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98
98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거대한 외침.
“태사조님을 뵈옵니다!”
턱을 바짝 치켜든 채 입가에 히죽 미소를 짓는 소년 염호의 눈이 대평원 가득한 화산파 속가 제자들을 훑어갔다.
염호의 입꼬리가 살짝살짝 떨렸다.
‘그래, 그래. 니들 마음 다 안다.’
이제 판은 다 깔았다.
염호의 눈이 대평원의 반대쪽 절반을 메우고 있는 이들을 향했다.
용천장의 무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 살벌하고 압도적인 기세는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들.
일대제자들의 어기충소와 초상비.
연이어 어검비행을 펼치며 나타난 장로들이 연타로 펼친 검강의 향연, 그때 이미 용천장 무인들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입가경,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염호의 허공답보였다.
사기가 들끓고 전의가 충만하다 못해 터져나가기 직전으로 끓어 올라버린 화산파 속가들이 일치단결하여 ‘태사조’를 외치니 용천장 무인들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전장을 숱하게 누빈 무인들이다.
지금의 상황이 예상을 훌쩍 넘는 범주이며 물러나 다음을 기약해야 할 때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염호 역시 한눈에 그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있었다.
‘어쭈~! 눈알 굴리는 거 봐라. 미쳤냐? 니들을 곱게 보내게.’
염호는 오늘 제대로 한 번 푸닥거리를 할 심산이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화산파를 향해 수작질을 부릴 수 없도록.
실수는 장평의 일 한 번이면 족했다.
그 작은 오판으로 온몸의 피가 들끓고 뼈마디가 전부 짓이겨지는 슬픔과 고통을 맛보지 않았는가.
염호의 눈이 차갑게 변해 용천장을 향했다.
바짝 치켜든 얼굴로 스윽 내려깔린 염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마다 움찔거리는 용천장 무인들.
일천 명에 달하는 섬요당과 굉뢰당은 말할 것도 없고, 멸사호군이라 불리며 사파와의 전장을 누벼온 비환영, 혼문영, 백변영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전장을 겪어봤기에 그들이 더 잘 아는 것이다.
뽀얀 얼굴에 아직 솜털이 다 사라지지 않은 소년의 눈빛에 담긴 명백한 의지를.
‘좋지 않아! 정말 좋지 않아!’
백발홍천 방자룡의 눈빛이 더없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이곳 대평원에서 용천장 무인들을 지휘하는 이가 바로 방자룡이다.
세수 칠십이 되는 동안 말도 못할 위기를 숱하게 겪은 방자룡이 지금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서총관! 이건 자네의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서귀를 찾아봐야 말짱 헛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원망의 감정이 생기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검신의 제자만 맡아주면 된다고 했다.
그저 시간만 끌면 되는 일.
그 사이 서귀가 용천위와 천인혈을 이끌고 화산에 잠입, 구금되어 있는 장주 연산홍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용천위와 천인혈이야말로 실질적인 용천장 최강의 무력집단이다.
거기에 금강영왕 서귀가 포함된 전력이라면 화산파 따위는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쓸어버릴 힘이란 판단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오직 장주 연산홍의 안위였을 뿐.
“장주는 빼내지도 못했는데……”
방자룡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어물쩍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죽기 살기로 싸워도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전력의 상대, 이미 고절한 무공 절학을 한껏 뽐내며 나타났으니 그들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검비행과 검강이라니…… 자칫 본장 전력이 반 토막이 나겠구나.’
그냥 시간만 끈다고 될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는지, 용천장과 방자룡의 구명줄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내려왔다.
“신공사자를 영접하라!”
“신공사자를 영접하라!”
천래성축도의 행렬이 쥐죽은 듯한 침묵을 산산이 박살내며 염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공사자를 영접하라!”
“신공사자를 영접하라!”
기다란 행렬의 오른쪽 사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왼편의 여인들이 화답하듯 소리쳤다.
염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요것들 봐라?”
