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출장 전 준비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카이루스는 잔에 담긴 포도주를 쭉 들이켠 다음 말했다.
“섭운 해례본이 있는 장소가 그 불법배틀기어를 모아두는 창고이기도 한 겁니까?”
“가능성이 굉장히 높죠.”
그래서 카이루스에게 순순히 섭운 해례본의 위치를 알려준 거다.
카이루스가 섭운 해례본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 세실리아 또한 이 도시의 통제를 벗어난 채 유통되는 불법배틀기어들의 위치도 알게 될 테니.
‘결국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군.’
시미드 캘로그의 일을 처리하고 난 다음 보수로 약속된 것이 섭운 해례본이었다.
그 말은, 카이루스가 별문제 없이 세실리아의 의뢰를 해결했더라도, 결국 또다시 장미정원을 위해 일하는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일 잘하는 사람의 골수까지 빨아내는 건 리더의 미덕인걸요.”
세실리아 또한 카이루스의 그런 생각을 짐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제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 혹시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해야 할 말은 끝냈으니, 네가 혹시 더 할 말이 없으면 이 자리를 파하겠다는 뜻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당장은 더 머무르면서 세실리아의 시간을 빼앗을 이유가 없다.
카이루스는 인사를 하고 세실리아의 저택을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복귀했다. 정기자격심사라고 하지만, 카이루스 입장에서는 그냥 멈추지 않고 싸움을 이어가야 했던 시간이다.
“이런 망할 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소파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일레나의 모습이었다.
소파 옆의 테이블에는 차갑게 식은 피자박스가 한 판 놓여있다.
“크헉. 음, 아… 너였구나.”
“너였구나 같은 소리 하네. 방 좀 치우면서 살지 그래?”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눈가를 비비며 옆에 놓인 피자박스 안에서 절망적으로 식은 피자 조각을 꺼내들었다.
“하나 먹을래? 아직 신선해.”
“이딴 게 제국 귀족이라니. 환장하겠네.”
심지어 그냥 제국 귀족도 아니고 명망 높은 캘로그 가문의 외동딸씩이나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는 꼴을 보면 술에 절어 인생을 막 사는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적엽기사단의 매력이지. 우리 단장님 봤잖아.”
카이루스는 혀를 차며 피자박스를 비롯한 쓰레기를 치우며 말했다.
“노라는?”
“목욕 중일 거야. 온수가 나온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루나시커는 기본적으로 냉수샤워를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몸을 긴장시키고 정신을 차리게 해주니까.
“귀족 같지도 않은 귀족이랑 회사의 권장사항을 무시하고 사는 루나시커 요원이라.”
거기에 더해 신상정보가 말소당한 페더윙까지. 이 사무실도 참 기깔나는 인간들이 몰려있다.
“자세 바로잡고 앉아. 할 일이 생겼으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그의 몸을 슥 훑었다.
“괜찮겠어?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데.”
산토스와 치고받은 몸의 상처는 아직 회복 중이다. 일레나의 판단에 따르면 카이루스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는 나아질 거다.”
일레나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데?”
“골디바 시의 주교 사재를 턴다.”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나 제국 기사단 소속인데. 제국의 주교를 털어먹자는 소리를 해도 되는 거야?”
지금 카이루스가 한 말이 전부라면, 일레나는 할 이유가 없다.
“제국 남부에 불법배틀기어를 유통하는 데 협조하는 녀석이야.”
“좋아.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뭐, 냉정하게 말하면 그 주교를 털어낸다 해도 불법배틀기어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식당이 망해서 빈자리가 나면 새로운 식당이 들어서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최소한 새 식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식당이 사라지는 건 사실이니까.
“주교는 사람들로부터 꽤나 존경받는 자리일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존경받으면 돈이 고프고, 돈이 많으면 존경이 고픈 법이지.”
카이루스와 일레나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목욕을 마친 노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이루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노라 한마디 했다.
“와, 오빠 걸레짝이 되었네.”
“말을 막 하는군. 왔으니까 너도 앉아서 설명 들어.”
“무슨 설명?”
“일.”
카이루스의 말에 노라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 착석했다. 장미정원에서 세실리아에게 쥐어터진 일도 있고, 공화국에서 내려온 의뢰도 있으니까.
물론 카이루스도 이전까지는 노라를 대하는 태도에 다소의 신중함이 있었다. 루나시커라면 카이루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세실리아의 만남 이후로는 확실해졌다.
‘인력과 자본을 갈아넣는 게 아닌 이상, 내 정체는 못 알아내.’
자신의 인생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당장 카이루스가 처한 상황에서는 굉장한 강점이니까.
‘섭운을 익히게 된다면 또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섭운을 사용하는 데 성공하면 카이루스가 페더윙의 생존자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증명되는 셈이다. 즉, 섭운을 익히더라도 그 사실을 드러내는 건….
들켜도 문제없을 정도로 충분히 강해진 다음이 될 것이다.
“골디바는 어떤 도시야?”
노라가 질문을 던졌다. 공화국 출신인 노라는 잘 알지 못하는 도시다. 제국의 주요한 도시는 루나시커로서 교육받았지만, 골디바는 그 정도로 중요한 곳이 아니니까.
