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98
“…예, 그렇사옵니다.”
아닙니다. 그저 사정이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천하의 모든 부유함이 조선으로 모여든 듯하였습니다. 그 부강함에 달달(達達)과 왜(倭)의 상인들이 꽃 주위의 꿀벌처럼 조선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 않고 주첨선은 조용히 문안 인사를 올린 채 자리를 나설 뿐이었다.
주첨선은 다음번 칙사를 보낼 때에도 조선에 자신을 보내 달라 주청하였다.
그때는 한양에 체류한다는 소련왕(蘇聯王) 탁락사기(托洛斯基)와도 회담을 가져 보고 싶었다.
조선을 저리 부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 많은 공장들에서 뿜어지는 염가의 종이, 포목, 의류, 농기구….
그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작금의 황상께서 곧 돌아가신다면 북경의 보좌에 오를 이는, 자금성의 주인이 될 이는 바로 주첨선 자신이었기에.
‘…명국도 그리 부강해질 수 있을까?’
만사(萬事)의 뜻을 깨우쳐 알고, 그 뜻대로 행한다면 사람이 무엇을 바꿀 수 없으리오?
‘반드시 가능하리라.’
주첨선은 여전히 조선의 벼이삭을 손에 쥐었을 그때의 감촉을 잊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 * *
“…전하, 부디 신을 버리소서.”
그리 읊조리며 민신은 저 멀리 북쪽 한양을 향해 절을 올렸다.
지금 이 노신(老身)은 조선 밖에 있으되, 마음만은 언제나 경복궁에 뉘인 옥체의 곁에 함께하리니.
감히 사이군(事二君)하여 사직을 능멸한 큰 죄를 입은 몸으로써, 조정의 분란을 피하고 전하께 입은 큰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니 이 어찌 기쁨이 아니랴?
그에 비하면 곧 죽을 몸이 또다시 서해를 건넘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민신은 들라.”
“예, 폐하.”
그렇게 남경의 황궁으로 드니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띄는 조정이다.
여전히 내각의 자리들은 비어 있고, 남경에서도 경태제에게 충성하겠다 우겨 대는 이들을 숙청하느라 천조(天朝)의 인재난은 척 보기에도 말이 아니었다.
“…북경의 폐주가 아조에 사절을 보내 군사를 청하니 저의 주군께옵서는 차라리 목에 칼을 들이밀라 하시며 거절하시었습니다.
그럼에도 강권으로 위협하니 어쩔 바가 없어 역적 무리에 재물들을 바쳤으니 아조(我朝)가 지은 죄가 크옵니다. 이에 신이 비분강개하여 이 소식을 알리려 남경으로 몰래 도망쳐 왔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엎드린다.
조정이 술렁인다.
저 술렁임은 조선의 몸값이 올라가는 소리다.
북경과 남경 중 조선은 남경을 택했다… 일단 이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장하다!”
되었다. 천순제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민신은 모든 일이 성사되었음을 알았다.
이제 조선의 사대부들 또한 주상 전하께 할 말이 없어질 터이다. 북경에 군병을 보내지 않음은 남경의 조정에 충성하기 때문이라는 대내적인… 그 소련 말로 하자면 ‘프로파간다’가 이어질 테니.
허나 대외적으로 조선은 중립이다.
남경에도 경제적 지원을 조금씩 제공하고, 북경에도 그를 이어 가며 양 세력이 적당히 균형과 힘을 유지해 에센에 먹히지 않도록 막아 낼 수 있게.
“…하오나, 이 모든 것은 신의 독단입니다. 저는 해동의 일개 군왕보다 중원의 황제 폐하께 충성하는 것이 옳다 여겨 이리 입조하였습니다.”
“너의 충정은 짐이 충분히 알았도다.”
그리고 그 중립은 민신의 존재로서 가능해지리라.
경제적 지원을 북경에 보내는 이유? 민신이 해명하길 그는 어쩔 수 없는 강권 때문이다.
북경에서의 지원 요구를 남경에 알린 이유? 그 또한 역적 민신의 독단이다.
북경에서 민신의 남경행을 알아챘을 때, 분명 조선에 항의해 오리라. 그렇다면 조선은 이미 국내에서 반역자로 취급해 오던 인간이라며 잡아뗄 수 있게 되리라.
조선은 북경과 남경 모두에 흠잡힐 일을 ‘그나마’ 최소화한 채 작금의 외교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를 위하여 민신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하리라.
역적으로 남으리라.
“조선 천세, 천천세… 주상 전하 천천세….”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늙은 신하는 입속으로 되뇐다.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중국의 도성은 거대했으나 그곳에는 깊은 그늘이 스며 있었다.
반쯤 부서지고 무너져 있어서가 아니라, 한 세기는 지나도 씻겨 나가지 않을 것 같은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너울거려서였다.
