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모두 좀 나서야겠소.”
검성 엽무백이 삼림 안쪽에 자리한 작은 전각들을 향해 소리쳤다.
조문신의 얼굴이 흠칫 떨리더니 긴장감이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북검회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존재했던 곳이 바로 소회림이다.
백학검선 같은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이인이 얼마나 더 모여 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곳, 그 면면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곳을 만들고 관리해온 검성뿐이 없었다.
“드디어 밥값을 하라는 것이구먼, 케케케케.”
쇠를 갈아먹은 것처럼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토해내며 나타난 꼽추 노인.
잔뜩 굽은 등에다가 축 늘어진 두 팔은 비정상적으로 길어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였다.
조문신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분명 낯이 익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입에서 비명 섞인 음성이 토해졌다.
“허억! 청마수(靑魔手)!”
청마수 갈곤.
그 이름을 기억해낸 조문신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사십여 년 전, 그러니까 조문신이 파릇파릇한 이십 대 초반이던 그 시절에, 강호무림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두 글자가 바로 갈곤이란 이름이었다.
그의 두 손에 찢겨 고깃덩이가 된 무인들의 숫자만 해도 기백 명이 넘으며, 무림공적으로 지목된 후에도 수백 명을 더 주살한 뒤 홀연히 사라져 버린 대마두.
그 후로도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종적을 찾기 위해 수많은 정도 문파가 피땀을 흘렸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그는 어디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 청마수 갈곤이 검성의 그늘 아래, 그것도 북검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에 조문신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크게케케케, 노부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구나.”
갈곤은 창백한 얼굴의 조문신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지만, 조문신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조문신의 눈가는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과연 북검회가 온전할 수 있을지, 하지만 그런 걱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달그락! 달그락!
돌덩이가 부딪히는 기분 나쁜 소리에 조문신이 고개를 돌렸다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헉!”
한눈에도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마두가 보였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쭉쭉 갈라진 얼굴의 중년 거한, 드러난 살갗이 모조리 회백색 돌덩이를 보는 듯, 마치 석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기괴한 외향만으로도 누군지 몰라볼 수가 없는 인물, 사령신(邪靈神) 장패였다.
얼마 전 용천장이 방심한 틈을 타 각기 청해와 사천 지역을 장악한 세력이 유령곡과 혈총이다.
그 유령곡과 혈총은 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천사맹이란 사파의 절대세력에 복속되어 있었다.
당시엔 천사맹의 힘이 무시무시해 정도무림 역시 무림맹을 만들어 그들과 대치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 천사맹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천사맹주 보다 더욱 더 거대한 공포로 군림했던 이가 천사맹의 이인자 사령신 장패였다.
석화신공(石化神功)이란 희대의 기공을 익혀 온몸이 금석처럼 단단해진 것은 물론, 도검불침의 몸으로 수많은 무림맹 고수들을 짓이겨 죽인 것으로 아직까지도 흉명이 남아 있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천사맹의 해체와 함께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 청마수 갈곤 보다 무게감이나 이름값이 훨씬 높은 이가 사령신 장패였다.
“호호호홋! 검성께서 드디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다니.”
간드러진 여인의 웃음이 들리고 조문신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
조문신의 얼굴이 어김없이 놀람을 표출했다.
하지만 전과는 또 다른 형태의 반응이었다.
여인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딱이고 양물이 움찔할 만큼 뇌쇄적인 몸을 가진 여인.
죽립을 길게 써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느껴질 만한 여인이었다.
요염한 자태를 숨기지 않고 걸어오는 여인, 그 순간 그녀의 발목을 타고 장정의 허벅지보다 더 굵은 시커먼 뱀 한 마리가 타고 올랐다.
“으억? 묵린사(墨鱗蛇)?”
이마에 한자 길이의 뿔이 솟은 뱀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여인의 몸을 천천히 타올랐다.
색요(色妖) 소부용, 수천 명에 달하는 사내의 정혈을 갈취해 죽였다는 희대의 악녀, 그녀 또한 무림 공적으로 지목당한지 수십 년이 넘었고 생사가 불분명하다고 알려진 극악한 요녀였다.
때마침 묵린사의 날름거리던 혀가 그녀의 죽립을 살짝 들췄다.
“!”
조문신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육감적인 몸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은 환골탈태해 젊어졌으나 얼굴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쭈그렁 할머니가 된 소부용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다.
