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70
470화
사내의 이름은 왕삼이었다.
왕 씨네 셋째 아들. 단지 그 정도의 의미를 지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
장칠이니, 곽사니,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같은 이름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왕삼은 북방의 동토에서 태어났다.
한씨가 다스리는 곳.
그곳에 사는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삼 대, 혹은 사 대 전의 조상들은 중원에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배신을 당해 쫓겨나야 했고, 그들을 죽이려는 이들의 칼을 피해 동토에 정착했다고 했다.
뭐, 자신과는 크게 관계없는 일이었다.
과거의 일에 불과했고, 그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그들의 왕이 중원으로의 귀환을 천명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저어되었으나, 소문에 의하면 중원은 매일을 동상에 시달리며 죽어 가는 곳이 아니라 맨발로 땅을 밟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따뜻한 곳이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낙원이라는 말을 세뇌당하듯이 들어 왔기에 모두가 귀소본능이라도 가진 것처럼 희망에 부풀어 짐을 쌌다.
그때, 붉은 띠를 두른 왕의 병사가 왕삼의 집을 찾아왔다.
암향 십일 호.
왕삼에게 부여된 이름이었다.
어린 탁이와 갓난쟁이 염이의 아버지이자 아문이라는 여인의 남편에 불과한 자신에게 막중한 소임이 주어진 것이다.
중원에 들어가서 작은 병에 든 액체만 뿌려 놓으면 가장 먼저 땅을 주고 금은보화를 내리겠다 했다.
탁이와 염이는 장성하기도 전에 새로운 세상에서 왕의 병사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저 왕 씨 집 셋째 아들의 자손일 뿐인 그들에게 출셋길이 열린 것이다.
왕삼은 병 속의 액체, 그러니까 흑살서의 독을 다루는 방법을 수도 없이 배우고 익혔다.
그러곤 가족을 이끌고 피난민인 척 섞여 대동이라는 곳까지 왔다.
먼저 지나온 사막마저도 그에겐 놀라운 곳이었건만, 대동은 숫제 별천지였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바닥에는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무엇보다 더위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며 적응하느라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동안 살아온 삶에 비하면 너무도 행복한 시련이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시기도 나고 질투도 났다.
그런데 훈련과 실전은 달랐다.
막상 독을 쓰려 하니 주저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자신은 암향 수좌의 말처럼 그저 수많은 사람 중 하나다.
왕삼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그가 맡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곳곳에 가득 자리 잡은 피난민들은 모두가 곯아떨어져 왕삼이 지나가는 것도 몰랐다.
은밀하게 안으로 들어간 왕삼은 술독이 보관된 장소를 찾았다.
자신의 앞에 놓인 술독에 약병의 액체를 쏟아붓는 간단한 일임에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래. 이건 다 탁이와 염이를 위한 거야.”
마침내 결심을 굳힌 왕삼이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퐁!
원체 조용했기 때문일까?
짧고 경쾌한 소리가 꼭 벼락처럼 귓전을 때렸다.
지레 놀란 왕삼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휴우…….”
몇몇이 뒤척이기는 했으나 잠에서 깬 이는 없었다.
이제…… 이제 붓기만 하면 된다.
그러곤 그대로 빠져나가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면 된다.
그럼 끝이다.
가장이 아닌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릴 테지만 자신만 입을 다물면 된다.
그럼 가족 모두가 편해질 수 있다.
아니, 이 별천지 같은 곳에서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혜택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왕삼은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술독을 향해 약병을 가져갔다.
막 따르려는 그 순간…….
슈웃! 팅!
“……악!”
공기를 꿰뚫는 파공성과 함께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왕삼이 제 손을 부여잡았다.
톡, 또르르르.
떨어져 구르는 약병에서 흘러나온 독이 바닥에 스몄다.
“아, 안 돼!”
구멍 뚫린 손바닥보다 자식들의 출셋길이 날아갔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술독에 넣어야 할 독이…….
이대로는 안 된다. 다 쏟기 전에 서둘러서…….
어떻게든 약병을 주우려고 버둥거렸지만 부질없었다.
천장의 어둠에서 떨어진 물체가 땅을 밟음과 동시에 그의 복부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퍼억!
“커억!”
차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왕삼은 벽에 처박혔다.
그의 앞에 선 자는 운암이었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행동을 차단하기 위해 운룡대팔식을 펼친 것이다.
“……?”
운암은 벽에 처박힌 왕삼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이자, 생각했던 대로 무인이 아니다.
내공이 있었다면 그를 찼을 때 발끝에 반탄력이 느껴졌어야만 했다.
“당신 뭐지?”
“……아.”
운암의 질문에도 왕삼의 시선은 다른 곳에 못 박혀 있었다.
“안 돼…… 독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
분명 차인 고통이 적지 않을 것인데 안타까움이 절절히 느껴지는 저 목소리와 표정은 대체…….
기이하다 여기던 중, 운암은 불현듯 눈을 부릅떴다.
독? 독이라고?
설마 흑살서의?
왕삼이 바라보는 곳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린 운암의 눈에 백선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뭐길래?”
……그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약병을 줍는 모습이.
“안 돼! 독, 백선, 버려!”
“예? ……흡!”
운암이 다급히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부지불식간에 독을 흡입해 버린 백선이 고통에 찬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억……!”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우웩!”
이내 허물어지듯 쓰러진 백선이 바닥에 대고 검붉은 피를 토했다.
“백서언!”
운암이 소리치며 다가서려 하자 백선이 고통 속에서도 손을 뻗어 제지했다.
