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79
에드워즈가 무슨 인텔리 출신이라면 모르겠지만, 결국 밥 에드워즈라는 인간은 노동계급 출신 노조 조직가 겸 정치인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경제학에 대해 대강은 알고 그 요체도 파악하고 있지만 심오한 영역까지 파고 들어가기에는 부족하다는 자격지심에 괜히 저들의 독서 모임에는 참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은 말하고 있다.
한번 봐야 한다.
확인해야 한다.
“저, 이아구 동지?”
“왜 그러십니까, 에드워즈 동지?”
“제가 요사이 회관에 찾아간 적이 없지요? 다음에 공부모임이 열릴 때 한번 초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바로 내일 오후 2시에 회합과 이론 공부가 있으니 언제든 환영입니다!”
좋다. 내일 오후 2시.
···왠지 밀려오는 불안감에 밤도 꼬박 새버린 에드워즈는 회관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경비 같은 이가 갑자기 입구에서 막아선다.
“잠깐, 오늘 행사는 이런저런 내규를 정하는 절차도 있어 완장이 없는 사람은 출입할 수···”
“동지, 뭐하는 건가? 이분은 에드워즈 동지일세!”
“아앗,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아구 동지의 초대를 받아왔을 뿐입니다.”
“당장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기묘할 정도의 과잉 대접을 받으며 이고납합은 안으로 들었다. 약간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에드워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지?
일단 벽에 펼쳐진 것은 지도다. 중국과 조선, 일본, 그리고 요동 땅이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지도.
그리고 그 중 요동 땅은 온통 백색과 적색으로 칠해진 뒤 ‘만주’라고 대문짝 만한 한자가 박혀 있다.
“저건 우리의 상징입니다! 만주가 우리의 정당한 영토임을 드러내며, 붉은 빛은 우리의 혁명적 이상을, 백색은 옛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의 상징색깔에서 따왔습니다! 만주의 형상과 저 문양은 저희 완장에도 새겨져 있지요!”
“···아 그렇군요.”
젠장, 빨간 바탕에 하얀색 문양이라니 뭔가 불쾌한 형상이 오버랩되지만 구태여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렇게 완장을 찬 청년들이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린다. 그러다 2시 정각이 되자 누가 꽹과리 같은 것을 두드리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단상으로 오른다.
이아구다.
“동지들! 오늘은 우리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혁명적 동지인 에드워즈 동지께서 참석하신 날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와아아아아아!”
역시나 부담스러운 접대에 에드워즈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오늘 이 자리가 특별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우리 동맹의 강령과 지향을 확고히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인 날들이 극히 짧음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많은 분파주의에 시달려왔습니다. 예를 들어 한족들을 포용할 수 있다느니, 저의 형님 이고납합 동지의 방향성이 틀렸다느니 하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들이 우리 조직을 위협했습니다!”
이아구가 단상을 한번 두드리며 말을 잇는다. 왠지 에드워즈는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아오는 것을 느낀다.
나를 바라보는 이 선망의 눈빛··· 마찬가지로 이고납합을 바라보던 눈빛···.
아주 익숙하다. 뉴스에서, 이곳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본 뉴스들에서 자주 보았던 눈빛들이다.
“우리는 민족에 대해 레닌 동지의 테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전자본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민족으로서 우리는 근대화로 나아가기 위해 당당한 하나의 민족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옳습니다!”
“이고납합 동지는 북변에서 공포에 떨던 동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만주민족의 일꾼으로 탈바꿈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틀립니까?”
“아닙니다!”
이아구의 말마다 착착 대답하는 동맹원들.
아니다. 이고납합은 그저 부족적 소속이 사라진 이들을 흡수해 호리개 족의 몸집을 불리려 했을 뿐이다. 그 양반은 ‘만주민족’ 따위 입에 담은 적도 없단 말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섬겨왔음에도 중국은 내분에 빠져서! 우리가 에센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 방관하였습니다!
저들은 동아시아의 야만성! 후진성의 심장입니다! 저들을 분쇄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 민족의 성쇠를 결정하는 사항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된 민족으로서! 하나의 지도자 이고납합의 영도 아래서 나아가야 하지 않겟습니까!!”
“우와아아아아아아!!!”
“저는 묻습니다.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이고납합 동지와 에드워즈 동지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가장 힘든 과업이라도 기꺼이 수행하겠습니까?”
“예!!”
“당연하오!!!”
“총력적인 근대화를 원합니까? 필요하다면, 오늘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더욱 총력적이고 급진적인 근대화를 원합니까?”
“와아아아아아아!!”
시발.
진짜 좆 됐다.
