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265)
아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죽어서 과거로 돌아온 자신의 존재. 만났던 이마다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어왔다.
이성민은 침묵했다. 과거로 돌아왔다. 이 세계가 앞으로 13년간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 이 세상에서 이성민만이 유일하게, 13년 동안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이성민은 앞으로 13년 동안의 미래에 대한 관측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성민은 과거와 똑같이 살지 않았다.
삼류 C급 용병이었던 이성민은 초월지경의 고수가 되었다. 위지호연과 만났다. 죽어야 할 백소고가 이성민에 의해 살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이성민이 개입하면서 무수히 많은 변화가 만들어졌다.
이성민이 직접 개입한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이성민으로 인해 변했을 것이다.
기억대로 흘러야 할 운명이 이성민으로 인해 다르게 흘러갔다.
왜곡과 변수. 그리고 이성민이 기억하는 13년의 미래가 끝났다. 이성민은 27살이 되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이성민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종언이다.
“……내가 종언을 불러오는 겁니까?”
“‘너’가 아닌,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가 종언을 불러오는 것이지.”
“그렇다면. 내 전생에서의 세상은? 그 세상에서도 종언이 존재했다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에 대해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전생의 돌. 그것은 던전에 출현하던 것이었으니까. 만약 다른 누군가가 전생의 돌을 잡았고, 죽어서…… 전생에 이성민이 살았던 세계로 회귀했다면? 그렇다면, 그 누군지 모르는 관측자가 기억하는 시점 이후에서 또 다른 종언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었어야 했던 겁니까?”
이성민이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누구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을 아벨이 말해주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성민의 존재가, 이 세상에 종언을 불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이전에 이성민이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민이 먼저 죽었더라면, 종언은 찾아오지 않았던 것일까?
“운명의 가호가 너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이전에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몸이었다. 짚이는 일은 없나?”
그 질문에 이성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짚이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27살이 되기 전. 14살부터 13년을 살았을 때, 이성민은 다양한 위기를 겪어 왔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짜로 죽음을 맞이했던 적은 없었다. 운명은 몇 번이고 이성민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프레스칸에게 죽을 뻔했을 때에도. 그 이후에는 검은 심장이. 사마련주가 개입하여 이성민을 구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의 가호 덕분이었던 겁니까?”
“너는 네가 죽을 나이까지. 네가 기억하는 시간대까지 살아남아야 할 존재였다. 네가 모르는 세상에 도달함으로써 종언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야. 운명은 더 이상 너를 가호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시간대에 도달한 시점에서부터 너의 존재 가치는 사라졌으니까.”
아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내 형님이 병신이라는 것이다. 파멸적인 죽음의 운명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도망쳤고, 결국 휘말려버렸지. 아무것도 모르고 너를 죽이려 했는데……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지. 너를 가호하고 있었던 것은, 내 형님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그 운명이었으니까.”
아벨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아벨이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은 기묘한 곳이오.”
아벨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에리아. 이 세상은 매일매일 다른 차원에서 사람을 소환하오. 무공, 마법사, 과학. 하지만 그중 결여된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이라 생각하오?”
“과학.”
“맞소. 무공이나 마법에 비해 에리아에 소환되는 이들 중 과학자의 비중은 거의 없소. 우리가 노 클래스라고 부르는 이들. 무공도 없고, 마법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불려온 이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문명을 기억하면서도 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지.”
그 말대로였다. 이성민도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았던 몸이다. 오래전이라고는 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자동차. 기차. 그것부터 해서 총 같은 무기들도.
“에리아는 무작위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오. 생각해 보시오. 무공이나 마법은 개인의 힘이오. 아무리 뛰어난 무공서나 마법서를 익힌다고 해도 가진 재능이 별 볼 일 없다면 제대로 익히는 것도 불가능하지. 선택된 천재들만이 그것들을 우수히 다룰 수 있소. 하지만 과학은? 그것들로 인해 만들어진 기술은? 그것을 쓰는 것에는 대단한 자질은 필요 없소. 완성된 것이라면 말이오.”
아벨은 목이 타는 것인지 준비되어 있던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로 들은 터무니없는 것들을 마법과 결합하여 어느 정도 완성시키고 발전시켜가고 있소. 마력으로 움직이는 열차도 그렇고. 마법사 길드에서는 ‘비행기’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기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 그런 식으로 밸런스가 맞춰지는 것이라 생각하오.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마법으로 대체해 나가면서. 이 세계는…… 그런 세계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소.”
“마법과 무공, 과학이 공존하는 세계로 설계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소. 무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마법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더군. 그건 마법 쪽에서도 그렇소. 마법이 득세한 세계에서는 무공 같은 수준 높은 몸 기술이 거의 발전하지 않았소.”
“……내가 살았던 세계에서도 마법과 무공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성민의 대답에 아벨이 다시 한번 머리를 끄덕거렸다.
