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현장에 나타난 것은 당가의 무인들뿐이 아니었다.
산 인근에서 쏘아진 신호탄을 발견한 청성의 도사들도 함께였다.
“도대체.”
이런 상황이 익숙한 당가의 무인들과는 달리 청성의 도인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너진 객점은 가끔씩 그들이 외유를 나갈 때 반드시 들르는 곳이었기에 익숙했다.
하지만 그 주변의 풍경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나무의 곳곳에 걸려 있는 살 조각들과 흙바닥을 적신 핏물이 절로 눈을 찌푸리게 했고.
진무의 강기에 잘리고 폭발해 버린 숲은 원래의 청량함은 간데없이 황량한 공터로 변해 있었다.
“진무 도장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청성의 도사들을 이끌고 온 녹운각주(綠雲閣主)이자 장로의 일인인 자경이 무거운 표정으로 진무에게 다가섰다.
“당가의 여식인 세령과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여 나온 길인데 이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글쎄요.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곧장 살수를 펼쳐 왔기에.”
“음.”
진무의 대답에 자경의 표정이 굳었다.
장문인에게 청옥패를 받은 진무이니 그가 청성을 자유롭게 출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성산에 이만한 혈사가 있었고 그 사건에 진무가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근래 마찰을 빚었다가 물러났던 당가의 무인들과 함께였다.
다른 곳도 아닌 청성산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사천성의 대부분에 그 힘을 미치고 있다고 하지만 허락도 없이 도량의 산천에 또다시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깝지 않은 생각이 계속되면 그에 관계된 이들까지 미워 보이는 법이었다.
“자네가 당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온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하면 이들이 어찌 알고 찾아온 것인가?”
목소리에 서린 은은한 노기에 진무의 눈동자에 짙은 짜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파는 이래서 문제다.
결론은 뻔하지 않은가?
불교의 유명한 격언 중에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뜻을 가진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좋은 뜻을 가지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이는 도가의 신언불미 미언불신(信言不美 美言不信),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과 동일한 가르침이다.
뜻 없는 친절은 없으며 또한 아름답게 말하는 자는 좋은 놈이 아니라는 뜻.
복면을 쓰고 청성산을 돌아다니는 놈들이 좋은 놈들이겠는가?
필시 놈들은 청성과 당가, 공동의 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중요한 문제보다 당가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에 언짢아하고 있었다.
딱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두 세력이 고작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사건 현장을 사이에 두고 반으로 나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당가는 그렇다 치고 무욕을 진리로 삼는 도사라는 놈들이 영역 욕심이나 부리다니.
“자경 도장.”
“말씀하시게.”
좋지 못한 분위기를 감지한 당세령이 당가의 장로가 있음에도 먼저 다가와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자경의 눈에 못마땅함이 일고 목소리에 퉁명스러움이 가득하다.
“비록 위험천만한 순간이라 본가의 무인들이 허락도 받지 않고 개입해 귀 도량의 산천을 어지럽혔음에 사과드립니다.”
“…….”
“혹 제가 위험에 빠졌을까 오해하여 왔으나 상황이 무마되었으니 원하신다면 다시 물리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끼어들어 사태를 수습하려는 당세령의 공손한 어조에 진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냥 미친년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다. 뒷발에 쥐를 잡았을 때도 놀랐는데 분위기 파악도 할 줄 알고.
덕분에 자경의 눈에서 못마땅한 기색이 조금 옅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 불편한 상황을 타개하기 부족했다.
당세령의 행동은 월권에 가깝다.
아무리 대가주의 딸이라고 해도 당가의 장로가 와 있는 상황에서 그와 상의도 없이 함부로 가인들의 거취에 관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로 인해 청성의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으나 그 반대로 당가의 장로와 무인들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하긴, 누가 굽히고 싶어 하겠는가?
말코에 독종 놈들. 둘 다 사천에서 내로라하는 거파의 무인이요, 중원에 내로라하는 고집쟁이들이었다.
당세령은 순간의 기지로 옳은 판단을 했으나, 경험은 아직 부족했던 것이다.
역시 늙은 생강의 제대로 여문 대처 능력을 보여 줘야 했다.
