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cowardly winter RAW novel - Chapter 2
1. 비겁한 나는
근래는 카페에 앉아서 무언가를 마실 여유가 없었다. 등에 눌린 소파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둘러보니 네온사인 간판을 벽에 걸어두는 게 유행인가 보다. 내가 촌스러운 건지, 시대의 감성이 빨리 변하는 건지. 아무튼 여유 없는 삶은 유행과 친하지 않았다.
“손 주임. 그래도 일은 잘했으니까. 나이도 아직 어리고. 솔직히 손 주임 스펙에 우리 회사는 아까웠지.”
정 대리님과는 평상시 몇 마디 나눈 것이 친분의 전부였다. 딱히 내게 해줄 말은 없을 것이다. 송별회랍시고 카페에 마주 앉은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시킨 녹차 라테를 겨우 삼켰다. 식어 빠진 음료가 혀에 감돌았다.
“아니면 공시 쪽으로 빠져도 좋은데. 손 주임 동창들도 많이 하지?”
정 대리님은 진로상담사 같았다. 내 직장을 정해달라고 한 게 아님에도 안달이었다. 정 대리님의 입술은 걱정을 걸러내고, 쏟아냈다. 이 걱정이 끝나면 다음 걱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 과장 그 새끼가 일은 더럽게 못하는데 여기저기 미팅 다니면서 이 입 놀리는 거 하나는 끝내주거든.”
이제는 녹차 라테 맛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시금털털한 빨대를 내려놓고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눈 안에 모래라도 들어갔는지 까슬까슬했다. 사실은 정 대리님이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알고 있다. 윤 과장은 번번이 내가 핸들링한 기획을 가로챘고, 사내는 눈치껏 묵인했다. 입사 전에는 연속극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런 일이 꽤나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은,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하다는 걸 알게 된 후였다. 그걸 항의하는 순간 미운털이 박힌다는 것도. 사내 남자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나누는 뒷담화가 끈끈하다는 것도.
“손 주임. 여기 다니면서 상처 많이 받았을 거야.”
“저 오늘 퇴사했잖아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대리님.”
정 대리님은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아마 오래 버텼어도 결과적으론 정 대리님의 수순을 밟았을 것이다. 만년 대리. 갓 입사한 남자애는 8개월 만에 대리를 달았으나, 나는 2년째 주임인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내가 회사의 부품으로 쓰일 줄 알았다. 월급만 제때 들어온다면 부품 취급도 나쁘지 않으며, 자리를 따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부품을 닦을 기름으로써 입사해, 그들을 유연히 굴러가게 만드는 용도로 쓰였다. 부품도 아닌 기름이었다. 용도 다한 기름은 제 발로 부품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바닥에 버려졌다.
“남동생 하나 있다고 했지. 이번에 대학 들어간다며.”
하필이면 껄끄러운 주제였다. 대리님 입장에서야 지난 우리의 대화에서 찾은 주제였겠지만 말이다.
내가 퇴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한꺼번에 나온 셈이다. 윤 과장. 회사. 남동생. 하도 속이 쓰라려 더는 능청스러울 자신이 없었다. 나는 어설픈 웃음으로 끝맺었고 대화는 거기서 이어지지 않았다. 정 대리님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세상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짜 맞춘 듯 손목시계를 봤다. 항상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추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만큼 시간을 할애한 것도 선심 썼다는 뜻이었다. 나는 미련 없이 옆자리에 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만 일어날까요.”
“아쉬워서 어쩌지. 술도 한잔 못 하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 대리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안도였다. 아까부터 남편에게 연락이 계속 온 것을 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던 것도 보였다. 새삼스레 아쉬움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의 거리는 그 정도였다. 그 거리를 둔 것도, 그 거리를 지킨 것도 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누구와도 그 거리를 좁혀본 적이 없다. 그러하니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이기적인 감상이었다.
고층 건물 사잇골목에 자리 잡은 카페였다. 빠져나오자마자 이별은 빨랐다. 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고, 정 대리님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떠났다. 걷는 내내 바람이 불었다. 도시의 날카로운 바람은 내 코트 곳곳을 누볐다. 잔뜩 움츠러든 나를 멈추게 했다.
잠시 서서 뒤를 돌아봤다. 총총걸음으로 떠나는 정 대리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
거기서 왜 헛웃음이 터졌는지 모른다. 새삼 내 꼴이 우스웠을까. 하얗게 퍼진 입김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뒤돌았다.
마음의 무게가 발목을 잡아챌 때, 내게 알맞은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근의 허기를 달래곤 했던 떡볶이 노점 옆에, 우동이나 라면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혼자 송별회를 하며 궁상떨기 안성맞춤이었다.
“어서 오세요.”
천막에 머리를 들이밀자마자 무심한 듯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반겼다. 아주머니는 어묵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면서 한 손으로는 도마를 닦았다. 회사 근처에서 오래 자리 잡으며 노련해진 손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아무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님은 나를 제외하면 어떤 아저씨 하나뿐이었다.
얼굴이 뻘게져서 소주를 따르는 아저씨가 내 송별회에 유일한 참석자였다. 덕분에 분위기는 칙칙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사장님은 어슷하게 잘린 오이가 담긴 접시를 툭 내려놓았다.
“뭐로 드릴까.”
그제야 나는 벽에 걸린 메뉴판을 한번 훑어봤다. 우동. 라면. 칼국수.
“우동으로 주세요.”
“술은 안 하고?”
“소주도 하나요.”
“어디 거로?”
나는 대강 유명한 상표 하나를 대답했다. 사장님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스레인지 쪽으로 사라졌다. 요즘 장사가 시원치 않다는 중얼거림도 들려왔다. 눈치를 받았지만 추가할 의욕은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백수인 처지에 누가 누구를 걱정하겠는가.
기다리다가 할 일이 없어 오이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오이가 상한 듯 물컹거렸다. 항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망한 송별회에 오이 하나가 더해진 것쯤이야. 자조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까만 화면에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찍혀 있었다.
하나는 지은 죄 많은 동생 송해경.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술 먼저.”
초록색 병 하나가 무심하게 식탁을 차지한다. 안 그래도 핸드폰 볼 맛도 떨어졌는데 잘 됐다 싶었다. 한 놈은 사고를 쳐서 보기 싫으며, 한 놈은 내가 사고를 칠 예정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던지듯이 식탁에 버려두고 소주병을 들었다. 뚜껑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오늘은 쓸개라도 들이붓고 싶은 날이니 쓸 대로 썼으면 좋겠다. 깐 소주를 잔에 콸콸콸 따랐다.
디리리리. 잔이 채워짐과 동시에 알림음이 들렸다. 나의 시선이 끌리듯 그쪽으로 향했다.
