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고우사와 장용은 구룡회냐 백룡회냐를 두고 한참 논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다.
약왕은 이제 와 용이 될 수 없다며 포기했고, 나머지는 전원 찬성해서 결과는 구 대 일.
장용이 크게 웃었다.
“영감, 봐. 세상에 용 되기 싫어하는 사람 없다니까.”
고우사는 동생들마저 배신할 줄 몰랐다는 듯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용 앞에서는 형이고 아우고 없구나.”
대홍랍강과 소지광이 멋쩍어했다.
“고우사 형, 미안하오. 나도 평생 사파로만 살아와서 그런가, 남들이 다 인정해 주는 그럴싸한 용 한번 해 보고 싶었다오.”
“어허…… 죄송합니다, 형님.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했는데.”
장용이 촉구했다.
“영감, 승복해. 이제 영감 혼자 용 되긴 글렀어.”
고우사는 하늘을 바라보고 후,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놈 말이 옳다. 평생 진법이나 연구하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내가 말년에 무슨 용이 되겠다고 욕심을 부리겠느냐. 흘흘…… 다 부질없는 일이다.”
갑자기 쾌도가 귀를 쫑긋했다.
“영감도 부질없어?”
“철량호는 왜 꼬나 쥐어, 인마. 됐다. 다들 생각이 그렇다는데, 따라야지 뭐 어쩌겠어. 백룡회……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고우사는 연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더니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난 진법이나 마저 손봐 두고 오마.”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가는 고우사의 등이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장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영감, 또 무슨 꿍꿍이야?”
약왕이 고우사의 편을 들었다.
“꿍꿍이는. 원래 나이가 들면 작은 일에도 주장을 잘 굽히지 않게 되네. 그러다가 자신이 옹고집을 부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면서 갑자기 신세가 처량해지는 거지. 그래서 저러시는 걸 게야.”
“아닌 거 같은데…….”
“자네도 늙어 보면 알아. 사람은 누구나 늙고 나서야 이해하는 것이 있다네.”
허윤은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고 노인장은 나중에 내가 잘 달래 보겠소이다. 그럼, 모두가 결정한 대로 합시다. 이 서무관?”
이진휘가 대답했다.
“응. 백도맹에 알리고, 상계에도 그 이름으로 필증 등록 마무리하고 올게.”
“수고해 주게.”
“옙! 알겠습니다, 백룡회주.”
이진휘는 자기가 뿌듯해서 허윤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땐 그냥 건방지고 성격 나쁜 양아치 건달인 줄 알았지, 이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다.
그런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제까지는 백도맹과의 연결 때문에 여전히 서무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백도맹을 그만두고 어엿한 백룡회 사람이 될 터였다.
그러면 자신도―비록 백 마리나 되는 용이지만― 그중 한 마리의 용으로서 활동하게 될 것이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하여 이진휘는 느꺼운 가슴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등록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장원을 나오자마자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나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 낮에는 발동하지 않는 거 아니었나? 아…… 맞다. 지금 뭐 손본다고 나오셨었지. 하필…….”
그 순간.
“야.”
이진휘는 앞에서 나타난 고우사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오셨어요. 그러잖아도 길을 잃어서…….”
“아아, 안개가 심하지? 뭣 좀 하느라고.”
“네. 나가는 길 좀 알려 주세요.”
“왜. 이름 등록하러 가려고?”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얼른 해야죠.”
“근데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고우사가 갑자기 이진휘에게 친한 척하며 웃었다.
“획 하나만 지워 줘.”
“네? 획을 지우다니요?”
“사실, 생각해 봐. 백룡(百龍)이라는 게 말이나 되나? 허가 하나로 똘똘 뭉쳐도 어려운 마당에, 이놈 저놈 다 자기가 용이라고 날뛰면 어떻게 되겠어. 개판 되겠지. 안 그래?”
“개판이 아니고 용판 되겠죠.”
순간 고우사가 웃음기를 지우고 이진휘를 노려보았다.
이진휘는 고우사의 눈빛이 싸늘해서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도, 상대는 한때 정사마를 오간 위험인물인 것이다.
“그, 그냥 농입니다.”
“이래서 내가 다 용 하지 말자는 거야. 알겠냐? 새로 들어온 놈이 주제도 모르고 같은 용이라고 맞먹는 꼴을 보고 싶어?”
