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law RAW novel - Chapter (2227)
그 당시 뉴스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제법 큰 뉴스였던 모양인지, 신문 여기저기에 도배되다시피 했었으니까.
“겐조 하다로?”
전 여자 친구를 포함한 일가족 다섯 명을 죽인 남자.
그의 이름은 겐조 하다로. 겐조 무카이의 아들이었다.
“세입자라면 같은 건물에 사는 가족들 중 한 명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노형진은 기록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노형진은 그 겐조 하다로에 대해 조사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른 쪽을 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련 자료를 찾아냈다.
“죽었어요?”
겐조 무카이는 죽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찾아가라고 공지가 되어 있었다.
무려 12년 전 공지이니 당연히 지금 찾아서는 나올 리가 없다.
“설마 죽었을 줄은…….”
“그래서 안 나타난 거군요.”
아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진 채로 발견된 겐조 무카이.
그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공지였다.
“근데 왜 살아 있는 것으로 나온 거죠?”
이미 기록을 찾아봤는데, 그 기록에는 그가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찾기 위해 그 난리를 친 것이다.
“일본의 망할 행정 때문이죠.”
일본은 전형적인 관료적 행정이다.
그래서 책임질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의 집에서 그가 죽은 채로 발견되는 것과 그의 사망 처리는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정식으로 사망신고를 접수할 수 있는 건 아들이다.
하지만 아들은 감옥에 있다.
당연히 사망신고가 접수될 리가 없고 지역 공무원이 그의 사망 처리를 할 리가 없다.
한국처럼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인터넷에서 연계해서 사망이 뜨지도 못하고.
“우리는 모두 유령을 찾아 헤맨 셈이군요.”
박 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대동이라고 해도 설마 이런 식으로 사람이 증발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거기에다 12년 전 사건이니까.
“그러면 이 주식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런 경우는 아들인 겐조 하다로가 물려받는 거죠.”
“하지만 그놈은 감옥에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지요. 그래서 문제죠.”
노형진은 신문에 나와 있는 겐조 하다로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번 사건의 구명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버지가 죽었다고요?”
겐조 하다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죽었다니, 그건 생각도 못 했으니까.
“모르셨습니까?”
“몰랐습니다.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
그의 얼굴에는 비통함 대신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도무지 방금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잘 죽었네요, 그 노친네.”
“사이가 안 좋으셨나 봅니다?”
“안 좋았냐고요? 그 인간과 대화를 해 본 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
노형진은 대충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가 감옥에 간 지 12년이 되었다.
그런데 대화한 지 20년이 넘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 8년 전부터 서로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즉, 같은 집에 살기는 했지만 남남 이하의 관계로 존재했다는 걸 의미한다.
남남이라도 최소한 대화는 하니까 말이다.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가 뭔가요?”
“뭐 같습니까?”
그는 손을 들어서 피식 웃었다.
“그 인간, 재산이 얼마인지 아시죠?”
노형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재산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정작 그가 살던 집은 허름한 빌라였다.
그마저도 자기 집도 아니고 빌려 살던 집이었다.
“그 인간, 아니 그 새끼는 돈 말고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오로지 돈만 바라고 살았고 돈만 지켰으며, 돈을 제외한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도 그 새끼 때문이었죠.”
부인이 아픈데도 겐조 무카이는 검사를 막았다.
검사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확실하지도 않은데 돈을 비싸게 주고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우긴 것이다.
“큰 실수네요.”
검사라는 것은 뭔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는 거다.
뭔지 확실하게 알았다면 그때 들어가는 건 검사가 아니라 치료다.
“그 새끼 때문에 결국 어머니는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죠. 그 새끼, 내가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도 변호사를 선임해 주는 대신에 국선변호인을 찾으라던 새끼입니다. 국선변호인은 공짜인데 왜 비싼 돈을 주고 변호사를 사느냐고 하더군요.”
겐조는 구역질 난다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국선변호인은 아무래도 받는 돈이 일반 변호사보다 적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열심히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 웃긴 게 뭔지 압니까? 어머니랑 저랑 조건이 맞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검사만 했다면 그의 어머니는 백혈병으로 죽기 전에 최소한 기회는 몇 번 더 잡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혈병은 골수이식을 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니까.
하지만 겐조 무카이는 돈이 아까워서 검사조차 막았고, 그 결과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이후에 연 끊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누구도 겐조 무카이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고 접수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사망 처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을 때까지 돈, 돈, 돈. 그렇게 돈 가지고 지랄을 하더니.”
‘대충 알겠네.’
한국에서도 돈이 있어도 사치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일본은 그게 더 심하다.
물론 요즘은 덜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돈 쓰는 걸 죄악시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겐조 무카이가 그런 타입이었겠군.’
