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25
26
“아, 그건 이유가 있습니다. 보석술사들 사이에서는 가장 간편하고 확실하게 보석의 소유권을 이전받거나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결혼이라서 그렇지요.”
리엘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청혼이라는 것은 보석술사들에게는 인사와도 같아요. 결혼해 달라는 것은 너에게 내가 원하는 보석이 있다. 그러니 보석 좀 나눠 쓰자. 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루시안은 찻잔을 들면서 자신도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그냥 완전히 빈말은 아니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보석술사들의 청혼은 정말 믿으면 안 되겠네요.”
어쩐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석 때문에 결혼을 하다니. 아무리 그들에게 보석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결혼까지 수단으로 여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셔서 제가 거절했다고 하시면 되나요?”
“거절하실 겁니까?”
“네?”
놀라는 리엘라를 보면서 루시안이 웃었다.
“제가 거절당했다 하면, 분명 누군가가 다시 찾아올 겁니다. 보석술사들은 워낙 욕심이 많은 자들이라서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리엘라 양께서 대답을 보류했다고 말해 둘 생각입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제가 자주 찾아올 겁니다. 다른 보석술사들에게는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손 좀 주시겠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리엘라는 의아해하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능숙하게 리엘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그 순간 루시안의 어깨를 잡는 큰 손이 있었다. 리엘라도, 루시안도, 네아도 놀라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하운이 서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하운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을 한 채 이쪽을 보기 시작했다.
“하운 대공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루시안이 갑자기 나타난 하운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하운은 그 말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리엘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리엘라의 앞에 살짝 허리를 숙이더니 말했다.
“리엘라 테니어. 나와 결혼해 다오.”
순간 무시무시한 침묵이 가게 안을 휘감았다.
어디서는 포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어디선가는 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딸꾹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동전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리엘라와 하운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와, 미쳤어.”
파르페를 먹고 있던 네아마저도 작은 티스푼을 든 채 멍하니 하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루시안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대공님, 죄송하지만 지금 시기가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조금 전까지 보석술사들에게 청혼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 루시안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슬쩍 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리엘라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되더니 하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공님, 대공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당장….”
하운이 더 말하기도 전에 리엘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청혼은 정말 좋아하는 분께 하셨으면 좋겠어요.”
***
하운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아무리 자려고 눈을 감고 노력을 해도 계속해서 리엘라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청혼은 정말 좋아하는 분께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운은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리엘라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차라리 리엘라가 당황하거나 화를 내었다면 뭐라 말이라도 했을 텐데, 안타까워하며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라니.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하운은 멍청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하운을 두고 리엘라는 네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꽃집으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저번처럼 꼴좋다고 놀릴 네아조차도 고개를 저으며 하운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한참 후에도 하운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하운에게 루시안이 다가와 말했다.
“왜 하필 이럴 때 그런 소리를 하셨습니까. 운이 없는 걸 넘어서 이건 정말….”
루시안은 동정 반, 놀라움 반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다음 리엘라에게 조금 전, 보석술사들에게 청혼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하운은 루시안의 멱살을 잡을 뻔 했다.
‘그런 설명을 듣자마자 내가 그런 소리를 했으니.’
왜 안타까운 얼굴로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라고 말했는지, 보석의 방을 열면 원하는 보석을 주겠다 말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던 하운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는 이미 틀린 듯했다.
‘내가 왜 그랬지?’
리엘라가 어디 있는지 물어 찾아갔을 때, 루시안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려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아 루시안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걸 깨달은 순간 저도 모르게 달려가 떼어 내고 말았다.
하운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가 한 짓이지만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시안을 떼어 내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 놈 역시 요주의 위험 인물이니까. 그런데 내가 왜 결혼 같은 소리를 꺼낸 것일까.
‘루시안 때문이었나.’
루시안은 호슨 공작만큼이나 속이 시커먼 인간이다. 그런 녀석이 리엘라에게 접근했으면 보나마나 목적은 보석의 방이 틀림없었다.
‘그놈 집요한 놈인데.’
어제 만났던 루시안의 말이 생각났다. 리엘라가 돌아간 뒤에 루시안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더니 곧바로 돌아가 버렸다. 그놈은 오늘도 리엘라를 찾아올 것이다. 그놈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리엘라의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리엘라가 꺼려 할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옆에 있을 수 있지?
