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0
10
호슨 공작은 활짝 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실 쪽에서 리엘라의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엘라가 공작저를 드나든 지 몇 달이 지났다. 이제 공작저의 사람들은 리엘라가 이곳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하인들과 함께 화분을 옮기는 모습을 보던 호슨 공작은 몸을 돌려 옆에 서 있던 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이 오는구나. 좀 도와다오.”
“네, 주인님.”
호슨 공작은 네아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멜다 부인은 남은 음식과 그릇들을 치우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공작의 건강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혼자 걸었던 공작이 이제는 점점 네아의 부축을 받는 시간이 늘어났다.
“괜찮으시려나.”
가족도 친척도 없으며 결혼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없는 공작이었다. 만약 공작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공작이 갖고 있는 재산을 생각하자 멜다 부인은 제 가슴이 답답해졌다. 공작의 재산을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던가. 조금이라도 얻어먹을 게 있다면 덤벼들 자들은 세상에 많았다. 그리고 걱정이 되는 것은 또 있었다.
이 저택의 하인들 역시 공작이 세상을 떠나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주인들은 분명 제 가신들을 데리고 올 테니까.
멜다 부인은 창문 너머의 정원을 보았다.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옷 여기저기에 흙이 묻은 리엘라가 보였다.
“공작님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공작이 직접 데려온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저렇게 매일같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은 리엘라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리엘라에게 많은 것을 물려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게 리엘라를 위한 길이니까. 적당한 돈이라면 모를까 이 모든 것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리엘라에게는 이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
호슨 공작은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고 나서야 그녀는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호슨 공작이 몸을 일으키자 옆에 있던 네아가 다가왔다.
“일어나셨군요. 물을 준비할까요?”
“그래. 그보다 지금이 몇 시지?”
“11시입니다.”
“오래도 잤군.”
호슨 공작은 혀를 찼다.
“그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느냐?”
“리엘라 아가씨께서 온실에 놔두었던 그 화분의 꽃이 빛이 더 강해진 것 같다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운 놈… 아니, 님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편지를 가져오너라.”
호슨 공작은 네아가 가져온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봉투를 건네받았다. 힘겹게 봉투를 연 호슨 공작은 잠시 편지지를 보더니 말했다.
“불을 좀 더 밝히거라. 어두워서 읽기가 힘들구나.”
그 말에 네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램프의 밝기는 평소와 같습니다.”
“…….”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호슨 공작은 들고 있던 편지를 네아에게 건넸다.
“읽어다오.”
“알겠습니다.”
네아가 건네받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보낸 편지 잘 받았네, 호슨 공작. 그런데 주인님, 아무래도 하운 대공작은 편지를 이 말 아니면 시작하지 못하나 봐요. 요즘 들어 편지가 무척 길어진 것 같군. 주면 고맙게 받아 읽기나 할 것이지 왜 길이로 말이 많아?”
“네 생각은 빼고 읽어다오.”
“네….”
네아는 다시 편지를 읽었다.
“이제 곧 수도로 돌아갈 예정이야. 당신이 원했던 대로 당신 대신에 북부 전선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약속한 것을 지키기를. 그럼 그날까지 건강하길. 추신. 보석의 방을 정리해 두시길 바람.”
이제 하운은 플레노트가 수면기에 들어가면 당분간 길게 파견될 예정은 없으니 본격적으로 제 옆에서 보석의 방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 일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던 호슨 공작은 이 자식이 누구더러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이냐며 화를 내고 있는 네아를 불렀다.
“네아.”
“네, 주인님.”
“내가 하운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러니까… 주기로 했던 것들을 주지 않으면 말이다.”
호슨 공작의 말에 네아의 눈이 반짝였다.
“세상에, 듣기만 해도 벌써 재미있어요. 그렇게 재미있는 일에 절 빼 두시면 안 돼요. 그놈이 억울해서 데굴데굴 구르는 꼴을 볼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호슨 공작은 하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상 무엇에도 무심한 표정이 없는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렇다 해도 말이지.’
호슨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저에게 보석들을 요구하던 하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넘겨야 할 보석이라면 가장 강한 자신에게 주고 가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냐며 오만하게 말하던 모습을.
‘어릴 땐 귀엽기라도 했지.’
제 아래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당신보다 강해질 거라고 바락바락 소리치던 하운의 모습을 떠올리던 호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인성 교육은 어릴 때 확실하게 하는 거였는데 바쁜 사이에 신경 좀 쓰지 못했더니 영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어른으로 커 버렸다.
‘심지어 겁쟁이로 자랄 줄이야.’