사실 주식을 초반에 투자한 게 아니라면, 보통은 거래하면서 주식의 가치를 늘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그가 산 주식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잡으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 타입.’
보통 사람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심한 사람들은 실제로 가족보다는 돈을 중시한다.
“뭐, 이제 와서 저보고 사망신고를 하라는 겁니까? 하고 싶지만 힘들겠네요.”
말하면서 겐조는 슬쩍 손을 들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두들겼다.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준 것이다.
“사망신고는 해야겠지요.”
노형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주식의 주주권을 넘겨받으시거든 저희 편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노형진의 말에 겐조 하다로는 눈을 찌푸렸다.
“아버지의 주식?”
“네. 제 아군이 필요하거든요.”
“웃기는군요.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까? 여기 이 창문 못 봤어요?”
겐조 하다로는 다시 한번 면회소 벽을 두들겼다.
“물론 바깥으로 나온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린 겁니다.”
순간 겐조 하다로는 침묵에 빠졌다.
바깥으로 나온다는 말.
아무리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라고 해도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노형진은 그런 그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아직도 억울합니까?”
“뭐요?
“스토킹과 살인. 그게 죄목이더군요.”
겐조 하다로의 얼굴이 사정없이 찡그러졌다.
“지금 누구 놀리십니까?”
“놀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이상하더군요. 진짜로 하신 거 맞습니까?”
“난…….”
겐조 하다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긴 한숨을 푹 쉬었다.
“난 그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아니, 집착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집착요?”
“내가 스토킹한 거, 부정은 안 합니다.”
그는 눈을 찌푸렸다.
“담배를 피우고 싶네요.”
“죄송합니다.”
노형진은 일본의 변호사가 아니다.
그래서 변호사 교섭이 아닌 일반 면회객으로 와서 투명한 창을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 당연히 담배 한 개비도 줄 수가 없다.
“그냥 그 멍청한 젊은 시절의 나를 욕하는 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는 아까와 다르게 우울하게 말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나 자신에 대한 혐오 역시 그 못지않은 듯했다.
“스토킹, 했습니다. 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진짜 못 할 짓을 한 겁니다.”
한 여자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기인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 한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했다.
“그런다고 채워질 것도 아니었고 그래 봤자 다른 희생자나 만드는 건데. 10년이 넘게 여기서 생각해 보니 알겠더군요.”
겐조 하다로의 목소리는 마치 늪처럼 깊숙하게 우울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혐오스러운 건, 그렇게 스토킹을 하고도 정작 살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고 의심스러운 사람도 모른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안 했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지금 상황이 과거에 그런 짓을 한 저에 대한 하늘의 벌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겐조 하다로는 그 부분에서 상당히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아주 과한 벌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요.”
“반성은 하시는군요.”
“반성요? 합니다. 아주 많이 반성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습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수인데 말이죠.”
그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째서 집행이 안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노형진은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억울한 마음이 더 크신 겁니까?”
“그렇게 계속 내 속을 긁어서 뭐 하자는 겁니까!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후회스럽다고! 그런데 왜 자꾸 건드립니까? 더 이상 내 죄책감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어차피 얼마 안 남은 인생입니다.”
아무리 주위에 맞추려 하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속을 긁으면 언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자 노형진의 옆에 있는 박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형진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노 변호사님, 설마 정말 이 사람이 무죄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무죄라고 생각한다고요?”
갑자기 겐조 하다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변호사라고 하셨습니까?”
“한국어를 아시나 보군요.”
분명 박 부장이 한국어로 말했는데 그는 그걸 알아듣고 도리어 캐묻고 있었다.
겐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까지는 자존심 때문에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변호사고, 또 자신을 무죄라고 생각한다는 소리에 실수로 한국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정말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풀려날 수 있다면 자존심이 중요하겠는가?
“젊어서 한국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를, 아니 제 무죄를 믿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노 변호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 부장은 당황했다.
물론 그의 경력상 한국어야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죄라니?
“저기, 설명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가 않습니다.”
박 부장의 말에 노형진은 지금 상황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일본은 사형 폐지국이 아닙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죠. 그런데 그는 12년째 감옥에 있습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죠.”
실제로 일가족 몰살처럼 잔혹한 범죄였다면 사형을 집행해도 벌써 집행했어야 한다.
“그런데 안 한다는 것. 그건 재판부도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네? 의심요?”
“네.”
“이해가 안 가는데요.”
한국에서는 범죄자가 그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를 풀어 준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살인자를 풀어 줬다면서 거품을 물며 화를 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가 대한민국 법의 대원칙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아니죠. 일본은 형법에 관해서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전근대적, 아니 봉건적이라고 욕을 먹는 나라입니다.”