쇠잔해 가는 제국의 심장은 점차 그 고동을 멈춰 가는 듯했기에 그 황금 지붕의 궁전과 오색으로 장식된 누각들조차 죽어 가는 이를 위한 화려한 수의일 뿐이었다.
공자 이반은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 마음은 다행히 위대하신 카간께서도 공유하셨는지 정복자의 간단한 요식 행위 같은 약탈을 끝낸 뒤 에센 카간께서는 말 머리를 다시금 북쪽으로 돌리셨다.
불모로 끌려왔으면서, 어느덧 그곳에 그리움을 느낄 정도였다.
시끄러운 말소리들,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도 언어가 달라 결국 손짓 발짓으로 대화하는 상인들.
동쪽 끝에서 온 향신료와 서쪽 끝에서 온 향신료가 함께 진열되어 어지러운 냄새를 풍기는 거리.
그곳에 차려진 성대한 궁전.
그 옥좌에 마치 신과 같은 근엄함으로 앉아 있는 카간.
카라코룸은 북경과 다르게 살아 있는 도시였다.
자라나고, 약동하고 있다.
그 두 도시의 완벽한 대비. 죽어 가는 늙은 제국과 팽창하는 젊은 도전자.
그 두 도시의 대조적인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반은 다시금 미뤄 두었던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센은 왜 쇠락한 중국을 살려 두는가?
출정 전 에드워즈와 에센이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폐하, 중국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절이여, 그대의 조언은 언제나 달게 듣겠으나 이는 내정 간섭이다.”
―“저는 이제 루스 총관으로서 폐하의 신하이기도 합니다. 부디 저의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현재의 몽골 제국은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적은 인구수를 토대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소화하려고 한다면 역량의 소모가 클 것입니다!”
―“그 역량은 다시 한족들로부터 거두는 세폐로 돌아올 것인데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아닙니다. 저의 말씀은 단지 자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때 에드워즈는 고개를 저으며 카간의 말에 반박했다.
―“몽골 제국은 사람의 파도에 묻힐 것입니다. 옛 대원(大元)이 서방의 다종다양한 인종들을 모아 ‘색목인(色目人)’이라 싸잡은 것도, 그들을 지배 계층으로 포섭한 것도 모두 그 파도에 묻히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대원의 중국 지배는 형편없었습니다. 지배라기보다는 차라리 약탈에 가까웠습니다. 그 역사를 반복할 바에야 세폐를 거두며 명을 존속시키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에센의 표정이 굳어 가고, 한참 고민하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고려하겠다.”
중국의 정벌은 카간의 개인적인 보복일 뿐 아니라 옛 원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정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대업이다.
그런데도 그는 에드워즈라는 자의 말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중국 정복 사업의 손익을 저울질했다.
게다가 결국 에드워즈의 조언에 따라 명으로부터 세폐만 거두고 정벌을 끝내지 않았던가?
조선이라는 나라가, 대체 카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몽골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젊은 루스인은 그 질문을 붙잡고 며칠 동안을 끙끙거려 보았다.
* * *
“전하, 야선의 확장을 더 이상 좌시할 수는 없사옵니다. 천조(天朝)를 사대로서 섬기는 아국에서 천조를 희롱하는 야선과 더 오래 손을 잡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그 뒤로도 신료들의 입에서 사대니, 신하로서의 도리니, 중화의 문명에 대한 지향이니 번드르르한 말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홍위가 보기에 그 말들의 귀결은 모두 같았다.
“전하, 옛 몽고와 고려의 관계를 생각하소서.”
두려움.
유학자로서의, 중화의 문명을 흠숭하는 신하로서의 아름다운 겉치레들을 벗겨 낸 뒤에 남는 본질이란 곧 그런 것이었다.
금나라를 집어삼킨 몽골은 곧 고려를 정벌하였다. 그 왕자는 볼모로 데려가고 왕은 몽골의 신하로 삼았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왕거(王昛), 그 아들 충선왕(忠宣王)의 이름은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였다.
그는 원 황제의 부마이며 신하로서 평생을 살았다. 그 뒤로 모든 고려 왕은 그랬다.
조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과연 명을 무너뜨린 에센은 조선을 지금처럼 가까운 우방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단지 카간의 위명을 화려하게 장식할 또 하나의 정복지로 전락할 것인가?
이 의제는 단지 조정에 모인 수백 명 사이에서만 논의되는 바가 아니었다.
―“호외요! 호외! 몽골이 명나라 황제를 무릎 꿇렸수다!”
―‘격변하는 봉건 세계여! 몽골은 깨어나고 명은 깊은 잠에 빠지는가!’
―‘작금의 북변은 어떠한가! 만주족 족장 이고납합에게 묻다!’