하운은 수도로 잘 돌아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며칠 머물지 않고 꼭 필요한 사람만 만난 다음에 다시 북부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는 듯이.
왕의 동생. 세기의 천재 보석술사. 수려한 외모에 강한 신체. 그는 손만 뻗으면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
하운을 생각하던 호슨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는 게 자신의 의무일 것이다.
“내일 공작가의 변호사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적어도 한 달은 이곳에서 머물며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전해. 그리고….”
말을 이어 가던 호슨 공작은 조금 괴로운 표정으로 마저 명령했다.
“…리엘라에게는 당분간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전해다오.”
***
“들어오세요, 아가씨.”
네아의 목소리에 리엘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갑자기 네아가 당분간은 저택에 오지 말고 온실에만 들러 달라는 공작의 명령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혹시 제가 뭘 잘못했냐고 물었지만 네아는 고개를 저을 뿐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공작저에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물어보니 호슨 공작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바쁘게 저택을 오가는 동안 리엘라는 한 걸음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저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지만 그보다 한 번도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호슨 공작이 걱정되었다. 하녀들의 말을 들으니 공작의 건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리엘라가 초조해하며 보낸 지 한 달째. 드디어 네아가 공작이 그녀를 만나길 원하다는 말을 전해 왔다.
리엘라는 조심스레 네아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호슨 공작이 보였다.
“공작님….”
“이런, 리엘라. 목소리가 왜 그런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군.”
공작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건만 결국 리엘라는 참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마차는 여전히 매일 가게로 리엘라를 데리러 왔지만 네아는 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네아가 공작의 옆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참다못한 리엘라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멜다 부인과 집사가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막아섰다. 공작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했다는 이유였다.
그 말에 리엘라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자유롭게 드나들다 보니 제가 정말로 이곳의 사람이 되었다 착각했다. 공작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밖에서 일하러 들어온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데.
리엘라가 훌쩍거리자 옆에 서 있던 네아가 재빨리 손수건을 챙겨 주었다. 그런 리엘라의 모습을 보면서 호슨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은 의사가 나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약의 힘을 빌리면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호슨 공작은 웃으며 훌쩍이는 리엘라를 달랬다.
“미안하네. 걱정 많이 했나 보군. 이래저래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던지라 자네를 만날 시간도 없었어. 사과의 뜻으로 며칠간은 자네하고 계속 함께 있고 싶어. 지겨워도 나와 좀 놀아 주게나.”
“안 지겨워요!”
“알았네, 알았어. 울지 말고.”
공작이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리엘라를 달래며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네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런 공작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리엘라는 며칠 지낼 옷과 물건들을 챙겨 다시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동안 보지 못했다는 섭섭함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일까. 공작은 자신의 옆방을 리엘라가 지낼 방으로 내어 주었다. 리엘라는 네아와 함께 하루 종일 공작의 옆을 지켰다.
리엘라의 생각과 달리 공작은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저택을 드나드는 변호사들이 자주 공작을 찾았으며 그때마다 공작은 그들이 건넨 서류를 보며 서명을 했다.
한 번 쓰러졌던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찾아오는 건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공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리엘라는 제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조금 친해지고 나서 리엘라가 공작님이 아직 힘드실 텐데 너무한 것이 아니냐 투덜거렸더니 변호사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들 역시 이러고 싶지 않지만 공작이 시킨 일이라 말했다.
공작은 시간이 날 때마다 리엘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리엘라는 책에서만 보았던 레드 드래곤 네이판타를 잡을 때의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고, 젊은 시절의 공작이 얼마나 제멋대로 살았는지도 들었다. 또한 지금 공작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는지도.
단지 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리엘라 역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마차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돌봐 주었던 조부모님의 이야기나 친구처럼 지냈던 친언니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살았다는 이야기. 브릭스 거리에 처음으로 가게를 냈을 때와 그곳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과 지금까지 지내 오고 있는 이야기 등등.
리엘라는 공작의 영웅적인 이야기에 비하면 제 이야기는 참으로 시시하고 재미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열심히 들어 주는 공작과 네아 덕분에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한참이나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 시계가 큰 종소리를 내었다. 자정이 넘은 것이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놀라 시계를 바라본 리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리엘라를 향해 손을 뻗은 공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손을 내렸다.
“찻잔과 접시는 제가 주방에 가져다 놓을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
리엘라의 인사에 공작은 힘겹게 일어나더니 다가와 리엘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잘 자게나.”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네아와 함께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리엘라는 한참이나 가만히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뭔가 다른 것 같았는데. 한참이나 공작의 인사를 떠올려 보던 리엘라는 무엇이 다른지를 알았다.
공작은 언제나 하던 ‘내일 보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