[어디야.]
반응이 느렸다. 이제야 내가 남긴 문자를 읽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무심한 남자라지만 여자 친구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보낸 글에 ‘어디야’라니. 그것도 하루 지나서 말이다.
“사장님.”
“예.”
“이거 한 병 더 주세요.”
다 끓인 우동을 가져오던 사장님이 발걸음을 돌렸다. 신나서 소주 한 병을 더 챙겨온다. 최악의 하루를 빌미로 원 없이 들이켤 작정이었다. 두 병이면 굴러서라도 집에는 갈 수 있으니까.
잔을 비우고, 쓴맛을 무마시킬 우동 국물을 떠먹었다. 짜다.
“아가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나와 포장마차를 전세 낸 아저씨였다. 취기 어린 눈이 내 테이블을 훑었다.
“계속 전화 울리는데.”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이 자지러지고 있었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이 가까워짐을 알린다. 비겁한 나에게 주는 최후통첩 같았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끊길 듯 말 듯 하는 순간에 집어 들었다.
귀에 핸드폰을 댔다. 남은 한 손으로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가슴이 옥죄었다. 벌 받기 전 두려움일까 아니면 후련함일까.
―지금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문자의 내용을 반복하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상대는 운전 중인 것 같았다. 목소리가 살짝 울렸다. 나는 술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운전 중이면 이따가 통화하지.”
모처럼 낸 용기가 피투성이로 변해갔다. 쪼그라들고 찢어지고 있었다. 도망칠 구멍을 물색 중이었으나 내 남자 친구는 기어코 끝을 볼 작정인가 보다.
―회사 근처. 아니면 너희 집 근처.
솔직해져 보자고 결심한 게 엊그제였다. 그런데 초라하게 벗겨질 준비가 덜 된 모양이었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회사.”
―회사 어디.
“역 근처에 포장마차. 알아?”
―…….
의문이 깔린 침묵인지, 아니면 황당함의 표현인지. 잠시지만 정적이 우리를 덮었다. 하기야 김유을은 이런 데를 한 번 와보긴 했나 모르겠다. 말없이 깜빡이를 켜는 소리만 들렸다. 구질구질해서 오지 않으려나 했는데 김유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10분이면 가.
올 것이 왔다. 나는 잔에 술을 채우면서 웃었다.
“오던 길이었나 봐?”
김유을은 내 질문을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뛰었다.
―15분. 주차할 데가 없어.
“안 와도 돼. 전화로만 이야기해도…….”
―시간 갖자면서. 그 이야기를 전화로 어떻게 할 건데.
“유을아.”
―4분.
급하게 핸들 꺾는 소리가 났다. 빵빵. 누군가 경적을 울리자 김유을이 욕을 했다. 씨발.
김유을은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대체로 두 마디 안에 의사 표현을 끝냈다. 응, 아니. 그마저도 감정을 짐작할 수 있는 표정은 전무한 편이었다.
씨발. 나로서는 처음 듣는 욕설이었다. 입가로 가던 술잔을 멈출 만큼 놀랐다.
통화는 가타부타 말없이 끊겼다. 나는 쓰임을 다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술맛이 시시할 정도로 가슴께가 뛰었다. 야윈 알맹이를 까 보일 자신감은 바닥 난 지 오래다.
간이 짠 우동은 손도 대지 않았다. 석 잔. 넉 잔. 소주 한 병을 안주 없이 비워갔다. 뇌가 취기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자제해야 한다는 의지도 어느새 빨빨거리며 달아났다. 이 자리를 취해서 모면하자는 잔꾀가 기승부렸으나, 영 미덥지 못한 심보였다.
“어서 오세요.”
4분. 그리고 두 번째 소주병의 첫 잔. 그즈음에 긴 팔이 빨간 천막을 걷었다. 김유을이었다. 코트도 걸치지 않고, 까만 목 폴라 스웨터만 입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뛰어온 차림새였다. 그가 건조한 눈빛으로 포장마차 안을 훑었다. 그 시선 끝에 내가 걸려 있다. 상처받을 준비를 마친 내가 말이다.
“일행?”
사장님의 확인이 끝나기도 전, 김유을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갈색 머리칼이 약간의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를 본 순간부터 눈도 돌리지 않는다. 그 열렬한 모습에 놀라는 중이었다. 우리는 꽤나 담백한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다. 장수 커플이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게 서로를 소 닭 보듯이 한다고.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사실 무시보다 뜨뜻미지근하다는 게 맞았다.
“왔어?”
시키기도 전에 사장님은 빈 잔 하나를 내어왔다. 김유을이 앉자마자 투명한 잔이 놓였다. 사장님은 눈짓으로 무얼 주문하냐고 물었다. 한 사람당 메뉴 하나씩은 주문해야 하는가 보다. 우동보다 칼국수가 나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저기.”
그나저나 김유을은 눈치가 없었다. 서 있는 사람 민망하게 입도 뻥긋 안 한다.
“주문부터 하지.”
김유을은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희 칼국수 하나요.”
결국 내가 주문을 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라졌다.
우리는 노란 조명 아래서 묵언 중이었다. 이러다가 침묵에 질식하겠다. 나는 가만히 김유을을 바라봤다.
“유을아, 이런 곳 처음 와보지.”
약간 알딸딸했다. 김유을은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은 얼굴이었다. 종일 피하고 싶던 시간이 왔다. 준비한 폭탄을 떨어트릴 차례였다.
나는 물방울 맺힌 술잔을 엄지로 매만졌다.
“나 일 관뒀어.”
꼭꼭 숨을 준비도 마쳤다.
요즘 들어 사람 앞에만 서면 오한이 든다. 사람을 멀쩡히 대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해야 할 말을 꺼내는 것조차 곤욕이었다. 주문 하나를 해도 자꾸만 내가 무얼 주문했는지 잊는다. 정신을 어디에 빼고서 다니는 것 같았다.
스스로 알아챘다. 한계에 달한 것이다. 사람 좋은 척을 더는 해낼 수 없었다. 성격 무난하고, 이름난 대학을 졸업하고, 제때 직장을 다니는 이 나라의 정상인. 더는 그 껍질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없으면 나를 숨긴다. 언제나 내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나를 가장 도망치게 만들고 싶은 건.
“유을아.”
김유을은 탐색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희 부모님이 나 데려오라고 그러잖아.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사귀고서 인사 한 번 안 하냐고.”
주제가 이상한 쪽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는지, 김유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인연을 전부 끊었다. 대학에 오자마자 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하고, 어쩌다가 닿는 연락은 돌리고 돌려 거절했다. 고등학교 시절과 이어진 끈을 피해 다녔다. 과외 여섯 개를 뛰는 덕에 핑곗거리는 차고 넘쳤지만.