확실하지 않아도 일단 감옥에 넣어 두고 본다는 게 일본 형법의 기본이다.
그렇다 보니 후진적이라고 엄청나게 욕을 먹는데,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그걸 고칠 생각이 없다.
“거기에다 일본의 삼심제도는 이상하거든요.”
“이상해요?”
“네. 재판부의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2심은 1심에서 가지고 온 증거에 기반하여 재판이 이루어진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죠.”
한국에서는 1심에서 이 증거에 대해 어떠한 해석을 붙였다 하더라도 1심과 2심을 별개로 취급한다.
즉, 2심에서 같은 증거를 놓고 1심과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자유심증주의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아니죠.”
1심에서 제출된 증거를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이미 답이 나왔다면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리고 1심을 통하지 않은 새로운 증거는 거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무리 확실한 증거라 하더라도요.”
“확실해도 안 된다고요?”
“네, 심지어 유전자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유전자요? 미친 거 아닙니까?”
박 부장은 질려 버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현대 과학수사의 꽃이 바로 유전자 검사다.
전 세계적으로 과학적 수사가 도입된 곳은 거의 100% 유전자를 인정한다.
“하지만 일본은 아니죠. 그래서 후진적이라는 겁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에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붙어 버린 거죠.”
그래서 문제가 된다.
삼심제도라는 것 자체가 혹시 모를 실수를 예방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2심부터 3심까지, 1심을 기반으로 깔고 판단한다.
“일본에서는 1심이 뒤집어지는 게 기적에 가깝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2심에서 뒤집어지면 뉴스를 타고 대서특필된다.
심지어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고 해도 만일 2심에서 뒤집어지면 일본의 검사는 책임지고 사직한다.
“좋게 말하면 책임지는 문화지만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협박인 거죠, 끼리끼리 붙어먹는. ‘이거 뒤집으면 나 때려치운다.’라는 식의.”
“그런 문화랑 겐조 하다로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박 부장은 겐조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일본의 법이 엿 같은 거랑 이 사람의 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문제입니다. 1심에서 사형이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상황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살인을 했다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거나, 아니면 물증이 있는데 살해할 이유가 없는 등 살인 사건과 관련해서 확신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사건 관련해서 확신이 없는 경우에 풀어 주는 대신에 대상을 무기한으로 잡아 둡니다. 재판부와 사법부가 사과를 하는 대신에 한 사람의 인생을 아예 망가트리는 걸로 은폐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겐조의 얼굴이 사정없이 찡그러졌다.
자신이 그 대상이었으니까.
“그걸 ‘엔자이’라고 합니다.”
“으음…….”
“일본에서 검사가 기소한 사건에 유죄 판결이 내려질 확률은 99.9%가 넘습니다.”
쉽게 말해서 검사가 기소하는 순간 감옥행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 사람인 게 다행입니다.”
“다행 아닙니다. 한국도 기소 시 유죄 확률이 99%가 넘습니다.”
“네?”
전혀 몰랐던 사실에 박 부장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검찰의 기소 시 처벌 비율은 낮지 않습니다. 미국도 비율이 97% 정도입니다.”
“그러면 비슷한 거 아닌가요?”
“비율은 비슷하지만 한국과 일본과는 전혀 다르죠. 미국 같은 경우는 아예 검사가 2심 항소를 못 하죠.”
검사의 역할은 딱 1심에서 끝나기에, 미국은 악착같이 자료를 밀어 넣고 1심에서 판결을 최대한 뽑아낸다.
그리고 피의자만 항소를 해서 재판을 받아 유무죄를 판단한다.
“하지만 한국은 아니죠.”
기소했다가 무죄를 받거나 2심이나 3심에서 뒤집어져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한국의 검사들.
거기에다 미국과 다르게 형량이 마음에 안 들면 더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항소를 할 수가 있다.
“물론 1심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을 내려서 항소를 할 수도 있다지만 그런 것치고는 검사들의 항소 비율은 너무 과하게 높지요. 대부분의 검사들이 항소를 법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괘씸죄처럼 생각하거든요.”
자기한테 굽실거리지 않거나 본인이 무죄라고 주장하면 100% 항소가 들어간다.
그걸 막으려면 검사에게 굽실거리거나 뇌물을 줘야 한다.
“그게 한국의 문제죠.”
“으음, 그러면 일본은 그 부분에서는 좀 자유롭겠군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법적인 구조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니까요. 새로운 증거가 인정되지 않으니 당연히 결과도 같지요. 뭐, 그건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죠.”
노형진은 머리를 흔들며 말을 정리했다.
한국 문제는 한국에서 해결하면 된다.