작가의말
이번 화가 아주 조금 역사를 밈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구태여 파시즘과 유사한 권위주의적 형상으로 만주족 민족주의의 발흥을 묘사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근대적인 독일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십수백의 봉건적 소국들이 느슨하게 흩어져 있던 독일 ‘지역’은 어떻게 독일 ‘민족’의 영토가 되었을까요?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시 프랑스에서는 공민적인 민족주의, 즉 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동지적인 관계를 지닌 구성원들 사이의 민족주의가 혁명과 나폴레옹 집권을 거치며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끌어낸 폭발적 역량에 오스트리아 등이 연패를 거듭하자 독일 지역의 몇몇 지식인들은 곧 프랑스와 같이 단결된, 독일어(당시에는 수십 개 방언으로 쪼개져 하나의 언어라 보기도 어려웠던)를 사용하는 이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국가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것을 독일 민족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 초기 독일 민족주의는 기존의 봉건적 정치체들을 무너뜨리고 ’민족 구성원 간의 평등하고 동지적인 관계가 이뤄지는 민족국가’를 상상했기에 자유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성격도 짙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이후의 국제적 질서와 함께 변화합니다. 민족주의는 기존의 봉건적인 지배 체제를 활용하면서 제국을 경영하던 오스트리아에게는 반역적인 것이었지만, 이와 별개로 새로이 세력을 키워가던 프로이센에게는 이용가치가 있는 사상적 움직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 민족주의는 점차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의 군주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인 양상을 띠며,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이 이뤄지고 신생 독일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될 때면 상당히 관제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아구가 바라보는 만주족은 어땠을까요? 부족 단위로 쪼개져 전근대적이고 조선에 의존적인 생활을 이어갈 때, 자신의 형님은 부족원들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자립을 꾀합니다.
물론 이고납합은 그저 부족원들의 수를 늘리고 그들을 부려먹어 세력을 키우겠다는 전통적인 사고에서 행동한 것이지만, 이아구의 눈에는 그것이 이고납합의 민족적인 ‘큰 그림’으로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현재 고향을 잃고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단결시켜 근대화를 이룩하는 것이 지상과제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작가의 생각은 이러하였습니다. 그럼, 앞으로 이어질 만주족과 조선의 미래를 즐겁게 지켜봐 주세요!
아, 불쌍한 밥 에드워즈는 완벽하게 좆 됐다!
공산주의자 모임인 줄 알고 후원해 놨더니 파쇼 지망생들이었다!!
그리고 이 진상을 알기 전까지 에드워즈가 한 일은 바로···
-“북청에서 원산으로 전합니다. 현재 현지에서 공산주의 청년 조직이 자생적으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해당 조직에서는 지금 다양한 서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당국에서의 지원을 요망합니다.”
···물자 요청이었다. 대부분은 이아구가 학습에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던 이론서들.
이 소식이 전신으로, 그리고 배편으로 전해지자 곧 소련 문화예술인민위원회 소속 학자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소문은 그 학자들의 동료들에게, 그 동료들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슬며시 퍼져 나간다.
그 소문의 내용인즉 이렇다.
‘북청의 만주족 수용 시설에서 공산주의 조직이 자연발생했다!’
이 소식은 고작 도시국가 정도의 규모밖에 되지 않는 소련에서는 족히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
소문이 퍼지는 곳마다 입씨름이 이어졌다. 멀리 만주에서 떠나와 조선 땅에 자리한 난민들 상당수가 마르크스를 공부하고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최근 조선 내에서 공산주의가 유행한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는 트로츠키와 블레어가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주족은?
정말 불모지에 핀 클로버 잎처럼 자연히 나온 것이 아닌가?
그 조직이 제대로 유지나 될까? 아니, 저들이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할까?
그 논쟁을 통해 원산 인민들이 느끼는 열광은 어마어마했다. 곧 숱한 술집과 (담배 없는) 흡연실과 (커피 없는) 카페에서 이 소식은 수도 없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유제프 크리스티나 카민스키의 맥주잔 앞에서도 말이다.
“···허, 그거 신기하군?”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고 있다네, 그것도 15세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해낼 수 있겠나?”
“흐으음··· 헌데 그게 과연 어떻게 굴러갈지를 모르겠네.”
“이 냉소적인 친구야, 신뢰라는 걸 가져보게! 소련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가 있나? 15세기의 만주인이나 러시아 내륙의 유목민족들이나 다를 게 뭔가?”
“그···런가?”
“그럼! 자네가 이 얘기를 지금 들은 걸 보면 아직 후원행사도 안 가봤겠구만?”