“오, 오지 마세요. 피하세요…… 부단주님…… 사람들을…….”
“…….”
자신이 죽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주변에 있는 이들부터 챙긴다.
운암의 눈이 분노로 붉게 충혈되었다.
이 개자식들…….
설마하니 민초에게 독을 풀라 시킬 줄이야.
“사,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번진다.
소란에 깨어난 피난민들에게도 독이 퍼지기 시작했다.
스거걱!
그 순간 하얀 섬광이 궤적을 그리고 중독된 피난민들의 육체를 갈라 그 자리에 잡아 두었다.
언제 다시 일어선 것일까.
후들거리는 몸으로 억지로 자세를 잡은 백선의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부단주! 뭘 머뭇거린단 말이오! 다 죽일 셈이오!”
“…….”
백선이 피를 게워 내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독이 대기 중에 노출되었다.
하물며 해독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
그 확산 범위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백선을, 다른 중독된 이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가슴을 찢는 아픔에 머뭇거리기보다는 중독되지 않은 이들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 개 같은 말을 실행에 옮기게 될 줄이야…….
우우우웅!
온 힘을 다해 모은 기운이 운암의 손에 모여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로.
좁은 문에 몰려든 이들에게 길을 터 주어야만 했다.
“하압!”
우르릉! 콰아앙!
바닥을 짓누른 일보와 함께 뻗어진 일격에 주루의 벽면이 터져 나갔다.
“모두! 속히 밖으로 나가시오!”
웅혼한 일갈에 사람들이 도망치듯이 이탈했다.
그리고 운암은 죽어 가는 백선과 사람들을 비통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가장 마지막에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미안하다, 백선.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백선이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
왕삼을 허리에 끼고 밖으로 나온 운암은 채 한 걸음을 걷지 못했다.
밝아 오는 주위 곳곳에서 독에 중독된 이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피난민뿐 아니라 정무맹의 무인들까지도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잠들었던 피난민들이 깨어나며 뿔뿔이 흩어졌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부단주!”
“……?”
한동안 멍해 있던 운암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감찰단의 또 다른 조장, 응천.
“백선은……?”
그의 물음에 운암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길……. 어쨌든 이럴 때가 아닙니다. 사방에 독이 퍼졌습니다. 곳곳에서 중독된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척후에 나가 있는 터라 대동에 대기 중인 이들로는 통제가 어렵습니다.”
“…….”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운암은 말문이 막혔다.
밤새 그토록 고요했건만, 날이 밝자마자 이런 참혹한 폭풍이 몰아치다니.
걷잡을 수 없는 혼란…… 만약 이것이 저들의 노림수라면?
“망할, 통제. 응천, 따르게.”
“예? 예.”
흥분한 운암이 빠르게 외치고 왕삼을 옆구리에 낀 채 곧장 검혜가 있는 곳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지금의 상황이 대동 쪽에만 벌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궁을 막기 위한 여섯 곳의 관문에 같은 일이 벌어졌거나, 벌어질 터.
지금의 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적이 공격해 온다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그렇다고 피난민들을 모조리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의 칼날 아래 모두가 죽을 테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자신의 손에 잡힌 왕삼처럼,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민초들 속에 자객을 감추어 놓은 것이다.
이래서야 누가 자객이고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이 빌어먹을 놈들.
세상을 바꾸겠다는 놈들이 자신의 백성을 도구로 이용하다니.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까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죽음으로 내몰다니.
“어르신!”
“운암!”
운암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검혜와 마주쳤다.
그녀 역시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서둘러 퇴각! 전파!”
“운암! 진정하고 호흡부터 고르게.”
벽운영은 지나치게 흥분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운암을 진정시켰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그의 말버릇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호흡을 고르는 운암을 대신해서 응천이 설명했다.
“검혜 어른. 피난민 중에 궁의 자객들이 숨어 있습니다.”
“뭐?”
검혜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피난민이 자객이라니?
그사이 호흡을 고른 운암이 설명을 도왔다.
“그들이 곳곳에 독을 뿌린 것입니다. 피난민들 중 흉수를 가려내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해독약이 없으니……. 속히 인접한 지역에 이 사실을 전파하고, 중독되지 않은 피난민들과 방어진을 형성한 무인들을 속히 철수시켜야 합니다.”
“……!”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혼란일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기다려 공격해 오기라도 한다면…….”
검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네. 속히 명을…….”
쿠아아앙!
그녀가 결정을 내리던 그 순간, 북쪽에서 거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게 무슨?”
홱 고개를 돌린 그들의 눈에 멀리서 솟구치는 붉은 화광이 들어왔다.
“젠장……. 자네들은 속히 다른 곳에 연락을 보내고 이곳을 통제해서 사람들을 피난부터 시키게. 내 직접 관문 쪽으로 가 보겠네.”
“알겠습니다.”
명을 내린 벽운영이 단숨에 날아올라 북쪽으로 향했다.
마땅히 따라가야 했으나, 지금은 피난민들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응천.”
“예, 부단주!”
“중독되지 않은 피난민들을 통제해 서둘러 대동을 벗어나도록 하세.”
“하면 이미 중독된 자들은?”
“…….”
응천의 질문에 운암이 미간을 찡그렸다.
언젠가 지탄을 받게 되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내려야 할 결정이었다.
“지금은…… 버릴 수밖에…….”
다른 대책은 없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한 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단과 대동을 지키는 이들에게 명을 전하겠습니다.”
“서두르세!”
“예!”
생각지도 못했던 전략에 탄탄히 구축하고 있던 방어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원의 명운을 건 전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