“중요한 건 겐조 씨를 풀어 주는 겁니다. 그래야 주식을 넘겨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그가 주식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가지고 있는 주식이 어디 건지 모르겠네요. 그 인간이 주식을 계속 사서 긁어모은 건 아는데,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돈을 빼앗으려고 그러느냐면서 지랄을 해 대서 물어본 적이 없거든요.”
“대동의 주식입니다.”
“대동요?”
깜짝 놀란 표정이 되는 겐조.
대동이라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마 시가로 따지면 못해도 50억 엔 이상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5…… 50억 엔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치가 나오자 겐조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50억 엔은 절대 작은 숫자가 아니다.
아니, 그의 인생 자체를 바꾸고도 남는 돈이다.
50억 엔이면 한국 돈으로 50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니까.
“물론 살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겐조 하다로의 아버지 겐조 무카이는 주식을 계속 긁어모아 쌓아 두기만 했다.
그리고 그사이 대동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인성은 나빴을지도 모르지만 투자에 대한 눈은 있었던 거죠. 아니면 운이 진짜 좋았든가.”
노형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말을 들어 보니 당연히 재산관리인이나 전담 변호사는 없었을 테고요.”
전담으로 붙으면 그때그때 돈을 주는 게 아니라 계속 돈을 지급해야 한다.
겐조 무카이의 성격이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결국 갑작스럽게 죽자 그 재산을 처리하거나 처분해 줄 사람이 없었던 거죠.”
“…….”
겐조 하다로는 왠지 묘한 표정이 되었다.
평생을 증오했던 아버지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물론 자신이 여기서 나간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런데 그 인간은 왜 죽은 겁니까? 저승사자도 안 데려갈 것 같았는데요.”
“그건…….”
노형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망 이유 자체가 웃겼으니까.
“동사입니다.”
“동사요?”
“네. 갑작스러운 한파가 몰아닥쳤죠.”
일본의 주택들, 특히 오래된 빌라들은 난방이 무척이나 취약한 편이다.
물론 일본이 본래 상당히 따뜻한 편에 속하기에 일반적으로는 난방에 신경 쓸 일이 없다.
하지만 세계 이상기후로 인해 그해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한파가 몰아닥쳤다.
“미친 새끼.”
겐조는 저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안 봐도 뻔하다. 돈을 아끼겠다고 난방도 제대로 안 돌리고 자다가 얼어 죽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정부에서는 그걸 보고 깊이 파고들지 않은 거죠.”
발견 당시에 겹겹이 입은 오래된 옷들과 이불을 보고 가난한 사람이 그냥 얼어 죽은 걸로 보고 자세한 조사 없이 신문에 시신을 찾아가라는 공지를 올리고 끝.
그게 다른 곳들이 삽질을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죽었다는 신고도 안 된 상황에서 그렇게 그냥 증발했던 거니까.
“재산이 많다고 해도, 문제는 저희가 겐조 씨를 꺼내는 겁니다.”
노형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그에게 위임장만 받아서 가도 하등 문제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런 혜택도 없이 겐조 씨가 저희에게 위임장을 주실 리가 없죠.”
겐조 하다로가 바보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이라고 해 봐야 뻔하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하니 겐조 씨는 억울한 것 같고요.”
“후우.”
긴 한숨을 쉬는 겐조 하다로.
이 상태로는 자신은 그냥 감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경우는 어쭙잖은 증거를 들이미는 건 소용없을 겁니다.”
새로운 유전적 정보? 새로운 증인? 새로운 증거?
다 의미가 없다.
일본 법원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미성년자 강간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무려 17년간 감옥에 있었는데, 새로운 유전자 증거가 나오고 피해자 가족들조차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이 있은 이후에 진짜 범인이 잡혔는데, 그 당시 재판부는 미안하긴 한데 내 잘못은 아니라고 일축한 게 끝이었고 그에 대한 어떠한 배상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일본인 종특인 것 같네.’
노형진은 왠지 한국 정부와 과거사 문제로 싸우는 일본의 버릇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사건을 뒤집기 위해서는 사건의 범인을 잡아야 할 겁니다.”
“사건의 범인을요?”
“네. 그러니 관련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그런데 믿을 만한 변호사가 혹시 있나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만한 변호사가 있었다면 자신이 이런 식으로 감옥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1심 변호사가 한 말은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뿐이었습니다.”
“흠…….”
노형진은 턱을 문질렀다.
“어쩌면 거기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네요.”
“네?”
“뭐, 별거 아닙니다. 사건에 대해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이거야말로 이이제이
겐조 하다로는 전 여자 친구를 비롯한 일가족 다섯 명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여자 친구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살해 방식은 그녀의 집에 들어가서 자고 있던 일가족을 한 명씩 칼로 찔러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칼이라는 거군요.”