“알잖나? 내가 사람 바글바글한 거 질색하는 건···”
“내가 가자고 할 때 따라오게! 자넨 내 등대지기 후배 아닌가? 함께 스웨터라도 짜서 보내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잘 되든 안 되든 한겨울에 만주인 한 사람이 얼어 죽는 건 막지 않겠나?”
그렇게 오랜 술친구에 한쪽 팔을 붙들린 채 카민스키는 큰 길을 따라 끌려갔다. 그러자 곧 탁 트인 장방형의 공용 광장이 나온다.
원산 시내 중심의 광장에는 하나둘씩 가설 천막과 현수막이 설치되었다. 인근은 축제가 열린 듯 사람이 몰려들었다.
“자, 여기! 여기 바느질 가능하신 분은 의류 수선 부탁드립니다!”
“헌 옷 수거합니다! 만주족을 도웁시다!!”
“지금 만주인들에게는 식기가 부족합니다! 그릇을 가져오시면 특제 스튜를 선물로 드립니다!!”
천막은 당국에 신청해 받아왔을 테니 모두 형태가 일정해야 할 테지만, 정작 자원봉사자들이 제멋대로들 설치하다 보니 천막 사이로 난 길은 삐뚤빼뚤, 사람은 와글와글했다.
가끔 가다 신이 난 아이들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과자를 손에 쥐고 뛰어다니다 카민스키의 발치에 부딪혀왔다. 걷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다고?’
사실, 이런 행사가 처음 열렸던 것은 아니다.
에릭 블레어의 설득 아래 수많은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로 전향하였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나, 곳곳에 협동조합과 농업공장이 건설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적에도 힘써 지원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많았다.
그때는 가설 천막이 없었나? 현수막이 없었나? 사람들이 덜 고무적이었나? 모두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후원 활동들은 길게 가지 못하고 이내 시들해졌다. 그런데 지금 왜?
“요새 할 것도 없는 참이고 스웨터 짜는 법도 다 잊어가던 참인데 잘 되었지? 그래도 털실을 만져보면 쉽게 손에 익을 테니 걱정은 말게나!”
“아, 코발치크 씨 오셨습니까? 옆에는···”
“친구일세. 같이 배 타던 친구.”
그리고 뭔가 오밀조밀하게 자리잡은 천막들 중 몇 안 되게 각 잡혀 설치된 것으로 들어가자 친절한 인상의 부부가 그들을 맞이한다.
“외투는 제게 주세요. 의자랑 털실은 여깄으니 50센티씩 뜨시면 얘기해주세요!”
“이 친구가 손은 거칠어 보여도 세심하네. 한번 믿어 보게나!”
친구의 거친 뱃사람다운 울퉁불퉁한 손바닥이 그의 등을 때리자, 오’ 코너는 깨달았다.
지금은··· 친구도, 자기자신도 심심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이후 한치의 여유도 없이 쉴 새 없이 달려왔었다.
슬슬 소련에서도 제대로 된 공장들이 돌아가고, 조선의 정국과 식량 생산 또한 안정화되었다. 전시상황이 마무리되어 많은 이들이 무기를 놓게 된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당장 카민스키도 퇴근 후 친구들과 맥주홀에서 소일하게 된 것은 최근이 아닌가?
그리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자원봉사자들이 대바늘을 쥐여주자 카민스키는 익숙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뱃사람으로 살았던 과거가 백만 년 전의 지질학적인 역사들만큼 멀게 느껴졌었는데···.
그는 곧 즐겁게 실과 실을 엮어 가기 시작했다.
///
“음? 여기는 스웨터 짜는 곳인가?”
“그런가 본데? 저기 보면 뱃사람 티가 나는 굳은 살 박힌 사내들이 우글우글하지 않나? 자네도 여기서 해보겠나?”
“됐네. 나는 손을 쓰는 일이라면 젬병이라네.”
오랜만의 외출에 아껴뒀던 양복을 입고 온 필립은 생각 외로 인파가 붐비자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벌써부터 누군가 그의 팔꿈치에 잼을 묻히고 간 것이다.
함께 나온 러셀은 잠시 이런저런 천막들을 기웃거리다 곧 귀찮아졌는지 필립의 곁에서 그저 잘 훈련된 푸들마냥 얌전히 따라 걷고 있었다.
“뭐, 어차피 우린 이미 북청에 보낼 서책 필사하고 있지 않나? 여기까지 와서 고생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너스레를 떨던 러셀은 이런저런 말을 지껄이다 광장이 내다보이는 인접한 카페로 필립을 안내한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후원 행사장을 바라보며 러셀은 이런저런 말을 속삭였다.
“동양학자들 얘기 들었나?”
