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49
49화 저택털기 (2)
* * *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카이루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정원이 내 몸을 제대로 가려주지는 못할 거야.’
겨울이니 대부분의 식물들이 가지만 앙상하다.
‘눈이 쌓여있으니 발소리는 잘 안 날 테고.’
일레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며 확인했다. 겨울의 정원이라는 건 죽은 나무와 풀만 가득하기에, 차라리 내린 눈을 치우지 않고 어느 정도 쌓여있게 두는 편이 더 운치가 있다.
그래서 캘로그 저택도 사람이 거니는 곳을 제외하면 쌓인 눈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발자국이 남기는 하겠지만… 카이루스는 지금 손님용으로 제공된 슬리퍼를 신고 있다.
‘이 족적으로 사람을 특정할 수는 없지.’
지금 술과 약에 취해 기절한 수훈기사를 제외한 나머지들이라면, 슬리퍼를 신고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불어라.”
카이루스는 한 손으로 색유리의 칼자루를 손에 쥔 채 배틀기어의 출력을 끌어올려 제풍을 사용했다.
정원을 향해 희미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흐르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건드리고 지나가자 녹지 못하고 가지에 걸려있던 잔설이 벚꽃처럼 흩날린다.
그리고, 가지와 바람이 서로 스치고 비벼지는 스산한 소리가 정원의 적막을 서서히 채워나간다.
카이루스는 자세를 낮추고 기척을 죽인 다음 걸음을 옮겼다.
도착해야 하는 장소는 저택 지하다.
‘위장을 할 수는 없어.’
어차피 지하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죄다 귀족이 아니라 하인들이다.
카이루스가 이제 와서 갑자기 하인 연기를 하는 게 싫어져서 위장을 못 한다는 게 아니다.
‘건틀릿이랑 배틀기어는 어쩔 건데.’
둘 다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들이지만 하인으로 위장하는 순간 대놓고 정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물건들이기도 하다.
“지상은 네 개의 건물과 중앙의 정원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지하는 정원까지 포함해서 전부 통로로 이어져 있다. 어디를 통해 들어가건 지하에 도착한다면, 통로를 활용해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처음부터 저택 지하는 하인이나 경비를 비롯한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모시는 분이나 초대된 손님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수 있으니까. 자고로 아랫것들이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윗사람들이 보면 안 되는 법이다.
“정원을 통해서도 지하로 진입할 수 있었지.”
정원 창고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캘로그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 창고를 통해 지하와 정원을 오가며,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사이 정원을 정돈하고 청소한다.
그리고 지금은 카이루스가 이용하게 될 통로이기도 하다.
‘지금 정원 창고를 이용할 이유는 없으니까.’
겨울은 그나마 정원에 손길이 덜 가는 계절이다. 정원 창고를 자주 쓸 일도 없고, 심지어 손님이 잔뜩 초대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정원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거다.
덕분에, 카이루스는 별다른 방해 없이 창고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렴, 왜 열려 있겠냐.”
하지만 창고 문은 잠겨 있었다. 쓰지 않으면 닫아둔다. 당연한 일이기에 카이루스는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살핀 다음 순간적으로 색유리를 뽑아 휘둘렀을 뿐이다.
희미하게 빛이 한 번 반짝였다.
잘려나가는 소리조차도 거의 없이, 문을 봉인하고 있던 금속 빗장이 잘려나간다.
‘배틀기어가 좋으니까.’
좋은 배틀기어와,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실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카이루스는 열린 창고를 통해 지하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
이제부터가 진짜다. 정원과 정원 창고는 지금은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여기부터는 아니지.’
저택의 사용인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조심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들킨다.
“뭐야.”
지하로 내려온 카이루스는 사용인들이 엄청나게 다급한 표정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서둘러 이 자식들아!”
하녀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자신의 지휘를 받는 하녀들을 향해 연신 불호령을 토해낸다.
제리 캘로그와 동행한 비비안 시트리가 파티장에서 쓰러졌다.
빠르게 조치를 취하고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면 난리가 날 거다.
“안주인님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
지금 제리가 보이는 태도라면 비비안 시트리가 캘로그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결국, 가주의 아내라는 자리는 사랑으로 쟁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마 가장 선호하는 첩의 자리를 가지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저택 사용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자가 되는 데에는 충분하다.
“먹은 음식에 이상 없어?”
“네, 문제는 없습니다. 갑자기 고열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하녀장은 빠르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베테랑에 어울리는 태도로 비비안이 자신도 모르는 음식 알레르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체크해 나갔다.
‘뭐어, 그 여자의 사정은 그 여자의 사정이고.’
이렇게 정신들이 없어졌으니, 카이루스 입장에서는 침투가 더 쉬워졌다. 다들 혼이 나갈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중이다.
워낙 지하가 부산스럽다 보니, 시야의 사각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
이미 들것에 실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비비안은 침대에 누워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비비안, 괜찮아?”
제리 캘로그가 비비안의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다. 이 녀석을 빨리 치워버리지 않으면 비비안이 활동할 수 없다.
