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17
87화
무당산.
호북성 균현에 우뚝 솟아 괴이한 봉우리와 굽이쳐 흐르는 계곡을 천하에 뻗어 내고, 천주봉을 시작으로 일흔두 개의 봉우리로 하늘을 떠받치는 곳.
그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전설 중, 전승되지 못했던 전설.
일찍이 하나였던 세상이 음과 양으로 나뉘어 다툼을 반복하던 시기.
음은 귀령, 양은 신령이라. 그러나 전장의 치열한 독기로 선(善)은 사라지고 악(惡)만이 가득해지자 무엇이 귀이고, 무엇이 신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하나 그 피해는 음양에 속하지 못한 자들의 것이라.
어두운 하늘 아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기를 오래.
태고의 뜻을 이은 중재자 중 음양의 힘을 치우침 없이 다루는 신수 현무가 육정육갑(六丁六甲)의 신장들을 이끌고 무당의 산정에 현신하니 귀와 신이 힘을 합하여 대적했다.
현무가 투구 아래 풀어 헤친 머리를 휘날리며 그 힘을 보이니 놀란 신령들은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려 그들을 모시고, 귀령들은 끝까지 항쟁했다.
격렬한 싸움의 끝에 항전했던 귀들을 물리친 후 현무는 수명이 다해 무당산에 스몄고, 산정을 따라 그 맥이 이어진 모든 곳에 음양의 힘이 고루 퍼졌다.
하나 소멸한 것은 귀령뿐, 현무의 발아래 고개를 조아렸던 신령은 천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무당산에 남게 되었다. 현무가 무당산에 스미며 천지간의 구분이 단단해져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령들은 산의 맥이 시작되는 작은 연못에 터를 잡았고, 자연히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치열했던 전쟁이 잊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틈엔가 신령들은 귀의 이름에 마를 더해 마귀(魔鬼)라 배척하고 신의 이름 뒤에 선이라는 존호를 더해 신선(神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깨달음을 좇아 온 이들이 무당산을 선실(仙室)이라 부르며 자리를 잡고 세를 이뤘다.
양이 득세하나, 그 내면에 음이 머무는 곳. 바로 오랫동안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로 운위되며 도가의 수좌로 군림해 온 무당파였다.
그리고 지금.
어두컴컴한 하늘 속 곧게 내리뻗은 빛줄기가 무당산의 산정(山頂)을 환히 밝히고, 먹구름보다 검은 마귀들이 산하(山下)를 짙게 둘러쌌다.
다시금 치열했던 과거의 격전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 * *
“큭큭, 드디어 왔군.”
“…….”
산하를 가득 메운 마귀들의 앞자락. 귀모의 명으로 무당산의 경계에 도착한 한빙옥주 혼천이 과거를 회상하며 살기 어린 눈동자를 번뜩였다.
“여태 화가 남은 모양이군.”
“여태?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이 빌어먹을 놈들로 인해 내가 이루었어야 할 역사가 무너졌어.”
“역사라…….”
그의 옆에 선 우융이 무심한 표정으로 혼천의 분기 어린 말을 되씹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네놈도 진무 놈에 의해 뜻이 꺾이지 않았나?”
“……글쎄.”
우융은 말을 흐리며 웃었다.
자신이 무당산을 바라보는 느낌은 혼천의 그것과는 달랐다.
화날 게 뭐 있을까? 그저 산이고, 그 위에 자리 잡은 도관일 뿐인 것을.
녀석의 흔적이 남은 곳, 이제는 그마저도 없는 곳. 우융에게 무당은 단순히 그 정도의 의미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계에서 만났을 때, 다시 한번 겨뤄 승부를 내 보지 못한 것이다.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인데…….
“나는 반드시 저놈의 산을 무너뜨릴 것이다. 진무 놈이 죽었으니 그 죄를 다른 이들에게 물을 것이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겠다. 진무 놈을 욕하고 저주를 부르짖으며 죽어 가게 할 것이다.”
“…….”
한 자, 한 자 짓씹듯 말하며 서늘한 분노를 토하는 혼천의 모습에 우융이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뭐 하는 거냐?”
“……나는 관심 없다.”
“뭐?”
“내가 이곳으로 오며 기대한 것은 피를 끓게 할 만한 강자였다.”
“…….”
우융이 무당산을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천계가 통로를 연 것은 분명하나, 귀모님 말씀처럼 마왕 셋을 죽일 만큼 강한 힘은 느껴지지 않는군.”
“빠지겠다고?”
“내가 빠지면, 더 즐겁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군.”
귀모는 분명 마왕 셋이 함께 무당산을 공격하라 명했다.
제 즐거움을 위해 항명을 불사하면서까지 잠시 물러나 주겠다는 우융의 말에 혼천이 잇몸을 한껏 드러내며 웃었다.