유일하게 남긴 건 김유을이었다. 그는 내가 끊어내지 못했다.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김유을은 밤바다처럼 고요했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김유을의 서늘한 얼굴을 흘깃 보곤, 빈 소주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앞으로 토해낼 이야기가 무겁고 썼다. 목구멍을 한 번 조이게 되었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다. 그것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마찬가지다. 그 뼈아픈 진실을 깨달았을 때가 고등학교 삼학년이었다. 삼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윤주는 친한 친구랍시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해우 부모님 사업하셔. 이런 거는 집에 막 굴러다닌다.’
입학 선물로 받은 명품 지갑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윤주의 의도는 악하지 않았다. 학생다운 허세가 가미되었을 뿐이었다. 담임이 투표를 건너뛰고 내게 반장을 맡기자, 그에 시비 걸듯 다가온 몇몇이 있었다. 윤주는 나를 변호하는 동시에 그들의 우위로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이학년 담임이 그대로 삼학년 담임이 된 것처럼, 어쨌든 이변이 없는 한 나는 반장직을 맡을 것이므로.
나는 동의나 다름없는 침묵을 택했다. 부모님이 사업하시는 것 맞고, 지갑을 애지중지 아껴야 할 형편도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게 겨울방학 전이라면 가능한 이야기란 것이었다.
부모님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한 것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부모님이 빚을 지고 야반도주하신 거라면 좋았을 것이다. 태풍이 우리 집을 휩쓸어간 것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무엇이든 좋았을 것이다. 엄마 아빠의 숨이 붙어만 있다면 말이다.
겨울눈에 미끄러진 차가 앞차를 박았다. 그 앞차는 핸들을 꺾었고, 갑자기 끼어든 차에 놀란 버스는 우회전을 했다. 오른쪽은 비탈길이었다.
하필 출장 가는 날 아빠 차의 바퀴가 성하지 않은 것도, 두 분의 출장이 상하이로 정해진 것도, 공항버스가 사고 난 것도 우연이었다. 포개진 우연의 교집합은 내게 잔인했다. 많은 걸 앗아가고, 많은 걸 뒤바꿨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사업은 멈췄고, 선뜻 도맡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수험생이었으며 나보다 어린 동생은 말해 무엇할까. 두 손을 놓은 건 아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빚이 되어 내 등에 꽂혔다. 젖먹이 때부터 살던 집을 팔았다. 도와줄 친척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평수가 작은 곳으로,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덕분에 마이너스 통장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집에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누렸던 사치는 은행 덕이라는 것도 알았다. 배운 건 많았는데 그 값은 무지한 내가 치러야 했다.
‘해우야. 사정이 힘들지?’
정신없는 겨울방학을 보내고, 울고불고하는 남동생을 떠맡았을 때였다. 반장직을 맡긴 담임은 노골적이었다. 나라에서 학비를 대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태도가 묘했다. 건성건성 부모님의 사고를 말한 뒤, 자신의 입은 무겁다고 했다. 마치 내가 숨겨야 하는 치부처럼……. 그 말을 하는 담임의 입에서 구린내가 났다. 믹스 커피와 담배의 찌든 내였다.
반 아이들은 나를 부잣집 딸로 알았다. 어쩌다 보니 거짓말은 완벽했다. 여태껏 학부모회에 참석 못 한 부모는 재료, 입 가벼운 윤주가 미주알고주알 떠든 것은 양념, 거기다가 나는 침묵으로 간을 쳤다. 완벽한 거짓말 한 끼가 탄생했다.
거짓말을 한술 떠먹을 때마다 목이 막혔다. 학교에서는 야무진 반장 흉내를 내다가 집에 가면 가장이 되었다. 외할머니가 보낸 생활비, 빚 갚고 남은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살았다.
그 비참한 현실은 내 양심을 야위게 했다. 거짓의 살을 불려, 뒤뚱뒤뚱 교정을 거닐던 나였다. 감히 나는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학교에서만큼은 소녀 가장 티를 벗고 싶었는지 모른다. 진실을 아는 선생의 비위를 맞추며, 외할머니에게 달마다 전화하는 나를 잊으며,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기대고 싶었는지도.
그리고 맛있게 차려낸 거짓말 같은 그해. 김유을이 왔다.
‘구식 같아도 말이야. 자기소개 해야지.’
시궁창 속에서도 대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장학금을, 교장의 추천서를 위해서 죽어라 문제집만 봤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나날, 막 가을에 들어선 그달에, 수능이 얼마 남았을까 손꼽아보는 그 시점에. 문을 열고 전학생이 들어왔다. 다소 뜬금없는 전학이었다.
‘쑥스러우면 이름부터.’
누가 문으로 들어오건 말건 고개를 아래로 고정시킨 채 오답 문제를 정리하고 있었다.
교실에 정적이 깔렸었다. 고삼이란 게 그랬다. 새파란 일학년들이 창문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조용히!’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생기가 없었다. 무얼 봐도 시큰둥하고, 저걸 봐도 껄렁했다. 수능이 가까울수록 심해지는 데다가 수시 철에는 말수마저 줄어든다.
그런 고삼이 깔린 반에 김유을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우리 반은 칼같이 반반으로 나뉘었다. 안경을 낀 자만 태반이요, 게임의 승부에만 시시덕거렸던 남자애들의 눈에 경계가 서렸고, 마찬가지로 선크림조차 사치라던 여자애들의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거짓말에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던 내 눈에는, 젠장, 그 빌어먹을 신발이 먼저 보였다.
‘아이고. 네 입술만 보다가 종 치겠다.’
담임은 마땅찮은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본래 성질대로라면 소개하기 전까지 서 있으라고 해야 할 텐데, 웬일로 나서서 전학생의 신상까지 전해줬다.
‘여기는 마천구에서 온 김유을이. 곧 1교시 시작하니까 질문은 생략하고 자리는…….’
담임의 말에 모두가 귀를 쫑긋거렸다.
‘반장?’
그리고 역시 내게로 떨어졌다. 나는 김유을의 비싼 신발에서 찬찬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딱 보아도 트러블을 일으킬 생김새였다. 양아치 티가 난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김유을의 열브스름한 갈색 머리나 밀가루 바른 듯한 피부는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두말하면 입 아팠다. 이목구비만 제자리에 붙어도 훈훈하다면서 난리인데, 미끈한 선을 가진 김유을의 대접은 어떠할까.
잘생기면 주변이 난리였다. 그 주변은 혼돈이나 다름없을 터다.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았다.
‘손해우.’
‘네?’
대답이 늦었다. 웃음소리와 담임의 날 선 시선이 동시에 날아왔다.
