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다음 날.
“진무야.”
“……어?”
스승이 웬일이지?
평소라면 아침 식사 때나 되어야 말을 꺼내던 명진이 입지 않고 걸어 두었던 도포를 말끔히 차려입고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소궁으로 가야겠다.”
“…….”
순간 진무는 명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새벽녘이라 바람이 차다.
기껏 살려 둔 놈이 괜히 찬바람이라도 들어서 다시 아프면 자신만 고생이었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요?”
“든든히 입었으니 괜찮다. 가자.”
이 자식이 뭔 좋은 일이라도 있나? 왜 자꾸 실실 웃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보는 눈이 많음을 잊지 않았던 진무는 성의껏 명진을 부축해 자소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매월 초닷새.
무당파에서는 장문인의 주관하에 정기적으로 장로 회의가 열렸다.
다가올 한 달 동안 시행되어야 할 행사들과 안팎의 살림살이를 논의하고 제자들의 수련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해서 장로들뿐만 아니라 각 궁의 업무를 담당하는 일대제자들까지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였다.
사부인 명진은 맡은 궁이 없기도 했고 근래까지 암자에서 두문불출했었기에 그동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그 때문에 장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진무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어? 사숙!”
부상을 털고 일어난 진허가 자소궁으로 가다가 명진을 보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했다.
“오, 진허더냐. 오랜만이구나.”
“예.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다. 그래 근자에 진전은 좀 있더냐?”
“진전이요?”
진허가 명진을 부축하고 있는 진무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사숙님의 제자 덕에 근래 크게 개안을 했지 뭡니까?”
“아, 들었다. 진무가 좀 과했다지?”
“과하긴요? 덕분에 아주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제가 사제 하나는 잘 두었지요. 아니 그러냐?”
진허가 진무의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이 새끼는 죽도록 처맞아 놓고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진허의 반응에 진무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 들어가자꾸나.”
“예. 함께 모시겠습니다.”
“오냐, 오냐.”
진무와 진허의 부축을 받으며 자소궁의 계단을 오르는 명진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왔다.
하나같이 지극히 공손한 자세와 존경심 가득한 눈빛.
‘뭐야? 이 반응? 그냥 뒷방 노인네 아니었어?’
그간 진무가 생각해 온 명진은 그저 병치레 중의 쓸모없는 도사 나부랭이였다.
하지만 무당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명진.
그는 지금의 무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도사 중 한 명이었다.
무공을 잃기 전까지는 명현과 함께 다음 대의 무당 장문인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촉망받는 인재였고.
사패천주에게 마지막까지 대항하여 싸우고 제자들을 보호했던 그는 무당의 항거 정신이자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장문인과 장로들이 힘을 모아 절벽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매던 진무를 살렸던 것도 그가 명진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도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무에겐 과거에는 그저 싸가지 없이 자신에게 덤볐던 주제넘은 도사였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더 쓸모없는 애물단지에 불과했지만.
“아니! 자네가 어쩐 일인가?”
누군가 알렸음인지 장문인과 장로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뛰어나왔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사형제였다.
명자 배의 모두가 죽고 남은 것은 지금의 장문인과 장로. 그리고 진무의 스승 명진뿐이었다.
“허허, 언제까지 충허암에만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몸 생각을 해야지.”
“괜찮습니다. 장문인.”
“장문인은! 사형이라 부르게, 이 사람아.”
명현이 진허를 물리고 직접 부축하였다.
“진허야. 가서 사숙을 위해 화로를 들이라 하거라.”
“예, 장문인.”
혹여 몸이 성치 않은 사제가 추위를 느낄까 싶어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명현이었다.
“그나저나 이리 멀리까지 움직여도 되는가?”
“괜찮습니다. 근래 요 제자 놈 덕에 거동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기력을 찾았습니다.”
“그래?”
명현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무당이 금하고 있던 육식.
그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역시 육식의 금기를 해한 것은 잘한 결정이야.’
명현은 고집스레 지켜 온 계율로 인해 사제의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했던 것을 다시 한번 후회하게 되었다.
더불어 명진이 바깥으로 거동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애썼을 진무가 더욱 기특했다.
“춥네. 어서 들어가세.”
명진이 장문인의 근처에 자리를 잡자 장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주제는 당연 청양상단이 주고 간 은원보에 관한 것이었다.
한동안 재정 상태가 바닥을 보여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과한 돈이 생기자 각 궁마다 원하는 것이 많아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정하기로 하지.”
두 시진에 가깝게 진행된 회의가 절충안을 찾아 마무리되는 시점에 명현이 슬쩍 명진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병약해진 사제에게 장시간의 회의가 힘들지나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장문인.”
“응? 뭔가? 할 말이 있는 겐가?”
“예. 청양상단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오! 어서 해 보게.”
회의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명진이 말을 꺼내자 장문인과 장로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집중했다.
“청양상단과 연을 맺은 것은 좋은 일이나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려라……. 어찌 그러한가?”
“진혜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의도와 출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돈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료됩니다.”
그 말에 명공의 뒤에 있던 진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흐흠.”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던 것인 터라 장문인과 장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
“제 생각에는 그들 곁에 제자들을 보내 놓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어? 설마?