칼로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그 칼에서 겐조 하다로의 지문과 유전자가 나왔다.
겐조 스스로도 그 칼이 자신이 쓰던 부엌칼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말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집에 있는 부엌칼이 살해 현장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군요.”
“네.”
박 부장은 그걸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증거는 명확하네요. 하지만 여러모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요?”
일단 사망한 피해자의 상황이 문제다.
가족은 그녀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다.
“그리고 그 집은 방이 한 개란 말이죠.”
일본은 땅은 좁은데 인구는 많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는 집이 좁은 편이다.
“하긴 일드랑은 좀 다르죠.”
“뭐,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일드에서 보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방 두세 개짜리 집에서 지내지만 실제로는 대기업 부장급이 아니면 30평대는 대부분 꿈도 못 꾸고, 가장 많은 평수가 18평형이다.
물론 실평수는 그보다 더 적고 말이다.
“한국 드라마도 보면 서민들이 2층짜리 집에서 살잖아요.”
“그러네요, 후후후.”
박 부장은 피식 웃으면서 사건 파일을 넘겼다.
“일단 마루에서 피해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이 자고 하나뿐인 방에서 어머니와 피해자가 자는 구조였는데 말이죠.”
즉,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한꺼번에 상대방을 제압할 수는 없다.
“법원에서는 이걸 잠자고 있을 때 무저항으로 죽인 증거라고 판단했군요.”
“이 판사는 살인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기는 한 걸까요?”
옆에서 사람을 죽이는데 모르고 잔다? 말도 안 된다.
물론 훈련받은 사람들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훈련받지 못한 사람이 한 번에 칼로 여러 사람을 저항 없이 죽이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겐조의 직업을 보면 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직업이고요.”
살인 사건에 쓰인 흉기는 일본의 가정에서 흔하게 쓰는 칼, 속칭 ‘사시미’라고 하는 긴 칼이었다.
“그리고 그 칼로 정확하게 갈비뼈 사이의 심장을 찔렀다.”
노형진은 사진을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보기 좋은 사진은 아니었다.
“이건 전문가의 솜씨네요.”
“어떻게 아시나요?”
“일반인들은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면 배를 노리지 갈비뼈를 노리지 않습니다. 보호받고 있어서 장기를 공격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갈비뼈라는 부분이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 부분은 외부의 공격에 사람의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당연히 그 강도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 연속 갈비뼈 사이를 정확하게 관통해서 찌른다는 게 가능할까요?”
일반인은 불가능하다.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부검 기록에 보면 갈비뼈에 상처가 없어요. 즉, 사람의 몸에 대해 잘 알거나 아니면 살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노형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음으로 파일을 넘겼다.
거기에는 불에 타다 만 집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살인 이후에 불을 질렀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잘 쓰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불을 지르는 것과 칼을 두고 나가는 건 전혀 다른 성향이군요.”
집에서 칼을 가지고 왔다는 것.
그건 무기를 준비했다는 거다. 당연히 준비성이 뛰어난 타입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하는 녀석이 칼을 두고 갈 리가 없죠.”
더군다나 불을 지른 것도 어설프다.
이불에 불을 붙였는데 소방서에서 출동해서 불을 껐다.
“만일 제대로 준비했다면 칼도 새로 사고 기름도 준비했을 겁니다.”
그런데 불은 이불에 지르고 칼은 싱크대 위에 올려 두고 갔다.
“대놓고 그에게 살인을 뒤집어씌우려고 한 흔적이 보이네요.”
“일본의 검사는 그런 걸 몰랐을까요?”
“글쎄요.”
모른 것일 수도 있고,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확실한 증거가 있고 상대방은 그걸 뒤집을 수가 없으니까.
“거기에다 겐조 하다로 씨가 그녀에게 매달린 것도 사실이니까.”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겐조는 족히 3개월은 그녀에게 연락하고 빌며 집착했다.
좋게 말해서 매달린 거지, 이 정도면 스토커로 처벌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 검사도 당연히 겐조 하다로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 테죠.”
스토커가 일가족을 참살하는 건 흔하게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그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편하고요.”
박 부장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만 조사하면 그의 스토킹 기록이 나올 테니까.
“거기에다 그는 좀 폐쇄적인 성격이고.”
부모와 사이가 안 좋고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주변에 나다니면서 증인이나 증거를 만드는 타입이 아니다.
따라서 검찰이 그때 어디 있었느냐고 물어봤을 때 집에 있었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테고.”
노형진은 턱을 문질렀다.
