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09
9화
허리에 검 한 자루를 차고 어깨에 봇짐을 멘 운연이 무당 산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표주를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그간에 표주가 잦았나?
비상 약품이며, 야숙 용품이며 공간 낭비 일절 없이 딱 필요한 것만 꾼처럼 싸 놨다.
게다가 자소궁에 인사하러 갔더니 당부 한마디 없이 잘 다녀오라는 말만 하고…….
젠장,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망할 도사 자식들.
이거 아랫마을 나들이 아니잖아. 공식 표주라고!
이제 막 도명을 받은 제자가 먼 길을 떠나는데 걱정도 안 되냐?
누가 많은 거 바라?
주의 사항 정도는 일러 주면 좋잖아! 일장 연설이 정 입 아프면 하다못해 그놈의 급급여율령이라도, 어?
대체 왜 이렇게 전반적으로 성의가 없어!
쓰레기도 이것보단 정성스럽게 버리겠다!
뿐인가? 제 기분은 거의 파문인데, 눈치 없는 산문 제자 놈은 잘 다녀오라며 열심히 손을 흔든다.
쓸데없이 해맑게…… 정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래서 표주의 목표는 무엇이었냐 하면.
‘화산 가.’
그게 전부였다.
밑도 끝도 없이 지명만 달랑 던진 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돌아온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뭐? 가면 알아?
이 자식들이 진짜…….
사람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뭐 이딴 주먹구구가 다 있어!
보냈으면 가서 뭘 해야 하는 건지 말은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망할 자식들, 이리 푸대접을 해?
오냐,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나중에 이 무당산을 네놈들의 머리로 장식하고 말 테다.
이를 박박 갈다가 고개를 축 늘어뜨린 그가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검을 맨 반대편 허리춤에서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원화관주 진허가 가다 배곯지 말라고 은전을 가득 채워서 건네준 전낭이었다.
미친놈들…… 필요도 없는 돈은 뭐 이리 많이 주는지.
와중에 마음껏 쓰고, 필요하면 전장 찾아서 무당 이름 대고 또 받아다 써?
술도 먹고, 맛난 것도 먹어?
산중에서 도를 닦는 놈들이 아주 과소비가 생활인 모양이다.
막 입도한 제자에게 사치하는 것부터 가르치다니…….
평소에 검소함이 몸에 익어 망정이지, 딴 놈 같았으면 좋다고 흥청망청했을 것이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날 밤에 장서각에 들러 양의심공을 빌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문파의 비급이라는 것이 무단 반출을 엄격하게 금하기에 밤을 새워 죽자고 외웠다.
거기다 핵심적인 구결을 추려서 은밀하게 필사(筆寫)까지 해 두고 나니, 피곤한 와중에도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어차피 독학으로 익혀야 할 무공이었다.
대성했다는 진무를 찾아가서 가르쳐 주십사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나름 원순데…….
뭐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면 표주를 나온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무당 놈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이제부턴 묵룡기를 마음껏 사용해도 될 테고, 눈치 안 보고 양의심공을 익히며 시간을 보내도 될 것이다.
멍청한 도사 놈들이 언제 돌아오라고 기간을 정해 주지도 않았으니까.
꼬로록.
“…….”
아침부터 쫓겨나듯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왔더니 배가 득달같이 신호를 보내온다.
문득 새벽같이 자신을 배웅한 청우의 말이 떠올랐다.
“해월각이라고 했지?”
단강구 물길 인근에 있다는 무제한 고깃집.
바다에 뜬 달.
육지에 있으면서 바다를 꿈꾸다니, 주인이 참으로 원대한 포부를 가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일대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맛집이니 반드시 들러 보라 하지 않았던가?
듣기로 무당과 오래전부터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고도 했고…….
“추릅…….”
허기에 먹을 것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그래. 가자, 가.
밥 좀 거하게 먹고 간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 * *
“와!”
대체 이게 다 뭘까?
운연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본관만 해도 무려 사 층인데, 주위에 전각이 두 채나 더 있다.
인근의 다른 건물들과 비교하면 마치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닛!”
운연이 허기도 잠시 잊은 채 한껏 고개를 젖혀 지붕을 쳐다보는데, 바깥을 쓸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점소이가 그를 보고 대뜸 놀란 표정을 했다.
뭐? 왜?
내가 침 흘려서 그래?
촌놈 같아서?
운연이 재빨리 소매로 흐르는 침을 닦으며 태연한 척하는데, 점소이가 싸리비를 휙 던지더니 주루 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뭐지? 내가 아닌가?
뭐 못 볼 거라도…….
운연이 의아해하며 주변으로 고개를 휙휙 돌리는데…….
우당탕탕쿵탕!