이놈도 챙겨 주고 저놈도 챙겨 주고. 그래야 내가 좀 더 편해지니까.
진무가 당세령을 곁에서 물러나게 한 뒤, 자경에게 은밀하게 소곤거렸다.
“자경 사숙.”
“응?”
이것들은 참 사숙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금세 표정이 밝아지지 않는가?
당세령이 저자세를 취한 덕분에 더 밝아지기도 했지만.
“청성의 영역이기는 하나 이는 사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비록 당가가 허락 없이 청성산에 들어왔으나 습격자들이 필시 당가와 악연을 맺은 자들이니 쉽게 물러나는 것 또한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음.”
“여기서 자존심을 세우면 당가나 청성이나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차라리 청성이 도량의 너그러움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너그러움을 보인다?”
“예. 아무래도 이런 쪽의 조사는 당가가 뛰어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청성산에서 일어난 문제인데…….”
“그들의 조사가 청성의 입회하에 이루어지게 하면 됩니다.”
“입회라?”
“예. 슬쩍 당가가 이런 일에 뛰어남을 칭찬해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어 도량의 너그러움을 보이고, 그들의 조사에 입회하여 관리 감독하면 청성의 면도 서지 않겠습니까?”
“흐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자존심 센 당가에게 조사 내용을 보고받는다?
나쁘지 않다.
더욱이 진무가 말한 ‘도량의 너그러움’이란 말이 귀에 착착 감기는 듯했다.
“허허, 무당지검께선 생각도 깊네그려.”
“과찬이십니다. 다 청성을 생각하는 마음이지요.”
“그러한가? 하하핫.”
통했다.
제 놈들 칭찬하는데 싫어할 놈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호칭부터가 진무 도장에서 무당지검으로 바뀌었다.
진무와 귓속말을 나눈 자경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갑자기 웃으며 다가오자 당세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보게.”
“예, 자경 도장.”
“귀 가문의 책임자가 누구인가?”
“그것은 어찌?”
“불러 주시게.”
자경의 말에 당세령이 진무를 힐끗거리고는 무인들을 이끌고 온 당가의 장로 당두광을 안내해 왔다.
“당가의 두광이오.”
“청성의 자경입니다. 명망 높은 녹혈호조수(綠血虎爪手)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자경이 미소 지으며 먼저 치고 나오자 선수를 뺏긴 당두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 인사했다.
“저 역시 청성의 녹운각주님을 뵙게 되어…….”
“귀 가문에서 청성을 어지럽히는 불의한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찾아와 주신 것에 일단 감사를 드립니다.”
“……뭐, 허락 없이 들어와 죄송하게 되었소.”
“하하, 죄송이라니요. 이들이 당가에서 오래 쫓았으나 잡지 못한 이들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지요?”
“…….”
오래 쫓으며 잡지 못한?
당두광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청성에게 여반장처럼 쉬운 일이나, 도량이다 보니 불의한 자들의 신분을 조사하는 능력은 미진합니다. 해서 조사에 관한 것은 당가에 도움을 청하려 하는데 장로께서는 어떠하신지요?”
“…….”
뭔가 참 애매하다.
당가가 잡지 못한 것을 청성은 쉬이 잡는다며 한껏 자존심을 세우고는 당가의 사건 조사 능력을 추켜세우며 도움을 구한다.
그런데 진무와 당세령이 처리한 일을 왜 지들이 처리한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듣기에 따라 화를 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상황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에게 불리했다.
어쨌든 청성산이 아닌가?
전체적인 말이야 어찌 되었건 당가를 칭찬하며 한발 물러났으니 당두광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당가가 어찌 돕길 원하십니까?”
“청성은 이 사건의 조사를 당가에서 맡아 주기를 원합니다.”
“……예?”
아니 그걸 장로가 막 결정을 내려도 될 일이란 말인가?
“대신 청성에서 일어난 일이라 모른 체할 수는 없으니 조사 과정에 입회하게 하여 주시오.”
입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저 입회가 아닌가?
“당가에서 도와주신다면 내 이번 일이 해결될 때까지 당가가 청성산을 마음껏 누비도록 장문인의 허락을 받아 드리지요.”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굳이 허락을 구하지 말라던 당위의 명이 있었지만, 장로들 사이에서는 청성과의 마찰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청성이 허락하였으니 마찰의 우려는 사라졌고, 당위의 말대로 청성의 모든 곳을 조사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그 또한 당가의 면을 세운 셈이었다.
