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99
그를 이용하여 스피리도노바는 좌파 사회주의혁명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지들, 우리는 안주할 수 없소.”
그런데… 조선?
이곳에서 스피리도노바는, 소련에서 추방된 한 줌 전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폭압적인 정권에 대한 테러리즘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테러의 대상이 없는 낙후된 동양 왕국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동지, 애써 스탈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이곳까지 왔건만. 우린 그저 투명 인간입니다!”
―“스피리도노바 동지, 부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결국 그들 가운데 영향력을 쥔 유일한 거물인 스피리도노바가, 대안을 내놓아야 했다.
“우리는 이 좁은 땅에 안주할 수는 없소! 중국과 몽골에 위협에 벌벌 떨면서 어떻게 공산주의를 이룩하겠다는 거요? 어떻게 세계를 변혁하겠다는 거요?”
급진주의적 테러가 아닌, 새로운 세력을 구축할 정치적 입장.
“소련은 더 뻗어 나가야만 하오!”
스피리도노바는 팽창주의를 택했다.
* * *
…한양의 대로변에서, 좌중의 공기가 굳어 간다.
공산주의자들이 수근거린다. 서로 으르렁대던 친소파와 인민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무리 짓는 것도 잊은 채 당황하여 함께 웅성인다.
심심풀이 삼아 근방을 나돌던 유자들 또한 손가락질을 시작한다.
그들 모두, 하위지가 공산주의로 전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태조께옵서 천명에 따라 아조(我朝)를 창건하여 혁명의 대업을 이루시니! 우리는 커다란 위기를 건널 수 있었소!”
그러나 이어질 하위지의 말은 그들의 예상과 다르리라.
“만일 전조(前朝)의 신우(辛禑, 고려 우왕)가 꾀하던 대로 요동을 정벌하였다면, 명국이 삼한 땅을 가만히 두었을 리 없소!
태조대왕께서 그 어리석은 짓거리에 개탄하시어 위화도에서 회군하셨기에! 우리는 명국에 굴욕과 국난을 겪지 아니하며 조선인이 조선인을 다스리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소이다!”
모두가 술렁이며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명목상 사대의 예를 따르기 위하여 이루어졌던 회군의 대의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인민주의자들이 태조대왕과 정도전을 나로드니키적 농촌 사회의 구현자로 칭송했듯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역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이 없던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유학자들의 대변자라 여겨졌던 하위지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선언이 나온다.
‘태조대왕의 창업은, 사대가 아닌 독립을 위한 쓰라린 결단이었다.’
“헌데 작금에 이르러 아조(我朝)는 또다시 몽골의 위협 아래, 명국의 요구에 벌벌 떨고 있소! 태조대왕께서 애써 지켜 내신 조선인의 나라를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소!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과 달달(達達)의 황제에게 나라를 바칠 셈이오?”
몽골과 중국의 위협, 그 앞에 가느다란 촛불처럼 흔들리는 우리의 조국.
그러한 레토릭은 스피리도노바의 입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소련은 그런 대외적 위기에 처해 있소!
프롤레타리아들이여! 그대들의 연장이, 토지가, 자유가 탐욕스러운 전제 군주의 예속물이 되려 하오! 마땅히 무기를 들고 눈을 돌려야 하오!”
대륙 세력들에 의한 치명적인 위협.
저 ‘야만적’이고 ‘전제적’인 전근대 군주들의 채찍에 대한 공포.
“동지들, 물론 이 우주의 물리 법칙은 우리에게 마법을 부렸소. 우리는 파시스트들의 잠수함과 소비에트의 전투기가 싸우는 지중해에서, 푸른 논밭이 세상을 메운 15세기의 아시아로 던져졌소.
그렇다 하여 우리의 투쟁이 끝나서는 안 되지 않소?
우리는 이 구세계의 유일한 사회주의자들이란 말이오!
작디작으나 지도에서 붉게 타오르는 이 한 점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우리’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세계를 변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디에 있든 싸워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피워 낸 혁명의 불길이 고작 10년을 가고 고꾸라질 것이었소? 역사의 영구적인 진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단 말이오? 고작 야만적 전제 군주에게 정복당하기 위한 소련이었소?”
한양과 원산에서 각각 제기된 두 개의 질문.
‘이민족’의 지배를 허용할 것인가?
‘전제 군주’의 위협에 손 놓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조선인들과 소련인들의 대답은 같았다.
“아니오! 결코 아니오!”
그 열광적인 반응에 화답하여 하위지는 말한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비롯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소!
