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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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의 손에 들려 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주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여름 오후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가 빠르게 그의 몸을 잠식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공포를 느낀 것이다.
루시안은 원탁회의의 의장이었다. 그 자리는 보통 제일 강한 보석술사가 맡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하운은 왕실 소속에 항상 전쟁터를 돌아다녔고, 호슨 공작은 정정한 주제에 나이 먹으니 숨도 쉬기 힘들다는 거짓말을 하며 그 자리를 루시안에게 넘겼다.
명예로운 자리였지만 동시에 할 일이 많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조언을 구한다는 핑계로 종종 공작저를 찾아와 호슨 공작의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자신이 귀찮아 도망쳤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호슨 공작은 툴툴거리면서도 서류를 읽고 필요한 보석이나 처리 방법을 조언해 주고는 했다.
덕분에 루시안은 호슨 공작의 특징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가 문을 두드리면 “루시안, 자네인가?”라고 말하던 짜증 섞인 목소리를.
조금 전, 벽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의심할 것 없는 호슨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럴 리 없어.’
본능적으로 느낀 공포에 얼어붙었던 머리가 천천히 분석을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공포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
호슨 공작이 만든 이 보석의 방은 이름이 방일 뿐 공작저의 별채였다. 본채와 긴 복도로 이어진 이곳은 육각형의 관(館)이었으며,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 벽은 이 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사실 관 가운데에 박혀 있는 거대한 기둥이라 봐도 무관하다.
호슨 공작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곧 여섯 달이 된다. 그 말은 이 벽 너머의 존재가 완전히 고립된 지도 여섯 달이 되어 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혹시 안쪽에서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하르메아의 브레스 정도가 되어야 겨우 녹는 벽, 열기 위해 수백 명을 불러 모아야 했던 까다로운 문, 여는 것만으로도 폭풍이 몰아쳤던 첫 번째 문까지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낮았다.
저 안에서 도대체 무엇이, 어떤 것이 여섯 달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보석을 이용하면 빛은 문제가 없다. 식량도 저장식의 형태에 보석의 힘을 빌리면 보관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문 하나 없는 관(棺)과 같은 곳에서 여섯 달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뚜벅. 스윽. 뚜벅.
루시안이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벽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걸음 소리는 정확히 루시안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안은 발걸음 사이에 무엇인가가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그의 머릿속에 생전 호슨 공작이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모습이 떠올랐다. 벽의 너머에 있는 것은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다가오던 걸음 소리가 벽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루시안도 숨을 멈췄다. 끔찍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고 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몸의 모든 뼈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고장 난 나무 인형처럼 힘겹게 한 걸음을 떼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몸을 숙여 하르메아가 뚫어 놓은 구멍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쪼그려 앉은 다리가 아파 오기 시작할 때까지도 건너편은 조용했다.
“하아….”
루시안은 저릿해진 다리를 두드렸다. 그러다 자신이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문득 깨달았다. 건너편 소리 하나에 얼어붙어 덜덜 떨고 있다니. 혼자 화장실 가기 무서워하는 꼬마도 아니고. 헛웃음을 흘리며 그가 구멍에서 귀를 떼고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루시안, 자네인가?”
아주 얇은 벽 너머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루시안은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몸을 돌렸다. 풀려 버린 다리가 제구실을 하지 못해 그는 마치 짐승처럼 바닥을 기었다. 문을 향해 구르듯 도망치는 루시안은 알 수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 틀림없는 호슨 공작의 목소리였다.
26. 공작의 무덤
루시안이 비명을 지르면서 보석의 방을 뛰쳐나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저택 안에 퍼졌다. 그리고 그가 호슨 공작을 외쳤다는 것도.
처음에 저택의 하인들은 또 공작님이 보석의 방 안에 짓궂은 장난을 쳤겠지, 생각하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듣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하얗게 질려 숨을 몰아쉬는 루시안을 본 순간, 그럴 때가 아님을 알았다.
잠시 후, 식당에서 멜다 부인이 차려 준 음식들을 먹던 하르메아가 양손에 고기가 잔뜩 끼워진 빵을 들고 달려왔다.
“무슨 일 있었어?”
야무지게 오른손의 빵을 한 입, 그다음에 왼손의 빵을 한 입 뜯어 물고 오물거리는 하르메아의 모습에 루시안은 어쩐지 울컥 화가 치밀어 소리 지르고 말았다.
“평소에는 잘도 옆에 있더니 도대체 왜 이럴 때 자리를 비우신 겁니까!”
소리를 지르는 루시안의 모습에 하르메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빛에는 ‘이 새끼 시끄럽네, 콱 먹어 버릴까’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왜! 밥 먹으러 갔었다!”
하르메아가 양손에 들린 빵을 루시안에게 휘두르려고 할 때 리엘라와 네아가 도착했다. 하르메아는 리엘라가 예전에 먹을 것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팔을 뒤로 숨겼다.
“루시안 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달려온 리엘라가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그에게 물었다.
“어, 그게….”
