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opened my eyes, I realized that modern life RAW novel - Chapter 1
1화
해 질 녘 노을을 맞고 주홍빛으로 물든 안뜰에 즐비한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지간한 관아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규모의 저택 안뜰인 만큼 그 주인 되는 사람의 위세를 알 수 있을 듯싶었고, 그의 권력이 마치 바람이 되어 피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내가 네놈 때문에 머리숱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않겠어…….”
그리고 그 권력의 주인이자, 이 커다란 영지를 보유한 저택의 주인인 듯 보이는 반백발의 사내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20대 중반 사내를 보며 이같이 말했다.
반백발의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20대 중반 사내가 주변 사내들의 시선을 받으며 멋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지금 이게 웃기느냐, 강아? 이 애비는 정말이지…….”
반백발의 사내가 그것을 들었는지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양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하자, 20대 중반 사내가 말했다.
“아버님, 그럼 어떡합니까? 아버님 같으면 그 상황에 그런 놈을 그냥 보내 주셨을 겁니까?”
청렴하고 정직한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자식의 말에 사내가 말했다.
“아니, 누가 그렇다더냐? 다만 정도가 있어야지 않겠느냐? 강율, 그 녀석의 장남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면 어찌한다는 말이냐?”
강이라고 불린 20대 중반 사내가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양 단호한 말투로 말을 받았다.
“임자 있는 아녀자에게 들이밀 만큼 채신없는 아랫도리라면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백발의 사내가 유감이라는 듯 감정을 드러냈다.
“아쉽지만 그것은 네 생각이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몇 달입니까?”
반백발의 사내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사적인 분위기를 지우고 부자간의 모습이 아닌 공직자의 얼굴로 말했다.
“상장군 최영의 이름으로 죄인 중랑장 최강을 5년간 참회동 형에 처한다.”
형을 선고받은 최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번엔 제법 길군요.”
“그래서 불만이더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최영의 말에 씩 웃어 보인 최강이 깊이 고개 숙여 읍했다.
조금 약한 모습을 해 보여도 되건만 소신을 지킨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라면 응당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너무나도 대견한 모습이었지만 그렇기에 처벌해야 하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미소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최강이 뒤에 참회동까지 감시할 사내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앞장서 걸어 사라지자.
장내에 있던 한 명의 사내가 최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째 참회동에 들어가시는 도련님보다 상장군께서 더 심란하신 듯합니다.”
사내, 그러니까 자신의 부관을 슬쩍 흘긴 최영이 사내의 말에 답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내가 대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일세. 다만, 그래서는 강율 녀석의 마음이 풀리지 않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아들놈 하나가 불구가 되었으니 말이야.”
부관이 최영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 숙이자, 최영이 말했다.
“이번에 강이 녀석이 참회동에 들어갔다가 오면 나이가 마흔다섯이 되겠군.”
수심이 느껴지는 최영의 말에 부관이 말했다.
“참회동의 진정한 벌은, 진법으로 인해 정신만 늙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하나씩 삐걱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영이 자조적인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내가 어릴 적 우연히 발견한 선산의 거목을 이용해 만들어 낸 형벌이 되레 나를 옭아맬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부관이 최영의 말에 최영과 같은 씁쓸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사랑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이 모두 죽고 떠나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이 머지않아 최강에게 찾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강의 부인만 해도 20대 중반의 외관인 최강과 달리 벌써 흰머리가 거뭇거뭇 보이는 마흔 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그리고 그러함을 잘 알기에 분위기가 따라서 숙연해졌을 때였다.
“장군님.”
장내로 갑주를 입은 사내가 불쑥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큰일 났습니다. 위화도에 머물던 이성계군이 개경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양 최영이 놀란 눈을 해 보였다. 보름 전 명과의 전투를 시작했다던 보고를 보내온 이성계군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이유였기 때문이다.
“지금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성곽을 지키던 금위군 오천과 이성계군의 선봉이 전투 중에 있으며, 이성계를 비롯한 그의 사병들이 그 틈에 시가지로 접어들었습니다. 바로 군을 짜서 성곽에 지원 배치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이성계와 그의 사병들은…….”
최영이 갑주 사내의 보고를 받고 있자니 부관이 말했다.
“제가 가서 도련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겠지요. 상장군께오서는 속히 저택에 있는 사병들을…….”
최영이 부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는지, 말을 채 다 하지도 않은 부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니, 보아하니 이미 늦었구나. 이성계가 거짓 보고까지 하고 강제로 회군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기습의 이점을 살리기 위함이다. 이미 적의 선발대가 개경 안으로 들어와 버린 이상 지금 와서 사병을 집결시킨다고 해도 희망이 없다.”
말을 마친 최영이 부관을 말없이 바라보자, 그의 의중을 깨달은 부관이 소리 냈다.