작게 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비비안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제리, 조금 쉬고 싶어요.”
동시에, 갑작스럽게 불려온 의사가 입을 열었다.
“환자에게 안정이 필요합니다.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리는 그 말에 머뭇거렸다. 사실, 의사의 소견에 따르면 비비안의 증상은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다.
‘첩 후보들이 흔히 하는 짓거리지.’
아픈 척을 연기하며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달라고 한 다음, 그대로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여 밤을 보내는 거다.
오랜 기간 캘로그 가문의 주치의로 있어왔던 의사 입장에서는 비비안의 행동 자체가 곱게 보일 리 없다.
만약 비비안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아프다고 해도, 저런 증세라면 전염될 수 있는 종류의 병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상황이건, 제리 도련님은 여기에 머무르게 둘 수 없다.’
자신이 섬기는 가문을 생각하는 훌륭한 태도였다.
‘자기 행동이 시미드 캘로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물론 비비안도 의사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저 혼자 있어야 하는 건가요?”
비비안이 눈을 크게 뜨고 약간 두려운 표정으로 방 안을 두리번거린다.
물론 그녀도 제리가 당장 꺼져버리면 바로 일을 할 수 있으니 굉장히 좋다.
하지만, 의사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여 제리에게 가라고 하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다.
‘곁에 있어달라고 애원하는데 의사가 강제로 떼어놓는 식으로 이어가는 편이 좋아.’
그래야 추후 의심에서 벗어나기 용이하다. 비비안은 거기까지 안배를 해두면서 제리가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색을 비쳤다.
“비비안, 네가 원한다면….”
“도련님, 환자에게 필요한 조치는 의사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시트라 님을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빨리 회복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제리가 뭔가 더 말을 이어가기 전에 의사가 선수를 쳤다.
“하지만….”
비비안이 더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 필요한 일이니 의사가 저리 말하는 거겠지요.”
비비안이 수긍하자, 제리가 의사를 바라봤다.
“안정은 얼마나 취해야 하는가?”
“하루 정도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의사의 말에 제리가 비비안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고 하네. 내일 오전 중으로 다시 찾아올게.”
제리의 말에 비비안이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때가 되면 나는 없겠지만.’
가주를 죽이고 필요한 서류를 확보하고 나면 이 저택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다.
그때 가서 속은 걸 깨닫는다고 해도 제리가 뭘 어쩌겠는가. 애초에 비비안 시트리라는 이름도 가명인데.
죽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하면서 복수를 다짐해봐도, 흔적이 남지 않은 허깨비를 향해 불태우는 분노일 뿐이다.
‘오늘 파티는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분위기였으니까.’
거기에 더해 사람이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파티가 계속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어차피 전야제니까, 오늘은 이즈음 해두고 내일 파티를 이어 갈 것이다.
즉, 시미드 캘로그 또한 자신의 침실로 갔다는 뜻이다.
‘이 자식만 돌아가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어.
비비안이 제리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사이 카이루스도 청사진을 통해 발견한 수상한 장소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하. 이거 생각보다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겠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카이루스는 복면을 잠깐 내리고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난리가 난 상황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돌파하지 못했을 거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누가 불평이라도 한 건가.’
사용인들이 모조리 음식과 음료를 검사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여튼, 다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덕분에 카이루스는 무사히 문제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이 벽이다. 카이루스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벽을 두들겼다.
“역시 비었어.”
청사진에 따르면 기껏해봤자 2―3평 정도 크기의 공간이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데에 꼭 넓은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카이루스는 벽을 몇 번 더 두들겨 본 다음, 색유리를 뽑아 휘둘렀다. 순간적인 반짝임과 함께, 칼날이 가벽을 소리 없이 잘라내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다.
설계도에 따르면 이 벽 너머의 공간은 그대로 쭉 시미드 캘로그의 침실까지 연결되어 있다. 필요한 물건을 확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탈출경로도 확보된다.
서류를 챙긴 다음, 쭉 시미드 캘로그의 침실까지 올라가면 되니까.
‘파티가 끝나려면 아직 1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할 테니.’
카이루스는 파티 일정을 숙지한 상태다. 그렇기에 카이루스는 시미드 캘로그의 침실이 비어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비안 시트리가 쓰러지면서 오늘 진행 중이던 전야제는 일찍 마무리되었다.
카이루스는 시미드 캘로그의 침실이 비어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시미드 캘로그가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카이루스는 확보한 서류를 빠르게 훑어내려간다.
‘만약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내용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긴 하니까.
“어디 열심히 빼돌린 세금을 어디에 썼는지 한번 확인할까.”
서류를 살피던 카이루스의 표정은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시큰둥했지만, 서류를 읽을수록 점점 더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다 읽었을 때에는 돌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시미드 캘로그라는 양반과 깊고 진중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는데.”
이 서류에 적힌 것들이 사실이라면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
카이루스는 서류를 챙긴 다음, 숨겨져 있던 공간 벽을 살폈다.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걸 타고 올라가면 곧바로 시미드 캘로그의 침실로 향한다.
카이루스는 사다리를 손으로 붙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