‘방금 대답한 애가 반장인데. 걔 앞자리. 너, 지우야. 네가 저 빈자리로 옮기고. 김유을이 네가 저 자리에…….’
그 뒤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투덜거리며 교과서를 챙긴 이지우가 일어서자마자 김유을이 걸어왔다.
김유을을 향한 시선은 발이 저릴 정도였다. 뜨거운 관심은 귀엣말로 번지고 번졌다. 김유을은 시선을 내리깔고 걸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소싯적 유도를 했다던 담임을 훌쩍 뛰어넘는 키에, 가방을 멘 어깨가 일자로 곧았다. 내 앞자리까지 오자 그 나이대 남자애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향이 났다. 후각이 먼저 김유을을 인식하고, 다음으로 시각이 움직일 차례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때 김유을의 눈과 마주쳤다. 스쳐 지나가려던 그 아이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김유을은 냉담하게 등을 돌려 제자리에 앉았다.
불안한 예감은 어떻게 그리 딱 들어맞는지. 9월 모의고사가 시작하기 전날 담임은 나를 호출했다. 들은 얘기는 뻔한 것이었다. 늘 그렇듯 내 불행이 여전히 불행한지를 묻고,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 얘기를 나눈 뒤였다.
‘김유을이. 걔 좀 잘 맡아줘. 뭐 물어보면 알려주고. 보다시피 영…….’
보다시피 영. 그 보다시피 영이라는 평가를 받은 김유을이 나는 싫었다. 내가 괜히 그 아이의 신발을 먼저 본 게 아니었다. 동생인 해경이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브랜드의 운동화. 그 잘난 손목에 두른 시계 또한 열아홉이 차기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잘사는 애였다. 잘생기고, 잘살았다. 감히 눈길도 못 줄 것들을 걔는 숨 쉬듯 가질 것이다. 내 동생이 몇 달에 걸려서 얻을 운동화를 걔는 신발장에 처박아놓고 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했다. 그 아이를 미워할 건수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건 열등감이었다. 그사이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음이다.
상담이 끝나고 교실에 올라가자마자 골이 아팠다. 내 자리를 남자애들이 깔아뭉개고, 김유을의 앞자리는 여자애들이 깔아뭉갰다. 예상한 그림이었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왜였을까. 나는 가짜인데 김유을은 진짜라서. 그게 몸살 나게 부러워서. 부럽다 못해 질투로 삭아가는 중이라.
무엇을 가져다 붙여도 맞는 말이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비극으로 비뚤어졌다고 하기엔, 내 머릿속은 실망스러우리만큼 구린내가 났다.
‘야. 너 되게 말수가 없다.’
뭉친 인파에는 가지 못하고, 애꿎은 화분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전학 왔냐니까.’
나는 내 예상이 빗겨나갔음을 알았다. 고삼을 풋내기처럼 모이게 한 장본인이었다. 아까는 수줍음이라고 치더라도, 남은 학기를 위해서 입술이라도 벙긋거려야 하지 않은가. 멍청하게 자기의 입술만 보는 이들이 몇인데.
그런데 김유을은 고개만 끄덕이거나 턱을 괴고 책상에 낙서를 끄적거렸다. 그 건방진 태도에 연예인 본 것처럼 매달릴 고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왕따를 당하기로 마음먹고 전학 온 것이 아닌 이상에야, 저런 반응은 독특하다고 해야 할지, 퍽도 개성 있다고 해야 할지.
‘해우야.’
무리 속에 섞여 있던 윤주가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얼굴에는 기대감과 교환해 온 실망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쟤, 어디 아픈 앤가 봐.’
보다시피 영. 아픈 애. 강렬한 첫인상에 비해 실망스러운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그때 나는 안심했던가. 탁월하다고 할 만한 사교성이 저 아이한테 없는 게 좋았다. 잘난 점보다 부족한 점에 기뻐했다. 다시 생각해도 비열하고 못났었다.
김유을은 제게로 오는 관심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뒷자리에 앉는 나조차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잠을 잔다. 쉬는 시간에는 핸드폰을 꺼내서 두드린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하교한다. 죽마고우도 정 떨어질 패턴인데 이제 막 만난 우리 반 애들이야, 뭐, 김유을에게 말 거는 애를 오히려 이상한 축에 두었다.
처음에 못마땅하던 그는 내 안중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점점 성적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할 시기였다. 당시 나는 교장 추천에서 떨어져, 수능을 무척 잘 봐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담임한테 알랑방귀 뀌었어도 교장 추천은 옆 반 성민지의 것이었다. 부모님이 의사를 한다던 그 애. 의대를 무조건 가야 한다던 그 애. 해우 너는 성적이 좋잖아, 하면서 나를 밀어냈다. 할 말이 없었다. 빽도 없었고.
그런데 김유을이 전학 온 지 한 달이 가까운 9월 말. 내가 한껏 예민해진 시기. 뜬금없이 김유을은 내 책상에 문제집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풀어.’
‘응?’
내 샤프 끝에 걸리는 깨끗한 문제집.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 머리 색하고 똑같은 눈이 달려 있었다. 김유을은 손가락으로 내 샤프가 가린 문제를 짚었다.
‘이거.’
농담하지 않고 목소리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생김새와 달리 서늘하니 낮고 발음이 정확했다. 당황한 나는 목을 큼큼 다듬으며 문제를 살폈다.
‘음……. 판별식은 알아?’
다정한 반장을 꾸며내고 있었기 때문에 웃음까지 지었다. 친절한 대답을 해줬다. 그런데 김유을은 인간적으로 돌아와야 할 반응이 없었다.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아무리 문과라지만 얘는 좀 심했다. 저번에 9월 모의고사도 내리 잠만 자던 애였다.
김유을은 그 질문을 끝으로 다시 등을 돌렸다. 뭔가 한두 마디 더 오갈 타이밍이었지만 김유을은 그 한두 마디를 안 해서 따돌림당하는 놈이었다. 내가 붙잡고 물어보기도 싫었다. 이미 김유을이 말을 걸었다는 것만으로 내게 주목되는 시선이 여럿이었다.
수능 전까지 곤란한 관심은 사절이었으나, 김유을은 또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판별식 알아왔어.’
‘뭐?’
‘판별식.’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하나를 빼고 김유을을 멍하게 쳐다봤다. 히터가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추웠다. 혀도 얼어붙었다. 기가 막히기도 막혔지만, 정말 학기 막바지를 달려가는 이 시점에서 수학을 배우고 싶었던 걸까. 그러기에 김유을은 열정이 없고 여전히 수업 시간에는 잠을 잤다. 수능 기적을 바라는 절박함도 없었다.
‘저기.’
나는 귀에서 빼낸 이어폰을 가지런히 두었다.