“상장군!”
“어차피 지금 불러온다고 한들, 승산은 희박할 걸세. 강이 녀석이 제아무리 성취가 일취월장해도 아직 그대와 같은 장군(정4품) 수준. 녀석 하나가 온다고 해서 전황을 바꾸기에는 버겁겠지.”
“…….”
최영의 말을 들은 부관이 침묵했고, 그를 슬쩍 바라본 최영이 쓰게 웃었다.
“이렇게 된 거, 그 아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최영이 다시 안뜰로 들어서는 남쪽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이를 부탁하네. 어차피 안에서는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은가? 강이가 들어가거든 참회동의 흔적을 지워 버리게.”
최영의 명령에 잠시간 내적 고민을 하던 부관이, 잠시 후 결연한 얼굴로 최영에게 한 차례 절했다.
부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임무를 마치거든 곧 따라가겠습니다.”
최영이 부관의 말에 허허롭게 웃으며 답했다.
“기다리겠네.”
최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안뜰에서 부관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자, 최영이 바라보던 커다란 남문이 거칠게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쾅.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필시 근시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을 가득 채우던 허름하던 초가집들은 빌딩과 고층 건물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고, 한밤중임에도 도시는 여기저기 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으며, 또 도로에서는 매연을 뿜는 자동차가 그 위를 바쁘게 달리면서 이곳저곳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로변의 가전제품점의 TV가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숭례문 앞에 나와 있습니다.
남색 계열의 짧은 단색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묶은 지적인 이미지의 여인이 TV에서 마이크를 들고 떠들고 있었다.
-여러분, 혹시 2008년에 있었던 숭례문 방화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당시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했던 방화 사건, 사실 그것이 앗아 갔던 것은 조선의 500년을 기억하던 남대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여인이 몸을 비스듬히 틀며 후면의 공간을 내보였다.
카메라의 줌이 자연스럽게 멀어지며 뒤편의 거목(居木)과 작아진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이후 정권을 잡고 이곳 서울, 즉 한양으로 도읍을 정해 조선의 문을 열 때, 개경에서 이곳으로 옮겨 심은 천목(天木)이 또 다른 유산입니다. 당시 화재로 불이 옮겨붙어 재가 되어 버린 이 천목의 꺼져 가던 생명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때문에 지금 남대문에는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요. 지금 현장에 나와 있는 시민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이 자리를 옮겨 어느 시민과 마이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끼이이익.
도로변에는 더 이상 TV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의 제동 소리와 경적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고, 그 소리와 함께 주변이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빵빵!
차들이 다니던 도로 위에 좀 전까지 없던 최강의 모습이 돌연 나타났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야. 죽고 싶어?!”
“…….”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도로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최강 때문에 깜짝 놀란 차량 주인이 뒤편에 정체되는 차들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썼다.
벌써부터 경적을 울려 대는 등 시끄럽게 소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달칵.
차량 주인이 신경질적으로 구시렁대며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뚜벅뚜벅.
사내가 도로변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는 최강에게 다가가 말했다.
“빨리 안 일어나?! 누구 미치는 꼴 보고 싶어!!”
“…….”
하지만 이번에도 답변 한마디 없이 양반다리를 한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최강의 모습에 사내가 이를 갈듯 말했다.
“하…… 씨…… 그래, 해보자 이거지?”
좀 전보다 더욱 심각해진 뒤편을 확인한 사내가, 참다못해 최강의 팔을 잡고는 잡아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끄으응…….”
이상했다. 어찌 된 일인지 최강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끙끙대던 사내가 최강의 팔을 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 안 일어나?!”
밤늦게까지 야근한 것도 분해 죽겠는데, 퇴근길에서마저 스트레스 받는 일을 겪은 사내가 마침내 폭발하듯 소리 질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번쩍.
마치 잠이라도 자는 듯 편안한 얼굴로 두 눈을 감고 있던 최강이 갑자기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본 사내가 경계하듯 움찔하며 물러났다. 다름 아닌…….
“뭐…… 뭐냐!”
이어서 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사내가 경계했던 것과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난 최강이 관심의 눈초리도 없이 터벅터벅 도로변으로 걸어가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내가 최강을 쫓아가 따지려다 말고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몸을 돌렸다.
차량 뒤편으로 그새 늘어선 많은 차량이 보였다.
“젠장!”
사내의 외마디 신경질적인 소리와 함께 다시 정체됐던 수많은 차량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가 자신의 차에 올라타 다시 운전을 시작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보도로 이동한 최강은 오로지 한 군데만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의 아나운서가 열심히 떠들던 TV였다.
눈을 감고 있긴 했지만 흐릿한 의식 속에서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와 천목이라는 단어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