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으, 으음…….”
신음과 함께 눈을 뜬 정소의 흐릿한 시선이 조금씩 밝아졌다.
타닥, 타닥.
곱게 쌓여 있는 나무에 붉은 화광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니 모닥불이 피워진 듯하고, 주위가 깜깜한 것이 밤이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긴?
정신을 차린 정소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묶인 것도 아닌데 움직이지 못한다면?
정소는 재빨리 기운을 운용했다.
흐르다 멈추는 곳에서 답답함이 느껴져 온다.
마혈,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거골혈(巨骨穴)에서 공손혈(公孫穴)까지 마혈이라 불리는 아홉 곳의 혈자리가 모조리 제압당했다.
정소는 냉정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석했다.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을 구했던 복면인.
누굴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준 것을 보면 적은 아닐 것이다.
영은당의 인물?
아니다.
그들 역시 신분을 숨기고 은거했다.
영은당에 소속된 무인들이 적에게 발각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상대를 죽이거나, 자결하거나.
누군가 발각된다 해도 모른 척하도록 훈련을 받은 그들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점점 더 의문이 더해진다.
혓바닥을 놀려 보니 자결을 위해 이빨 사이에 끼고 있는 손톱만 한 독주머니가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확인해야 한다.
독주머니가 사라졌고 마혈을 제압당했으니 자결하거나 도망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전무(全無).
정소는 날카로운 눈으로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대신 눈알을 열심히 굴려 보았으나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뒤쪽에 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모습을 감추었다고는 해도 소리까지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쉬이이.
청각에 온 정신을 집중하자 귓가에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타닥, 타닥.
모닥불에 불길이 타올라 아스러지는 소리.
찌르르.
이것은 풀벌레 소리.
텁, 쭈아악.
“……?”
그리고 이건 분명?
뭔가를 처먹는 소린데?
“어? 깼어?”
“…….”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다.
목소리로 연령대를 추측해 봤을 때 상당히 어리다. 대충 따져도 약관 전후?
누굴까?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데 배가 고파서 먼저 먹었네. 어때, 배 좀 채울래? 허기질 텐데.”
그러고 보니 화산파 놈들에게 쫓기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자,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자.
어둠이 진득하게 내려앉은 지금까지 마혈을 제압당한 것 외에는 신변에 어떤 이상도 없다.
즉, 아직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뜻.
거기다 음식까지 준다면?
일단은 호의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확실하다.
결코, 배가 고파서 아무렇게나 생각해 내린 판단이 아니다.
퓻! 퓨퓻!
지풍이 날아오는 소리에 이어 오른팔 몇 군데가 뜨끔해져 왔다.
대단한 고수다. 지풍을 날려 오른팔만 움직일 수 있도록 해혈하다니.
툭.
“먹어. 이따가 괜히 정신 잃으면 귀찮아지니까.”
“…….”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호의적인 인물이 정소의 눈앞에 고기 조각을 던져 놓았다.
정소가 잠시 고민하자.
“독 같은 거 없다. 그리고 어차피 나 아니었으면 뒈졌을 놈이 뭔 대갈통을 그리 굴려?”
맞는 말이다.
차라리 독주머니가 사라진 이상 고기에 독이 있다면 죽으면 그만인데 어찌 두려워했단 말인가?
정소는 더 고민하지 않고 오른팔로 고기를 당겨 입으로 가져갔다.
찌이익.
“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는 분명 야숙의 달인이 틀림없다.
불에 구운 고기 조각에 배어 있는 육즙이 상상을 초월했다.
황홀한 맛을 느낀 정소가 허겁지겁 고기를 삼켰다.
게 눈 감추듯이 해치워 버리자 코웃음을 터트린 인물이 또 하나의 고기 조각을 던져 주었다.
“꺼억!”
너무 급히 먹었기 때문일까?
마혈이 제압당해 있음에도 트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정소는 왠지 미안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너무 예의가 없지는 않았을까?
“뭘, 생리 현상인데.”
아, 이해심이 넘치기도 하여라.