쉽게 말해서 겐조 하다로는 안 좋은 타이밍에 안 좋은 곳에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상황을 보면 누군가가 그의 칼을 훔쳐서 가족을 몰살하고 관련 증거를 조작했다는 편이 맞겠네요.”
“하지만 카메라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 그가 입던 옷을 입은 누군가가 들어가는 장면이 찍힌 영상이 있다.
그것도 증거로 제출되었고, 유죄를 밑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칼도 훔쳤는데 옷 한 벌 더 못 훔치겠습니까?”
상황상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는 그를 오래 감시해야 한다.
그랬다면 그가 평소 즐겨 입던 옷이 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상을 보면 얼굴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요.”
마스크를 쓰고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 사람이 겐조 하다로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겐조 하다로가 평소에 입던 옷차림이라는 것뿐.
“결정적으로 위치가 애매합니다.”
“애매하다고요?”
“집의 현관을 제대로 찍고 있더군요.”
“그래서요?”
“계획범죄를 저지르는 놈이라면 카메라 위치부터 확인할 겁니다.”
“아!”
만일 즉흥적으로 저지른 범죄라면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가서 칼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쓰던 칼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근처 아무 가게에 가도 그런 칼은 넘쳐 나니까.
“그리고 영상이 찍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죠.”
“어째서요?”
“뒷모습이 잘 찍혔잖습니까?”
“네, 그게 증거가 되었죠.”
“카메라가 있다는 걸 모르면 뒷모습만 찍힐 수가 없죠.”
“그렇군요. 그 부분은 생각 못 했겠네요.”
카메라가 시점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정되어 있는데 계속 움직이는 사람이 뒷모습만 찍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구도에서 보면 보통 사람은 옆모습이 한 번은 찍힐 수밖에 없는 구도거든요.”
그런데 문을 열 때도 뒤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로 움직였다.
“거기에다 가로등 문제도 있죠.”
“가로등 문제요?”
“네.”
노형진은 사진에 있는 가로등 하나를 가리켰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시간은 새벽 2시입니다. 그리고 밤에는 불이 별로 없죠. 이 시간에 열쇠로 문을 열려면 열쇠 구멍에 제대로 열쇠를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로등은 카메라 쪽에 있지요.”
“……!”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로등을 앞에 두고 열쇠 구멍을 맞출 것이다. 그래야 잘 보이니까.
“하지만 이 카메라에 있는 사람은 바로 뒤에 가로등을 두고 있지요.”
안 그래도 컴컴한 밤. 거기에다 가로등까지 등지고 있으면 당연히 더 어두워져서 구멍이 안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요.”
“카메라가 있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군요.”
“네.”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범죄자라면 얼굴이 드러나는 걸 최대한 막고 싶을 테니까.
“당장 마스크가 눈을 가리지는 못하니까요.”
눈매만 달라도 범인은 달라진다.
그러니 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즉, 범인은 겐조 하다로와 덩치가 비슷하다고 봐야 합니다.”
“으음…….”
“하지만 겐조와 다르게 아마도 근육질일 겁니다. 같은 옷을 입었으니 아마도 실전 근육 스타일일 테고요. 근육이 압축된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요?”
“실전 근육요?”
“네.”
노형진은 테이블 옆에 있는 볼펜을 쥐고 사람을 깔고 앉은 형태로 자세를 잡았다.
“범인은 사람을 죽이러 왔습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피해자들이 깨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칼을 가슴에 찔러 넣으면 비명을 지를 수도 있고 마지막 몸부림을 칠 수도 있죠.”
“으음…….”
“그걸 막기 위해서는 이렇게 피해자를 아래에 두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잡고 휘둘러서 찔러 넣어야 합니다.”
그 자세를 똑같이 하던 박 부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힘이 부족해지네요.”
“네.”
아무리 갈비뼈를 잘 피해 찔러 넣어도, 아무리 칼이 날카로워도 사람의 근육은 생각보다 질기다.
거기에다 여자라면 가슴 부위가 도드라지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다.
“그런데 다섯 명 다 한 번에 살해했죠. 힘이 빠지지도 않고요.”
양손으로 하면 모를까, 한 손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힘들다.
“결국 전문적인 사람이라는 거네요.”
“네. 그러니 재판부 입장에서는 사형을 집행하기가 애매할 겁니다.”
증거는 명백한데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 일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사건 중 하나였고 또 모든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는 뉴스였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한국에서도 가짜 가해자를 만들어 내는 게 흔하게 있는 일이었죠.”
하물며 전근대적이라고 욕먹는 일본의 형법 구조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진범을 잡느냐가 관건이네요.”
증거는 전혀 없다.
아무리 범인을 잡고 싶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면 추적이 불가능하다.
‘칼에도 흔적이 없겠지.’