“누군가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 세상에 각 차원에서 적합한 이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오. 그것으로 인해 마법과 무공이나 기술이 섞이고, 발전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기술 쪽이 크게 낙후되었다고는 하지만. 마법이 결합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소.”
“구파일방의 무공.”
사마련주가 입을 열었다.
“같은 무당파의 무공, 같은 이름을 가진 검식이라 해도. 서로 살았던 차원이 다르다면 같은 검식이라 해도 많은 차이점이 존재하지. 시조 장삼봉이 만든 무공이라 해도 차이점이 많아. 그런 무공들은 에리아의 무당파 안에서 다시 해석되며 서로 합쳐지고 있네.”
“그건 마법도 마찬가지요. 똑같은 파이어볼이라고 해도 세세한 술식이나 마나의 배열이 다르오. 마법사 길드가 꾸준히 새로이 소환된 마법사를 영입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법과 기존의 마법이 얼마나 다른가. 무엇이 다르고 어느 쪽이 우수한가를 따지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함이오. 마치……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사용해, ‘완전’에 가까운 무공이나 마법을 만들려는 것 같지 않소?”
“우리가 사육되고 있다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공기가 무겁다.
“……종언은 무엇인가?”
사마련주가 입을 열었다.
“세상의 멸망?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저 머저리 같은 제자가 과거로 돌아왔기에 종언이 예정되었다고? 아니, 그건 아니겠지. 애초에 이 세상에는 그런 종언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일 텐데. 왜 그런 것이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종언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종언의 ‘사도’가 존재하는 이상, 종언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 사도가 강림하여 이 세상 모두를 다 죽여 버리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추측일 뿐이오. 종언이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 것인지, 왜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죽고 싶은 마음은 없소.”
아벨이 힘을 주어 말했다. 아벨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종언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것에 대해서는 아벨도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에 대해 아십니까?”
이성민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황금색의 열쇠였다. 아벨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이성민은 열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전생의 돌을 얻었던 던전에 들어가, 돌을 잡은 순간 열쇠로 변해버렸노라고.
“……뭔지 모르겠군.”
아벨은 열쇠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귀속 마법이 걸려 있다는 말을 미리 들은 덕에, 아벨은 열쇠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벨은 마법을 사용해 열쇠를 탐지해 보았지만.
“안 되는군.”
아벨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상치 않은 물건임은 틀림없지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아벨은 빠르게 포기했다. 워낙에 포기가 빨라 이성민은 조금 당황하여 질문했다.
“더 안 해보십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다. 내가 해봐서 안 되는 것이면 그 어떤 마법사도 이게 뭔지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니, 더 힘을 쓸 필요도 없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어찌 되었든. 련주, 나는 죽고 싶지는 않소. 그러니 종언에 저항하는 것이고. 기왕이면 련주가 힘을 보태어 줬으면 좋겠군.”
“뭔지도 모를 종언을 상대로 연합이라도 맺자는 것인가?”
“손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그건 그렇지.”
사마련주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는 곁에 앉은 이성민을 힐긋 보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이성민을 향해 사마련주가 말을 걸었다.
“머저리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자책하지 말란 말이다.”
툭 내뱉는 말에 이성민의 말문이 막혔다.
“네가 이 세상에 종언을 불러왔다고는 하나. 그 책임이 너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 너 역시 휘말렸을 뿐이니까. 그리고…… 네 역할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종언을 불러오는 것이 전부는 아닐 거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오슬라가 너에게 말했을 텐데. 너는 언젠가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확실히. 요정의 숲에서 만난 오슬라는 이성민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안쓰러운 존재라고. 그리고, 충실하라는 말도 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매일을 충실하게 살라고.
오슬라는 종언의 사도에 대해 오랜 약속이라고 말했었다. 즉, 종언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라는 말이다.
종언은 끝.
종언의 사도는 끝을 이행하는 자.
나는?
그때의 질문에 오슬라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그로 인해, 이성민은 자신이 종언의 사도가 아닐까 생각해 왔었다.
그 말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이성민이 지금까지 살아온 덕에 이 세상은 종언이라는 운명을 맞닥뜨리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정해진 것이 없다.
오슬라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었다. 므쉬도 오슬라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왜 네가 다시 돌아온 것일까.
무언가 착오가 있던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과거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돌아왔다면 돌아와야 할 만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고, 돌아왔다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돌아온 이유에 걸맞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아벨이 말했었다. 이 시간대에 도달한 이상, 이성민에게 존재 가치는 사라졌다고.
이성민의 존재 가치는 13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관측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므쉬와 오슬라는 이미 예전에 이성민에게 말했었다.
‘사라지지 않았어.’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래,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이성민은 과거로 돌아와야 할 만한 일을 겪지 못했다.
돌아온 이유에 걸맞은 존재가 되지도 못했다. 아직은 정해진 것이 없다. 오슬라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정해진 것은 없다던 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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