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63
33화
박피옥은 염수호의 중심부에 있는 섬이다.
다만,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염수의 흐름에 따라 흘러 다니는 유동적인 섬이다.
해서 몇몇을 제외하면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자가 드물었다.
사실 그 안에 사는 이들 중 누구도 박피옥의 위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차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들은 정해져 있고 항시 같은 일상이 반복되니, 호기심 같은 감정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박피옥의 가장 외곽, 염수호와 닿은 연안부에 위치한 해형장(醢刑場)의 관리 귀, 육장도 그 지긋지긋한 일상을 수백 년째 반복해 왔다.
박피옥의 망자들이 가장 마지막에 받는 형벌, 해형.
말 그대로 껍데기가 벗겨진 채, 염수호에 담가져 젓갈이 되는 것이다.
상처 속으로 파고드는 염분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박피옥 연안에 사는 식어(食魚)에게 살점을 뜯어 먹히며 죽는다.
물론, 죽는다고 끝이 아니다.
완전한 소멸이라는 것이 없는 그들은 또다시 정해진 장소에서 부활해 처음부터 형벌을 반복하며 하계에서 지은 불효와 불충의 죄를 뉘우친다. 영원히 반복되는 망자들의 일상이다.
또한 허망한 살점을 뜯어 먹은 식어들이 배부를 리 없다.
망자의 소멸과 함께 뱃속에 들어갔던 살점이 허망하게 사라지니 식어들은 항상 허기에 시달리고, 자연히 해형장 물속에 망자가 들어오면 미친 듯이 달려든다. 그것이 식어들의 일상이다.
해형장의 괴들은 껍데기가 벗겨진 망자들을 하나씩 염수호에 담그는 것이 일상이고, 총관리자인 육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어?”
그런데 그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촤아악, 촤아악.
“…….”
물길을 헤치며 노질하는 소리.
자욱한 안개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지 않은 소리에 육장은 물론이고 해형장의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가리온?”
누군가 염수호를 건너오고 있다면 오직 그 하나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해형장은 망자들이 인도되는 항이 아니질 않은가?
항상 같은 곳을 향하는 가리온의 배가 항로를 벗어난 일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희한한 일이네. 가리온이 길을 잃기라도 한 건가?”
육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리온의 항로 이탈은 응당 보고부터 해야 할 사안이었으나, 의문과 호기심이 더 컸다.
촤아아악.
육장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이윽고 가리온의 배가 안개를 뚫고 해형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형장의 요와 괴들도 육장과 마찬가지로 의아했던 모양인지, 망자들에게 가하던 해형을 멈추고 멍하니 연안으로 정박하는 가리온의 배를 바라봤다.
그런데…….
나타난 배를 본 육장은 이전보다 더욱 큰 의문을 품었다. 선상이 휑했던 것이다.
마땅히 막 박피옥 외곽에 도착해 형상을 갖추지 못한 혼령이 그 위에 타고 있어야 할 것인데…….
선상에 있는 것은 뱃머리에 팔짱을 끼고 선 매우 불량한 표정을 가진 놈 하나, 그리고 그 뒤에 좌우로 자리를 잡고 선 큰 놈 하나와 작은 놈 하나, 또 그 뒤로 이상하리만치 안쓰러워 보이는 놈 하나. 노를 잡은 가리온을 제외하고 총 넷이었다.
대체 뭘까? 혼령도 아니고 형체를 갖추고 있는 저것들은…….
안력을 집중해 봤지만, 아는 얼굴이 아니다.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배가 멈추고 노를 놓은 가리온이 무척이나 공손한 자세로 뱃머리에 선 자를 향해 말한다.
가리온이 뭔가 설명하듯 손가락을 뻗어 한참을 말하자 뱃머리에 있는 놈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대체 뭘까?
수많은 물음표가 육장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리온, 그는 일반적인 뱃사공이 아니다.
귀모의 명을 기다리는 자.
무려 아비옥주의 천거를 받아 업경의 죄가 사해졌고, 박피옥 사공으로 머물며 천계로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만귀(萬鬼)의 모범이 되는 자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업경에서 죄가 사해지는 일은 몇천 년 동안 손에 꼽을 정도의 일이었고, 가리온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귀들의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육장도 몇 번이고 그와 친분을 만들어 보려 노력했다. 귀동냥으로나마 그가 천계로 갈 수 있었던 방법을 들어 보려고…….
혹시 또 아는가? 그의 도움으로 자신도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떠나 천계로 향하게 될지.
어쨌든 그가 정해진 항로를 벗어나 자신을 찾아왔다면…….