까마득한 과거, 천살마군으로 세상을 종횡할 때도 가장 치를 떤 것이 광신도 집단이었다.
혹세무민 어쩌구 하는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지들이 무얼 믿든 뭘 하고 살든 무슨 상관이랴, 다만 맹목적으로 변한 광신도들이 얼마나 황당한 짓들을 서슴없이 벌이는지 눈앞에서 지켜본 탓이다.
‘하여간 저것들은 말이 안 통하는 종자들야! 으드득!’
염호가 이빨을 갈았다.
겪어봤으니 더 잘 안다. 그래서 또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었다.
저런 놈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신공사자를 영접하라!”
“신공사자를……!”
“조용!”
염호의 나직한 음성.
하지만 대평원 구석의 누구에게나 또렷하게 전해진 목소리였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소리쳐 떠들던 천래성축도 행렬이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염호가 발을 살짝 들더니 바닥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쿠쿵!
염호의 발끝을 따라 순식간에 시작된 균열.
쩌-어-억!
땅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헉!”
“으억?”
“아악!”
천래성축도 행렬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파도에 휩쓸리듯 푹푹 땅속으로 꺼지기 시작하는 기다란 행렬.
화산파의 속가제자들도, 맞은편에 대치 중이던 용천장의 무인들도 모두 두 눈을 치켜뜨고 턱이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수 십장 땅을 갈라버리는 공력.
거기다 천래궁이란 미지의 집단을 상대로 일말에 망설임도 없는 과감한 출수까지.
상황이 어찌 되었든 상대는 그 천래궁이 아닌가.
여타의 무림인이 아니라 일반백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다.
신도의 수가 대륙 전역에 쫙 깔려 황궁이나 조정에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집단 천래궁.
거기에다 그 배경이나 출신 모두 온갖 신비로움으로 점철된 존재 ‘요천’이란 거인까지 있는 곳.
“크으윽!”
“으윽!”
“아아악!”
대평원을 가르며 깊게 파인 구덩이 안.
천래궁 신도들이 아우성을 쳤으나 염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큰 목소리를 토해냈다.
“조용해라!”
역시나 그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귓속으로도 또렷하게 꽂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일장 깊이 파인 구덩이 속에 허우적거리는 천래궁 신도들은 여전히 비명과 고통스런 신음만을 토해냈다.
그 순간 염호의 얼굴이 조금 팍 일그러졌다.
천천히 다시 들어 올려진 염호의 발.
쿠웅!
쩌-쩌-적!
푹 꺼진 구덩이 양쪽이 들썩 치솟았다.
파도처럼 치솟은 좌우 흙벽이 천래궁 신도들을 그대로 파묻어 버릴 것처럼 덮쳐왔다.
“으으으악!”
“아아아악!”
“사…살려…!”
거대한 흙벽을 보며 눈이 뒤집혀 소리치는 천래궁 신도들.
“조용! 확! 진짜 묻어버린다!”
“……!”
“……!”
이전과 달리 천둥처럼 들려온 염호의 목소리.
그리고 밀려들던 흙벽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뒤엉킨 천래궁 신도들은 그때부터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염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스윽 훑었다.
화산 속가 제자들이나 용천장 모두 구분할 것도 없이 침만 꼴깍 거리는 것이 보였다.
바로 등 뒤에 선 장로들이나 장문인 진무, 매화검수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게 몰천력이다, 이놈들아!’
환골탈태에 이어 반로환동까지 해 버린 염호에게서 이제 마공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정공과 마공이 합일해 전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염호, 이제 천살마공의 신력인 몰천력을 마음껏 쓴다 해도 누구 하나 알아볼 수 없고 거리낄 것도 없었다.
씨이익!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가며 염호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인생 뭐 있나? 신나게 사는 거지!’
그때였다.
길게 파인 구덩이 속에서 누군가 슉 하고 날아오른 것.
“신공의 위엄을 무너뜨리고, 네놈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흙더미에 파묻혔다 뛰어오른 인영이 잠깐 허공에 둥실 뜬 채 소리쳤다.