순간 회의가 지루하기만 했던 진무의 눈이 번뜩였다.
“제자들을?”
“예. 그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조심스레 살펴보는 게지요.”
명진이 계율을 담당하는 명공을 바라보았다.
“흐음. 명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연을 맺은 상단에는 일대제자들을 식객으로 보냈던 전례가 있으니…….”
“그렇기야 하지. 헌데 제자들을 보내 어찌하잔 말인가? 자칫하면 그들이 감시를 받는다 언짢아할 수도 있는 일일세.”
명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명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상단에 호위를 둔다고 하나 무당의 제자들에 비해 못할 것은 자명할 일. 그저 잠시 식객 생활을 하겠다 하면 오히려 좋아할 듯합니다.”
“식객이라…….”
명현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은데 다들 어떠한가?”
“옳은 말입니다. 일전에 본 그의 성격상 도움이 필요해도 따로 청하지는 않을 듯했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장로들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고 명진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진무는 그제야 아침부터 장로 회의에 참석한 명진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하! 이것 봐라?
청우 그 모자란 자식만 도움이 되는 줄 알았더니. 명진까지? 이거 목숨 줄 연장시켜 놓은 보람이 있잖아?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니 그리하세. 허면 누가 좋겠는가? 장로들은 과하고, 청자 배는 아직 모자라니 일대제자들 중에서 하나를 보내야 할 터인데.”
명현의 말에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누구를 보낼까 의논하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진혜가 제 스승인 명공에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명진이 선수를 쳤다.
“무얼 고민하십니까? 진무가 있는데요.”
“진무를?”
좌중의 시선이 진무에게 집중되자 진혜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야. 우리 스승님께서 구구절절 맞는 말씀 하시는데 꼬나보길 어딜 꼬나봐? 기사멸조로 확 눈깔을 파 버릴까.
진무는 진혜를 똑바로 쳐다보며 몰래 비웃어 주었다.
‘저놈의 새끼가…….’
얄밉기 짝이 없는 진무의 표정에 진혜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자신이 오랫동안 공들여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오는 진무가 눈엣가시 같았다.
“명진 사숙의 말이 지당하십니다. 다른 일대제자들은 각 궁에서 맡은 일들이 많아 바쁠 터입니다. 진무를 보내시지요.”
진허가 명진의 말에 힘을 보탠다.
이 자식, 너 좋은 녀석이구나?
그런 줄 알았으면 그때 좀 살살 팰 건데…….
한참을 고민했던 문제가 갑자기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흠, 저도 동의합니다. 진무라면 청양상단주와 안면도 있고 제법 관심 있어 하는 눈치였으니.”
제 사부인 명공마저 동조를 하자 진혜의 얼굴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청양상단주와 안면이 있어?”
“예. 그에 관한 말씀은 따로 올리겠습니다. 장문인.”
명공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무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뜻을 모았으니 고생스럽더라도 진무는 충허암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예.”
진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키운 도사 한 놈 열 사파 부럽지 않다더니…… 흐흐흐, 이게 웬 횡재냐.
* * *
“사형! 이대로 두고 보실 참입니까?”
진혜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히 채웠다.
“으음.”
진혜의 눈초리를 받은 진궁이 얼굴을 찌푸렸다.
진궁은 무당칠자의 둘째이자 무당의 외부 활동을 담당하는 우진궁(遇眞宮)의 책임자였다.
외부로 나가 있는 진명을 제외하고 현 무당파 제자 중 가장 연장 제자였다.
장로 회의가 끝나고 실무 회의격으로 열린 일대제자들의 회의 석상에서 진혜는 진무의 문제를 거론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계율을 어겨 징계를 받고 있는 녀석입니다. 그런 녀석에게 외유라니요.”
진혜의 말에 진궁 이하 일대제자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도 틀리지는 않네만, 이미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아닌가?”
덩치가 무척이나 큰 정동궁(淨東宮)의 진소의 말에 진혜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형. 장로 회의가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틀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허! 진혜는 말을 삼가라.”
대놓고 장로들을 불신하는 말에 진궁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르십니까? 녀석은 제자들을 꾀어 육식을 하고 있습니다.”
“…….”
“응당 더한 죄를 물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장로 회의에…….”
“답답한 소리 마십시오. 진소 사형.”
“아니 이 사람.”
“도동이었던 놈입니다. 화전민의 자식이었던 천한 놈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장문인과 장로님들이 명진 사숙의 이름에 가려 그놈을 인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대로 놈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
“음…….”
“설마 닭 쫓던 개 꼴이 되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동배의 제자를 함부로 폄하하는 말이었으나 틀리지는 않았다.
진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각궁의 일대제자들은 선별된 인원이었다.
나름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나 풍운의 뜻을 품고 무당의 도명을 받았고 다음 대를 책임질 대제자가 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무가 세 개의 죄를 짓고 해검지를 보수하는 일을 맡았을 때.
따로 무인을 배정하지 않기로 한 것은 진허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동의한 일이었다.
“저는 장로님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당의 오랜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는 놈에게…….”
진혜가 피를 토하며 말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정말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원화관의 진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