칼에 다른 유전자가 없었다는 것 자체가 가해자가 장갑 같은 걸 끼고 있었다는 증거다.
즉, 노형진의 사이코메트리 능력도 소용이 없다는 거다.
“범인은 나중에 잡아야지요.”
“범인을 나중에 잡는다고요?”
“네. 중요한 건 범인이 아니라, 겐조 하다로 씨를 꺼내는 겁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요? 일본 정부에서는 절대 꺼내 주지 않을 텐데요.”
노형진 스스로가 말하지 않았던가?
유전자 검사도 인정하지 않고, 결코 풀어 주지 않는다고.
“그건 일반 사건을 기준으로 한 거고요.”
“일반 사건? 이번 사건은 뭐가 다른가요?”
“이번 사건이 다른 게 아니라 겐조 하다로가 가진 게 다르죠.”
“뭐가 다르다는 말씀이신지?”
박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겐조 하다로가 가진 것요.”
“주식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노형진은 피식 웃었다.
“우리와 겐조 하다로는 협상을 했죠. 하지만 그 협상이 진범을 잡는 거였나요?”
“네?”
“그런 조항이 있었나요?”
박 부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범인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자신들의 목적은 겐조 하다로를 감옥에서 꺼내는 것.
“하지만 우리가 꺼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겐조를 감옥에 집어넣은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법부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적인 사법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무죄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일본의 사법을 적으로 돌린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진실을 추적하는 걸 일본 정부는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일본 정부는 원래부터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이권만 추구하는 정부다.
오죽하면 ‘유사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맞습니다. 우리끼리 싸운다면 그렇지요.”
아무리 신동하가 나름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절대 일본의 사법부를 뒤집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다른 사람들요?”
“우리만 겐조 하다로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 말을 들은 박 부장의 눈이 빛났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이 겐조 하다로를 찾은 이유도, 그의 억울함 따위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요구할 게 있어서가 아닌가?
“그리고 그들에게 이 정보가 가면 어떻게 될까요?”
완벽한 승패의 카드를 쥔 사람이 드디어 추적되었다.
그리고 그가 억울하게 감옥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신동우와 신동성이 어떻게 해서든 힘쓰려고 하겠네요.”
겐조 하다로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
“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계약했으니 그들은 헛되이 힘을 쓰는 것뿐이죠.”
그렇다고 그들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힘이 없으면 그들이 대신 힘을 쓰게 만들면 됩니다, 후후후.”
* * *
신동하는 노형진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신동우에게 알려 줄까 고민했다.
“전처럼 찾아갈 수도 없을 텐데요.”
내부에 없다면 모를까, 이제 내부에 들어온 이상 아군이라기보다는 적. 최소한 중립 세력이다.
자신이 굳이 찾아가 정보를 알려 준다면 믿을 리가 없다.
설사 믿는다 해도, 꿍꿍이가 무엇인지 당연히 의심할 테고 말이다.
“전처럼 가서 정보를 주는 건 안 됩니다. 제일 좋은 건 자연스럽게 흘리는 겁니다.”
문제는 접점이 없이 그들이 스스로 찾아냈다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이거야 원. 보안을 철저하게 한 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네요.”
신동우나 신동성이 스파이를 보낼까 봐 조심했더니 필요할 때 역으로 정보를 뿌리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제가 겐조 하다로를 찾아갈까요? 분명 저를 감시하는 놈이 있을 텐데요.”
“그러면 더 의심할 겁니다. 특히나 우리에게 포섭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겠지요.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와 접점이 없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할 구조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그게 쉽지 않다.
하지만 노형진의 말에 신동하는 아차 싶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건 아니죠. 결국 기본 권리의 문제 아닙니까?”
“기본 권리?”
“아버지가 죽었으니 아들이 그걸 물려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
그가 감옥에 있다고 해서 그 재산에 관한 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걸 쓰지 못할 뿐이지.
“하지만 변호사를 사서 정식으로 상속 절차를 밟는 건 어려운 게 아니죠.”
“그걸 생각 못 했네요.”
“그리고 그 재산을 이용해서 자기 변호사를 사서 2심을 진행하면 됩니다. 일이 그쯤 되면 신동우와 신동성이 모를 수가 없지요.”
“그 변호사를 제 사람으로 넣어 두기만 하면 되는군요.”
“네, 후후후.”
그 변호사는 최선을 다해 싸워 주면서 동시에 신동우와 신동성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그들은 최대 주주인 겐조 하다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고 말이다.
“그 말은, 사실상 대동 그룹이 겐조 하다로를 꺼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죠.”
“재판부 하나가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압력은 아니겠군요.”
“확실하게 꺼낼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보도록 하지요.”
“있습니까?”