“…….”
무언가 거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벌컥!
갑자기 해월각 정문이 부서지듯이 열리더니 한 떼의 사람들이 뛰쳐나와 고개를 휙휙 돌린다.
“저기 계십니다!”
누군가가 외치며 손가락으로 운연을 가리키자, 뛰어나온 이들이 심각한 표정과 함께 우르르 달려왔다.
뭐, 뭐야? 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흠칫 놀란 운연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어서 옵쇼오!”
“…….”
먼지바람과 함께 비단옷을 펄럭거리며 달려온 뚱뚱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두 손을 공손히 착 모으고 허리를 냅다 직각으로 접었다.
“어서 옵쇼오!”
우렁찬 선창에 뒤를 따라 나온 사내들이 후창하며 허리를 숙인다.
“…….”
깜짝 놀랐다.
뭔 놈의 객점에서 인사를 이리도 공격적으로 한단 말인가?
“도사님, 어찌 이리 귀한 걸음을 다 해 주셨습니까?”
“…….”
“자자, 들어가시지요. 제가 뫼시겠습니다.”
가장 앞에서 인사했던 후덕한 사내가 냉큼 옆으로 비켜나 허리를 숙이며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귀인의 봇짐을 받아 들거라!”
“예!”
“…….”
생각지도 못한 소란에 운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돌격형 인사도 모자라서 짐 수발까지 든다고?
자신이 무슨 팔십 먹은 노인도 아니고, 고관대작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자, 어서요. 어서.”
“…….”
사내가 재차 웃으며 권하자 운연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어찌?”
“무당 도사님이 아니십니까?”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요.”
“…….”
뭐가 그러니까요, 냐?
이게 뭔 영문인지 설명을 하라고! 설명을!
“핫핫, 초행이시군요?”
“뭐, 예.”
……초행이다.
게다가 복수 어쩌고 외치며 무당까지 왔기는 해도, 운연은 세상 물정에 상당히 어두웠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어릴 때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전긍긍하며 눈칫밥에 찌들어 살았고, 상관평을 만난 뒤론 심산유곡에서 죽도록 수련만 해 댔다.
물론 그 후에 무당 오려고 운남 오지에 숨어들어서 그 동네 부족민들과 좀 어울리기는 했지만, 원체 깡촌이었어야지…….
아무튼 상관평이 들려준 말, 그가 구해 준 서적, 그리고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는 운남 오지 부족민들과의 교류.
그게 그의 세상 경험 전부였다.
세상을 책으로 배웠달까?
“허허, 저희 해월각에 대해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
“일단 들어가시지요. 초행이라 하시니 안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자꾸만 등을 떠미는 사내의 말에 운연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뭐가 이리 크단 말인가?
밖에서도 놀랐지만, 안은 더 놀라웠다.
족히 백여 명이 한꺼번에 앉아서 식사할 만한 넓이, 고풍스러운 장식.
그리고 벽면에 걸린 대문짝만한 족자에…… 응? 무당지검 다녀간 집?
삼십 년 전통의 원조, 뭐 이런 거 아니고?
그리고 이건 또 뭐야?
무당지검이 제갈근과 싸우다 부서진 흔적?
아니, 부서졌으면 고칠 일이지 뭘 대단한 기념이라고 금줄까지 쳐서 보존하고 지랄이야?
놀람이 황당함으로 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방 벽면에 무당지검 어쩌고 적혀 있었고, 그곳을 방문한 이들의 기록이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자, 이쪽으로…….”
사내에 의해 이 층 주루의 내실로 안내된 운연은 넓은 탁자를 홀로 차지하고 앉았다.
“저기, 대체 제게 어찌?”
미리부터 궁금했던 질문에 객점 주인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무당 도사시니까요.”
“그…….”
그건 나도 알겠다.
무당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환대와 무당 도사 간에 뭔 상관관계가 있다고?
“허허, 궁금해하시니 설명 올리겠습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해월각의 주인인 허삼이올습니다. 저희 해월각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제 조부님 대이나, 진정한 번영의 역사는 영명하신 진무 도장께서 방문하신 후부터지요.”
“…….”
점원들이 술과 고기를 내와 탁자를 가득 채우는 사이에도 허삼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대로 두면 밤도 새겠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장광설이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진무가 유명해지면서 자신의 객점도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거의 단강구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주요 관광지 수준이랄까?
허삼이 작년에는 심지어 황제가 직접 왔다 갔다며 침을 촤악 튀겼다.
거, 객점 한다는 인간이 음식 앞에 두고 더럽게…….
“하여, 저희는 무당 도사님들만큼은 술! 무료! 고기! 무료! 숙식! 무료! 즉, 해월각의 부압피(孚狎彼: 미쁘고 익숙한 그이)로 환대하고 있지요.”