루시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하하, 벽 너머에 호슨 공작님이 살아 계시는 것 같더라구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만약 호슨 공작님이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세상은 아마 난리가 나겠지.
루시안은 이마를 짚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세간이 얼마나 발칵 뒤집어질지 보이는 것 같았다. 처음엔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이제는 속까지 쓰렸다. 이제 이 문제는 입을 닫고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할 게 아니었다. 루시안은 한참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운 대공과 지금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하운은 침대 헤드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며칠 사이, 방은 그가 기억하는 것과 점점 다른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제가 정신을 차렸던 날, 리엘라는 양손 가득 그의 옷을 사 왔다.
“멋대로 옷장을 열어 봐서 미안해요. 그런데 입을 만한 옷이 별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 왔어요.”
그러려니 싶었는데 리엘라는 다음 날에도 다시 그가 입을 옷과 쓸 물건들을 잔뜩 사 왔다.
텅 비어 있던 그의 옷장은 어느새 문이 잘 닫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놓인 모습 그대로였던 테이블 위에는 많은 문구와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책장 역시 다양한 분야의 책으로 가득 찼다.
이제 눈치라는 것이 조금 생긴 하운은 새 셔츠를 사 왔으니 한번 보라는 리엘라에게 이게 다 얼마냐, 돈을 내겠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음에 든다며 잘 입겠다고 말했다.
리엘라가 사 온 옷들은 전부 깨끗하게 한 번 세탁이 되어 있었다. 옷소매의 끝이나 안쪽에는 부드러운 실로 그의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이 옷은 하운의 것이라고 알려 주듯이.
하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리엘라가 왜 이렇게까지 가득 물건을 사 왔는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짐이 너무하다 싶을 만큼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겠지.
그는 제 옆에 놓여 있는 창세 신화 책을 집어 들었다.
어릴 적, 호슨 공작이 그에게 다 외우라며 준 책이었다. 아이들이나 읽는 이야기를 왜 봐야 하냐며 투덜거리는 그에게 공작은 무릇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이라 말하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생각하면 할수록 호슨 공작과의 기억은 굴욕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잔뜩 골이 나 제대로 읽지 않고 삽화 위에 낙서를 했다. 하지만 결국 할 일이 없어 삽화 뒤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운은 창세 신화에 푹 빠지고 말았다.
보석과 꽃의 탄생뿐만 아니라 빛으로부터 태어난 보석들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보석이 무엇인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그 힘을 갖게 되었는지…. 아침부터 밤까지 호슨 공작에게 굴려지다가도 저택으로 돌아가면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다음 그는 매번 이 책을 읽다 잠들었다.
전쟁터로 떠날 때,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을 챙기고 최대한 가볍게 짐을 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책은 배낭 안에 넣었다. 이것 이상의 물건들을 소중하게 챙길 자신이 없었다.
하운은 오랜만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당분간 깨어날 드래곤이 없으니 제가 수도에 머물겠다 결심하면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있다.
‘계속 공작저에서 지낼 순 없어.’
좋은 곳이다. 아름다운 곳이고, 리엘라도 가까이 있고. 하지만 밥벌레라 부르는 네아의 말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평생을 이곳에서 머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머물 다른 집을 알아봐야 한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파르멜 영지의 저택이 생각났다. 비를 피해 들어가게 되었던 자신의 저택.
‘거길 수리하는 게 좋겠군.’
하운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방을 살펴보았다. 리엘라가 어찌나 전투적으로 물건을 가득 사다 놓았는지 옷장과 서랍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옷과 물건들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리엘라가 준 것이니 무엇 하나도 버릴 생각은 없다. 그러니 이것들을 잘 놓아둘 장소가 필요하다. 파르멜의 저택이라면 충분히 이 모든 것을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리엘라가 한 번 정도는 더 그곳에 놀러 와 주지 않을까.
“…….”
하운은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뺨에 닿았던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복도를 쿵쿵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하운 대공님! 잠깐 저와 이야기 좀 하시지요!”
“루시안? 무슨 일인가?”
답지 않은 루시안의 모습에 놀라 그를 바라보자, 루시안은 저를 뒤따라온 리엘라와 네아가 방으로 들어오는 걸 확인한 다음 문을 단단히 잠갔다. 밖에서 당장 문을 열라며 닦달하는 하르메아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까지 질러 가며. 평소와 다른 루시안의 행동에 하운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루시안은 모두를 방의 한가운데에 모은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호슨 공작님이 무덤에 묻히는 모습을 본 사람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런 건 왜….”
“일단 대답부터 해 주십시오!”
그의 이가 다닥,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하운은 그가 극도로 공포에 질려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하운은 네아와 리엘라를 보았다. 자신은 호슨 공작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공작의 마지막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리엘라도 네아도 고개를 저었다. 리엘라가 말했다.
“아니요. 무덤에 갈 수도 없었어요. 지금도 가지 못하고요. 공작님께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싫다면서 유언장에 아무도 오지 말라 일러두셨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