하운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의 주인은 하운의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하늘이 밝지도 않은 이른 새벽이다. 누가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그가 경계를 하며 문 앞으로 다가갔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운은 재빨리 제 보석들을 챙겼다.
북부 전선에 있을 때는 바람 소리에도 곧바로 일어날 정도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수도에 돌아오고 나서 너무 해이해진 자신을 반성했다.
똑똑똑똑.
조금 전보다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적어도 자신의 기척을 숨길 생각은 없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하운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을 두드린 사람이 말했다.
“대공님.”
밖에 서 있는 것은 리엘라였다.
하운은 잠시 눈을 끔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지? 리엘라가 왜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이른 시간에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도 따지는 듯한 목소리에 리엘라가 물러서자 하운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이 시간에 리엘라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리엘라는 당장 어딘가 갈 모양인지 외출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리엘라는 입을 다문 하운 앞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결심했다는 듯이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갑작스럽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리엘라는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슨 일이지? 들어 보기는 하겠다.”
하운이 대답하자 리엘라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저와 같이 꽃 시장에 좀 가주세요!”
07. 꽃 시장
어제 리엘라는 저택으로 돌아온 다음 남아 있던 변호사들을 찾아가 말했다.
꽃 축제가 자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제가 그 행사의 출전 자격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서. 그러니 더 이상 경고장을 받지 않기 위해 매일 꽃집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도.
“그건 좀….”
변호사들은 곤란해했다. 리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이 저택에 남아 리엘라에게 유언 집행에 대해서 완벽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일이 꽃 축제 때문에 한참이나 더 길어지게 되었으니 곤란하겠지.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엘라의 예상과 달랐다.
“그렇게 되면 하운 대공님이 더 오래 저택에 머무르실 텐데 불편하지는 않겠습니까?”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변호사들이 리엘라에게 물었다.
“음…불편한 건 저보다 대공님 쪽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다른 목적이라고는 해도 청혼을 그렇게 딱 잘라 거절했으니 자신을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공 정도 되는 이가 거절당하는 것이 기분 좋을 리가 없으니까.
다행히 변호사들은 리엘라의 뜻을 존중해 주었고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네아와 동행할 것을 부탁했다. 당연히 꽃 시장은 네아와 함께 갈 생각이었다. 자기 전에 부탁하자 네아는 그곳에는 처음 가 본다면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고 약속된 시간이 되어도 네아가 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을 자나 싶을 정도로 네아는 언제나 밤늦게 자신의 방을 둘러보고 갔고, 저택을 돌아다니며 안전을 확인했고, 새벽이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리엘라의 방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런 그녀가 약속을 잊을 리가 없었다.
걱정되어 네아의 방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제가 몸이 좋지 못해서….”
더듬더듬 말하는 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에는 눌린 신음 소리까지. 놀라서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문을 두드렸지만 네아는 열어 주지 않은 채 안에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늘만 쉬면… 될 거예요.”
억지로라도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안에서 어서 가 보라는 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네아의 상태도 걱정이 되었고 점점 꽃 시장이 문을 열 시간도 가까워져 왔다.
“날이 밝으면 바로 의사를 부를 테니… 저는 걱정하지 말고 가 보세요.”
어쩐지 네아가 어서 자신이 가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리엘라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변호사들은 리엘라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냈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뭐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꼭 네아와 함께 나갈 것. 만약 어떠한 이유로 네아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보석술사와 함께 나갈 것.
이 저택에 네아를 제외하면 보석술사는 리엘라가 아는 한, 한 명밖에 없었다.
27յη
리엘라와 하운을 태운 마차가 새벽길을 달렸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하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리엘라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나?”
“네? 아, 저는 괜찮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이런 무리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운이 부르는 말에 리엘라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다. 잠들지 않았던 걸까. 하운은 조금 충혈된 눈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보다 네아가 아프다고?”
“네.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고 신음 소리도 내는 것을 보면 많이 아픈 것 같았어요. 나오면서 만난 멜다 부인에게 곧바로 의사를 부르도록 부탁드렸는데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네아가 아프다라….”
하운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리엘라는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택에서 다른 보석술사분이 계시지 않아서….”
사실, 하운이 정말로 함께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제도 당장 자신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저를 보면 불쾌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했는데 하운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알겠다며 바로 방을 나섰다.
그나마 물어본 것이라면 왜 네아가 함께하지 않았나. 그것뿐이었다.
“다른 일이라면 참았을 텐데 한 번만 더 경고를 받으면 축제 참가 자격이 취소되거든요.”