“아, 예…….”
처음 들어 보는 말이지만 제법 사람 우쭐해지게 하는 말이다.
부압피라니…….
“자, 여기 방명록.”
허삼이 잽싸게 내민 서책과 간이 지필묵을 받아 든 운연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행적을 휘갈겼다.
무당 이대제자 운연 다녀감.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시킬 일이 있으시면 여기 이 줄을 당겨 주십시오.”
허삼이 천장 한구석에 길게 뻗어 내려온 붉은 수술이 달린 줄을 가리키고는, 다시 한번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하, 참…….
이놈 저놈,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다들 진무 진무 노래를 하는구만.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지?
약간 질투가 나긴 했으나, 자신이 목표로 삼은 자가 높은 곳에 있다는 건 꼭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기다려라, 진무.
내 언젠가, 반드시 널 뛰어넘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좀 먹고.
운연이 탁자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잔뜩 집어 빠르게 입으로 가져갔다.
“……!”
그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이…… 미세 조절이라도 한 듯이 딱 맞는 간!
미칠 듯한 감칠맛!
맛집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맛집!
파파파파!
우걱우걱. 쩝쩝.
향신료가 주는 짜릿한 맛에 취한 운연이 미친 듯이 음식을 입에 욱여넣고 씹기 시작했다.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에 정신을 놓아 버린 탓이었을까?
“꺼어억!”
예기치 못한 실수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눈치를 본 운연이 얼굴을 붉히고는 술을 따라 마셨다.
“캬아! 이 맛이네.”
참, 좋은 술이다.
독작(獨酌)에 흥이 날 리가 만무하건만, 이 술은 홀로 감춰 두고 마셔야 할 느낌이 드는 게…… 오히려 독작을 부른달까?
쪼르륵.
입에 착 달라붙는 술맛에 희희낙락 잔을 채우는데, 작은 목소리 하나가 운연의 귀를 파고들었다.
“어르신, 금룡협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
익숙한 지명에 운연이 귀를 쫑긋거렸다.
벽 너머에서 들리는 걸 보면 옆방이다.
화자는 젊은 사내였고, 청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인 듯했다.
한데 금룡협이라면…… 화산!
묵룡혼원공이 남겨져 있었다는 곳이 아니던가?
순간 흥미가 확 동한 운연이 눈알을 좌우로 한 번 굴리더니, 귀를 쫑긋 세우고 벽에 착 달라붙어 소리를 빨아들였다.
숨어 듣는 이야기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기척을 지우기도 했다.
“……화산이 없애 버린 묵룡동이 가짜라는 이야기 말이냐? 헛소문이 아니었더냐?”
“어허, 목소리가 크십니다.”
“…….”
젊은 사내의 핀잔에 노인이 급히 목소리를 낮추자 덩달아 운연도 제 숨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가짜라니, 그럴 리가.
상관평이 그곳에서 가져왔다는 묵룡혼원공은 진짜였다.
자신이 이미 익히고 있었고, 그 효과까지 검증한 바 있었다.
하면 이들이 알아낸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걱정 말게. 내 이 층 내실이 빈 것을 다 확인했어. 좌우로 아무런 기척도 없지 않은가?”
“음, 그렇군요.”
젊은 놈이 못 미더운 듯이 다시 한번 기감을 펼쳐 살핀 모양이나, 다행히 자신이 있다는 사실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자, 이제 말해 보게.”
“개방 출신의 영웅 각출, 아시지요?”
“……여, 영웅이었나?”
“영웅이지요.”
“…….”
대화가 일순 뚝 끊겼다가, 잠시 후 다시 이어졌다.
“아, 알지, 알고말고. 자네가 팔촌 사돈의 둘째 아들 친구라고 자랑하던 사이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지요.”
“가깝긴, 남인데…….”
또 말이 끊어진다.
그리고 대화가 어째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데…… 기분 탓인가?
“여하간, 들어 보십시오. 그 각출 영웅이 말하기를, 금룡협에 남겨진 것은 내공법뿐이라 했다더군요.”
“뭣이? 그것이 사실인가?”
“예. 금룡협에는 내공법만 남겨져 있고, 진짜는 소화산 어딘가에 있다고 합니다.”
뭣? 그게 무슨 소리지?
대경한 운연의 몸이 순간 크게 움찔했다.
딸깍.
팔이 스친 탓에 옆에 있던 탁자 위 술 주전자가 딸깍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
옆방의 대화가 다시금 끊어졌다.
젠장, 들켰나?
들켰겠지? 들켰을 거야.