문득 든 생각에 육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나의 지성(至誠)이 통한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의 지극한 정성이 감천이 아니라 감(感)리온 한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뜬금없이 해형장을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뱃전의 인물에게 보이는 가리온의 저 공손한 모습. 그가 저럴 정도라면 필시 보통의 신분은 아니다.
지극히 높은 존재. 자신이 박피옥에서 본 적도 없는 얼굴이라면?
“혹시 귀모님의 사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만약 가리온에게 천계 입시가 허락되었다면? 그래서 귀모의 허락을 전할 사자가 온 것을 박피옥주에게 고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었다면?
가는 길에 잠시 해형장에 들른 것이다. 자신에게 천계로 가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 이런!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저 높으신 분들을 어찌 앉아서 맞이한단 말인가? 귀생 최고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것을!”
번뜩 정신을 차린 육장이 옷매무새를 고칠 겨를도 없이 일어나 귀한 객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말을 마친 가리온이 뒤로 물러나자, 고개를 끄덕인 사자가 고른 치열을 재수 없게 드러내며 손가락을 세워 세차게 뻗었다.
그리고 그 입 모양은 분명…….
“……조……져?”
일어서다 엉거주춤하게 멈춰 버린 육장의 눈에 뱃전을 밟고 표표히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큰 놈과 작은 놈, 그리고 그 뒤의 불쌍한 놈의 모습이 보였다.
“뻗어라!”
슈아아악!
쭉 뻗은 손에서 붉은 섬광을 쏘아 해형장의 괴들을 꿰뚫는 큰 놈.
“크크크, 바로 이 맛이지!”
스거거걱!
어느새 해형장의 괴들 틈으로 뛰어들어 양손에 쥐어 든 비수를 휘둘러 대는 작은 놈.
“으아아아! 다 죽여 버리겠다!”
흉측한 쇠도리깨를 꺼내 큰 놈과 작은 놈이 지나간 곳에서 신음하는 괴들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불쌍해 보이던 놈.
고작 셋.
붉은 섬광이 꿰뚫고 지나간 뒤로 쌍비수가 회오리를 일으키고, 이어 도리깨가 휘둘러지자 해형장이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전장으로 변해 버렸다.
뒤늦게 요와 괴들이 막아섰지만, 그 셋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안이 벙벙한 육장으로서는 그저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왜? 어째서? 뭣 때문에?
“크아악!”
“꿰에엑!”
“…….”
해형장을 가득 채우는 비명에 육장이 번쩍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아직 찾아온 연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내버려 뒀다가는 해형장이 쑥대밭이 될 것이 자명했다.
가리온이 천계로 가는 방법을 알려 주러 온 것이든, 함께 온 이들의 신분이 귀모의 사자이건 간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제 영역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어찌 두고 보겠는가?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멈추지 못할까!”
분기탱천한 육장은 곧바로 자신의 법구인 자옹(磁甕)을 꺼내 들고 몸을 날렸다.
쐐애애액!
“……항아리?”
해형장으로 가장 먼저 뛰어들어 적광을 뿌려 대던 큰 놈, 청상이 육장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리온, 아니 백표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해형장을 관리하는 수좌이다. 그리고 애초에 청상을 비롯한 셋의 목표는 진무가 나서기 전에 해형장의 적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좌쯤 되니 진무에게 처결을 물을 법도 했지만…….
사숙이 누굴 빼고 조지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래! 언제까지나 사숙께 맡길 수는 없는 일이지!”
박피옥주도 아니고, 고작 그 아래에서 해형장이나 관리하는 귀가 아닌가. 그 정돈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
“신!”
“……?”
“뒤를 맡아라!”
해형장의 수좌와 싸울 생각이로군.
청상의 외침에 달려드는 요와 괴들의 몸뚱이를 분리해 놓고 있던 황신은 힐끗 육장을 쳐다보곤 단번에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자신도 청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진무의 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아직은 무리였다. 힘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았거니와, 청상보다 모자란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가 협비의 검우를 막아 내던 모습을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하니 일단은 뒤를 맡을 수밖에…….
“칫! 알았다. 하나 만에 하나 놈에게 당해 쪽팔리게 만들면 반드시 그 아가리를 찢어 버릴 테다!”
“날! 믿어라!”
“…….”
씩 웃곤 자충을 갈무리하며 육장을 향해 날아가는 청상을 보며 황신이 비틀린 입술로 투덜거렸다.
이게 어디서 개천주 흉내야?
믿긴 누가 믿어?
그냥 잠시 앞자리를 맡기는 거다. 내가 더 강해질 때까지만.
달음질 경기라는 것이 원래가 그렇다. 당장에는 청상이 빠르기에 그 뒤를 쫓고 있다고 해도, 결승점을 누가 먼저 통과할지는 온전히 뛰어 봐야 아는 법이다.
