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85
00078 거리의 등불 =========================================================================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금복의 집에서 사진과 편지를 모두 태워 버린 건 역시 해경답지 않은 일이었다. 소화는 해경의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었지만 공연히 주제넘게 나선다고 할까 싶어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소화였다.
성국을 통해 병원에서 경두가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금복이 떠난 다음 날이었다. 증상이 나타난 뒤 빠른 시간 안에 병원으로 옮겨진 덕분에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경두는 자신이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며 쓰러진 것이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마신 행인수가 과한 탓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들 역시 경두의 증상을 청산 중독과 비슷하다고 진단했으므로 해경이 발설하지 않는 이상 경두가 진실을 알 길은 없었다. 해경은 정신을 되찾은 경두를 방문해 조사 결과대로 폭발은 영사실의 온도가 올라가며 필름이 발화해 생긴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 말에 숨긴 것은 있어도 거짓은 없었으므로, 경두는 해경의 말을 썩 석연찮게 생각하면서도 약속한 의뢰비를 지급하겠다고 했으나 해경은 그것을 거절했다. 진상에 대해 조사하기로 한 것이 자신의 일이었지만 딱히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대외적인 이유였으나, 실은 해경 자신이 숨긴 진실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소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두 달쯤 지나 소화도 그 일에 대해 잊어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조선은행에 볼일이 있다며 근처에 왔다가 사무실에 들른 인혜가 대화중에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참, 조선극장에 허경두 사장의 아들이 부사장으로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군요.”
소화는 잊고 있던 경두의 이름에 깜짝 놀라 차를 내리다 말고 인혜를 돌아보았다. 해경 역시 잠깐 눈썹을 좁힌 채 인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인혜는 두 사람의 미묘한 공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말을 이었다.
“듣기로 허경두 사장의 본처가 재산 한 푼 받지 않고 이혼 소송을 걸었답니다.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해경이 되물었다. 인혜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남의 집안일에는 그리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요.”
해경은 인혜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인혜에게 물었다.
“재산 한 푼 받지 않고 이혼 소송을 걸었다고요?”
전에 없이 남의 집안 사정을 캐묻는 해경의 표정에 별 일도 다 있다는 얼굴을 한 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는데요. 이금복 여사라 했던가요? 그이가 남편은 이미 심신이 모두 자기를 떠났으니 더 이상 부부로 삶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했답니다. 폭발 사고가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있던 아들에게 갑자기 방문해 가진 돈을 모두 유산이라며 주고는, 거기서 허 사장에게 이혼 소장을 우편으로 부치고 떠났다는 거예요.”
소화는 차가 지나치게 우려진 것도 모른 채 인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혼 소송을 거는 여인들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 흔한 일도 아니었고 더구나 경두와 금복의 이혼 소송이라면 남 이야기 좋아하는 뭇 사람들의 입에 충분히 몇 날 며칠을 오르내릴 만한 일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해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떠나다니, 어디로 말입니까?”
인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건 모르지요. 아무튼 이혼 통보를 받고 허 사장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봐요. 게다가 아들에게 준 돈이 십오 만원 가까이 되는 거금이라더군요. 집안이 망했다며 수십 년 돈을 뜯어내더니 물려줄 유산이 이만큼이나 있었냐고 허 사장이 길길이 뛰다 아주 자리에 드러누웠다네요. 그렇지 않아도 허 사장과 바람났던 여급이 집에 있던 금거북이인지 뭔지를 훔쳐서 도망가는 바람에 홧병이 단단히 난 모양인데……허 사장이 종로서에서 펄펄 뛰다 쓰러지는 바람에 아들이 급히 조선으로 돌아와 임시로 극장 사업을 꾸려 가기로 했답니다.”
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인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해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소화는 어쩐지 금복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눈을 잠시 감았다. 세련된 양장을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중년의 여인이 뾰족구두 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여객선의 갑판에 오르는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금복의 행선지를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소화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배표에 ‘上海(상해)’라고 쓰여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혜가 침묵하는 해경의 표정을 살피다 소화를 돌아보고는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군요?”
“아, 아니어요.”
깜짝 놀란 소화는 손에 들고 있던 다완의 차가 너무 우려졌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찻물을 버린 뒤 다시 물을 따랐다. 우려진 차를 잔에 부어 가져가자 인혜는 말없이 앉아 무슨 생각인가에 빠져 있는 해경의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차를 반도 마시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미스터 정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어야 하겠군요. 이만 돌아가지요. 소화 양, 퇴근하고 만나요.”
손을 펴 해경에게 보이지 않도록 입가를 가린 인혜가 소화에게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소화가 채 인혜를 만류하기도 전 인혜가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해경은 인혜가 나간 것도 모르는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곧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인혜의 자리가 빈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해경이 낮은 한숨을 쉬더니 소화가 가져온 차를 천천히 마셨다. 쟁반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눈만 내놓고 그런 해경을 보고 있던 소화는 해경이 소화 양,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네, 선생님.”