빠르게 결론을 내린 운연은 더 생각하지 않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곤 뒤이어 우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있던 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젊은 사내가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누가 봐도 무당 도사인 옷자락 끝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거 새끼, 차~암 빨리도 토꼈네.”
젊은 사내, 아니 거지.
그는 백결복을 입은 각출이었다.
“흠, 그런데 설마하니 진짜로 속을 줄이야. 급조된 이야기라 허술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옷소매에서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빠르게 적었다.
운연, 매우 허술한 듯하나 눈치는 매우, 약간 아주 미세하게 빠름. 주의할 것.
그러곤 적은 종이를 찢어 돌돌 만 뒤, 전서구의 다리에 단단히 묶었다.
푸드드득!
“된 것입니까?”
각출을 뒤따른 객점 주인 허삼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땀을 닦아 내며 물었다.
“예, 됐습니다.”
“다행입니다. 내 진무 도장께서 시키신 일이라 한 것이지만…… 어찌나 긴장되던지.”
“하하, 연기력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예,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예.”
역할을 다한 허삼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자, 언짢은 표정을 하고 뒤에 서 있던 노인이 콧방귀를 뀌며 다가와 각출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빠아악!
“큭! 아니, 왜 때려요?”
“이게 어서 눈을 부라려? 확 그냥!”
“…….”
각출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노인.
머리카락과 듬성듬성 난 수염이 온통 하얗게 센 거지, 양소방이었다.
“아주 지랄로 배지도 않은 애도 낳겠다, 이놈아. 니가 영웅이냐? 팔촌 사돈이 뭐 어째?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 놈이…….”
“……에헤이, 연기 아닙니까, 연기. 봉공 어른께서 멈칫하시는 바람에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구요.”
“허, 염병을 연속으로 해 대는 것 좀 보소. 넌 어째 갈수록 진무 그놈처럼 변하는 게냐?”
양소방의 짜증이 담긴 핀잔에 각출이 볼을 긁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 내 시킨 대로 했다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게냐?”
“천주님이 부탁하셨습니다.”
“망할 놈. 기껏 얼굴 좀 보나 했더니……. 다 늙은 노인네에게 이딴 연기까지 시켜? 대체 저놈이 누구길래 그런다더냐?”
“글쎄요. 자세한 내력까진 모르겠는데, 묵룡기를 쓰더라구요.”
“뭣! 묵룡기라고? 그 씹어 먹을 무공은 양진이나 청상, 청우에게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니냐?”
“예. 해서 천주님께서 이리하면 분명 어떻게든 반응을 보일 거라고.”
“흐흠……. 미끼를 던졌다? 감추고 있을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해?”
“예.”
“하면 진무는 소화산에서 기다리는 것이냐?”
“아니요. 아마 요 근처 어디에 계시다가 저 친구를 쫓아가셨겠죠.”
“그래? 그럼 우리도 어서 가자꾸나. 내 진무 안 본 지가 오래되어서…….”
“봉공께서 왜요?”
“응? 왜라니?”
“천주님께서 그의 진짜 신분을 확인해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어쩌면 무림의 운명이 달린 일일지도 모른다면서요.”
“……무, 무림의 운명이라고?”
난데없이 뭐가 또 그리 거창해?
하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무림의 안녕과 평화에 죽고 못 사는 정의 거지 양소방이었다.
금세 얼굴을 달리한 그가 각출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예, 하여 벌써 하오문에도 같은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듣기론 개방보다 빨리 찾아야 한다면서 가부자가 벌써 은위대를 운남으로 급파했다던데요?”
“뭐, 뭣이?”
각출의 말에 양소방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
각출이 창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지고 난 뒤 얼마 후, 양소방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자신이 아껴 마지않는 진무의 부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오문 떨거지 놈들에게 뒤질 순 없었다.
지난 환란에도 당했지 않던가?
고생은 개방이 다 했는데, 진무를 따라다녔다는 이유로 공은 하오문 놈들이 다 챙겨 가 버렸다.
망할 가짜 공자 새끼가…….
멍청한 각출이 놈을 믿은 것이 실수였다.
제자 하라고 보냈더니 영 심부름꾼 노릇만 하고…….
어쨌든 이번에도 당하지 않으려면?
급히 움직이는 수밖에!
“젠장, 비선(秘線)들은 듣거라!”
양소방이 열의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힘차게 외쳤다.
“……예!”
허공에서 높낮이가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중원 각지에 파견된 아이들에게 연락을 보내 현 시각부터 모든 임무를 중지하고 운남으로 집결하라 일러라! 내가 직접 이끌 것이다!”
“예, 봉공 어른!”
“가자!”
창턱을 밟고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가는 양소방을 필두로 어디선가 나타난 이들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전서구 수십 마리가 명을 싣고 중원 전역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