우리의 땀 흘려 거둔 미곡이 저 멀리 천자(天子)와 대가한(大可汗)을 배 불리며, 우리의 말은 저 낯선 이족(異族)의 말과 서로 상통하지 않아 무시될 뿐이외다!
조선은, 조선인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오. 명국과 달달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하오.
한때 삼한 땅을 일컬어 해동천하(海東天下)라 하였으니 이는 조선이 그저 중원의 천하에 속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리하여 아등(我等)은 중원과 다른 천하를 세워야 할 터! 좁다란 땅에서 그저 중원 천하의 동태를 살펴만 보고 있다가는 그 쟁투의 승자에게 무릎 꿇고 사직(社稷)을 바치게 될 뿐!”
스피리도노바 또한 대회장을 가득 메울 성량으로 외친다.
“우리가 일본으로 진출했던 이유는 무엇이오? 우리가 조선의 적법한 국왕을 다시 세운 연유는 무엇이오? 우리는 이 작은 원산으로는 생존에 한계를 느껴 손발을 뻗치지 않았소?
그리고 역사의 의지는, 진보의 운명은 다시금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소!
‘부족하다. 아직도 부족하다!’
소련과 조선이 몰락한다면 다시 세계에는 캄캄한 야만의 암흑이 되돌아올 것이오!
소련은 조선에서 백정에 대한 차별을 폐하려 하오! 일본에서 다이묘들의 폭압을 끝장내려 하오! 만주에서 소녀들의 순장을 금지하려 하오!
주인과 노예를 없애고, 오직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뿐인 세계를 건설하려 하오!
우리가 스러지고 멸망한다면 세계의 피억압자들에게 거대한 죄를 짓는 것과 같소! 우리의 패배는 역사의 패배이며, 진보의 역행이오!”
민족 국가의 밑그림을 그리는 선비와,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조국을 부르짖는 테러리스트.
같은 계기.
다른 질문.
그리고 같은 결론.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하오! 더 넓은 조선인의 천하를 위하여!”
“조선의 바깥으로! 소련의 승리는 곧 공산주의의 승리이니!”
한양과 원산, 두 도시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지고.
그 순간, 스피리도노바의 눈을 마주친 트로츠키는 깨달았다.
이제 소련과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억 인구의 운명이 영원토록 변화하였다.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세계는 한 몸이 된 두 나라의 발아래 놓이게 되리라.
“세계로! 세계로!”
이 거대한 함성과 박수를 연료로, 거대한 전쟁 기관이 가동을 시작한다.
* * *
/ 작가의 말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Mögen die herrschenden Klassen vor einer kommunistischen Revolution zittern. Die Proletarier haben nichts in ihr zu verlieren als ihre Ketten. Sie haben eine Welt zu gewinnen.)
이번 화 소제목 역시 ‘공산당 선언’의 그 유명한 대목에서 따왔습니다. 저 문장 바로 다음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보다 익숙한 문장이 나옵니다.
+색목인(色目人)이라는 말은 흔히 오해되듯 ‘색깔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줄임말로 ‘여러 종류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몽골 제국에서 몽골족과 한족 이외의 종족들을 통틀어 일컫는 데 사용한 표현입니다.
+흔히들 민족 정체성(Nationality)을 확립함에 있어 필수적인 과정으로 ‘구성적 외부(Constructive outside)’의 형성을 이야기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본래 15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극히 안정적이고, 인구 이동이 상대적으로 적어 피아의 식별이 이루어지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강력한 몽골 제국의 재부상과 함께 그에 대한 위협감이 가시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대신파에게 민족주의를 활용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더하여 이러한 공동의 적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신문, 라디오 등의 대중 매체를 경유해야 합니다. 같은 신문을 읽는 대중들끼리는 공동의 뉴스가 공유될 것이며, 그로써 이 대중 매체의 수용자들은 나와 같은 사건을 경험하며 나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나와 공동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들, 같은 언어로 된 신문과 라디오를 접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이 감각이 민족주의 형성의 주 동력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앤더슨은 16세기 이후 발전한 출판 자본주의를 민족주의의 주된 원인으로 바라봅니다.
베드로의 성스러운 도시 (1)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하고 신선한 아침 공기와 까슬까슬한 이부자리의 감촉이 느껴진다.
침소의 풍경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10여 년은 지났다.
바실리 2세는 이제 그 사실에 대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소리와 냄새와 촉감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이미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현실이었다.
불평과 비탄은 이미 10년도 더 전에 매듭지은 과거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반 그놈도 이곳에 있나?”
“예, 전하. 동쪽 방에 침소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자신이 지을 성이 완공되기까지는 대공 전하와 같은 성을 쓸 듯합니다.”
