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Shrine RAW novel - Chapter 927
그냥 지방관 정도라면 주목에게 제출하면 되겠지만 합비성주라는 위치는 그냥 사직서 던져 놓는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조조에게 사직서를 냈을 때 반려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율이 끝나야 이 사직서가 통과하는 거다.
난 손에 들린 사직서를 보며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그가 은퇴하려는 모습을 보니 속이 쓰렸다.
“성주님.”
“말리지 마라.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니까.”
정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진 군수야 진가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쉽게 은퇴할 수는 없지만. 나야 뭐… 그저 바라보던 것이 전하였으니까 말이다. 이정도면 할만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대로 가시는 것은 좀 아쉽잖습니까. 정점에 한번 올라보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원하신다면 태공의 자리라도…”
“그랬지.”
예전에 정욱은 야심이 넘쳤고 스스로를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렇기에 명령을 어기고 유표와의 싸움에 지원군을 보내는 일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뭔가 달랐다.
굉장히 초탈한 모습이다.
“합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더구나.”
“뭐가요?”
“그렇게까지 아둥바둥 위로 올라가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싶더구나. 그리고… 이런 말도 있잖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나 같은 늙은이들이 위에 계속 남아봤자 바뀌는 것은 별로 없어.”
“아직 정정하시잖습니까.”
정욱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더구나. 그… 합비성이 점점 커져가고, 힘없이 살아가던 유랑민들이 정착하여 한마음이 되어 오와 싸우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이미 내가 늙었어. 그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이들은 좀 더 젊고, 그리고 패기넘치는 이들이 필요하지.”
부드럽게 말한 후 정욱은 나를 보았다.
“마침 이번에 좌장군이 왕위에 오르시게 되며 친분이 있는 몇몇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늙은 것들은 늙은이들끼리 놀면서 살자고.”
“하지만 정 성주께서 가시면 저희는 어쩝니까.”
“잘 할 거잖냐. 차기 승상부주.”
실실 웃으며 정욱이 내 어깨를 가볍게 쳐 주었다.
“옛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지? 그때 너는 수백의 도적들과 함께 움직였었다. 지금이야 흑귀대 녀석들이 사족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정욱과의 첫 만남.
양양에서 흑귀대를 이끌고 동아현으로 갈 때 만났었다.
그때는 흑귀대고 뭐고가 아니었다.
감녕 휘하의 도적에 건달 나부랭이들이었지.
하지만 모두 젊었고 패기넘쳤다.
그렇기에 근처에 있는 도적들을 쓸어가며 올라갔고 정욱은 우리를 이용해서 자신이 다스리던 현의 도적들을 쳐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난 피식 웃었다.
“아~ 그때. 솔직히 속으로 욕했습니다. 길 내어주는 것이 뭐 힘들다고.”
“하하하… 나는 뭐 웃으며 넘어갔는 줄 알았냐? 만약 그때 통행증이 없었으면 목숨을 걸고 토벌하려고 했어. 이 녀석아. 그때 피도 안마른 꼬맹이가 당돌하게 덤벼드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데.”
껄껄 웃은 정욱은 쓰게 웃었다.
“그때로부터 거의 이십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구나. 많이 지났어. 많이 했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 해야 할 일. 많은 것들을 해왔다.”
“정 성주님.”
“이제 놓을 때가 되었어. 그리고 넘길 때가 되었지. 유하야. 나를 놔줬으면 좋겠구나.”
“하아…”
정욱은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다.
능력도 있고, 또 가문도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은퇴를 하겠다고 대놓고 말하니 속이 쓰렸다.
좀 더 일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사람을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네 성격상 후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지? 안그래도 장 교위와 악 교위, 그리고 내 아들이 합비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음달 쯔음이나 해서 그들을 올려보낼테니 한번 확인해보거라.”
“…예.”
“합비성주의 은퇴는 승상부에서 관리하는 일이지. 나는 이 길로 곧장 승상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러니…”
정욱은 내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
“부디 빠른 처리 부탁한다.”
“하아…”
나는 결국 정욱을 막지 못했다.
업무를 마치고 양 사형과 교대를 한 후 집에 돌아갔다.
요새는 어째 매일 이런 새벽에 들어가는 것 같군.