하계에서나 이 순간이나 청상이 더 강하다곤 하지만 반드시 뛰어넘을 것이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개천주의 개인 호위니까.
꽈악.
결의를 다진 황신이 양손에 잡은 비수를 힘껏 움켜쥐었다.
“이생!”
“어어?”
홱 돌아보는 황신의 모습에 사력을 다해 도리깨를 휘둘러 대던 이생이 지친 기색으로 쳐다봤다.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포악하게 싸워라! 사력을 다해서!”
파아앙!
앙칼지게 외치며 이전보다 더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하는 황신을 보며, 이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사력? 그딴 건 진작 다하고 있다. 말한다고, 다짐한다고 힘이 더 나겠냐? 그건 니들 같은 괴물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씨발, 그냥 도산옥 나찰귀로 살 것을 괜히 따라와서는…….
“으아아아아! 죽어라! 괴 놈들아!”
하지만 후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적들로 인해 또다시 회천에 가게 생겼으니, 황신이 말하지 않아도 더 빠르고 강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뒤를 내맡긴 청상은 온전히 육장에게 집중했다.
[뻗어라! 자충!]슈아아아악! 콰아앙!
“크으윽!”
육장의 자옹과 청상의 자충이 부딪치며 생긴 충격파의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흐흠.”
멀리 뱃전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진무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진무는 백표에게 박피옥 점령의 교두보가 될 만한 곳을 요구했다.
박피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중 가장 실력 있는 귀가 지키는 곳.
그곳이 해형장이었다.
듣자니 육장은 백표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실력자라고 했다.
사실, 굳이 이런 소란까지 피울 필요는 없었다. 제 성질대로 하자면 그대로 뚫고 들어가서 박피옥주와 맞짱을 떠도 충분했으니까.
그편이 가장 빠르고, 자신의 수련에도 효과적이다. 약하디약한 것들 괴롭혀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지계 전체와 싸우기로 한 이상 혼자 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청상도, 황신도, 이생도…… 함께 강해져야 한다.
등선하자마자 지계로 온 청상은 경험이 부족하다.
하계에서 이루어 낸 경지가 낮진 않으나 천계와 지계에서의 싸움은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듣도 보도 못한 술법을 쓰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또한, 황신이 힘을 되찾았다고 하나 온전히 쓰지 못하는 상태.
귀모가 자신을 지켜볼 생각이 확실하다면, 그 시간을 철저하게 이용해 수련의 기회로 삼는다.
본시 목숨을 내건 실전 경험이야말로 실력을 증진하는 가장 좋은 수련법이다. 하나씩 하나씩 강자에 맞서 싸우며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종내 지계의 정점에 있다는 귀모와 싸우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전장을 바라보는 진무의 모습에 백표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음, 저리 몰아붙이는 것은 좋지 않은데…….”
“응?”
“청상도사와 싸우는 육장 말입니다.”
“……쟤가 왜?”
“여간 까다로운 놈이 아니거든요.”
“까다로워?”
“그렇습니다. 성격이 좀 가벼워 보이는 것은 허허실실의 수법일 뿐입니다. 모두가 그에게 방심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의 진짜 실력은 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나 그의 법구는…….”
“그래서.”
백표의 걱정 가득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잘라 버린 진무가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째려봤다.
“청상이 지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 그런 말이 아니옵고…….”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이게 지계 놈이 되더니 가재는 게 편이라 이거야? 지금 누구 앞에서 육장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어?
가만히 보니 좀 짜증이 났다.
지가 언제부터 나랑 같이 뒤에서 팔짱 끼고 쳐다볼 위치였다고?
“백표.”
“예, 은공.”
“넌 뭐 하냐?”
“예?”
“그렇게 계속 지켜볼 거야?”
“……예? 제게 따로 말씀하시기로는 저들의 수련을 위한 싸움이라고…….”
“그래서?”
“전 굳이 수련이 필요하지 않은데요?”
“아, 그르셔? 그럼 어느 정도길래 수련이 필요 없는지 확인해 줄까? 내가 직접?”
쭉 치켜 올라가는 진무의 눈꼬리에 백표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텨 가라, 좋은 말로 할 때.”
“……!?”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슬며시 드러나는 송곳니가 결정타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백표가 즉시 식칼을 빼 들고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 갑니다. 가려고 했습니다, 암요!”
“…….”
“으아아아아! 이놈들! 껍데기를 모조리 벗겨 주마!”
과장되게 외치며 전장으로 뛰어든 백표의 모습에 진무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짜식이 진작에 그럴 것이지.
우리 청상이가 어떤 앤데 저 육장 같은 놈 따위와 비교를 해?
앞으로 육계의 주인이랑 어깨를 나란히 할 그런 놈이라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