그를 이렇게 만든 드미트리 셰먀카의 아들놈을 공동 영주로서 받들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하찮군. 나의 거처에 빌붙는다고 나의 지위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그 역겨운 꼴을 굳이 모스크바에서 봐야 한다니 통탄스럽군.“
“이런 날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카간 폐하께서도 곧 비열한 반역자를 대공위에서 폐하실 것입니다.”
“그러길 바라지.”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셰먀킨.
바실리 2세 자신이 직접 그 아비를 독살했거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도망쳤다가 몽골에 붙어서 돌아온 망할 반역자의 핏줄.
그놈이 카간과 함께 공동 대공으로 모스크바에 당당히 입성함과 동시에, 루스의 여러 대공국을 애써 묶어 놓았던 바실리 2세의 카리스마와 권력 또한 박살이 났다.
이제 다시 루스는 카간의 발아래 무릎 꿇은, 산산조각이 난 유럽의 변방으로 추락한 것이다.
“오늘이 ‘그날’이다. 손님을 맞을 준비는 모두 마쳤나?”
“예, 총관 전하와 그 일행들께 바칠 선물은 모두 흑단 상자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반이 바치는 것보다 몇 배로 화려해야 한다.”
이 공동 대공의 자리 또한 카간의 자비로운 처분 덕에 유지한 것이라는 사실.
만일 에센이 조금만 ‘덜 관대했더라면’ 그는 지금쯤 목이 잘리고 망할 이반 놈이 대공으로 으쓱대고 있었으리라는 그 사실은 참기 힘들었다.
―똑. 똑.
“전하, 총관 전하께서 곧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바위 같은 인내심은 모든 고난을 이겨 내는 법.
이 두 눈을 잃고 변방을 떠돌더라도 결국 바실리 2세는 대공의 자리를 되찾았다.
당장의 굴욕 따위 앞으로 다가올 복수의 달콤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니.
“…이반, 네 아비와 할아비처럼 비참하게 죽여 주겠다.”
바실리 2세는 차갑게 끓는 분노로 자신의 심장을 달랬다. 예복을 걸친 뒤 화려한 모피 가죽을 두른다. 루스의 서늘한 바람이 그의 가슴속 열기를 훔쳐 내지 못하도록.
옷을 한 벌 한 벌 입으면서도 독이 발라져 있지는 않은지 몇 번을 확인했다. 바실리 2세 자신부터가 이반 셰먀킨에게 독이 묻은 외투를 선물했으니까.
이제 카간 폐하께서 보내오신 총관 전하를 맞이할 시간이 되었다.
바실리가 성을 나서서 오른편에 서자, 곧 빌어먹을 이반 셰먀킨 또한 그 반대편에 자리 잡는다.
문이 열리고 저 멀리, 총관 각하께서 들어오시… 는데….
“허?”
기다란 마차의 행렬이, 줄을 지어 크렘린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기묘할 정도로 반듯하게 각진 형태에, 회색 칠이 된 마차들.
모두 어마어마한 양의 짐들을 실어 놓은 듯하다. 대부분의 마차는 모스크바 크렘린 안으로 진입하지도 못한다.
루스인들은 수근거린다. 커다란 낭패다. 저런 행렬이라니 총관이 과시와 사치를 즐기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필시 상납금 또한 두둑하게 챙겨 가려 들 터.
그리 생각하며 총관의 환영식을 위해 모여든 귀족들은 앞으로 빠듯해질 살림을 생각하며 이마를 짚는다.
…마차 겉에 있던 천 쪼가리들이 치워지고, 그 안의 숱한 건축 자재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들 혼란에 빠졌으나 바실리는 빠르게 눈치를 챈다.
‘저 마차들은, 루스로부터 무언가를 실어 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루스에 무언가를 실어다 주기 위한 것이다. 대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번에 몽골인들은 ‘미천한 루스인’들의 사정을 좀 배려해 주려나 보다.
곧 타타르인 인부들이 나와 능숙하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마차들의 정렬을 지휘한다. 말도 안 되는 수의 마차들이 곧 체스판의 말들처럼 가지런히 늘어선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뭔가 가설 건물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가운데, 짐짝을 나르는 수레와 구분되지 않는 곳에서 유럽인이 걸어 나와 대공들 앞에 선다.
모스크바인들이 영문을 몰라 하는 사이 그 유럽인은 이렇게 말한다.
“루스 총관 로버트 밥 에드워즈입니다. 여러분의 성대한 환영에 감사합니다.”
* * *
“온 마음을 다하여 환영합니다, 총관 전하. …헌데 몽골인이 아니시군요.”
눈앞에 급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인사를 건네는 모스크바의 두 대공이 보인다.