다들 자고 있을테니 깨우기도 미안하다.
방에 들어가 혼자 차를 홀짝이고 있을 때 아버지가 들어왔다.
“무슨 일로 이 늦은시간까지 일하고 온 것이냐?”
“아버지.”
“정 성주가 왔었지?”
아버지는 자리에 앉은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도 권하더구나. 은퇴할 생각이 없냐고. 나야 진가를 위해서라도 쉽게 은퇴를 결정할 수 없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먹은 듯 하더구나.”
정욱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
아버지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나도 은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 하시죠?”
“녀석아. 전에도 말했지만 가문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야. 성이를 위한 것이고, 또 너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내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는거다.”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차를 한모금 마셨다.
“다음달 초 쯤에 산양군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때 성이와 모가, 모현을 데리고 가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순선도 데리고 가마.”
“예? 왜요?”
이건 또 예상치 못한 발언인데?
내가 의아해하자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아까 승상이 왔었다. 선이가 이번 일에 의욕을 크게 내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 신 장비를 개발하는 것 때문에?”
“그래. 뭐. 순선을 생각한다면 지금도 차분히 준비를 하는 것이 낫겠지. 어차피 그 녀석도 관직에 올라야 할 테니까.”
아버지는 천천히 말한 후 천장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산양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왜 걱정을 안합니까…”
“왜냐하면 지금의 산양군은 괜찮기 때문이지. 당장 등애, 조식, 낙통도 있는데다가 한 현령도 일을 아주 잘해. 거기에 순선이 연구소를 위해서 온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산양군에서 일하게 될거다. 이거 참. 젊은 이들만 있으니 나나 한 현령 같은 사람은 금방 퇴물이 되겠군.”
“으음…”
“성이야 태학에 들어가게되겠지만 그래도 산양군과 태학을 오가면서 생활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는 이곳에서 일을 하거라.”
진지한 시선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너에게 지침이 되고, 또 너를 많이 이끌어 준 이들이 은퇴하고 있다. 순욱, 정욱… 그들이 시작이지만 이제 하나 둘 씩 은퇴를 말하겠지.”
아버지는 탁자를 천천히 쓸어만졌다.
살짝 파인 부분을 톡톡 치며 빙긋 웃었다.
“장강의 윗물결이 아랫물을 밀어낸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고여 있는 물은 쉽게 빠지지 않는 법이다. 너는 이 고여있는 물처럼 남아 있어야 한다.”
“아버지.”
“물은 고이면 썩지만 그 고인물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만큼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 것이다. 그렇지 않니?”
신뢰가 듬뿍 담겨 있는 아버지의 조언에 난 한숨을 쉬었다.
그런 나를 느긋하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거라. 내일도 바쁘게 일해야 하니 말이다.”
“예. 쉬세요.”
아버지가 나가자 난 침상에 누웠다.
고인물이라.
확실히 나도 위국에서는 고인물 수준에 들어가는 편이지.
조조가 연주목이 되기 전부터 그와 손발을 맞췄다.
본의가 아니기는 했지만 그와 연을 맺은지도 벌써 이십년이나 지났다.
그정도면 고인물을 넘어서 썩은 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후우.”
그렇다면 썩은물은 썩은물 답게 움직여 볼까?
양 사형과 함께 한달동안 죽어라 일했다.
정말 미친 듯이.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갈 정도로 일을 해가며 겨우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산양군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가시는거에요?”
“그래. 가야지.”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제 나도 몇년만 있으면 마흔이다.
그런만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사람도 몇 없었다.
“신년제라도 좀 하시고 가시지…”
이제 곧 연초다.
조비의 죽음 때문에 신년제를 하니 마니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럴 때 일 수록 슬픔을 잊게 신년제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입장에서야 나쁠 것이 없었다.
이번 신년제때 조앙을 내세우며 위국이 안전하고, 또 조비의 죽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니까.
조조도 허락을 했으니 신년제의 준비가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달만 있으면 신년제인데 여기서 신년제도 즐기고 갔으면 싶구만.
“산양군에서도 계속 연락이 오고 있다. 그곳에서도 신년제를 준비해야 하니 말이다. 다들 내가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어쩌겠냐.”
