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서생에게서 고수 특유의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손에 돌을 쥐고 만지작대는 걸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백룡회주?”
“저자가 허 선생인가 하는 그놈이라고?”
강호에 수많은 허씨가 있어도, ‘허 선생’으로 통칭하는 이는 한 명뿐이다.
허윤은 무심코 읍을 하려다 말고 허리를 세웠다.
“내가 백룡회주요. 싸우지 않고 해결하려 하였는데, 잘 안 됐구려.”
생마신이 굵은 목소리로 껄껄 웃었는데 웃음의 마지막은 호호, 하고 가녀린 소리로 변했다.
“싸우지 않을 방법이 있긴 하지. 네가 가진 비급을 내놓으면 된다.”
“아? 그래도 되는구려. 과연. 비급을 주면 안 싸워도 되지. 그 생각은 못 했는데.”
응……?
“비급을 순순히 내놓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또 있나?”
“그런 게 있소.”
허윤의 뒤에 있던 일행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런 게 있긴 하지.
단번에 몰살시켜서 싸웠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학살을 하면 그렇게 되지.
“이상한 놈이로군.”
생마신과 할타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허윤을 훑어보았다.
육대마가를 비롯해 일사삼종과 지옥이궁, 사악사교 그리고 마가십세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 저 서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곧 할타관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허윤을 보며 끌끌 웃었다.
“대종사는 여태 저 허여멀끔한 놈 하나가 마도군의 전력 몇 할을 말아먹게 둔 것인가?”
생마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피식 웃으며 여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광한성모도 처음 백룡회주를 봤을 때 그런 말을 했겠지.”
생마신을 바라보는 할타관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건방진 년. 본관이 말하고 있는데 감히 누가 끼어들라고 했나.”
생마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엔 지독하게 굵은 목소리가 나왔다.
“버릇이 없는 놈이로고.”
할타관이 비웃었다.
“년일 때 욕먹으면 놈으로 바꾸고, 놈일 땐 년으로 바꾸면 네가 욕을 안 먹은 게 되느냐? 어디 새파랗게 어린놈이 목소리를 깔아.”
“어린놈? 아수라신교를 처음 세운 지가 일 갑자가 넘었다. 본좌가 왜 교조(敎祖)라 불리겠는가?”
일 갑자가 육십 년이고 보통 십 대부터 강호행을 하니, 최소 일흔 이상이란 얘기다.
“본관의 관복이 보이느냐? 강호에서 포역(捕役)과 쾌수(快手)로 활동하던 시기에 입던 의복이니라.”
할타관이 쓴 동그란 관모와 빛바랜 관복은 한 시대 전의 양식이다. 적어도 여든 이상은 되었다는 의미다.
은조옹도 끼어들었다.
“어이쿠, 이런. 겨우 그 정도로 이 할아버님의 앞에서 나이 얘기를 하셨는가들? 본로가 우산을 쓰고 낚은 세월이 그것보다는 더 되겠구나.”
우산 산(傘) 자는 갓 모양이 팔(八) 자와 닮았고 아래의 획에 십(十) 자가 있으므로, 팔십을 일컫는 것이다.
거기에 강호행을 시작한 나이를 더하면 구십 이상은 된다고 봐야 한다.
따지고 보니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타관이 은조옹보다 어렸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나이 많아 좋겠군. 나보다 빨리 죽겠어.”
거기에 생마신과 은조옹도 한 마디씩 더하면서 서로 말싸움이 났다.
“가는 데 순서가 있나.”
“손주 볼 나이도 한참 지났는데 노치(孥稚)들이 재롱을 부리니 귀엽구나.”
“끌끌. 그렇게 해 먹고도 은퇴를 하지 않으니 강호가 이 모양 이 꼴이지. 거, 이 정도면 살 만큼 살았을 텐데 내 위로는 알아서들 관짝으로 갑시다?”
허윤의 일행은 할타관과 생마신, 은조옹이 서로의 나이로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곤거렸다.
“엄청난 노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놨잖아.”
“강호에서는 노련함으로 무공의 상성도 극복한다는데,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허윤은 속으로 좀 뜨끔했다.
방금 저도 모르게 ‘겨우 칠팔십 밖에 안 됐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룡회에서 평소에 함께 지내는 이들이 육칠팔구십, 그리고 십이까지 있었던가…….
“그런데 나이 가지고 생각보다 오래 싸우는걸요?”
“그러게.”
웃기면서도 우습지 않은, 실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뒤쪽에서 나무줄기에 기대 있던 서덕이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노인네들 되게 시끄럽네……. 전음을 했으면 저런 꼴 안 보고 간단하잖아…….”