향민청에서 대중 계몽 용도로 간행하는 신문들, 그리고 친소련파 당파들이나, 각 지역의 협동조합들이 뿌리는 삐라들만 보아도 이미 몽골에 관한 이야기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국의 수백만이 이 소식 하나에 목을 빼고 그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천조(天朝)와 통교하면서도, 북경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하며, 두 조정의 세를 유지케 하여 야선에 대적케 함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러나 그 열기와 대조적으로, 결국 조정에서는 하위지가 정리한바 그대로의 밍숭맹숭한 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는 불안한 균형 위에 조선을 던져 놓는 것이니 결국 미봉책이다.
중국 대륙이 있고, 그 옆에 작은 반도로서 조선이 있는 한 이민족 제국이 등장할 때마다 영원토록 침공을 두려워해야만 하리라.
‘이를 근본적으로 타개할 방법은….’
하위지는 대강 그를 짐작하고 있었다. 대신파의 인원들이 모여 몇 날을 논의하였으나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것이 유학자로서 입에 담기 어려운 방향성으로 흘러갔기에 쉬쉬했을 뿐.
그럼에도… 그 ‘대안’을 염두해야만 한다.
그 사실을 하위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유학자답지 않게 내놓은 대안이다.
그렇다면 유학자답지 않은 방법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인민주의자와 친소련파 인사들이 점거했던 거리의 연단들.
하위지가 그 자리에 오르자 군중은 의외의 상황에 놀라 웅성거린다.
…오늘을 위한 수많은 밑 작업이 있었다. 신문을 발행하고,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연설장을 건설했다. 마치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하듯.
그 방안들은 대부분 실패하였으니, 오늘날에야 하위지와 벗들은 민족주의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마침내 하위지는 입을 뗀다.
“동포 여러분.”
적대감.
‘우리’가 아닌 자들에 대한 적대감.
* * *
“우리가 마주한 것은 하나의 거대한 위기요!”
어느 의원이 선언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산에서 이번 회기에 개최된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
특히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만큼, 한양에 있던 트로츠키까지도 여기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고립을 두려워하였고, 전 세계와 맞서 싸울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전 세계’가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로 몽골의 확장에 대한 대응책.
아마 조선에서도 지금 이 순간 열정적으로 논의되고 있을 주제이리라.
“당장,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조선과 소련은 다시 이 반동적인 중세 세계의 작은 섬으로 남을 뿐입니다!”
“옳소! 이를 타개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몽골을 막아라!”
특히 열렬히 호응하는 이들은 소련인들, 그것도 군 출신들.
영국과 프랑스와 일본이 오직 볼셰비키 혁명을 좌절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러시아에 상륙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
‘고립’과 ‘포위’라는 말에 여전히 본능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
…그리고 트로츠키는 자신의 오른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 또한 그 ‘겁에 질린 소련인’의 일원임을 깨달았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는 영원히 등장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몽골이 유럽 전체를 불태워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지’라는 공포가 모두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감으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동지들? 하고자 하는 말이 있소.”
한 사람이 연단으로 올라선다.
옛 사회혁명당의 거두, 러시아 혁명의 주역 중 하나,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와서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그야말로 거물.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
* * *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은 백성이 보는 것을 보며 백성이 듣는 것을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 하였으니, 하위지는 유자(儒者)로서 평생 민심이 곧 천명(天命)이라 배웠다.
허나 하늘은 저 아득히 먼 곳에 있으니 발 딛고 살아갈 땅과 나라를 쥐고 다스리는 것은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며, 백성들은 임금을 우러러 곧 나라님이라 하였다.
그런데 작금에 사회주의자들은 민(民)이 곧 나라라 한다. 그러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불경하게 속삭인다.
그들은 ‘나라’를 움직이기 위해서 백성들을 움직였으며, 백성들을 움직이기 위하여 신문을 뿌리고 연설을 하였다. 목청 놓아 노래 부르고 외친다.
마치 사회주의자들과 같이 하위지는 단상에 오른다.
그 또한 ‘나라’를 움직이려 한다.
그렇기에 외친다.
“동포 여러분! 현금에, 우리 조선은 위기에 처해 있소이다!”
‘우리 조선.’
이 땅에서 처음으로 백성이 나라 되는 순간이라.
* * *
스피리도노바. 그 이름을 들으면 누군가는 말한다.
―“위대한 혁명의 투사여! 옥중에서, 유형지에서 보낸 나날이 자유의 나날보다 길었던 붉은 테러리스트여!”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한다.
―“대책도 없는 망할 테러리스트! 결국 고위 관료 하나 무작정 암살한 거 말고는 업적이 뭐지?”
결국 지지자든, 반대자든, 스피리도노바를 설명하는 바는 똑같다.
22살 때의 화려한 총기 암살 사건을 통해 일약 스타로 떠오른 혁명가.
암살자, 투사, 테러리스트.
그 이미지가 그가 가진 정치적 자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