아버지는 웃으며 천천히 내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아쉽다.
“그래. 영아. 유하를 잘 부탁한다.”
“예. 아버님…”
눈물을 글썽거리며 영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는 영이를 가볍게 보듬아 준 후 속삭였다.
“저 녀석이 사고치면 내게 바로 오거라. 회초리로 때려줄라니까.”
“후후후. 알겠어요. 아버님.”
“그래. 청이도 이리 오거라.”
“예!”
아버지보다 키가 큰 청이다.
어째 아버지가 청이에게 안겨 있는 것 같군.
아버지는 청이를 한번 안아 준 후 손을 잡았다.
“네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다.”
“예…?”
“괜찮다. 난 율이도 아주 좋아하니까. 그리고 성이나 석이, 유 역시 네 아들이지 않느냐.”
“아버님…”
결국 청이가 눈물을 흘렸다.
완이와 희가 사내아이를 낳은 것을 마음에 걸려하던 청이다.
청이도 이제 마흔에 가까워졌다.
물론 외모는 아직도 삼십대 초반조차 되지 못한 것처럼 아름답다.
꾸준히 오금희를 하고 훈련을 한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이제 아이를 낳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만큼 청이가 가끔씩 성이나 유, 석이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버지가 등을 토닥거리자 청이는 훌쩍거렸다.
그녀를 달래 준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율이가 아주 귀엽고, 또 성격이 좋으니 무슨 걱정이냐. 부디 성이와 석이, 유를 네 아들이다 생각하고 잘 보살펴다오. 그리고 유하 역시 나이만 먹었지 속은 애나 다름없단다. 이미 네가 키우는 아들이 넷이나 되지 않느냐.”
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내 얘기가 왜 나오지?
아버지의 농담에 청이가 베시시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래. 완아. 너도 이리 오려무나.”
“네!”
밝게 웃으며 아버지에게 다가간 완이는 아버지가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아버님! 많이 그리울 거에요!”
“녀석. 늘 밝은 성격 덕분에 집안이 항상 화목한 것이 좋구나. 네가 있어서 진가에 언제나 웃음이 생긴 것 같다.”
“헤헤~”
“부디 진가에 언제나 웃음이 있게 만들어다오.”
“예…”
“울지 말고.”
“네!”
눈물을 그렁그렁 맺고 완이가 밝게 답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아버지는 말없이 팔을 벌렸다.
머뭇거리던 희가 아버지에게 안긴다.
“희야.”
“예…”
“네가 나를 무척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버…님.”
“재가했다는 것은 흠이 아니다. 너는 이미 진가의 여인이며, 내 소중한 며느리다. 그러니 그리 생각하지 말아다오. 나를 네 아버지라 생각하고 편히 대해다오.”
“아버님…”
재가를 했다는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일까?
희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를 꽉 안아 준 아버지는 희의 눈물을 닦았다.
“영이나 청이, 완이는 성격이 밝지만 조금 막나가는 구석이 있단다. 하지만 너는 늘 차분하게 가문을 다스릴 능력이 있지. 너무 자중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예…”
“그러니 진가가 항상 예를 갖추고, 법에 맞는 행동을 하게 네가 보살펴다오. 나는 너를 믿고 있단다.”
“아버님… 흑흑…”
대단하다.
어떻게 말 몇마디만으로 네 여인을 울게 만들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부인들이 훌쩍거리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율이를 안아들었다.
“우리 율이.”
“할아버지 가면 싫어~! 으엥…”
유독 아버지를 잘 따르던 율이다.
애교도 많고, 또 장난도 잘 쳤지만 늘 아버지의 옆에서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율이다.
그런 율이의 이마에 입맞추며 아버지는 허둥거렸다.
“어이구. 울지 마라. 율아. 너도 이제 진가의 여인이란다.”
“할아버지… 히잉… 가지마아…”
“하하하. 우리 율이가 이렇게 잡으면 할아버지가 어찌 가겠니. 어제 할아버지랑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지?”
“우웅…”
율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꼬물거렸다.
천천히 떨어진 율이는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애써 웃었다.
“할아버지… 잘 가요… 아프지 말고… 밥 잘 먹어야되요…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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