새 총관이 몽골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통역까지 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들 당황한 듯했으나, 에드워즈가 애써 체통을 지킴으로써 어수선했던 첫 대면의 분위기는 바로잡았다.
…영국의 노동자가 ‘전하’ 소리를 듣는다니. 내가 휴이 롱이 대통령에 당선된 미국에 왔나?
아무튼, 정신 차리고 보니 바실리 2세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올려다보는데… 어우, 새빨간 속살과 빈 구멍밖에 없다. 그 적나라한 광경에 에드워즈는 무심코 시선을 피할 뻔했다.
안 된다. 이 정도에 벌써부터 기선 제압당하면.
…그래. 학자들이 전해 준 그대로다. 드미트리 셰먀카가 그의 두 눈을 뽑았고, 그전에는 바실리 2세 쪽에서 드미트리 셰먀카의 아버지 유리의 눈을 뽑았다 했다.
지금은 이반 셰마킨과 바실리 2세가 갖은 수를 쓰며 서로를 향한 정치 공작을 벌이고, 주위의 대공국들을 포섭하며, 에센이 남기고 간 몽골군과 다루가치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다고 하니….
정말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정국이다.
원한 관계와 이해득실이 서로 뿌리 깊게 얽혀 있어 언제 피를 보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두 대공 간의 피 튀기는 경쟁은 에드워즈의 몫으로 진상된 저 금은보화가 가득 든 상자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마굴에서 몽골군이 예쁘게 조져 놓았을 루스 곳곳의 황폐화된 농촌들을 재건하고,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
그것이 러시아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의였다.
―“작금에 이반 셰먀킨이 모스크바에 돌아왔다니 문제가 복잡하겠군요. 당시 루스는 영주들의 가혹한 착취에 농촌 공동체들이 대거 스러지고 있던 상황입니다. 이에 대응하려면….”
―“현재 노브고로드 공국까지 점령되었다면 그곳의 요충지 몇 곳을 장악해야 할 것입니다! 반란을 막고 스웨덴을 견제하려면 여기와 여기를 개발하고….”
평소에 할 일이 없어 힘을 숨기고 있던 러시아 사학자들이 온 힘을 다해 갖가지 고급 정보들을 물어다 줬으니….
그 매뉴얼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아마 소련으로 귀환하자마자 분노한 러시아인들의 보드카에 잠겨 담금주가 되리라.
게다가, 에센이 그에게 맡긴 특별한 임무까지 고려해야 한다.
―“전하께서 잠시 맡으실 루스는 본래 우리 주치인 울루스의 오랜 봉토였답니다, 하하하. 그곳의 야만인들은 다스리기 힘들 터이니 언제든 제게 조언을 구하셔도 좋습니다!”
잠깐 들렀던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에서, 에드워즈를 접대하던 칸은 그렇게 말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희 측에서도 학자들을 대동하고 왔으니 칸을 번거로이 만들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세금도 제대로 못 거두고 계셨다 하니 오히려 제가 칸께 버거울 일을 대신 수행해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아하하하! 이거, 이거, 솔롱고스(Солонгос, 조선을 뜻하는 몽골어)와 카간 페하께서 영웅호걸을 루스로 보내시는군요!”
―“영웅호걸이라뇨? 과찬이십니다. 그저 난장판이 된 루스를 ‘제대로’ 지배하지 못할 만치 어리석지는 않은 이들 중 한 사람을 아무나 고르셨을 뿐입니다.”
그렇게 응수하니 쿠춤 무함마드 칸의 눈이 얼마나 분노로 불타올랐던가?
은근히 “너는 지나갈 놈이고 내가 원래 거기 주인이다.”라며 꼽을 주길래 홧김에 받아쳐 버렸다.
시발, 그때부터 대접이 점점 개차반이 되더니 결국 수도를 떠나기 직전에는 일행 중 반 이상이 복통에 시달려서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독살 안 당한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사실 시도는 몇 번 있었는데 들고 다니던 은수저를 찻잔에 넣으니 색이 변해서 겨우 산 거지만.
트로츠키가 웬 수저를 손에 꼭 쥐여 줄 때까지만 해도 왠지 몰랐다.
“자네, 이건 꼭 챙기게. 독살은 러시아의 오랜 전통이라네.”라고 말해 주던 트로츠키 동지의 혜안이여! 그 은혜에 다시금 목이 메어 온다.
…아무튼 그 개자식들, 킵차크 칸국이, 사사건건 이곳 루스 땅에 영향력을 미치려 들 테다. 다 죽어 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할지라도 저들은 한때 이 동토의 정복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