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4
그 부분을 끝까지 고민했으나, 결국 답을 내지 못한 채 거사를 진행케 되었다. 어차피, 시간을 끌수록 승리는 희박해질 것이었기에.
‘그렇다면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그것조차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세 사람을 감싼 병력은 아무리 잘 쳐줘도 30에서 40여명. 이 병력 또한 귀중한 숫자이기는 하나, 그들을 쫓아오는 수백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
‘그렇다면···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고뇌하던 한명회의 눈에 갑자기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모자를 기묘할 정도로 푹 눌러쓴··· 색목인들이··· 어?
“노동계급이여, 단결하라!”
“소비에트 연방 만세! 공산주의 만세!”
“트로츠키 만세, 만세, 만만세!”
“레닌재림 만노앙복!”
갑자기 굳게 잠겨 있던 무슨 영감님네, 무슨 대감님네의 대문들을 박차고 하인들이 수십 명씩 뛰쳐나온다.
쇠스랑이니, 갈퀴니 하는 것들을 손마다 든 채로.
“이···이게 뭔가?”
“한명회 선생. 누가 인민을 의식화하려는데 다짜고짜 노래부터 부르며 다니겠습니까?”
르네 에티앙블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깔아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명회는 시간을 끄는 것처럼만 보였던 두 사람의 행적을 다시금 돌이켜보았다. 골목으로 들어가, 무슨 문을 두드리더니, 품속에 감춰둔 뭔가 반짝이는 패를 보여주고··· 패?
그제야 한명회는 르네 에티앙블의 손에서 선명하게 반짝이는, 낫과 망치 문양의 메달을 볼 수 있었다.
///
신숙주는 드디어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을 되새겼다.
허후가 비루하기 짝이 없는 평화 조약문을 받아 들고 왔을 때, 그렇게 외란(外亂)의 모든 책임을 대신들이 꼼짝없이 끌어안게 되었을 때였다.
이전까지 자제하고 있던 상소문과 탄핵이 물밀듯이 밀려들어갔고, 그 결과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은 변명 한 마디 못 하고,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그 작자들이 애써 얼굴빛을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꼴이란!
그렇게 쓸쓸하게 퇴청하는 김종서를 마주친 뒤, 신숙주는 과장되게 공손한 자세로 읍(揖)했다.
조롱의 의미를 한껏 담아서.
“좌상 어른께서 지금껏 사직의 평안을 위해 조정에서 힘써 오신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외방에서 노신(老身)을 쉬게 하고 계시면, 저희가 정치에 일심을 다하여, 좌상께서 누워 계실 외방까지 이 땅의 덕화(德化)가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한껏 말씀을 올리고 신숙주가 얼굴을 들어 그의 표정을 보았을 때는, 놀랍게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때만큼 경탄을 느꼈던 적이 없다. 이런 모욕에도 미세한 흔들림 하나 없다니, 저것이 북방의 야인들을 떨게 한 호인의 담대함인가, 싶기도 했다.
김종서의 입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비져 나오기 전까진.
“허, 자네도 우습구만. 어찌 이리 경망된 마음을 지닌 선비가 사방 수천리를 덕화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심신을 먼저 갈고 닦지 않고서 어찌 나라의 정치를 갈고 닦겠는가?”
역시, 아무리 김종서라도 조롱을 참지는 못한 것인가 싶어 신숙주 또한 맞받아쳤다.
“좌상과 좌상의 뜻을 따르던 이들이 안타까운 일을 맞아 외방에 내려가게 되셨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저와 같이 경망된 선비일지라도, 그 빈 자리를 차지하여 어진 정치에 한 줄기 보탬이라도 될 기회를 잡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김종서의 얼굴이 굳어갈 것을 생각하며 이죽대던 신숙주는, 여전히 웃음기를 겨우 억누르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며 점점 궁금증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대답도 없이, 그저 신숙주를 지긋이 쳐다보기만 하던 김종서는 갑자기 쯧, 하며 혀를 찼다.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렇게 말하며 김종서는 신숙주의 귀 가까이 입을 가져다댔다.
“자네는 태종조의 일을 벌써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 말만을 남긴 채 김종서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때는 단지 노인네의 허언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서는 그래도 정승까지 올랐던 자의 식견있는 예측이었다 감탄할 뿐이었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신들은 상황이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네. 이에 대해 미리 준비했을 것이야.”
“그리고 대신들의 유배지를 정한 것은···”
“그들 자신이었네. 그렇다면 대신들은 아마 거병을 준비했을 터이네.”