“터는 괜찮은데 상황이 안 따라줘서 발전이 더딘 도시지.”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도 있고, 인구도 충분하고… 그래서 철도도 깔렸어.”
하지만 뭔가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계속 제국의 국토 개발 계획에서 소외되고 있는 도시다.
“어쨌든, 지금 진행해야 할 건 갈리아 메토스에 대한 조사겠네.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있어?”
일레나가 카이루스에게 질문했다.
“이 도시에 믿고 맡길 만한 녀석이 있겠냐.”
돈 많이 주고 장미정원에 보증 서달라고 하면서 사람을 고용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고용할 수 있는 인간들 중에 그나마 카이루스가 함께 일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봄달래.’
실력 있는 건축사이고, 함께 일해본 결과 그 능력은 카이루스도 인정할 정도의 수준이다.
물론 상황이 까다로워지자 그대로 일을 포기해버린 전적이 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카이루스가 장미정원의 뒤통수를 후려깐 상황에서 계속 일을 함께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니까. 이제는 카이루스도 장미정원의 추살령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실력이 보증된 사람과 다시 한번 같이 일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뭐야, 어디가.”
일레나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말했다.
“외출. 이번 일에 동참시키고 싶은 놈이 하나 있거든.”
일레나와 노라에게 목적과 행선지를 말한 다음, 카이루스는 코트를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이미 알고 있는 봄달래의 아지트였다.
“….”
갑자기 찾아온 카이루스를 보고, 봄달래는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봄달래가 이전에 내렸던 판단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못된 선택이었다. 카이루스는 장미정원의 분노를 피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끝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
봄달래 나름대로 고민 끝에 카이루스에게 건넨 한마디였다.
“헤어진 애인이나 할 법한 대사를 하고 있네. 그래 뭐, 댁이 중간에 손을 떼버리는 바람에 내가 많이 힘들긴 했지.”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살짝 움찔했다. 괜시리 그의 성질을 건드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젠장맞을 나도….’
봄달래 또한 나름대로 이런저런 공사에 건축사로 참가하면서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봄달래가 건축사로서의 명성과 커리어를 쌓는 사이, 카이루스는 고속질주를 거듭하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이름값을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카이루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봄달래를 바라봤다.
“지난 일은 잊자고. 어찌 되었건 나도 이렇게 살아있고, 댁도 무사하잖아. 중요한 건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나갈 관계 아니겠어?”
봄달래가 무슨 반박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관계라는 말을 해서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알 수 있을까?”
“내가 너랑 만나서 뭘 하겠어. 데이트라도 할까?”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카이루스는 행동하는 시공업자고, 봄달래는 시공업자를 위해 설계도를 그리는 건축사다.
이 두 직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만났다면 서로 나눌 이야기는 정해져 있다.
“까놓고 말하자면, 나에게 선택권이 없잖아.”
“그것도 정답.”
카이루스는 봄달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현 상황에서는 카이루스가 예전 일을 들먹이며 봄달래 멱을 따버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한다.
이제 카이루스는 그래도 되는 수준의 입지와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나는 협박과 억압으로 형성된 관계보다 이익과 신용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훨씬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는 사람이거든.”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가 심호흡을 했다.
“거절해도 된다는 거냐?”
“네가 거절하면 이익과 신용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우리 밝은 관계가, 협박과 억압으로 얼룩진 어두운 관계로 변질되는 거지.”
현 상황에서, 봄달래에게 선택권은 없다. 이미 카이루스는 봄달래의 뜻 따위는 무시해도 될 정도의 거물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카이루스 또한 현재 자신의 입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범죄자들 사이에서 입지가 높아졌다는 게 어떤 뜻인지, 교화소 생활로 잔뼈가 굵은 카이루스가 모를 리 없다.
“하면 될 거 아니야.”
봄달래는 이번 일에 참가하게 되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도 썩 나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말 슬픈 사실은, 아직 봄달래는 카이루스의 의뢰 내용이 뭔지 듣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대답을 들으니 좋군. 그럼, 이제 의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카이루스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함께 일할 동료가 두 명 더 있거든. 녀석들도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 뭐냐. 얼굴은 말이지.”
카이루스가 봄달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알아. 그러니 가면 써. 여기가 아니라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자고.”
봄달래 입장에서는 카이루스가 그 정도 배려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면을 비롯한 위장을 마친 봄달래와 함께, 카이루스는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우와. 뭐야 이 중년 아저씨는?”
곧바로 반응을 보인 것은 노라였다. 루나시커인 그녀도 나름대로 신경 써서 신원을 파악해야 할 정도로 봄달래는 열심히 위장한 상태였고, 그 점이 오히려 노라의 호기심을 끈 거다.
“뭐, 뭐야 이 어린애는.”
봄달래 입장에서도, 아직 술도 못 마실 나이로 보이는 소녀가 자신을 뜯어보는 것 같은 모습으로 살피는 현 상황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소개하지. 루나시커 요원인 노라 갈라테아다.”
“… 뭐?”
봄달래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얼탱이가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재 이런저런 각자의 사정이 겹쳐 내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루나시커가? 그래도 사규에 어긋나지 않는 거야?!”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반응이 카이루스와 노라에게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후, 카이루스는 일레나와 노라, 그리고 봄달래를 서로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테이블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