“참가 자격?”
“두 달 후에 열리는 꽃 축제의 참가 자격입니다. 작년까지 추첨에 탈락했는데 올해 처음으로 붙은 거라 포기할 수가 없어요.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경호를 부탁할 다른 보석술사 분을 찾겠습니다. 다시는 대공님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다른 보석술사?”
“네, 오늘 루시안 님께서 다시 찾아오신다 하셨으니 원탁협회의 회장이신 그분께 소개라도 부탁드릴 생각이예요. 아, 꽃은 잘 숨겨 둘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리엘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찾을 필요 없어.”
“네?”
“찾을 필요 없다고. 내가 계속 같이 갈 테니까.”
툭 내뱉는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하운을 바라보았다. 하운은 그런 리엘라의 얼굴을 보며 마저 말했다.
“그러니 다른 보석술사 따위 옆에 둘 필요 없어.”
***
마차는 쉴 새 없이 달려 꽃 시장에 도착했다.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하운 역시 조용히 가는 것이 경호에 더 편하다고 해서 크고 화려한 마차가 아닌 길거리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마차를 타고 왔다.
꽃 시장 근처에서 내린 리엘라는 마부에게 시장에서 받은 번호표를 주고 마차를 세워 둘 곳을 알려 주고 언제까지 돌아오겠다고 말한 다음 모자를 푹 눌러썼다. 혹시라도 알아볼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이네.”
몇 주간 자신은 온갖 일을 겪으면서 정신이 없었는데. 꽃 시장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전국 각지에서 도착한 꽃들이 마차 뒤 수레에 실려 시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 이슬을 맞은 꽃들이 저마다 다투어 좋은 향기를 뿜었다.
꽃 시장이라고 해서 꽃만 파는 것은 아니다.
꽃이 있다면, 그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 주기 위해 나뭇잎이나 가지 또는 다른 풀들이 필요하다. 소재라고 불리는 것들 역시 꽃만큼 중요했다. 소재를 실은 마차 역시 꽃 마차들처럼 시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소재 외에도 포장을 위한 종이와 리본, 그 외의 장식을 실은 마차, 그리고 화분들과 흙을 실은 마차도.
그사이 손이 빠른 사람들은 벌써 마차에서 물건들을 내리고 있었다.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 그리고 배달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가 섞여서 꽃 시장은 시끌벅적한 모습이었다.
“이쪽이에요.”
리엘라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운의 옷을 잡아끌었다.
“언제나 이렇게 바쁜가?”
“오늘이 유독 바쁜 날이기는 해요. 수입 꽃이 들어오는 날이거든요. 이런 날은 희귀한 꽃들의 경매도 열리기 때문에 꼭 꽃 가게를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리엘라도 수입 꽃이 들어오는 날은 가능한 한 꽃 시장에 들렀다.
워낙에 가격이 비싼지라 브릭스 거리에서는 들여놓아도 잘 팔리지 않아 구경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처음 보는 화려한 색과 처음 듣는 이름은 그것만으로도 가 본 적 없는 곳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1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는 산에서 피는 꽃과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피어나는 꽃까지 다양한 꽃이 존재했다.
“플레노트의 레어보다도 정신없군.”
리엘라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놀란 빛을 숨기지 못한 하운이 말했다. 리엘라는 그런 하운의 표현이 신기했다. 하운은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다른 보석술사와 달리 수도에도 별로 돌아오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북부 전선에서 머물며 플레노트를 막고 있었다고.
지금이야 플레노트가 수면기에 들어가서 하운이 수도에 머물렀지만 그는 곧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드래곤과 몬스터들을 상대하러 가겠지. 아마도 그렇기에 하운은 호슨 공작의 보석을 더욱 바라고 있을 것이다.
‘대공님이 보석을 받는 게 맞는 일인 것 같긴 한데.’
그때 누군가 리엘라의 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꺼번에 몰리는 사람들 때문에 입구에는 사람들이 서로 바짝 몸을 붙인 채 힘겹게 이동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밀어 대는 사람들 때문에 가운데 낀 리엘라는 팔을 오므리며 낑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하운은 가볍게 자신의 쪽으로 잡아끌었다. 하운의 옆에서 누군가가 ‘걸리적거리지 말고 좀 비켜 보쇼!’라고 외쳤다. 그 말에 리엘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저씨, 빨리 가요!’