“그래서 가까이 가려다 걸린 거요.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안 된다니까.”
허윤은 쓴 입맛을 다시며 슬슬 눈치를 보다가 두풍을 준비했다.
세 사람이 모여 있으니 회전 두풍으로 휘어 치면 한 번에 쓸어 담을 수도 있을 듯했다.
예견으로 결과를 확인해 보니, 열 번의 시도를 하곤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비급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일 비급 일부가 소실되면 비급을 가진 나머지는 찾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산을 떠나 버릴 터였다. 그러면 어쨌든 천마신공이 강호에 나가게 된다.
그걸 막으려면 그들이 떠나기 전, 이곳에서 모두 모아 한 번에 없애야 했다.
하여 허윤이 만년소정의 내공을 움직이려는 순간.
“나이를 좀만 더 따지고 있다간 곧 동 시각에 모두 함께 갈 것이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돌을 들던 허윤을 멈칫하게 했다.
동시에 칠팔구 세 노괴가 자연스레 허윤 쪽을 돌아보았다.
“뭔가 했더니.”
“이런 비겁한 놈을 보았나.”
“자꾸 몰래 그러네.”
찰나의 차이로 회전두풍을 쏠 기회를 놓쳤다.
허윤은 인상을 쓰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빈 소매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지켜보다가, 허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천기성이 고개를 들고 거만한 태도로 허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상을 어지럽힌 놈이 너냐.”
“당신이 방금 끼어들지 않았으면 어지럽히게 만들 요인의 일부가 사라졌을 거요. 어디서 오셨소?”
천기성의 답변은 냉랭했다.
“내가 너 같은 놈에게 왜 그걸 알려 줘야 하느냐.”
“알아야 내버려 둘지, 앙갚음을 할지 결정하니까.”
천기성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입가에 화가 난 듯 아닌 듯 기묘한 웃음이 맺혔다.
“앙갚음 좋지. 나는 십팔비성의 천기성이다!”
허윤이 잠깐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십팔비성과는 악연이 없소. 그러니 봐 드리지.”
“건방진 놈.”
명승기가 감탄했다.
“방금 회주님을 모욕하고 난세의 원흉으로 몰아갔잖습니까?”
일행은 그가 모처럼 핵심을 찌르며 눈치 빠르게 나선 줄 알았는데, 뒷말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회주님은 이 정도는 악연으로 치지 않으시는군요. 역시 아량이 남다른…….”
허윤이 곧바로 말을 바꿨다.
“천기성. 생각해 보니 내게 악감정이 있는데 굳이 봐주는 것도 이상하구려. 돈푼 좀 가진 거 있소?”
“돈?”
“이따가 점을 좀 볼 일이 있을 것이오.”
그 말의 의미를 아는 이라면, 허윤을 흉악한 놈이라고 욕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천기성은 그럴 일 없다는 듯 비웃었다.
“흥.”
둘의 설전을 세 노괴도 흥미롭게 지켜봤다.
“점쟁이 놈들의 신경전도 대단하구만.”
할타관이 문득 천기성에게 소리쳐 물었다.
“이보시게!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비급을 가지는 건 누구겠는가?”
“듣고 싶소?”
“물었잖은가. 누구냐고.”
“밤까지 기다리시오.”
할타관이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낮에도 별이 있어 점을 칠 수 있다고 했던 듯한데.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할타관은 다시 끼어들었다.
“자, 자. 이 정도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들 시작하지. 어차피 이 중에서 셋은 오늘 무덤으로 갈 텐데, 친분을 더 다질 필요는 없지 않나.”
“셋?”
생마신의 되물음에 할타관이 살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남십자성과 북십자성은 서로 어울리기 어렵지. 적통과 개가 어찌 어울리겠는가?”
생마신도 킬킬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은조옹이 슬쩍 허윤에게로 붙었다.
“내가 사파인이라고 해도 마도와 어울릴 수는 없지. 먼저 저들을 처리하고 나서 우리끼리…….”
“그럴 일 없소.”
허윤이 단칼에 거절했다. 은조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곧 생마신이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그러자 은조옹을 쫓았던 아수라신교의 고수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귀찮은 것들을 치워라.”
생마신의 명령에 고수들이 허윤 일행과 천기성 쪽으로 움직였다.
공세연이 허윤에게 말했다.
“우리 걱정은 말아요.”
“알겠소. 조심하시오.”
명승기가 검을 뽑았다.
