 설설 기어야 했다.
이후 비원쥔과 주세아의 만남은 성사됐다. 그곳엔 강무혁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양측이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당사자들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관홍조차 자리에 없었기에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다.
다만, 비원쥔이 관홍을 포기했다는 것만 통보처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헌터계의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잡혀있던 미라주의 잔당이 황룡 길드에 뻗친 마수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 영상으로 퍼지면서부터였다.
세상은 이 영상이 어떻게 퍼지게 됐는지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황룡 길드가 미라주에게 당한 피해자라는 사실만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 * *
세계헌터연맹에서 파견한 레이븐은 미라주와의 전투에 대해 강무혁으로부터 전해 들은 다음 그대로 위에 보고했다.
레이븐은 화상 회의를 통해 아일라에게 상세한 내용을 전했다.
“일루전을 쫓는 게 우선이겠군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국 인접국에 수배령을 내리겠어요. 비행기는 못 이용했을 테니, 선박 위주로 진행하죠. 연맹의 특수부대도 언제든 참전할 수 있도록 할게요.”
보고를 다 들은 아일라는 원탁에 이 작전을 제안하고자 바쁘게 움직였다.
아일라가 움직이자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알렉스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레이븐에게 더 묻고 싶은 게 있다며 자리에 남았다.
“새로운 오더를 내리겠네, 레이븐.”
-예.
“한국에 남아 히르밧 종족에 대해 알아보게.”
-히르밧이라면……
“최근 한국에서 활동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네. 그에 대한 자료를 보내지.”
-아일라 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히르밧 종족? 물론. 하지만 이번 조사는 내 독단일세.
-아일라 님께 필요한 일입니까?
“내가 언제 아닌 일을 맡겼던가?”
-알겠습니다.
레이븐이 화상 회의를 종료하려하자 알렉스가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 그냥 활동하면 C004에게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자네 소속을 임시로 아이언윌에 파견하는 것으로 해두겠네.”
-네? 왜 무슨 일로…….
“드루이드잖나. 라이더 울프와 친해지게나.”
레이븐이 뭔가 불만을 토로하려 하자 알렉스는 냉큼 화면을 꺼버렸다.
그는 레이븐이 사라진 화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히르밧 종족 문제는… 어머니나무회에서 눈치챘어. 아일라 님이 곤란하게 둘 순 없잖나. 미안하네, 커맨더.”
* * *
김명준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일본길드단체연합에서 소환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뭔가 냄새를 맡은 건가?’
자신이 황룡 길드와 손을 잡고 일본에게서 벗어나려는 계획이 들켰다거나.
하지만 일본에 입국해 만난 길단련의 번주인 키신 타케루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물어왔다.
“우리 첩보로는 게이트 폭발이 있었다던데?”
“예? 저, 저는 전혀 처음 듣는…….”
서울숲과 용산공원의 아웃 브레이킹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게이트 폭발이라니?
김명준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쯧. 이래서야 네 녀석 필요가 없어지잖나?”
S랭크의 서슬 퍼런 문책에 기겁한 김명준이 넙죽 엎드려 말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반드시 알아내도록 해. 그에 관련된 모든 사항에 대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한국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는 듯하니까.”
키신은 더는 김명준을 보지 않았다. 그는 현해탄 건너를 응시했다.
‘한국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 * *
“흠, 게이트 폭발이 막혔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경복궁 근처 빌딩 옥상에서 정상이 날아간 북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코트를 팔에 걸고 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는 도통 이해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게이트 폭발을 도중에 막은 전례가 없는데…. 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군. 이건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호기심이 동한 눈으로 북악산을 바라보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예.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남자가 코트를 펼쳐 입었다.
코트는 평범한 옷가지가 아닌 아머 코트였다.
“주세아, 강무혁. 아이언윌이라…. 오래 쉬었더니 바뀐 게 많군. 당분간 정신이 좀 없겠어.”
남자는 그대로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이 아머 코트를 갈라 나부꼈다.