“자, 그럼 허기는 해결된 것 같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
뭘 시작한다는 거지?
경계심이 풀려 가던 정소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다.
저벅,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의문의 인물이 그의 등 뒤에 멈춘 것이 느껴진다.
설마? 나머지 마혈을 모두 해혈해 주려는 것인가?
정소의 의문이 점점 더 커지는 와중에.
텁.
그가 정소의 손목을 움켜쥐고 당겼다.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얼굴.
“……네, 네놈은!”
무, 무당지검?
그의 얼굴을 어찌 모를까?
그는 영은당 서안지부에서 잔뼈가 굵은 세작이었다.
어떻게 봐도 무당지검 진무가 확실했다.
이번 일로 인해 정무칠성과 더불어 궁의 척살 대상 일 호로 지목된 바로 그놈.
그런데 저 표정.
진무가 사악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츄릅…….
“……!”
뭐지? 방금 저 행동은?
뭔가 처먹기 전에 흘러내린 침을 급히 빨아 먹는 듯한.
마혈이 제압당해 움직일 수 없음에도 그 사악한 눈빛과 미소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오른다.
무슨 짓…… 어? 어?
이게 뭘까? 갑자기 몸 안의 기운이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꾸어어어…….”
내공이…… 내공이 빠져나갔다.
진무가 잡은 손목을 통해 또 내공이 빠져나가자 정소가 빵빵하게 부풀었던 공에 바람이 빠지듯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꾸어어어…….”
이, 이건, 그러니까…… 마교의 흡성대법(吸星大法)?
어째서 그가? 무당의 제자가 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정소가 수십 년 이상 늙어 버린 모습이 되었을 때 진무의 손이 그를 놓았다.
죽진 않았다.
딱 살 수 있을 정도까지 내공을 빨렸다.
“헤엑…… 헤엑…….”
정소가 힘겹게 호흡을 몰아쉰다.
하지만 많은 내공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인지 피부가 흡사 말라 버린 고목 같았다.
“흐흐흐, 모처럼 포식했네. 역시 내력이 강한 놈들이 최고야.”
“…….”
설마 이놈.
도사가 아니라 마인이었단 말인가? 내공을 먹고 사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약관의 나이에 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이놈은 도사로 위장한 마교의 인물이 분명한 것이다.
분명 무당에 있는 제 사형제들의 내공을 죄다 빨아먹고 성장한 것이 분명했다.
툭. 또르르르.
“…….”
마혈이 풀림과 동시에 정소가 자신의 앞에 떨어져 굴러온 작은 구슬을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본다.
“알지? 요상단이야.”
“…….”
요상단.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약. 그걸 모르는 무인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어째서?
“먹어, 운기해. 내력 차게. 뒈지면 곤란하니까.”
“…….”
그러니까 왜?
정소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본다.
“나, 두 번 말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
진무가 짜증 서린 눈빛으로 쏘아보자 정소의 눈에 살기가 어린다.
설마 내력을 돌아오게 해서 또다시 빨아먹으려는 건가?
사악한 놈 같으니.
정소는 진무의 잔인함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자신을 무슨 휴대용 내공 새참쯤으로 생각한다는 뜻 아닌가.
저게 인간인가.
“죽여라. 이놈.”
“뭐, 나중에는 그럴 건데 지금은 안 돼.”
“무슨 개소리냐!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서 죽여라, 이놈!”
“…….”
빼앗긴 내력이 만만치 않을 터임에도 정소가 발악하듯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었다.
“뭐, 그래. 처음에는 다 그렇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진무가 정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끌어 올렸다.
“……?”
정소가 의아함을 품는 순간.
퍼억!
“크어어…….”
복부를 파고든 주먹, 창자가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
나, 정소. 영은당의 서안지부에서 잔뼈가 굵은 세작 중의 세작. 적에게 잡힐 것을 대비해 고통을 참는 훈련을 수도 없이 받아 왔…….
뻐어억!
“끄어어어…….”