천래성축도 행렬이 신공사자라 떠받들던 미청년이었다.
그것이 부운답신의 경공술이라는 것은 굳이 염호가 아니라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기가 잔뜩 죽어 구덩이 속에서 달달 떨고 있던 천래궁 신도들의 눈이 다시 한 번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떠올랐던 신공사자가 바닥에 착지한 뒤 신도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신공은 천지를 바꾸니! 신도들은 나를 따라…… 허걱!”
빽 소리치던 미청년이 갑자기 숨이 막히는 소릴 내질렀다.
쓔우욱~!
“으어어어!”
보이지 않는 뭔가에 잡아끌리듯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끌려가는 신공사자.
턱!
신공사자의 목덜미를 잡아챈 염호의 눈이 일순간 섬뜩한 빛을 발했다.
파르르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거리는 신공 사자의 눈이 염호를 잠시 향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순식간에 내리깔린 신공사자의 눈.
“아직 나 할 일 많다.”
“…….”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알았지?”
끄덕끄덕!
미청년 신공사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한 손으로 신공사자를 번쩍 치켜들고 있던 염호가 다시 한 번 오른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조금 전 두 번의 발길질과 달리 염호의 얼굴에 시퍼런 힘줄까지 불끈거렸다.
콰쾅!
슈슈슈슈슈슉!
일순간 구덩이 안쪽에서 수백 명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으어어어!”
“아악!”
“어허헉!”
용수철에 튕기듯 땅밖으로 날아오른 천래궁 신도들의 입에서 기겁한 비명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사방팔방 바닥으로 내리꽂힌 천래궁 신도들이 또다시 신음과 비명을 토해내려는 순간, 예의 그 천둥 같은 염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들어갈래?”
“…….”
“…….”
바닥에 나뒹굴던 천래궁 신도들이 일제히 주둥이를 다물고 납작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제야 염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광신도를 다루는 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는 것을 확인한 즐거움이 염호를 웃게 만들었다.
‘하여간, 요것들은 꼭 겪어 봐야지 알지.’
염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일어섯!”
나뒹굴던 천래궁 신도들이 군기 바짝 든 병사처럼 일제히 몸을 세웠다.
“뒤로 돌앗!”
처처처처척!
제식을 받은 병사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
“열 셀 동안 사라진다. 남은 놈은 파묻는다.”
“……!”
“하나! 둘! 셋…….”
후다다닥!
꽁지가 빠져라 뛰기 시작하는 천래궁 신도들 덕에 대평원 가득 먼지가 폴폴 피어올랐다.
지켜보는 화산파 속가나 용천장 무인들의 표정이 아연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도처를 찾아다니며 기둥뿌릴 뽑아 남도련을 붕괴시킨 검신 태사조나, 천래궁의 행차를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만들어 버린 그 제자의 행보나 모두 상식을 넘어서는 파격으로 느껴졌다.
“저, 저기요… 저, 저도 좀……”
여전히 염호의 손에 붙들려 있는 미청년이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염호가 청년을 바닥에 살짝 내려놓은 뒤 옷가지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었다.
염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거리는 미청년.
“가라~!”
“감사합…!”
청년은 말도 다 내뱉지 못하고 냅다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잠깐!”
우뚝!
뛰는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진 신공사자.
“근데 니들, 왜 왔냐?”
미청년이 화들짝 놀라더니 땀을 삐질 거리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청년의 손에는 자주색 비단으로 곱게 접히고 번쩍이는 황금실로 매듭이 묶인 봉서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이걸 전하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다가서는 미청년 신공사자.
염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눈앞의 미청년이나 봉서 때문이 아니었다.
그즈음 여태껏 숨소리도 내뱉지 못하던 용천장 쪽이 술렁거리기 시작함을 느낀 것이다.
한천 연경산에게 전달했다는 천래궁의 배첩.
미청년의 손에 들린 봉서가 바로 그 요천의 도전장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