아머 코트의 등과 가슴엔 슬레이어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3부 완결. 4부로 이어집니다.
4부 프롤로그
이탈리아 베네치아.
12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바다 위의 도시, 베네치아는 과거 대전쟁 때 물에 완전히 잠겨 현대의 아틀란티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종전 이후 정부는 베네치아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으나 소전쟁에서 다시 한번 큰 침수 피해를 입으면서 도시가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하지만 소전쟁이 끝난 후 이곳에 글로리아 길드가 자릴 잡으면서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무너진 도시는 과거 물의 도시라 불렸던 베네치아의 특색을 살려 이젠 완전한 계획도시로 재탄생 됐죠. 그 계획도시의 상징이 바로 저기에 있는 ‘무로 디 테라(대지의 방벽)’입니다.”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가이드는 베네치아의 새로운 명물 ‘대지의 방벽’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지의 방벽은 온난화로 높아진 해수면에 대처할 뿐만 아니라 바다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평소에는 해수면의 수위에 맞춰서 바닷물이 내륙에 살짝 들이칠 정도로만 올라가 있었지만, 몬스터 경보가 울리거나 썰물이 들이칠 때면 최대 8m까지 쓰러진 도미노를 역으로 밀어 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수십 개의 방파제가 세워져 기다란 벽을 만들었다.
“그럼, 지금부터 기념 촬영을 하시고 한 시간 후에 여기에 다시 모여서 다음 일정을 소화하겠습니다.”
관광객들이 흩어지자 가이드는 어깨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크로스백을 등 뒤로 돌리며 한숨 돌렸다.
그녀는 근처 노상에서 이동식 가판대를 마련해 장사하는 노인에게로 가 커피를 주문했다.
노인은 환한 웃음으로 가이드를 반겼다.
“엠마, 오늘도 기운차구나. 그렇게 매번 큰 목소리로 안내하다간 목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일이 즐거우니까요, 그로소 씨.”
“늘 먹던 대로 에스프레소?”
“당연하죠.”
투어 가이드 엠마는 베네치아 토박이였다. 그녀가 태어날 무렵의 베네치아는 이름만 남아 있던 도시라 이곳 출신이라는 표현이 무색했지만, 당시 그녀와 같이 폐허에서 태어난 전후 1세대는 이 물의 도시를 사랑했다.
그들은 베네치아의 재건과 인생을 함께했고, 이젠 베네치아의 현재를 책임지고 있으며, 미래의 주춧돌이 될 세대였다.
엠마는 누구보다도 그런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페이가 좋은 투잡도 아니고 본업보다 가이드를 더 열심히 하는 건 좀 아니잖니?”
“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 전 이 자랑스러운 도시를 관광객들에게 소개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요.”
“그러다가 직장에서 쫓겨난다.”
“쫓아내라면 쫓아내라죠. 그렇다고 제가 본업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고. 제 상관도 저한테 뭐라 하지 못할걸요? 저 쉬는 날에 가이드 하는 거니까.”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자, 여기 에스프레소 나왔다.”
“으음, 좋은 향기. 역시 그로소 씨 커피는 향부터가 다르다니까.”
“커피가 다 거기서 거기지.”
엠마는 커피향을 음미하며 가판대 옆 벤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올해 11월의 지중해 바람은 예년에 비해 따뜻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선선했으나 따뜻한 햇볕을 받는 한낮엔 벤치에서 기분 좋은 일광욕을 즐길 정도였다.
엠마는 호로록 커피를 입에 머금고 벤치 뒤로 펼쳐진 바다를 돌아봤다.
잔잔한 물결이 바람을 따라 넘실거렸고, 햇살이 번쩍이며 황금빛 수평선을 긋고 있었다.
“음, 평화롭네. 커피 맛도 기막히고, 바람도 좋고. 매일 이랬으면 좋겠네요.”
“몬스터만 없으면 그럴 수 있겠지.”
물건을 정리하던 그로소가 지나가는 말로 대꾸했다. 엠마는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베네치아의 몬스터 방어는 대형 길드가 많은 로마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최고라고요. 저 방벽만 해도 어지간한 애들은 못 바로 넘기 힘들걸요.”