“오늘 형산의 힘을 보여 주마!”
그가 가장 먼저 아수라신교를 공격했다.
공세연과 남궁민, 진승도 그의 등을 지키며 싸움에 임했다.
이후 허윤과 세 노괴가 서로 대치했다.
허윤은 그간 여러 번의 싸움을 겪었지만, 일 대 일이 아니라 네 명이 전부 서로의 적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아마 난전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았는데, 모두가 고수라 행동이 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로 빠를 터였다.
그러면 아무리 심상으로 들어가도 예견으로 미래를 보는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가급적 한 방에 여럿을 보내는 게 제일 나았다.
‘최대한 수를 줄여야 할 텐데.’
반면, 셋의 생각은 허윤과 좀 달랐다.
할타관의 살인술과 생마신의 장법, 은조옹의 조법. 이 셋이 모두 위험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역시 허윤이었다.
두풍은 범위가 넓고 빨라 피하기도 어려운데, 심지어 막거나 버티는 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다.
‘괜히 붙어 있으면 함께 쓸리기 딱 좋지.’
‘최대한 거리를 둬야겠군.’
‘공방이 일 합을 넘어가면 필히 두풍이 날아온다.’
장풍을 쓰는 생마신과 낚싯대를 쓰는 은조옹은 중간 거리에서 가장 유리하다. 반면에 할타관은 근접에서 강하다.
그들의 이익이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허윤을 먼저 죽여야 한다!
생마신이 번개처럼 허윤을 향해 장을 날렸다.
수라번천장(修羅翻天掌)!
장력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졌다가 오므라들면서 허윤에게 이르러 한 점이 되었다.
점이 될 때까지 억눌렸던 장력이 목표했던 곳에서 터졌다.
퍼엉!
이 장법의 특징은 폭발의 충격이 반경 삼 척에 이른다는 것이다. 최소의 움직임으로 피하려 하면 반드시 피해를 받는다.
하지만 허윤은 이미 일 장 밖까지 달아난 뒤였다. 심지어 생마신이 손을 뻗기도 전부터 뛰었다.
하여 허윤을 당황하게 만들려던 생마신이 오히려 당황했다.
“뭣!”
할타관이 벼룩처럼 뛰어 허윤의 뒤로 넘어갔다. 그리곤 공중제비를 돌며 허윤의 뒤통수에 발차기를 날렸다.
그런데 허윤은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뒤통수를 들이밀었다.
한데 발 날이 허윤의 뒷골 뇌호(腦戶)에 닿기 직전, 할타관은 매우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하여 즉시 발길질을 멈추고 반대쪽 발바닥으로 자신의 발등을 차, 그 반동으로 재주를 넘어 피했다.
그가 묘기를 부리는 동안 은조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낚싯줄에 달린 추가 섬전처럼 허윤의 목으로 날아갔다.
목은 호신기공으로 막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웬만해서는 목뼈가 부러지고 목구멍이 터져 죽는다.
하지만 허윤은 고개를 숙이며 도리질하듯 홱 틀었다.
쨍!
덕분에 목이 아니라 머리에 맞은 추가 튕겨 나갔다.
할타관은 거푸 재주를 넘으며 허윤과 거리를 벌리고 있다가, 팔을 땅에 짚고 거꾸로 선 상태에서 쨍 소리와 함께 추가 날아오는 걸 보았다.
하여 바로 몸을 웅크리고 더 빠르게 회전했다.
팽그르르르!
그런데 허윤이 머리로 추를 튕기는 걸 본 은조옹이 팔뚝으로 줄을 누르며 낚싯대를 잡아챘다.
원래는 추의 방향을 바꿔 땅에 부딪치게 하고, 당기는 탄력으로 허윤의 등을 다시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할타관의 입장에서는 아래로 지나갔어야 할 추가 갑자기 튕겨 올라, 하필 자신이 피하는 방향으로 날아온 셈이 되었다.
등의 혹에 추가 직격했다.
뻐억!
할타관이 그대로 날아가 뒹굴었다.
“어?”
은조옹은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서 약간 떨떠름했다.
할타관이 고통스러워하면서 바닥의 흙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이놈이 나를……!”
곱사등이인 그에게 등의 혹은 일종의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필 거기에 정확하게 맞은 것이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던 곳을!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는데, 허윤과 눈이 마주쳤다.
허윤이 뭔가 고민하는 양 돌을 들고 살짝 망설이는 중이었다.
“돌로 칠까…… 말로 할까…….”
할타관은 왠지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러나 이렇게 죽을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말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