그렇게 소장파들의 논의가 계속되는 사이에도, 담장 너머에서는 창칼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
다시 운종가.
병사들이 부딪혔으나, 급하게 모인 사졸들끼리니 피아식별조차 쉽지 못해 서로 엉켜서 아무데나 칼을 휘두르는데 불과했다.
한양의 가장 큰 길은 그렇게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산 사람의 발버둥과 죽은 사람의 늘어진 몸으로, 그 넓던 길이 막혀 함부로 오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유리한 것은 안평대군.
“어서 후방으로 병력을 돌려 주상 전하의 신변을 확보하라!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안평대군의 명령에 벌써 몇몇 병사들이 싸움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향한다. 시어소로만 가서 주상을 확보한다면 일은 훨씬 유리해지리라.
“막아라! 막아야만 한다! 안평이 전하를 위협하게 두어선 안돼!”
“대감, 우리 병사들이 저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권람의 말에 수양대군은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싸움 자체는 한명회 덕에 호각으로 만들었으나, 그 이후로 일을 진행하기에는 너무나 불안하다. 물론 안평대군이 주상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수양 한 몸만 살아 있다면 바로 다음날이라도 흩어져 있는 군사를 그러모아 다시 싸움을 벌여볼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수양은 공격하는 쪽이 되고 안평은 보다 유리하게도 수성하는 쪽이 될 것이고.
계책을 써 겨우 마주하는 병력의 숫자를 동수로 맞춰 놓았을 뿐.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한 것은 수양이다. 전장을 우회해 시어소로 향한다? 이미 병력의 수효가 극히 부족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찌··· 어찌 해야 한다는 말이냐.”
부족했던 계획, 힘에 부치는 목표, 원하는 것을 모두 얻기엔 부족했던 역량.
그 모든 걸 알고서 실행한 것이기는 하나, 정작 실패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수양대군의 눈앞이 컴컴해지는 듯했다.
“대감!”
그 순간, 수양대군의 눈에 한명회와 웬 병졸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거병.”
이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거병’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읊조리자, 그제야 현실을 파악한 듯 선비들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지도를 보면, 못해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길도 4개의 도에서 거병할 것이네. 어쩌면 강원도의 관찰사나 도병마사들도 동원될지 모르지.”
그들은 열심히 전국팔도에 파견된 군지휘관과 지방관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대부분 대신들이 임명한 사람들이군···.”
“그 중, 가장 위험한 자는”
신숙주는 지도의 북쪽을 가리켰다.
“이징옥.”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 북방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
다른 곳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인사인 김종서가 함길도로 향했다는 점에서 그와 이징옥의 신뢰관계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원산과의 전쟁에서 초반에 병졸을 잃은 뒤에는, 북방의 국경을 경계한다는 명목 하에 의외로 병력의 피해를 적게 입은 곳이었다.
그렇게 북에서, 남에서 몰아쳐온다면. 그들을 막을 임금도 없이 두 대군이 사병을 놀리는 한양이 막아낼 수 있을까?
더하여 대신들이 주상 전하의 안전과 수호를 내세운다면, 명분상으로도 대군들에 비해 우위에 있지 않은가?
만일 이런 시국에 한양에 생각없이 남아 있다가는···
“우리 모두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것이야.”
“맙소사···.”
“그리하면, 우리는 어찌해야만 하는가?”
“지금이라도 한양을 빠져나간다면?”
하위지의 제안에 신숙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받아주겠나? 대신들이? 아니면 둘 중 승리한 대군이? 그건 그저 양측 모두에서 버려지게 되는 하책일세.”
“그렇다고 한양에 남아있으면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어느 편이든 손을 잡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미 상황이··· 늦어버린 것이 아닌가?”
박팽년의 말에 나머지는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렸다.
진퇴양난이란 실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때 갑자기,
“이보게, 취금헌(박팽년의 호). 자네 주상 전하를 구하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신숙주가 박팽년의 팔을 붙잡았다.
“마···맞네.”
“그렇다면, 해보지.”
“뭘 말인가?”
신숙주는 잠시 망설였다. 이 계획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두를 죽여버리는 일은 아닐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그러나 고민할 시간도, 고민에 걸리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신숙주가 찬찬히 계획을 설명하자, 선비들의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해보지.”
“그 길 말고는 없군.”
“좋네. 그렇게 해 봄세.”
선비들은 동의했다.
그들은 곧 말을 타고 대문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시어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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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Say, run. (1)
한명회가 그렇게 빠르게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 간단하다. 말을 얻어 타고 왔으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빠르게 병력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 더 간단하다.