“아, 아뇨. 그래서…… 뭘 지우라고 하신…….”
“백(百)에서 획 하나 지워서 백(白)으로 해.”
“네?”
“이왕 띄울 거 확 띄워야지. 마도에 흑룡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그럼 정파에도 백룡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어? 흑룡, 백룡. 딱 대비되고 얼마나 좋아. 점쟁이인 것도 똑같고. 가만히 있다가 다른 놈들한테 백룡 자리 뺏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 아뇨.”
“이게 다 허가 놈을 위한 일이야. 그놈이 얄밉긴 해도 우리 대장이잖냐. 최소 마도의 흑룡하고는 짬을 붙여 줘야지.”
“예, 예에…… 그렇죠…….”
이진휘는 반 협박, 반 설득에 어쩔 수 없었다.
말을 안 듣기라도 했다간 또 정색하며 눈빛으로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잘하자.”
“네…….”
고우사는 계속 이진휘를 토닥이며 진법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이진휘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가지지 못하면 남도 가지지 못해야 옳은 세상이지.”
고우사는 말을 하고 나서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내가 이래서 용이 못 됐나…….”
* * *
드디어 백룡회(白龍會)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건 등록을 맡은 상계였다.
정명충효도의 도사들에게서 재촉을 받으면서도 때를 기다리던 노인이 마침내 움직였다.
“교섭이라는 것은, 혼자서만 의욕이 넘친다고 되는 게 아닐세. 상대가 내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야 비로소 말이 통하는 게야. 새로운 출발을 앞둔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지.”
“저희는 그저 신선님만 믿습니다.”
도사와 상인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선물로 편액을 준비했으니 하인에게 들고 따르라 하겠습니다.”
노인이 늘 들고 다니는 도경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싱긋 웃었다.
“자, 그럼 다녀옴세.”
그가 떠나자 상인들은 우려를 표했다.
“정말 괜찮을까.”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땐…… 우리가 여길 떠나는 수밖에 없는데…….”
도사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분의 능력을 안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대체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시기에 그렇습니까?”
“강호에서 드러내어 움직이진 않으시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중재를 실패하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상인들은 그래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말씀하시는 걸 보면 믿음직스럽긴 한데, 워낙 상대가 상대인지라…….”
하인 한 명을 이끌고 움직인 노인은 어느새 허윤의 산장에 거의 다다랐다.
앞쪽에는 안개가 스산하게 깔려 있었다.
“진법이 있으나 지금은 발동하지 않은 듯하군. 편액은 내게 주고 자넨 잠시 기다리게.”
노인은 편액을 받아 홀로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앞에 홀연히 색동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산한 분위기와 대낮부터 핀 안개, 그리고 색동옷을 입은 소녀.
보통 사람이라면 이 기묘한 분위기에 주눅부터 들 터였다.
마치 굉장히 범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이가 사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
하나 노인은 겁먹긴커녕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귀하신 분께서 이런 데서 뭐 하시오?”
소녀 낙락이 노인을 위아래로 훑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보면 모르나? 일하네.”
“흠. 산장의 주인이 대단한 인물이 맞기는 한가 보구려. 귀하 같은 분을 몸종으로 부리다니.”
“몸종이 아니라 계약직일세.”
“하여간 희한한 분들이 많구려. 허허허.”
“남 일하는 거 신경 쓰지 말고 자네도 할 일 하게.”
낙락이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따로 약속이 없으시면 주인님께서 뵐 자격이 있는지 보셔야 합니다. 이 진법을 통과해야만…….”
“아. 선물을 가져왔소이다. 백룡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고 하여 정명충효도에서 편액을 보냈소.”
노인이 비단으로 가렸던 편액을 열어 보였다.
“남창 최고의 서가(書家)에게 글씨를 맡겼소이다. 귀 장원의 대문을 장식하기에 결코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예로부터 다른 건 몰라도 음식과 술, 글씨를 가져오는 이는 박대하지 않는 법이라 하였으니…….”
낙락은 편액을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글자가 틀렸는데?”
“백룡회(白龍會)가 아니오?”
“우린 백룡회(百龍會)야.”
“허허, 틀릴 리가 없소. 등록한 이름을 보고 그대로 적어 왔을 것이오.”
“백 마리 용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는걸.”
그 말에 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바로 편액을 종이 찢듯 산산조각 냈다.
그리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낙락에게 포권을 했다.