‘대학 가고 싶어?’
김유을은 생각지도 못했던 주제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서 옆 분단 아이들이 힐끔거렸다. 나는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이거 봐봐.’
나는 샤프 끝으로 유명한 인터넷 강사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적은 종이의 끝을 찢은 뒤, 김유을 쪽으로 살며시 밀었다.
‘이분 유명하시거든. 여기 사이트 들어가서 기본 개념 강의 듣고서, 그래도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줄래?’
김유을은 종이를 받다가 말고 나를 물끄러미 봤다. 담임한테 부탁받은 게 있어서 이 정도로 해주는 것이었다. 고삼이라면 다 아는 강사의 이름을 중국집 메뉴판 보듯이 보는 그 애였다. 아마 나는 어설픈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고삼인데 이것도 모르면 어떡하니. 그래도 너보다 내가 잘 하는 거 하나는 있구나, 하는 거.
이쯤이면 대학 생각 없어 뵈는 김유을이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김유을은 정말로 그 강의를 보고 온 것인지, 이따금 내게 등을 돌려 이 질문 저 질문을 했다. 분명 개념 문제에서 그친 수준이었지만, 나날이 높아지는 공부량은 엿볼 수가 있었다.
대강대강 그 아이를 봐주던 나도 점점 열과 성을 다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지만, 내 도움으로 나아지는 누군가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나에게만 말을 거는 김유을을 보고서, 어디 날뛰는 짐승을 길들인 듯한 주변 반응에 우쭐한 것도 사실이었다.
마지막 사설 모의고사를 치를 때 즈음에는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간간이 쉬는 시간에 말도 섞었다. 대부분이 공부에 관련한 것이었지만, 그 아이는 이따금 나에 관한 것을 묻기도 했다. 어디에 사는지, 무슨 과목을 좋아하는지, 무슨 대학에 갈 생각인지.
11월에 들어서 가장 예민한 시기에, 우리 반에 김유을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수능 직전까지 붙어 앉은 우리를 보고 놀려댄 남자애들이 있었다. 김유을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무리가 특히 말썽이었다.
김유을을 가르치며 기초를 닦은 덕분일까. 아니면 다른 잡생각 없이 집중한 덕분일까. 그해 수능, 나는 지금껏 받은 적 없던 최고의 성적을 받았다. 유독 볕이 좋은 날이었다. 엄마 아빠에게 내 성적표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모두 하교한 후에도 그것을 쓸어보고 있었다.
수능 성적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김유을은 그날도 먼저 하교했다. 누구보다 빠른 하교였다. 같은 반 아이들마저 미련 없는 듯 떠났다. 홀로 교실을 지키며 드디어 해방됐다는 기쁨을 맘껏 누렸다. 그리고 목 놓아 울었다. 3년을 보낸 책상에 엎드려, 열두 개의 반이 다 빠져나간 교정에서 울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여자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이 드르륵 열렸다. 콧물이 흐르고 눈에서는 투둑투둑 눈물이 흘러서 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도, 나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교실 문을 연 방해자를 보았다. 아까 하교한 김유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안 갔어?’
김유을은 내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책걸상을 가로질러 자신의 자리로 왔다. 내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의 하얀 목덜미에 땀이 맺혀 있었다. 김유을의 살 내음이 더욱 짙게 났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뭐 두고 갔나 보다.’
김유을은 의자를 돌려 앉은 그 자세로, 내 책상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뛰어 올라온 게 분명했다. 들썩이던 그의 등이 가라앉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담긴 내 얼굴은 긴장된 채였다.
그해 겨울 첫눈이었다. 창밖에 흩날리는 흰 눈을 잠시 보다가, 나는 엎드려 있는 김유을을 바라봤다. 히터가 꺼진 교실에서 우리는 하얀 입김을 내쉬고 있었다.
김유을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손해우.’
‘응.’
‘사귈래.’
그때는 내가 뭐에 홀렸었나 보다. 대학에 가면서 새 인생을 살기로 다짐했다. 거짓으로 대했던 고등학교 인연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연결 고리를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가식으로 점철된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들 앞에서 항상 가면을 써야 할 테니까.
그런데 나는 김유을이 내 어떤 모습에 사귀자고 했는지도 모르고. 그날의 그 기분 좋았던 감정에 취해, 그의 별난 행동에 흔들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속였다. 해명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렇다기에 우리의 시간은 꽤 길었다. 언제고 나는 변명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 않은 건 나의 선택이었다. 그로 인해 불어난 거짓말 또한 내 몫이었다.
김유을 앞에서 부모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속이더라도 기만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할 때는 두루뭉술하게 전할 뿐이었다. 살아 있지 않은 사람들을 내 일상에 집어넣는 것은, 고립된 회사 생활보다 못 할 짓이었다.
“매번 너한테 엄마가 일찍 돌아오라고 그랬다고 한 거, 아빠가 나한테 이것저것 사줬다고 한 거. 다 거짓말이야. 돌아가셨어.”
나도 속이는 게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건 치사했다. 일에 치이고, 내 사정에 벅차서, 이제 숨어버리고자 마음먹었을 때 말한 건 치사하지 않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도망가기 전에, 숨어버리기 전에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그는 알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랑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단 한 번도 사랑을 서로의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입맞춤도 한 달에 한두 번. 잠자리야 워낙 바쁜 일정 때문에 손에 꼽을 정도고. 심지어 그 스킨십에서조차 열정의 흔적은 미미하기만 했다.
우리를 연인으로 묶이게 하는 것이 없음에도 우리는 연인이었다. 나는 김유을을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피하고 싶었고, 보고 싶다가도 이따금 그를 잊었다.
이 어설픈 연인 관계를 돌아보게 된 건, 그러니까 우연히 김유을의 통화 내용을 들었을 때였다. 좀처럼 제 부모 얘기를 하지 않는 김유을이 밖에 나가서 혼자 하던 통화. 수화기 너머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마 김유을의 어머니일 것이다.
김유을 어머니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김유을은 건조하게 한마디로 응수했다.
‘조만간.’
조만간.
‘될 수 있으면 같이 가고.’
비로소 그 통화를 훔쳐 듣고서야 내 꼴을 돌아봤다. 퇴사하라고 압박을 넣는 거나 마찬가지인 윗선, 그들이 주도한 따돌림. 대학 입학을 앞둔 동생이 유일한 혈육이고, 동시에 가장인 나는 허겁지겁 취직하느라 스펙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에게는 다르게 보였을 것들이었다. 우선 내 취직만 해도 그랬다.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 경험을 쌓는 것으로 보일 테고, 제 부모님에게 소개할 거리가 추가된 것에 불과했다.