“···또 그쪽에서 소식이 나온 게 있나?”
러셀의 속삭임에 맞춰 필립 또한 목소리를 죽인다. 두 사람은 서로 귀를 가까이한다.
“중요한 건 아닐지 모르겠지만··· 원래 역사에서 몽골은 계속 분열 상태를 이어갔다더군.”
“뭐?”
“그래, 그러면 우리의 도래로 인하여 만주인들은 몽골에 쫓겨 고향을 잃은 것이지?”
“그건··· 우리 탓이 아닌가?”
“우리 탓이지. 내 생각에 이는 우리가 만족감을 느낄 사안은 아니라고 보네.”
공산주의가 만주족 사이에 퍼진다는 호소식에 내심 들떠 있던 필립 역시 마음 한 구석이 찔려 얼굴을 찡그렸다.
이··· 영국인들, 영국의 인텔리 신사들이 바로 자신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학술적 쾌감과 보수주의적인 친지들에 대한 경멸이 그들을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내면에는 수치심이 있다. 샴페인 사회주의자들, 노동계급과 유리된 이들, 그저 단순히 동정심 많은 도련님들인 자기자신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러셀의 말은 그런 필립의 마음속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만주족 권익 관련 단체를 조직해보고 있네. 자네도 여기에 연서명을 해주게나.”
-‘만주족 수용시설의 시설 개선에 대한 촉구 연서명’
“뭐··· 이 정도쯤이야.”
필립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러셀이 쥐여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창밖에서 바지런히 북청에 보낼 지원 물자들을 준비하는 대중을 바라보았다.
망설임없이 필립은 사인을 갈긴 뒤, 대용커피를 마셨다. 커피콩이 아니라 밀과 보리로 흉내낸 가짜 커피.
“누구든 각자의 방식으로 신념에 봉사해야지.”
그렇게 말하다가도 뭔가 불만스러운 듯 손가락을 탁자에 딱딱 두드리던 필립은 결국 의자에서 일어난다.
“자네 뭐하나?”
“그래도 한번 스웨터 짜기 시도는 해보려고 하네.”
“대체 왜?”
“···펜대만 굴리고 앉아있기에는 그래서 그렇지.”
그렇게 두 사람이 카페에서 나오자, 태운 보리 냄새가 늦가을 찬공기에 섞여 들었다.
///
“우리는 카페 안 들르나?”
“나는 안 되겠어. 보리로 만든 커피는 맛이 너무 텁텁해서 내 입맛은 아니야.”
그렇게 카페를 포기한 두 사람은 꾸준히 길을 걸었다. 그들이 닿은 곳은 소규모 식당. 오늘의 메뉴는 닭고기가 조금··· 아주 조금 들어간 감자 스튜였다.
“이보게, 자네는 뭐 특별히 참가하는 봉사활동 있나?”
“나? 나는 딱히 당기는 활동이 없어서 가만히 있네만···.”
“그렇다면 오늘부터 퀼트 동호회에 가입하게. 만주인들에게 보낼 물자를 만들다가 그냥 동호회가 만들어졌어.”
“흐음? 고작 바늘 갖고 놀라고 탄광에서 일하던 나한테 연차를 쓰라고 했나?”
“고작 바늘이라니?”
앤드류 몰리뉴가 불만스럽게 내뱉자 페디 매컬리스터가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퀼트라는 것이 생각보다는 꽤 재미있다네? 아, 자네 냅킨을 떨궜군.”
“으음? ···아.”
몰리뉴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메컬리스터가 내민 냅킨에 쓰여진 글귀를 읽어내려간다.
-‘우리 동호회에서는 퀼트에 세잎 클로버를 그려넣는다네?’
몰리뉴는 급히 냅킨을 구기듯 쥐고서 메컬리스터에게 답한다.
“···아, 갑자기 몹시 구미가 당기는군. 자투리 천끼리 꿰메어 이어붙이고··· 무늬를 만들고···.”
“맞네. 세잎 클로버 모양으로.”
“그래, 세잎 클로버 모양으로.”
세잎 클로버는 아일랜드의 상징.
자투리처럼 찢어져 있는 아일랜드인들을 모아 다시금 조직적 정체성을 일군다. 그리고 아일랜드계의 권익을 위한 세력을 은근하게 만들어낸다.
바로 지금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취미 동호회와 모임들 사이에 껴서.
이제는 그들 모두 소련인이고, 모두가 다 같은 의용군 소속일 뿐이라고 트로츠키는 외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생각하는 자신의 진정한 소속은 변하지 않았다.
···IRA(아일랜드 공화국군).