“잠깐 함께 외출하지요.”
뜻밖의 말에 소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왜 함께 외출하자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해경의 눈치를 보고는 재빨리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겉옷을 내려 걸친 소화는 해경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해경이 택시를 잡아타고 소화와 함께 간 곳은 관철동의 우미정이었다. 극장의 간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소화가 영문을 몰라 해경을 쳐다보자, 해경은 말없이 표를 두 장 사서 소화를 데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극장 안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십 분쯤 지나자 한 젊은 변사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십 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수염도 나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의 변사였다. 변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우미관의 신(新) 변사 장태열입니다. 오늘은 제가 변사로서 여러분 앞에 서는 첫날이라 몹시 흥분되고 감격스러운 마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선보일 영화는 여러분께서도 몹시 좋아하시는 챠리 채푸린의 영화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부디 어여삐 보아 주시고 변사에게 많은, 많은 응원과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소화는 어둠 속에서 해경의 그린 듯한 옆모습을 살짝 훔쳐보았다. 해경이 자신을 왜 여기에 데려왔는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불이 완전히 꺼지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흑백의 영상 속에서 키가 작고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붙인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공연히 이상한 걸음걸이로 걷기도 하고, 거리의 조각상에 올라가 그 무릎 위에 눕는가 하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소화는 남자의 행동에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우스운 떠돌이 남자 찰리는 어느 날 꽃을 파는 눈 먼 소녀를 보게 되고,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 소녀가 가진 꽃을 샀다. 소녀는 찰리가 인정 많은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찰리는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일 뿐이었다. 눈이 먼 소녀는 점점 찰리를 의지하게 되고, 찰리는 그녀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 술에 취하면 자기를 친구처럼 대하는 백만장자에게 돈을 얻어 그 돈을 눈 먼 소녀의 수술비로 주어 버렸다. 술에서 깬 백만장자는 찰리를 도둑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 풀려난 찰리는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다시 거리를 떠돌다 이제는 눈을 뜨게 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이제 자신의 작은 가게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 그녀는 찰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그를 가엾게 여기고는 꽃과 동전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그 때, 소녀는 그 손의 촉감으로 바로 그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찰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찰리는 그녀가 이제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소화는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아 저도 모르게 훌쩍이며 가만히 두 사람을 보았다. 영화가 모두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질 때까지도 소화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말없이 앉아 있던 해경은 영상이 사라진 빈 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입니다. 어두운 시대지만 사람들은 서로에게 빛을 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소화는 그 말에 해경을 쳐다보았다. 해경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였다.
“채플린은 아직도 무성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날 이금복 씨의 집에서 했던 행동에 대해 소화 양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다시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 내가 했던 일은 어떤 점에서 옳지 않아요. 소화 양이 그 일로 내게 실망했다거나 나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 날 그 자리에 돌아간다면 역시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겁니다.”
“선생님.”
“이만 돌아갈까요?”
해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화는 머뭇거리다 해경의 뒤를 따랐다. 소화는 문득 금복과 찬용을 떠올렸다. 금복은 채플린의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고 했고, 찬용은 채플린의 영화를 보고 변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했다. 찬용은 아마도 평생 동안 금복의 진실에 대해서는 모르고 살 테지만 어쩌면 영화 속의 눈 먼 소녀처럼, 언젠가 다시 어떤 모습으로 금복을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아무도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진실을 깨닫게 될지도 몰랐다. 소화는 영화 속의 찰리와 소녀의 모습 위에 두 사람을 겹쳐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해경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아무런 말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생각한 소화는 해경을 불렀다.
“저어, 선생님.”
“네.”
해경이 잠시 걸음을 멈추며 소화를 돌아보았다.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활동사진 보여 주셔서 감사해요.”
해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화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부드러운 얼굴로 살짝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가 짧아져 이미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에 하나둘씩 와사등이 켜지고 있었다. 와사등의 빛이 해경의 위로 떨어져 발치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화는 해경의 등 뒤에서 한 걸음 떨어져 걸으며 그 그림자 위를 밟았다. 빛 뒤의 그림자. 모든 일이 결국 이러한 것일까. 소화는 찰리와 소녀가 마주보며 미소 짓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언제나 그처럼 행복하게 끝날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그런 마지막을 생각하며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해경이 앞을 보며 말했다.
“시간이 좀 이르지만 좋은 곳에서 저녁이라도 먹으면 어떨까요?”
해경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소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아, 네. 선생님.”
걸음을 멈춘 해경이 몸을 돌려 소화를 마주보았다. 잠시 소화를 내려다보던 해경이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는 다른 채플린 영화를 보여 주지요. 양식을 먹어 본 적 있습니까? 괜찮다면 본정 쪽의 레스토랑으로 가 볼까요?”
“레스토랑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소화의 얼굴에 해경이 쿡쿡 웃었다. 소화는 해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뇌어 보았다. 언젠가는 아무런 말 없이도 해경을 이해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소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해경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와사등의 빛이 거리에 떨어져 별빛처럼 알알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