어디까지 그를 속일 셈이었을까. 그에게 대놓고 부잣집 딸입네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는 곳은 숨겼다.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데이트도 그의 수준에 맞추고, 내 빈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과연 이걸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가 당연했다. 김유을의 칼국수가 식탁에 차려지기 전까지 나는 술만 따랐다. 사장님은 한마디도 안 하는 우리의 중앙에다가 칼국수를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 위에 입술을 꼭 닫은 바지락이 두어 개 올려져 있었다. 그 바지락이 우리의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났다.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안 나오나 봐…….”
용기를 끌어모아서 눈을 들었다. 어느새 두 번째 소주병도 다 비웠다. 그가 화를 내거나 어처구니없어하거나. 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왜 지금까지 숨겨왔냐고 묻는 것이 일반적일 터였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김유을, 너.”
천천히 그의 가슴팍부터 올라가 두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오갔다. 황당함, 분노, 기막힘. 그의 눈에는 씻은 듯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엊저녁 먹은 메뉴를 들은 것처럼 잔잔했다. 태풍이 와도 소란스럽지 않은 바다 같았다. 무심한 남자라서가 아니다. 내 말에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턱밑까지 끌어올린 목 폴라에 가려져 있지만, 분명 그의 입술 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웃고 있었다. 웃을 일인가.
“왜 웃어?”
입 안이 빠짝빠짝 말랐다. 처음으로 낸 용기였다. 처음으로 그에게 솔직했다. 깨끗이 청소하고 숨어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낸 용기였다.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내가 수십 번 곱씹어보아도 저건 미소였다. 제 여자 친구가 실직자에, 다년간 거짓말을 했다는데 멀쩡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
술기운에 흔들거리던 조명이 순간 또렷해졌다. 불어터져 엉킨 내 마음이 수치심을 뱉어냈다. 아등바등 김유을 앞에서 멀쩡한 사람인 척하려던 내가 떠올랐다. 과외를 그렇게나 뛰면서도 티 한 번 내지 않았던 과거가 손을 들었다.
“언제부터.”
나는 얼굴을 한껏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쯤이면 김유을이 한마디 해야 한다. 아니, 한마디뿐일까.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나인데 오히려 내가 추궁하고 앉아 있었다. 송별회는 무슨 송별회냐고 비웃던 윤 과장의 말보다, 그 말에 쥐 죽은 듯 따라가던 다른 동료들보다, 오늘 가장 나를 비참하게 만든 건 그의 침묵이었다.
김유을은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다가 드디어 그 귀한 입술을 움직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알고 있었다. 김유을은 다 알고도 내 거짓말을 구경했다. 이게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는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발악하는 내 심정을 이해해서 눈감아준 것일까. 그런데 후자는 아닌 듯싶었다. 김유을의 눈에 안타깝다거나 불쌍하다거나 하는 감정이 없었다. 그는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자조적으로 나 자신을 할퀴었다.
“내가 혼자 생쇼를 했구나.”
김유을의 손가락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잔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이 아래로 향해 있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원망이 한 숟가락 섞인 내 눈과 마주쳤다. 김유을은 시선을 비끼지 않았다. 그의 손이 빈 잔을 엎어두었다. 그리고 손톱으로 그걸 톡톡 두드렸다.
“다 마셨으면 일어나.”
그가 의자를 드르륵 밀어냈다. 다 불어터진 칼국수와 우동에게 큰 그림자가 졌다. 끝날 리 없는 대화가 끝이 났다. 우리가 이렇게 터놓고 얘기한 건 처음인데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나 혼자만 당황하고 목마른 표정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자 김유을은 내 옆자리에 둔 가방을 들었다.
김유을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만사천 원이요. 사장님은 다가오는 김유을을 힐끔 보다가 말했다. 김유을은 한 입 먹지도 않고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무심하게 노란 지폐를 사장님에게 건넸다. 잔돈을 거슬러 받는 동안 김유을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언제까지 거기에 뭉개고 있을 거냐는 눈빛이었다.
술에 취해서 헛꿈을 꾸는 건가 했다. 내가 상상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적어도 김유을이 나를 비웃거나 적어도 나를 비난할 줄 알았다. 백 번을 더 그려보았지만, 그 상황에 김유을이 태연한 얼굴을 한 적은 없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일어나서 테이블 사이를 걸어갔다. 김유을이 한쪽 팔로 천막을 들고서 서 있었다. 따듯한 내부로 찬바람이 들이치자 어묵 국물의 김이 한순간에 날아간다. 사장님의 미간도 약간 찌푸려진다. 나는 다급하게 그 뒤를 따라나섰다.
찬바람을 맞으며 김유을의 곁에서 걸었다. 차를 대놓은 곳은 역 근처였다. 주차 딱지가 떼일 것 같다.
“타.”
김유을은 그 말과 함께 차 문을 열어줬다. 표정은 포악하지만 매너 있는 손길이었다. 데려다주려는 모양새다. 시간을 갖자고 한데다가 있지도 않은 부모를 있는 척해왔는데.
“안 타?”
더 세워뒀다가는 차 안에 욱여넣기라도 할 목소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부터 차 안에 넣었다. 자리에 허벅지가 닿자마자 차 문이 닫힌다. 1월 날씨에 제대로 된 겉옷도 없는 김유을이 보였다. 김유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나를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군다.
아까부터 술 한 모금 안 마신 이유가 있었다. 그가 시동을 걸자마자 내 쪽을 본다.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김유을은 내가 저를 볼 때까지 계속 쳐다만 봤다.
“왜.”
결국 지고 만 내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벨트.”
말하지 않아도 내가 매려고 했다. 그런데 불쑥 그의 몸이 튕겨 나왔다. 곧은 어깨가 내 턱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뿌리는 옅은 향수 냄새를 맡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팔에 잡힌 벨트가 지이잉 잡혀 내려온다. 달칵, 꽂는 순간까지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얼른 비켰으면 좋겠다. 입만 슬쩍 벌려도 알코올 냄새 장난 아닐 텐데. 신경 쓰여서 개미처럼 숨죽이고 있는 거 안 보이나. 나는 눈으로 힐끔힐끔 그를 바라봤다. 사귄 게 몇 년인데 아직도 내외하는 사람처럼 구는 건 내 탓이 아닐 거다. 우리는 그만큼 서로를 긴장시킨 적이 없었다.
“안 가?”
고개를 마저 돌렸다. 그의 팔에 갇혀, 뺨 가까이 온 입술을 먼저 보았다. 살짝 튼 입술이 오히려 맨 입술일 때보다 붉었다. 김유을은 그 입술을 벌렸다. 그의 스웨터에 묻은 겨울 냄새와 어울리는 입술이었다.
“왜…….”