“악구, 너는 어쩔 것이냐?”
“네놈의 기분보단 귀모님의 명이 우선이다.”
“큭, 그 역시 그렇군. 그럼 악구 너는 느긋이 오너라. 나는 먼저 갈 테다.”
“……그 정돈 배려하지. 한데 네가 직접 할 것이냐?”
“당연한 소릴. 아랫것들에게 나의 즐거움을 빼앗길 순 없지!”
음산하게 웃은 혼천이 누가 잡을세라 서둘러 무당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 두 발…….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모습이 변했다.
흰 서리를 맞은 듯 하얗게 물드는 머리칼, 속이 비칠 듯 투명한 눈동자.
봉신을 해하고, 혹한(酷寒)의 권능을 드러낸 혼천은 꼭 하얀 마귀처럼 보였다.
쩌저적.
걸음마다 서릿발 같은 한기가 뻗어 나가 대지를 차갑게 얼린다.
빠각, 빠가각.
난데없는 찬 서리에 얼어 버린 풀들이 혼천의 걸음에 산산이 부서졌다.
“응? 이건 뭐야?”
거침없이 사방을 얼려 가던 한기가 순간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뻗지 못하자 혼천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우융과 악구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한의 권능이 범접지 못한다?
“결계로군.”
“……결계? 하면 천계 놈들이 방비를 해 두었다?”
우융의 혼잣말에 혼천이 투명하게 변한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전혀 다른 힘이다.”
“뭐?”
“아무리 분노에 휩싸였다 하나, 마왕인 네놈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
“우리와 상극인 천계 놈들이 펼친 결계라면 상쇄(相殺)로 인한 반발력이 느껴졌어야 한다.”
그제야 혼천이 고개를 홱 돌려 힘과 힘이 맞닿아 있는 경계점을 살폈다.
“스, 스민다고?”
결계가 자신의 힘과 동질화되더니, 잡아먹고 있었다.
“큭큭, 마력을 흡수하는 결계라…… 제법이군. 귀모님께서 괜히 마왕 셋을 함께 보낸 것은 아니란 말이지?”
“…….”
내내 무심하기만 하던 우융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팔짱을 풀자, 혼천의 투명한 눈매가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내게 맡긴다더니…….
고대하고 고대해 온 즐거움을 우융이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쿠우우우…….
“부숴 주지, 이따위 결계!”
싸늘한 외침과 함께 혼천의 손에 새하얀 기운이 어려 둥근 공처럼 응축됐다.
슈아악!
이내 뻗어 낸 손을 따라 백색 구체가 긴 꼬리를 달고 쏘아져 나갔다.
터어어엉!
혼천의 힘을 가로막고 있던 막이 무당산 안쪽으로 움푹 패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흥!”
코웃음을 친 혼천이 백색 구체에 힘을 더했다.
조화의 힘을 머금은 거목의 작은 가지로 만든 결계. 하지만 그 힘의 한계는 명확했다.
봉신을 해한 혼천의 힘이 수용 한도를 초과하자 결계가 굉음을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쾅!
밀어닥친 혹한의 광풍으로 인해 찢어진 결계 너머로 감춰졌던 내부가 드러났다.
결계 앞에 선 채 자신을 겨눈 자들.
천계의 일 차 지원군을 이끌고 온 북방칠수의 수좌, 두장군 백양을 비롯해 각양각색으로 보이는 수많은 신령.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다. 그러나 그 뒤를 보는 순간 혼천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태극무늬가 선명한 도포와 도관을 갖춰 입은 도사들. 바로 명진이 이끄는 무당의 제자들이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검 끝을 떨어 대는 게 겁을 먹어서인지, 혹한이 주는 냉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이거야 원, 어중이떠중이들을 긁어모은 천계 놈들로도 모자라…… 인간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결계로 인해 무언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기대감이 사라졌다. 맥이 탁 풀린 혼천이 피식 웃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큭큭, 이거야 원. 자네들은 나설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
악구는 무심했으나 우융의 눈에는 실망한 빛이 가득했다. 혼천은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앞쪽을 주시했다.
“명진, 뒤로 물러나 자소궁을 지키시오!”
“아닙니다.”
백양의 외침에 명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무당이외다. 어찌 악의를 품은 자들이 발 디디는 것을 물러나 구경만 하겠소.”
“젠장, 저들은 마왕이오.”
“누구라도 같습니다.”
“…….”
명진은 한결같았다. 과거의 어느 때 그랬던 것처럼, 무당을 지키고자 했다.
설사 다시 폐인이 될, 아니 소멸할지라도.
“큭큭, 미친놈들…….”