너무 아프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진무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그가 움켜쥐고 있는 머리 가죽은 뜯겨 나갈 것만 같았고, 맞은 자리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참고 싶어도 짐승과 같은 울부짖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완벽한 굴복의 전초를 감상하며, 진무는 흐뭇하게 웃었다.
참으로 듣기가 좋다.
원래 처맞아 보기 전에는 대부분이 목을 뻣뻣하게 들고 도전적인 눈빛을 하는 법이다.
아주 오래전 소림사의 젊은 중놈을 만난 적이 있다.
이름이 각원이었나?
중놈이 하도 자신하길래 진무가 코웃음을 치며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철포삼? 금강불괴로 가는 무공?
부동심법?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유지한다고?
개소리하고들 있다.
처음에는 좀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 지린내를 피워 내며 제발 그만해 달라고 사정에 사정을 했다.
“끄아아악!”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정소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언제나 확고하게 가진 생각. 매 앞에서는 장사 없다.
개처럼 맞으면 개 되는 법이다. 체면이고 뭐고 다 사람일 때 이야기 아닌가.
죽을 만큼 줘 터지다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싹싹 빌어 대는 것이 인세의 섭리다.
그리고, 패는 사람이 진무라면 더 할 말도 없다.
맞고 나서 끝까지 뻣뻣한 놈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스승이 된 명진.
그렇게 맞고 골병이 들어 무공이 폐해졌음에도 버텼다.
그렇기에 그 기개에 반해 자소궁을 불태우지 않고 물러난 것 아닌가.
진법의 환상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어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조금, 아니 좀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때 한 번뿐이다.
그 외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매가 사람을 만든다면, 진무는 그 분야에서는 가히 구야자급 명장이었다.
더군다나 천우명이라는 걸출한 맷집을 가진 무인은 진무가 그쪽 방면에서 천하제일로 군림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사패천 최강이라 불리면서도 진무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철혈붕권이라 불리는 천우명조차도 그러할진대.
퍼억!
“끄아악!”
딱히 힘을 잔뜩 줘서 때릴 필요도 없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사혈만 골라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린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정도의 아픔.
아마 정소라는 놈은 지금쯤 어서 빨리 죽고 싶은 심정이리라.
혼절을 하고 싶어도 혼절을 할 수 없게끔 혈도를 제압해 놓았으니 미치고 환장할 테지.
“어때? 먹을래?”
정소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앞으로도 그런 자세만 계속 유지하면 맞을 일은 없을 거야.”
진무의 구타가 효험이 있었을까?
손을 놓자 바닥에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은 정소가 벌게진 눈으로 요상단을 찾아서 입에 넣었다.
그러곤 냅다 운기에 들어간다.
아주 바람직하다.
정소는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내공을 회복해야 했다.
운기가 끝난 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듯한 표정으로 진무를 향해 손목을 내밀었다.
그래, 먹어라. 이놈.
사악하고 악랄한 마귀 새끼.
한여름 내공 모기 같은 새끼.
하지만 절대로 입 밖에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음보다 무서운 구타의 무서운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뭐 해?”
“……?”
진무가 눈을 찡그렸다.
“가자.”
어딜?
“너희 동료 위치 알지?”
“…….”
“대답 안 해?”
진무가 주먹을 슬쩍 들어 올리자 정소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안내해.”
끄덕, 끄덕.
“좋아.”
정소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
채기법은 죽을 때까지 내력을 빨아먹는 마교의 허접한 흡성마공과는 다르다.
한 대상에게 딱 한 번 취할 수 있고,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비록 남의 기운을 빨아먹는 무공이지만 욕심을 자제해야만 대성할 수 있는 절제의 무공인 것이다.
탐욕에 빠져 상대를 죽인다든가, 마구잡이로 내공을 훔치면 백표처럼 부작용이 일어나 마인이 되는 것이다.
정소에게 빨아먹을 내공은 전부 빨아먹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안내였다. 진무의 사기를 배불리 채워 줄 또 다른 무인에게 안내할 인도자.
기다려라. 이놈들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놈씩 소중하게(?) 빨아먹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