“혹, 아미에도 전서를 하나 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를 말이오. 내 장문인께 책임지고 허락을 얻겠소.”
자경의 말에 당두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청성산과 아미산.
그 모두를 분쟁 없이 조사하게 되지 않았는가?
“녹운각주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되레 당가의 도움으로 불의한 자들을 발본색원하게 되었으니 청성이 감사를 드려야지요.”
우려했던 마찰 없이 녹운각주와 당두광의 협의가 손쉽게 끝났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서로의 잘못을 사과하고 웃으며 대화하니 어찌 평화롭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과거의 진무였다면?
일단 청성과 당가를 모조리 때려눕히고 난 다음 멋대로 조사를 시작했겠지만.
어쨌든 잘되었다.
굳이 진무가 애써서 복면인들의 뒤를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죽일 만큼 죽였고 패 줄 만큼 패 줬으니 되었다.
이제 중요한 건 백운각에 있는 구멍이다.
어쩌면 그곳에 양의심공의 조각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자경 사숙.”
“말씀하시게.”
“하면 저희는 그만 산문에 올라가 봐도 되겠습니까?”
“이를 말인가? 함께 가세. 이번 사안에 대하여 장문인께 보고도 드려야 하니.”
“예. 사숙.”
“하하, 이 사람. 하하하!”
자경의 입가에 너털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 소저도 함께 가시겠지요?”
언제부터 당 소저란 말인가?
조금 전까지 당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봐 놓고는.
“예. 바늘이 가는데 응당 실이 따라가야죠.”
“바늘? 실?”
자경이 당세령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무가 한숨을 푹 쉬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시고 서둘러 올라가시죠. 장문인께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으실 겁니다.”
“아, 그러세.”
가만 놔두면 끝도 없을 것이 분명한 당세령의 헛소리를 선수 쳐서 차단한 진무의 재촉에 자경이 함께 온 일대제자들에게 당가를 도우라 명하고 청성산으로 향했다.
* * *
“흐흠.”
비록 밤잠을 설치기는 하였으나 자환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듣자니 당가가 잡지 못하고 있던 자들을 진무가 잡아 주었다고 한다.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진무는 무당의 제자인 데다 청성의 장로들을 사숙이라 칭하며 연을 강조하지 않는가?
옳다. 무당은 청성과 같은 도문의 길을 걸으니 진무가 잡은 것은 청성이 잡은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또한, 자경의 말에 따르면 청성이 당가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웠다 했다.
더욱이 그들의 조사를 입회까지 하며 감독하게 되었으니 그보다 좋은 마무리가 어디 있는가?
“녹운각주는 잘 판단하였네.”
“장문인의 허락 없이 결정을 내려 죄송합니다.”
“허허, 이 사람. 아닐세. 장로 또한 문파를 대표하는 자리이네. 현장의 분위기는 자네가 가장 잘 알았을 터. 잘한 것은 잘한 게야. 사숙들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 자네를 칭찬하실 것이네.”
자환이 자경의 공을 치하하며 흡족하게 웃자.
“실은 모든 것이 무당지검의 의견이었습니다.”
“호오? 그래?”
“예. 올바름은 물론이요, 생각마저 깊은 도인입니다.”
“허허.”
자경의 말에 자환이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은 진무를 바라보았다.
“우리 청성이 도장에게 도움을 받았구먼.”
“아닙니다. 청성과 무당은 한배에서 나온 형제이니 어찌 모른 체하겠습니까.”
“암, 옳네. 옳아.”
훈훈함이 장문인의 거처를 가득히 채운다.
사설이 길었다.
진무는 단 한마디를 하기 위해 다리가 저림에도 참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할 때.
“장문인.”
“응? 말씀하시게.”
“혹,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예.”
“어려워 말고 말씀하시게. 내 어떤 부탁인들 들어주지 못하겠는가?”
“어렵지는 않고, 백운각에 다시 찾아가 볼까 합니다.”
“……?”
진무의 말에 자환은 물론 자경까지 의아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