여전히 소리치는 남자를 향해 리엘라는 진심을 담아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몰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소리치던 남자는 곧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리엘라와 하운도 입구를 빠져나와 시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리엘라는 사람들에 밀려 구겨진 옷을 정리하다 제 옆에 서 있는 하운을 보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뭐가?”
“조금 전의 사람이라거나….”
“상관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더 안전하지.”
그런가? 어쨌든 하운이 신경 쓰지 않는다니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런 곳에서 무례함을 따질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니까. 하운에 대한 근심을 조금 던 리엘라는 시장 안을 바라보았다.
나무 팔레트가 여기저기 높게 쌓여 있었고 그것들마다 녹색 모자를 쓴 사람이 올라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녹색 모자는 경매를 담당하는 중개인이라는 표시였다. 그들 앞에는 꽃 한 다발이 양철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자신이 어떤 꽃을 팔고 있는지 알려 주는 셈이었다.
중개인이 꽃을 들어 올리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뒤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나무판으로 가린 제 손을 흔들거나 손가락을 올렸다.
“이쪽이 꽃 경매장이에요. 최대한 빨리 사겠습니다.”
리엘라는 이런 정신없는 곳에 하운을 오래 세워 둘 수 없다 생각하며 경매인들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 뒤를 하운이 재빨리 따라 걸었다.
“일단 장미하고 카네이션, 리시안셔스 세 가지 색에 프리지아….”
리엘라는 브릭스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꽃들을 중얼거리며 그 꽃들을 파는 중개인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붉은색의 장미가 보였다. 제일 잘 팔리는 꽃이었기에 몰린 사람들도 많았다.
중개인이 경매품을 소개하며 경매가 시작되자 서 있는 사람들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이렇게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이 경매에서 꽃을 받아 오는 가게에서 사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가게를 열지 않았던 것을 보충할 영수증이 필요하니까 오늘은 많이 사야 해.’
꽃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가게가 어느 정도 이상의 꽃을 거래했다는 증거도 필요했다. 그러니 오늘은 많은 꽃을 사기 위해 경매장에서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중개인은 양손을 올리며 손뼉을 세 번 쳤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꽃이 담겨 있던 나무 상자를 옮겼다. 리엘라는 재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가 제 마차의 번호를 알려 주었다. 리엘라는 그중에 세 상자를 낙찰받았다. 운반하는 사람들이 이 꽃들을 바로 마차로 옮겨 줄 것이었다.
“장미는 이걸로 충분해요. 다음에는 프리지아!”
얼마 지나지 않아 운반하는 사람들이 봉오리가 잔뜩 맺힌 프리지아 다발을 들고 떠났다. 이제 다음에는 뭘 사야 하지? 예쁜 거! 싱싱한 거!
다음 사냥감을 찾아 번뜩이는 눈빛으로 안을 둘러보던 리엘라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스위트피!”
옅은 분홍색과 보라색이 아름답게 섞인 스위트피가 근처 물통에 꽂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름대로 달콤한 짙은 향이 훅 올라왔다. 리엘라는 홀린 듯이 다가가 스위트피를 살펴보았다. 줄기도 굵고 튼튼하며 얇은 꽃잎도 물이 잘 올라 싱싱했다.
사실 스위트피는 리엘라가 잘 사는 꽃이 아니었다. 꽃이 쉽게 상하는 편이라 오래 보관하기가 힘들고 카르디아의 토양과는 잘 맞지 않아 예쁜 품종은 전부 외국에서 개량한 것이었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탓에 그만큼 값이 비쌌다. 그렇기에 따로 주문이 있을 때나 혹은 값이 조금 내려갔을 때만 사던 꽃이다.
리엘라는 바쁘게 움직이는 중개인의 손을 보았다. 스위트피의 가격은 여전했다. 원래 예쁜 게 비싼 법이다. 그게 수량이 적으면 더 비싸고.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품질 좋은 스위트피였기에 가격은 평소보다도 비쌌다.
‘가져가도 다 팔리진 않을 텐데.’
리엘라는 고민하며 다시 꽃을 보았다. 물통 안에 있는 스위트피가 어쩐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나 예쁜데 그냥 가려고?
그사이에도 경매는 진행 중이었다. 순식간에 남은 물량이 훅훅 줄어들었다. 다들 좋은 걸 보는 눈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엘라는 손을 들었다. 나 돈 있는 사람이야! 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