죄지은 사람처럼 내 말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김유을은 고개를 흔들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 벨트는 느려터지게 매준 것에 비해 자신의 것은 즉시였다. 매끄럽게 도로로 들어가는 움직임 또한 자연스러웠다.
이색적인 포장마차 데이트를 즐긴 연인처럼, 한겨울 냉담하게 싸운 연인처럼, 참 속 모를 김유을은 조용히 운전했다. 기대했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각오한 비난이 없으니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으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으나 알코올이 불쑥불쑥 방해한다. 결국 차가 신호등에 걸리고 나서야 이름 하나를 겨우 뱉었다.
“민윤주야?”
아무래도 그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분명 조용히 졸업했고, 그는 나와 같은 대학이 아니었다. 군대 다녀오랴, 제 아버지 밑에서 일 배우랴.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경로는 고작 학교 때 인연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삼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민윤주. 그 입 싼 아이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한참 생각한 듯, 그는 신호가 바뀌고 느긋이 출발하며 답했다.
“민윤주가 누군데.”
“그나마 안다면 걔야. 그 외에는 부모님 돌아가셨던 거 알 만한 애 없었어. 심지어 너는 전학 왔었잖아.”
운전에 집중하던 그가 일그러진 표정을 했다. 눈은 사나운데 입술은 호선을 그린다. 그는 그 얼굴로 핸들을 꺾었다.
“작정했나 봐, 오늘.”
비웃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많은 걸 알아챘다. 너는 꽤 오래전부터, 어쩌면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 싸워본 적도 없으니까. 네 실망한 얼굴, 비난할 목소리. 내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렸는데. 그런데 넌 이미 알았다고 하면, 이건 그냥 내가…….”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같다. 내가 숨기고자 한 진실을 그는 유희로 즐기며 산 느낌이었다. 안다. 못난 수치심이었다. 조금이나마 식혀보고자 차가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앞을 주시하던 김유을의 시선이 꺾어졌다. 내게 닿았다.
“손해우.”
나는 창문에 기댄 뺨을 돌렸다. 차가운 유리가 뺨에 문질러졌다.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 같아.”
“뭐?”
“몇 퍼센트나 확신해. 백? 칠십?”
김유을의 말이 경주마처럼 빠른 것도 놀랍지만 저런 불명확한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언제나 간결했다. 오른쪽이면 확실하게 우회전 깜빡이를 켜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너.”
그의 한쪽 눈가가 찌푸려진다. 마음에 차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되게 허술해.”
무색의 도화지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페인트를 들이부어도 무구할 것 같았다. 그런데 도화지가 살벌하게 구겨지고 물들여졌다. 그의 말보다 표정이 더 놀라웠다.
물론 말도 충격이긴 했다. 허술하다니. 그러는 자기는 대나무 숲처럼 빽빽한 사람인 줄 아는가.
기막힌 내가 말을 고르는 사이, 차는 어느덧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언제 도로 가에서 빠져나왔는지 몰랐다. 그만큼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뒤에야 빌라 사이사이에 이어진 전깃줄이 눈에 익었다. 자주 두부를 사러 가는 슈퍼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몰랐을 터였다.
“유을아.”
김유을과 데이트 코스는 단조로웠다. 영화를 보고, 근사한 밥을 먹고, 두 달에 한두 번씩 호텔에, 그것도 아니면 집 근처에 나를 내려준다. 우리처럼 재미없게 사귀는 커플도 없었다. 오랜 시간 사귀어왔지만 나와 김유을의 사이는 겉만 번드르르하고 알맹이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섞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고, 더군다나 속이는 내 입장에서야 어느 정도의 죄책감이 따라다녔다. 우리가 오래 사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말을 많이 아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을 항상 했다.
차가 정차했다. 정확히 우리 집 앞이었다.
“집, 알고 있었네.”
김유을은 대답 대신 느리게 숨을 뱉었다. 주머니 안쪽으로 쑥 들어간 그의 손가락에 담뱃갑이 걸려 나왔다. 그 하얀색 담뱃갑이 오늘따라 매정해 보였다.
김유을은 긴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하지만 피울 생각은 없나 보다. 불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좀 더 편하게 운전석에 기댔다. 늦저녁 골목길. 정차해 둔 차에서 나는 소음을 제외하곤 조용했다. 다들 저녁을 먹고 연속극을 보거나 가족과 단란하게 보내는 시간일 것이다.
“우리 집에, 부모님에. 다 아는 거 보니까 나 대학 다닐 때 과외 때문에 아등바등했던 것도 알았겠어.”
숨기려고 애썼던 과거가 우스웠다.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넘기자 김유을은 입에 문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 내려놓는다. 그리고 젖힌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여기서 해?”
“뭐를.”
“얘기.”
그의 눈이 창가 너머 빌라로 향해 있었다. 오늘따라 김유을은 다른 사람 같았다. 속내 숨기기가 양파보다 더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지금의 그는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속 보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자는 거야?”
김유을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머릿속에 급하게 나오느라 엉망진창인 집구석이 생각났다. 알딸딸하게 올랐던 술기운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참 잭팟도 이런 잭팟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오늘 정리를 하고 싶었다. 떠나기 전 말끔한 뒷정리. 그런데 이건 정리보단 난장판을 만드는 하루에 가까웠다.
엉망인 집구석이라도 숨겨볼까 했지만 어차피 막다른 골목이었다. 여기서 더 거부해 봤자 구질구질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한숨을 삼키고 안전벨트를 끌렀다. 궁상맞아도 놀라지나 말라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김유을이 웃고 있었다. 스웨터 소매로 가렸지만 웃고 있었다. 운전대에 기대어 숨을 눌러 참듯이 웃고 있다. 내 생에 저 남자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유을아.”
무서우리만치 당황스럽다. 그런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웃음기를 달고 있는 김유을이 운전석에서 내려, 차 문을 열어줄 때까지 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덜미가 잡힌 것처럼 얼어붙었다. 무언가 잘못 걸린 느낌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달칵, 차 문이 열린다. 싸늘한 공기가 차 내부로 들어온다. 김유을은 아까의 미소를 지운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손님인 그가 납치범이 된 기분이었다.
“안 치워서 더러울 텐데.”
김유을은 내가 내리자마자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가 사는 빌라 쪽으로 걸어갔다. 더럽다는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시골 외할머니댁으로 도망칠 결심을 했을 때. 나는 약간 붕 뜬 상태였다. 게임에서 망한 캐릭터를 삭제하기 직전의 상태. 그 전에 나를 괴롭히던 버그들을 지우려는 상태. 그래서 내게 쏟아질 경멸조차 무덤덤할 수 있는 비겁한 상태.