봉신을 해한 마왕을 앞에 두고 옥신각신하는 둘의 모습에 혼천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쭉 찢어졌다.
이내 그의 신형이 극심한 한기와 함께 무당산을 향해 훅 쏘아졌다.
“모조리 찢어 죽일 것이다!”
극심한 한기가 광풍이 되어 몰아치고, 무당산을 둘러싼 마귀들이 대지를 검게 물들이며 내달렸다.
“마귀들을 막으시오!”
백양이 양날 도끼를 움켜쥐고 이십팔수와 함께 혼천과 마주했다.
콰아아앙!
가공할 한기에 쩍쩍 얼어붙었던 산천초목이 충격파에 모조리 박살 났다.
“천계의 잡졸 따위가 내 앞길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닥쳐라! 마왕 놈!”
혼천을 둘러싼 백양과 이십팔수의 신장들이 가진 모든 선기를 동원했다.
“무당은! 검진을 펼쳐라! 검을 들어 마귀들을 처단하라!”
백양을 돕기엔 나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명진은 거멓게 몰려오는 마귀들을 향해 선두로 치달렸다.
비록 그를 제외한 모두가 귀와 신의 힘에 미치지 못한 인간이었으나, 신목의 가지를 깎아 만든 태극검이 그 격차를 메우고 있었다.
“버텨라! 조금만 더 버텨라!”
선두에 선 명진의 움직임은 단연 발군이었다. 마귀들의 목을 베어 내면서도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외면치 않았다.
목놓아 외치며 독려하고, 몸소 적들의 예봉을 꺾어 전의를 고취했다.
“음.”
멀리 떨어져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의 전투는 혼천만으로도 충분하다.
“끄아아악!”
하반신이 통째로 얼어붙은 신장이 괴성을 내지르며 산산이 부서져 소멸했다.
혹한의 권능을 지닌 혼천에게 지금의 싸움은 여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신장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고 있지만, 어찌 봉신을 해한 마왕들과 견줄 수 있을까?
혼천의 걸음이 느린 것은 이십팔수를 찬찬히, 하나씩 찢어 짓밟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절망에 젖은 그들의 표정을 만끽하느라.
아무리 악착같이 버틴다 해도 종내 무너질 무당이지만, 악구는 명진이 이끄는 도사 놈들의 행태가 신경 쓰였다.
그의 외침처럼…… 버텨 내고 있지 않은가? 고작 인간 따위가.
나무로 만든 목검에 불과한 그들의 무기가 마치 신묘한 법구라도 되는 양 마귀들을 소멸시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신경 쓰이는군.”
얼굴을 언짢게 일그러뜨린 악구가 우융을 힐끗 쳐다봤다.
팔짱을 낀 채 심드렁히 서 있는 그.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최강의 마왕.
하긴, 이런 것들을 상대로 나서는 것도 체면이 상할 일이지.
픽 웃어 버린 악구가 무당산을 바라보며 싸늘히 언령을 외었다.
[……가거라.]그 한마디에 발설옥의 마귀들이 일제히 무당산에 더해졌다.
“크아아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리는 그들을 보며 악구가 비릿하게 웃었다.
무당산…….
옥황이 직접 올 것도 아니고, 천계가 지원해 봐야 마왕 셋의 힘을 어찌 막겠는가?
무너질 것이다.
자신과 우융이 굳이 돕지 않더라…… 응?
순간 옆을 돌아본 악구의 눈이 커졌다. 내내 심드렁하던 우융이 경악한 듯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악구의 시선이 서둘러 그를 좇아 위를 향했다.
우우우우!
천지를 진동시키며 단숨에 모든 움직임을 멈추는 포효와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가닥 선.
그리고.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환한 빛이 번쩍 쏟아져 내렸다.
쿠드드드드! 콰아앙!
땅을 강타한 빛이 무당산을 중심으로 거대한 동심원을 만들며 연거푸 번지고, 빛에 휩싸인 마귀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당산이 원래의 평화롭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크으윽!”
“……!?”
마치 환상 같았던 순간이 경계 밖으로 떠밀려 버린 혼천의 신음에 깨졌다.
이를 악물고 눈을 찡그린 혼천이 바라보는 곳.
빛이 사라진 그곳에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하아, 잠깐도 비울 수가 없네.”
“……?”
과거 한때의 전설 속에 등장했던 현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타난 것만으로 귀와 신의 싸움을 멈춰 버린 사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산하의 마귀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이런 개새끼들이, 무당산이 우습냐?”
……역사는 흐르고, 전설은 재현된다.
비록 이전엔 기억하지 못할 전설이었으나, 지금의 전설은 모두의 뇌리에 때려 박이듯 각인됐다.
짝다리를 짚고 선 진무의 송곳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