“제 친구 중에 있습니다.”
“혹시나 신동우나 신동성 쪽으로 넘어가지는 않겠습니까?”
“그 친구가요?”
신동하는 피식 웃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습니다. 대동에 취업했다가 잘렸거든요.”
“잘려요?”
“네. 부라쿠민 출신입니다.”
“아…….”
부라쿠민. 일본의 불가촉천민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다.
비공식적으로 기업들은 그 명단을 관리하면서 취업도 안 시켜 준다.
“제가 안 건 그 이후입니다.”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로펌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돈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대동에 들어갔지만, 나중에 부라쿠민 출신인 게 드러나면서 위에서 대놓고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만뒀다고 한다.
“대동이라면 이를 갑니다. 절대 안 넘어갑니다.”
“그러면 가격도 얼마 안 하겠군요.”
“네. 메이저 변호사 노릇은 못 하니까요.”
그냥 동네 사건이나 하면서 근근이 먹고살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도 전에 있던 동네에 부라쿠민 출신인 게 소문이 나서 더 안 좋은 곳으로 이사 왔다던가?
‘뭔 뜻인지 알겠군.’
대한민국도 변호사들이 모이는 곳은 법원 앞이다.
그런데 가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뜬금없이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진짜 서민과 함께하면서 일하려고 하는 사람, 아니면 세력 싸움에 밀려서 쫓겨난 사람.
‘아니지. 부라쿠민 출신이면 세력 싸움을 할 새도 없이 바로 추방되지.’
노형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대충 각이 나오네요.”
“각이 나오다니요?”
“겐조 하다로 씨는 돈이 없거든요.”
“네? 돈이 없다고요?”
“네.”
“하지만 아버지 재산은요? 주식이 50억 엔어치가 있는데요?”
“그게 문제입니다.”
겐조 하다로 자신이 가진 돈은 별로 없다.
주식은 아직 명의가 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손을 댈 수가 없다.
“유일하게 남은 돈이, 전에 살던 집을 빼면서 돌려받은 겁니다.”
“아!”
그러면 가난한 겐조 하다로가 가장 싼 변호사를 찾다가 만났다는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그 변호사가 재산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안 거죠.”
그리고 상속을 개시하는 시나리오.
그런 거라면 신동하가 드러날 일은 없다.
“과연 도구가 되어 버린 신동우와 신동성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후후후.”
“평생 남을 도구로 써 왔으니 자기들도 한번 당해 보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신동하는 눈에서 빛을 내뿜으면서 말했다.
* * *
“뭐라고?”
신동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겐조 무카이의 주식에 대해 상속 신청이 들어왔어?”
“네. 아들인 겐조 하다로가 상속을 하겠다고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법원을 통해서도 접수되었고요.”
“그러면 겐조 무카이가 죽은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이제야 튀어나와!”
“그게…….”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는 쉬웠다.
당연히 겐조 무카이가 죽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조사하자 노형진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윽…… 쓰으읍…….”
신동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일본의 황당한 행정절차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사람이 그걸 물려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면?”
“그가 누굴 선택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대동중공업의 주식은 그룹 차원에서 보면 절대 작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대동중공업이 모기업이기 때문에…….”
“젠장! 이거 신동성 그 새끼도 알고 있겠지?”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공식적인 자료이고, 그걸 자기 사람들만 독점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방법은?”
“가장 좋은 무기는 그를 꺼내 주는 겁니다.”
“꺼내 줘? 어디에서?”
“감옥입니다.”
“감옥? 감옥에 있어?”
“네, 사실은…….”
부하는 신동우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 설명을 들으면서 신동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교도소 문제까지.
“우리가 커버할 수 있겠어?”
“대충 조사해 보니 사건에 의혹이 많습니다. 잘하면 2심에서 뒤집을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 검사가 책임지고 검찰을 나가지만 말이다.
“혹시나 말이야, 그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영전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걸 뒤집으면 우리가 곤란해져.”
신동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12년 전 사건이다.
만일 그 사람이 위쪽으로 올라갔다면 섣불리 건드리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 당시 검사와 판사는 이미 퇴직해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2심에서 뒤집을 수 있겠군.”
“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판사들의 자존심이…….”
“지금 판사들 자존심 따위가 문제야?”
신동우는 ‘쾅’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붙잡아 와! 그가 신동성 그 새끼한테 넘어가면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
부하는 찔끔했다.
자신은 신동우의 직속 부하다.
만일 신동성이 승리하면 해직은 기본이고, 아마 감춰진 여러 가지 비밀을 캐면서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대기업 후계자의 최측근은, 깨끗한 사람은 절대로 갈 수가 없는 자리니까.
“알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겠습니다.”
부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