소회림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단지 그들 셋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면면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하나같이 사특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노인에다, 외팔이인데 등에 쌍검을 멘 중년 사내, 철퇴를 허리춤에 꽂고 나온 장한…….
그 사이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결옥에서 시비 일을 하던 여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망림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자객집단 환락루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조문신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검성의 얼굴에 서린 미소는 섬뜩하리만큼 차가웠다.
이런 날을 대비해 수십 년 동안 공들였던 이들이었다. 약점 하나씩은 완벽히 붙잡고 있는 이들이라 그들을 버릴 패로 사용하는데 망설일 것이 전혀 없었다.
“화산파를 척살해주시오. 그럼 자유를 줄 것이니.”
“!”
“!”
일제히 격한 반응이 왔다.
하지만 누구도 반문하거나 따지는 이는 없었다.
검성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휙 하고 허공에 뿌렸기 때문이다.
일제히 날아가 모여 있던 이들의 손에 떨어진 것은 자그마한 환약이었다.
“내공의 금제가 풀릴 것이외다. 물론 하루뿐, 끝나면 해독약도 내어 줄 것이고.”
검성의 말을 다 듣기도 전 여기저기서 허겁지겁 환약을 삼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구오오오오!
화라락! 파아앙!
여기저기서 폭풍 같은 기세가 하늘까지 치뻗어 오를 것처럼 터져 나왔다.
조문신의 낯빛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공력을 회복한 이들이 맹렬한 살의를 지닌 채 검성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자칫 화산파가 아니라 검성을 향해 단번에 공격을 감행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검성은 태연했다.
아니 이전까지 존대와는 다른 거침없는 명령이 내려졌다.
“화산파다. 거길 없애면 완벽한 자유다. 물론 몸 안에 독도 말끔히 제거해 줄 것이다.”
맹렬하던 적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케케케! 하루면 충분하지. 화산파를 없애고 네 놈의 목을 따기엔.”
청마수 갈곤이 제일 먼저 신형을 쭉 뽑아 올렸다.
“호호호홋! 엽가야.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네 놈을 통째로 우리 묵아에게 먹이로 줄 것이니까.”
늙은 노파의 얼굴이 점점 이십 대의 요염한 여인으로 변해가는 소부용의 목소리였다.
날름거리는 묵린사의 혓바닥이 그녀의 얼굴에 진득한 타액을 묻힐 즈음, 그녀 역시 소회림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달그락, 달그럭.
사령신 장패는 말없이 검성을 한 번 노려본 뒤 발걸음을 뗐고, 그때마다 돌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앞으로 나가자 가로막고 있던 굵은 삼나무들이 후드득 꺾이며 길이 만들어졌다.
그 뒤를 따라 소회림에 모여든 이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성은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서야 뒤늦게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했다.
철컹, 철컹, 철컹!
커다란 수레바퀴를 끌고 있는 초로인이었다.
바퀴가 구를 때마다 수레 위의 쇳덩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으며 그만큼 많은 쇳덩이가 수레 위에 뒤엉켜 있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초로인, 그는 천천히 수레를 끌며 새로 만들어진 길로 나아갔다.
검성의 미간이 수레 끄는 초노인을 보며 잔뜩 일그러졌다.
백학검선과 더불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인물이며 그 정체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문신이 오히려 노인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철노(鐵老)가 여기 있었습니까?”
북검회 무인들의 병기를 만드는 대장간 주인이 바로 철노였다.
근 삼십 년 동안이나 철방의 주인이었던 노인, 은퇴했다고 알려진 게 몇 년 전인데 소회림 안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조문신이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검성 또한 그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고.
다만 철방을 맡기 전에도 뭔가 사연이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걸 알지 못한다는 것이 찜찜했다.
그럼에도 소회림 안에 머물게 했던 이유는 그가 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기 때문이었다.
손과 발 역시 참근단맥 형을 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철방의 주인이 된 것이 이상하다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위협이 되지 않고, 또 때때로 귀한 검을 한 자루씩 만들어 주니 소회림 안에 머물도록 허락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기를 잔뜩 쌓아 놓고 밖으로 나선다?
뭔가 알 수 없는 싸한 느낌을 받는 검성이었다.
“가보셔야지요?”
조문신이 조심스레 물어 퍼뜩 정신을 차린 검성.
“먼저 가게.”
“?”
“비겁한 암습으로 내상을 입었네. 마지막 운공을 한 후 온전한 몸으로 저들을 친히 단죄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