“그래, 저 방벽이 베네치아를 지켜 준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의 풍경이 사라진 건 아쉬운 일이야. 그땐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이 참 운치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베네치아 운하 물은 하수구였다고 들었었는데요? 차라리 다 박살난 다음에 새로 지어져서 지금은 이렇게 깨끗하고 좋잖아요. 좋은 변화라는 건 바로 우리 도시를 보고 말하는 거겠죠.”
“젊은이들이야 그렇겠지. 엠마 너도 나 같은 늙은이가 되고 보면 옛날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란다.”
“하긴 몬스터가 없던 옛날은 좀 혹하긴 하네요.”
엠마가 피식 웃으며 커피잔에 입술을 댔을 때였다.
뚜우우우우~!
경보음이 도시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데시벨이었다. 그 기분 나쁜 소음에 관광객들이 패닉에 빠졌다.
“이, 이건 뭐야?!”
“도망쳐야 하나 봐?”
“어디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엠마는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그로소에게 커피잔을 건네며 푸념했다.
“안내 책자 좀 그렇게 숙지해두라고 해도 안 보더니만. 에효, 하여간 비상시 대피 방법을 읽는 사람들이 없다니까요. 요즘 같은 세상에 안전불감증이라니.”
“관광객들이 베네치아에 오는 건 안전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런 비상 행동에 눈길이 가겠니?”
“도시에 돈을 쓰는 분들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어디 게이트라도 생겼나? 갑자기 경보를 울리고.”
“글쎄다.”
엠마는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해보려 했다.
그때였다.
귓가에 그그긍, 돌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엠마는 바다 쪽을 쳐다봤다.
“벽이…….”
대지의 방벽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뒤로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게 보였다. 어떤 전조도 없던 쓰나미였다.
엠마가 소리쳤다.
“아쿠아 앝타!”
‘아쿠아 알타’는 이탈리아어로 만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탈리아 북부에선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이상 조위 현상을 뜻했다.
아쿠아 알타 시즌엔 베네치아가 물에 잠기는데, 보통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이 현상이 발생하고, 11월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즉, 지금 이 시기가 아쿠아 알타의 절정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베네치아는 아쿠아 알타가 발생해도 방벽을 세워 물길을 막을 수 있었다.
현재 도시 일부를 관통하는 수로는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한 물길일 뿐, 과거와 같은 침수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다.
엠마는 그런 사실을 잘 아는 가이드임에도 아쿠아 알타를 외쳤다. 현재의 아쿠아 알타가 다른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필시 ‘나가(naga)’로구나.”
그로소는 벽을 향해 달려오는 해일을 보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파도가 인위적인 현상임을 눈치챈 것이다.
“예. 몬스터 웨이브의 전조에요. 이런 짓을 할 놈들은 나가뿐이고요.”
“시간은?”
엠마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후 첫 번째 파도가 벽에 부딪히는 시점을 확인했다. 파도가 방벽을 때리는 순간 타이머로 바꿔 눌렀다.
“아쿠아 알타 이후 첫 웨이브까지 5분 30초.”
그로소도 손목시계 타이머를 확인했다. 그가 엠마에게 물었다.
“글로리아 초동대응반 대처 시간은?”
“그로소 씨 은퇴 전하고 같아요. 4분 40초.”
“쯧! 아슬아슬하군. 4분 10초로 끊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거늘. 아직도냐?”
“최근 5년간 주기적으로 나가 둥지를 청소해왔어요. 그 덕에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나가 습격이 없었죠. 줄일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줄일 필요가 생겼구나.”
“생겼죠. ……어쩌면 늦을지도?”
“늦으면 늦는 대로 현장에서 대응해야겠지. 이거야 원, 은퇴해서도 고생하게 생겼네.”
그로소는 가판대 아래를 뒤적이더니 검과 방패를 꺼냈다. 그리곤 단검 하나를 더 챙겨 엠마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무기를 받아든 엠마가 어이없다며 말했다.