노래 한 소절만 부르면 되었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와아아아아아!”
“소련 만세에에에!”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단 수십 명이라도 한명회에게는 귀중한 병력들이었다.
이전에 세 사람을 쫓던 안평대군의 병력들도 이렇게 튀어나온 하인들에게 포위되었다.
기와집들 담장 너머에서 짱돌과 가재도구들이 던져져 안평대군의 군졸들이 맞아 죽었고, 뒤따라 뛰어나온 하인들이 그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 죽여 놓았다.
그렇게 살아난 뒤, 앙티에르와 매원은 자신과 조직가들에게 훈련된 호위병력 몇을 붙여주는 조건으로 ‘유용한 노래들’을 알려주었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와아아아! 레닌 만세! 혁명 만세!”
“자 다들 갑시다!”
한명회가 홀로 말을 타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자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은 하인들을 십수 명씩 토해냈다.
‘우리가 저들의 세력이 퍼지는 것을 도왔구만.’
하인들이 뛰쳐나오고 텅 빈 집들을 둘러보면서 한명회는 깨달았다.
이런저런 두 대군의 싸움에 웬만한 양반들이 한양의 저택을 버리고 도망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저택을 관리할 하인들만 덩그러니 남은 상태.
이 때, 원산에서 온 ‘조직가’라는 인간들이 다가와서 이들을 열성적인 공산주의의 신도로 만들어 놓기엔 최적의 상황이 갖춰졌으리라.
저들이 이야기하는 그, 공산주의라는 것이 어느새 이리 퍼졌다는 말인가? 지금은 고작 기백 명 정도겠지만 언젠가는···.
그 사실을 생각하자 한명회는 잠시 등줄기로 식은 땀이 훑고 가는 것을 느꼈으나, 그런 시시콜콜한 일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암구호처럼 정해진 노래들을 부르자 사람들이 뛰쳐나와 병력이라 부를 만큼 어엿한 숫자를 이루었고.
그렇게 구름떼처럼 모인 병력을 끌고 오자, 수양대군은 크게 감복하며 한명회의 두 손을 잡았다.
“이보게, 사우당! 자네가 나를 살렸네!”
“과찬이십니다. 그보다도 안평대군은?”
“용(瑢)은 이미 시어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상의 신변을 확보하려 할 것이야.”
“걱정 마십시오. 결코 불궤한 자의 손에 전하의 옥체를 넘기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휘몰아 달리기 시작하는 한명회였다.
“병력을 반으로 나눔세! 자네들은, 길을 빙 돌아서 안평이 시어소로 가는 길에 앞질러 주게! 자네들은 나와 같이 가서 안평의 뒤를 좇도록 한다! 가자!”
“와아아아아! 레닌! 재림! 레닌! 재림!”
아마, 레닌이란 것은 저들이 섬기는 신령인 듯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며 한명회는 그저 빌 뿐이었다.
‘그, 레닌이라는 자가 정녕 존재한다면, 부디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오!’
///
상온에서, 음파의 속도는 대략 시속 1200km 정도 된다.
그 말인 즉, 인간은 결코 소리보다 앞서 나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안평이 시어소를 향해 서둘러 달려나갔으나, 뒤에서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닿으면 갑자기 어디 김씨네, 어디 박씨네 저택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튀어나와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와아아아! 레닌재림 만노앙복!”
“소련 만세에에!”
“이런 제기랄!”
당연히 훈련되지 않은 몇몇 무지렁이들이 낫 같이 허접한 무장을 들고 나와 봤자, 무장한 병사들이 몇 번 베면 고꾸라져 죽는다.
그러나 그렇게 베어 죽이길 한 명, 두 명, 열 명, 스무 명.
작고 사소한 지체일지라도 몇 번씩 쌓이다 보니, 어느새 뒤편에서 쫓아오는 한명회와 일당들의 목소리가 커져온다.
“저기, 안평대군이 있다!”
“잡아라!”
“젠장, 더 속도를 내서 나아가라!”
귀중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아깝게 지체되는 찰나들이
그렇게 모이고 모여 큰 손해로 다가오고 있다.
나아가기가 점점 지지부진해지고, 수양대군의 군세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다 결국,
“따라잡았다!”
“와아아아! 앞뒤로 포위다!”
방금 전, 한명회의 명을 받아 돌아가는 길로 갔던 병력이 안평대군의 앞을 막아서고, 뒤에서는 한명회가 직접 이끄는 이들이 어느새 안평의 병졸들을 따라잡았다.
물론, 병력의 질을 따지자면, 조금 부족한 머릿수를 감안하더라도 안평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