“귀한 분께서 하는 말씀이니 틀린 얘기가 아니겠구려. 내 평생에 단 한 번도 실수가 없었는데, 난생처음 결례를 저질렀소이다. 오늘은 날이 아니니 이만 돌아갔다가 다음에 다시 오겠소. 귀찮게 하여 죄송하오.”
“괜찮아. 일이니까. 오늘 공치나 했는데, 내가 고맙네. 잘 가게. 아니, 안녕히 가세요.”
낙락이 꾸벅 인사하자 노인은 곧바로 돌아갔다.
낙락은 일행들에게 돌아와서 노인의 얘기를 전했다.
“정명충효도에서 편액을 보냈는데, 흰백 자로 써 왔어. 우린 일백 백이라고 했더니 미안해하면서 가던데.”
허윤과 일행들은 웃으면서도 감탄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출범식을 하면서 상계 쪽과도 좀 풀까 했는데, 그쪽이 먼저 움직였네.”
“어려운 글자도 아닌데 실수했나 보군그래.”
“정명도 도사들이 움직였다는 건 남창 상계가 똥줄이 탄단 얘기 아닌가. 한데 그런 실수를 해서 어쩌나. 쯧쯧.”
“그나저나 상계도 대단하네요. 등록하고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편액을 준비한 겁니까?”
낙락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일을 했으니 고우사에게서 당과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슬슬 피하는 이진휘가 눈에 들어왔다.
“왜 저래?”
“그, 그게…….”
이진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곤 사실대로 실토했다.
이진휘의 얘기를 들은 허윤이 허, 하고 어이없게 웃었다.
“어쩐지, 고 노인장의 내 시선을 피하더니만. 지금도 그래서 어디로 도망을 간 모양이군.”
장용도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줄 알았지. 그 영감이 어쩐 일로 순순히 인정하나 했다.”
한데 약왕이 백룡(白龍)을 몇 번 되뇌더니 말했다.
“어감이 나쁘지 않네. 한곳에 용이 너무 많으면 그것도 좀 그렇지.”
대홍랍강도 동의했다.
“확실히 흑룡과 백룡이 기억에 훨씬 잘 남긴 하네. 이러면 한번에 마도의 이인자 급수로 올라간 셈인가?”
이들 틈에 끼어서 같은 용이 된다는 게 조금은 어색했던 번산과 안소방도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듯했다.
“하면 여기는 백룡장이 되는 거고, 형님은 백룡장주, 백룡회주 이렇게 되는 겁니까?”
“뭔가 엄청 있어 보이네요. 백룡장주. 글자 하나 다른 것뿐인데, 듣다 보니 흰백이 더 잘 어울립니다.”
소지광이 좀 생각하다가 반대했다.
“흑룡에 대응하는 백룡이라면 장주나 회주는 급이 떨어지지. 조장이 여태 별호가 없었으니까, 부르던 대로 백룡선생은 어떤가.”
“그것도 좋네요.”
다들 그 말에 공감했다.
그때 멀리서 고우사가 다가오며 손뼉을 쳤다.
“캬! 아주 좋아, 백룡선생! 어때? 너희들도 마음에 들지? 나도 이참에 진 이름을 항허절진보다는 항룡절진 같은 걸로…….”
허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우사를 쳐다보았다.
“동료를 협박한 건 괘씸하지만, 노인장의 소원이었으니 이번엔 넘어가겠소.”
고우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미안해에. 그렇다고 내가 막 심하게 협박하고 그런 건 아냐. 말로 평화롭게 잘 설득했어. 야, 먹물아. 그렇지? 내가 그렇게 무섭진 않았지? 뭐 때리지도 않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낙락에게 당과 두 개를 던져 주었다.
낙락이 당과를 받아서 바로 하나를 입에 넣고는 말했다.
“근데 편액 들고 온 노객(老客)이 화가 엄청 나서 편액을 산산조각 내고 돌아갔는데, 괜찮을까?”
장용이 뚱하게 말했다.
“사고를 친 영감이 책임지겠지.”
고우사가 자기 가슴을 탁 쳤다.
“제가 화나 봤자지. 꼬마 계집아, 그놈이 또 오면 내게 데려오너라. 나 고우사가 그런 놈에게 겁이나 먹을 것 같으냐?”
낙락이 당과를 쪽쪽 빨면서 대답했다.
“도귀(刀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