“은퇴했다는 사람이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근처에 그게 없으면 잠을 못 잔다. 너도 내 나이 돼봐. 오랜 버릇은 고치기 어렵다.”
엠마는 단검을 뽑아 검지로 칼날을 퉁 튕겼다. 은은한 울림이 손잡이를 타고 울렸다.
“쓰기 적당하네요.”
“길이 잘 들은 놈이지.”
그로소는 가벼운 가죽 갑옷까지 꺼내 챙겨입곤 장비를 들어 방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하지만 네가 입을 건 없다.”
“괜찮아요. 전 이게 있으니까.”
엠마는 크로스백을 벗으며 안쪽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청색의 기다란 코트, 헌터의 아머 코트였다.
“그놈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은퇴할 때 기념으로 하나 가져가셨잖아요.”
“잘 손질해서 집 옷장에 걸어뒀지.”
“그 비싼 걸요?”
“몬스터 잡을 것도 아니고, 입고 다닐 일이 없으니까.”
엠마는 아머 코트를 한차례 털 듯이 펼치곤, 휙 돌려 바람을 일으키며 입었다.
아머 코트가 그녀의 몸을 감싸자 조금 전까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투어 가이드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눈을 가진 헌터가 대신 자리했다.
엠마는 아머 코트의 가슴 부위를 쓰다듬었다. 그곳엔 글로리아 길드의 영광을 상징하는 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목에 끼고 있던 특수 고무줄로 금발 머리칼을 뒤로 묶으며 그로소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 아니 두 헌터가 어깨를 맞대고 다가간 방벽엔 이미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대부분 연차를 쓰고 있거나 오후 늦은 출근을 기다리던 헌터들이었다.
엠마는 몇몇 아는 헌터들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대신했다. 같은 길드 소속 선배와 후배가 있었고, 다른 길드이지만 사냥을 함께 했던 헌터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음에도 대형을 짜고, 일부 헌터는 높이 솟구친 장벽 위로 올라가 바다를 살폈다.
엠마도 장벽 위로 올라갔다. 딜러인 동시에 척후 포지션을 가진 그녀에겐 장거리 탐색 스킬이 있었다.
그녀가 장벽 위로 올라가기 무섭게 미리 자리했던 헌터 하나가 외쳤다.
“마지막 아쿠아 알타! 바로 뒤에 퍼스트 웨이브!”
엠마는 마음을 다잡을 시간도 없이 단검을 뽑아 역수로 쥐었다.
쓰나미가 방벽을 강타했다. 높은 파도였다. 방벽에 장치된 난간 기둥을 쥐고 있던 헌터들의 몸이 휘청일 정도였다.
그 뒤로 파도 속에서 뭔가 번쩍이는 기광이 일었다. 나가들이었다.
엠마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많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몬스터가 왜 많은지, 이 많은 놈들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덮치는 나가 무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뀌에에엑!”
엠마는 첫 번째 나가의 아가미에 단검을 찔러넣으며 두 번째 나가의 배를 찼다. 세 번째 나가는 주먹으로 후려쳤고, 네 번째는 첫 번째에서 뽑은 단검을 눈에 박아넣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까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로 뒤로 몸을 띄웠다. 파도가 나가와 엠마를 함께 장벽 안으로 밀었다.
장벽 안쪽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뒤로 수십 마리의 나가가 따라왔다.
뒤쪽에서 대형을 짜고 있던 헌터들이 전투 준비를 했다.
가장 연장자인 그로소가 외쳤다.
“지원이 올 때까진 어떻게든 버티라고, 이 애송이들아!”
“선배님이나 뒈지지 마쇼!”
헌터들은 방벽을 넘은 나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베네치아!”
앞서 달린 그로소가 함성을 질렀다. 따라 달린 헌터들이 호응했다.
“우오!”
그들 곁으로 엠마도 함께 달렸다.
이날의 전투는 이후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베네치아 방벽 공성전’이라고 불릴 사건의 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