바로 십여 년 전에 아일랜드 독립 전쟁으로 영국에 맞서 싸웠는데. 사회주의적 대의를 위해 스페인 내전으로 왔더니 뜬금없이 15세기 아시아로 떨어져버렸다.
게다가 망할 영국놈들이 깽판 쳤다는 이유로 아일랜드인 조직들까지 억울하게 도매급으로 엮여 갈갈이 찢어지기까지··· 생각해보니, 그 원흉이 지금 북청의 에드워즈다?
“영국놈이 망쳐놓은 조직을 바로 세울 기회를, 영국놈이 다시 준 건가?”
“그래서 안 받을 건가?”
“···당연히 받아야지.”
마침 음식이 나왔다고 종업원이 외친다. 케컬리스터가 가져온 스튜를 입안에 떠넣으며 몰리뉴는 생각한다.
지금 움직이는 것이 자기들뿐일 리가 없다. 트로츠키의 반민족주의 정책에 무너진 숱한 폴란드인, 체코인, 아일랜드인 등등 약소민족의 조직들. 이 은근한 동화정책에 불만을 품었을 그들.
지금 오랜만에 생긴 이 숨쉴 틈을 놓치지 않고 우후죽순으로 조직들이 발흥할 게 뻔하다.
그렇게 마치 수두 걸린 피부의 두드러기처럼 우둘두둘하게 각종 민족주의가 창궐한다면··· 소련은 어떻게 될까?
자신의 새로운 조국 소련의 미래에 대해 순전한 호기심을 느끼며, 몰리뉴는 스튜를 다시 한 입 떠넣었다.
마지막으로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한양에 있는···
“허, 마르크스주의 모임이 만주족 사이에서?”
“제보에 따르면 상황이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독자적인 치안 유지 조직과 지역 봉사로 수용 시설 내 지역 사회에 공헌한다는군요.”
“상당히 흥미롭군. ···뭐 부족사회에서 말하는 사회주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을지야 뻔하지만.”
트로츠키와 그 외교 고문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저런 창구에서 들어오는 보고들이 조금씩 제각각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예를 들어 에드워즈 동지의 보고에 따르면 해당 조직은 독서를 위한 청년 클럽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인근에서 경비병력을 제공하는 다른 착호병 소비에트 대표들의 보고에서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자치기구에 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 북청에 파견되었던 병력들을 통한 것 같은데···.”
당연히 트로츠키와 에티앙블은 진상을 알지 못했다.
이아구의 말만 대강 믿고서 보고를 보낸 에드워즈의 보고내용과, 동맹회의 회당 근처를 기웃거리며 제한적이게나마 정보를 획득한 병사의 보고내용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그러나 동맹의 운영이 여진어로 이뤄지기도 했고, 두 사람 다 회당 안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기에 두 보고서는 모두 부실한 추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름답게도 공산주의 공동체가 북청에 자생했다. 물론 그 내실은 엉망진창이겠지만 적어도 만주인들 가운데 친소련적 기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트로츠키가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자, 그 다음 사안의 보고를 위해 에티앙블이 입을 열었다.
“두번째로는 소련 내에서 이런저런 문화 향유 모임이나 취미 관련 사교클럽이 꽤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건 앞선 사항과 이어지는 부분인데··· 만주인을 대상으로 일어난 대중들의 자원봉사 운동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취미 모임? 드디어 우리 경제가 안정화되었구만. 아주 좋아.”
“예, 그렇습니다. 정말 고무적인 소식입니다.”
그렇게 잠시 기뻐하던 트로츠키는 곧 침착함을 되찾고 펜대를 굴리며 생각에 잠긴다.
“그럼··· 그 취미 모임들에 대한 정부 지원 지급 정책을 고려해야겠지. 새로운 조직 기반들이 자라나니 다른 이들이 차지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차지해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방에서 나서려는 에티앙블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에드워즈에게 전하게. 내가 직접 치하도 할 겸해서 방문하겠노라고.”
곧 트로츠키의 북청 방문 소식은 빠르게 에드워즈에게 전달되었다. 전신 덕분에 세상이 좁아졌음을 에드워즈는 새삼 느꼈다.
“···시발.”
그리고 좆 됐음도.
에드워즈는 트로츠키에게서 날아온 전보를 휴지통에 버린 뒤 머리를 싸매다 하던 행위를 지속하였다.
눈앞에는 에드워즈가 직접 그린 스탈린 초상화가 있다. 앞에는 정수가 담긴 물그릇이 있다.
그 앞에 에드워즈는 망설임 없이 부복하였다.
“제발··· 제발 한번만 더 꿈에 나와주십쇼! 제발! 제바아아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