그런데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 친구를 데리고 빌라에 들어선 나는 뭐랄까. 오히려 진실을 알리고자 마음먹었을 때보다 두려움에 차 있었다. 알고 보니 나는 까발릴 생각이 없었다. 사연 없는 악당은 없다고 했던가. 악역이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말함으로써 동정받듯, 나는 그로부터 우아하게 퇴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밑바닥에 고인 물까지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더는 물러설 퇴로가 없음이었다. 손가락은 힘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곧 있으면 동생 올 거야.”
싸운 뒤부터 늦저녁에 귀가하는 동생이지만. 문을 열면서 나름대로 반항이란 걸 해봤다. 처량한 나를 전시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튕겨낼 수 있는 장치를 해둔 것이었다. 그러나 김유을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열린 틈으로 발부터 밀어 넣는다.
내가 비켜서고, 천천히 그가 현관에 신을 벗었다. 무심하게 장판 위로 올랐다. 시선을 느리게 옮기며 음미하듯 집 안을 훑는다. 때 묻은 벽과 중고로 얻은 티브이, 거실과 연결된 부엌이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김유을은 세기의 성이라도 되는 양 훑어보았다.
“이런 데 한 번도 안 와봤지?”
뭔지 모르게 숨고 싶은 만큼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밝게 웃으며 다가서는데 그가 갑자기 휙 돌았다. 표정에는 경멸 대신 옅은 흥미만 있을 뿐이었다.
“네 방은.”
왼편과 오른편에 방이 하나씩 있었다. 김유을은 감으로 때려 맞히듯 물었다.
“오른쪽?”
이 좁은 거실에 김유을이 서 있다는 것도 겨우 받아들인 참이었다. 까무러치지 않은 게 용한 와중에 내 방을 찾는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김유을은 긍정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구경하는 거 불편해?”
“별로 볼 거 없어. 책상이랑 화장대랑 침대랑.”
남들 사는 만큼은 갖추고 산다고 둘러댔다. 흥이 식길 바랐지만 그는 제 턱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네가 쓰는 책상이랑 화장대랑 침대.”
“…….”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게 그거야.”
하마터면 변태 새끼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있는 힘껏 참았으나 그가 꼭 아는 눈치였다. 눈빛이 수상쩍었다. 내 섣부른 착각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어질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해경이 대강 치운 모양이었다.
사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어쨌든 집까지 초대한 연인 아니던가. 그것도 햇수로만 따지면 7년이 되어가는 연인이었다. 방 구경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나는 심드렁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고 있어. 나는 마실 거 좀 꺼내올게. 정말 별거 없으니까 실망하지 말고.”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여는데, 김유을이 즉각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안에는 오렌지 주스와 결명자차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면 오렌지 주스를 찾는 내 버릇 때문에 동생이 사다 놓은 듯했다. 덕분에 손님 맞을 구색은 갖출 수 있겠다. 엊그제 끓인 결명자차를 내놓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제일 그럴듯한 유리컵에다가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설거지를 막 해둔 듯 물기가 흐르는 쟁반까지 꺼내 들었다. 문득 낯선 기분이 엄습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누구도 초대한 적이 없었다. 동창들이 집들이하자며 졸라대도 얼씬 못 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 김유을이 내 집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장 숨기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자연스러울지를 고민했다. 김유을이 어떻게 알았는지 캐묻는 것은 조사 같고, 또 우리가 정답게 앉아 지나간 세월을 얘기할 만한 상황인가 싶었다. 나는 퇴사를 한 뒤 할머니 집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 후였다. 도망치기 직전, 비겁하게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그와 술주정하듯 과거 얘기를 하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여러모로 내 고민의 길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유을?”
아침마다 보는 내 방이었다. 그 방 한쪽 벽에 김유을이 기대어 서 있었다.
벽지는 전에 살던 세입자가 바른 촌스러운 분홍색이었다. 여러 번 다른 색으로 칠할까 했지만 곧 건성건성 알아보다가 관두곤 했었다. 여유 시간도 없을뿐더러, 아무튼 세 들어 사는 집인데 바꿀 게 있나 싶었다. 묘하게 사춘기 중학생이 쓸 법한 방 같아서 내키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김유을은 딴짓 중이었다. 그는 내 물건을 들고 있었다. 어제 입고서 의자에 걸어둔 셔츠였다. 그의 손에 잡힌 셔츠는 축 늘어져 있었다. 벗다가 립스틱 자국을 묻힌 곳에 김유을의 입술이 겹쳐졌다. 김유을은 한참을 그 자세로 있었다.
“유을아.”
그제야 문 앞에 서성이는 나를 본 김유을이 셔츠를 내린다. 그의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웠다. 나는 들고 있는 주스로 시선을 깔았다. 김유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게 나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항상 그랬다. 김유을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나를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왜 졸업하고서 헤어질 우리가 여태 묶였는지 알 수 없으니, 나는 그의 앞에서 빚쟁이처럼 초조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 전혀 모르겠다. 그걸 되살려 들여다볼 정신이 없었다. 그의 존재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마셔.”
김유을은 내가 가지고 온 오렌지 주스를 보았다. 들고 있는 셔츠를 의자 위에 고스란히 걸어놓고 컵을 집어 든다. 내 셔츠 옷깃에 닿았던 붉은 입술로 노오란 오렌지 주스가 빨려 들어간다. 나는 둔치처럼 그 장면을 넋 놓고 구경했다.
뜨거운 시선이 끼쳤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김유을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명료한 수갈색 눈동자가 나를 가뒀다. 김유을은 천천히, 농락하듯 천천히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그의 눈이 점점 휘어진다. 웃고 있었다. 김유을은 오늘따라 웃음이 헤펐다.
더운 느낌이 들어 윗옷을 펄럭거렸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깐. 만약 침대에 앉은 의도를 오해한다면.
“손해우.”
“어?”
음탕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쟁반을 꽉 안고 말았다. 김유을은 빈 유리컵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다 마셨어.”
나는 빈 유리컵을 받아서 작은 협탁 위에 올려뒀다. 저걸로 내 머리통을 깨어 기절하고 싶었다. 왜 자꾸 얼뜨기같이 구는지 모르겠다. 차분하게 대화를 주도해도 모자를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의 의사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한 데다가 내 쪽이 코너에 떠밀린 듯 불리했다.
팔짱 낀 김유을이 내 방을 순시하듯 둘러보았다. 낱낱이 들킨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이쯤에서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는데 시작이 난감했다. 말문을 틀 주제는 무엇으로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까.
입술을 달싹거리며 할 말을 찾아보았다. 확실한 건 내 방에서는 무언가 곤란했다. 나는 코트를 벗으며 김유을을 올려다봤다.
“유을아.”
벽에 걸린 내 졸업 사진을 보던 김유을이 돌아보았다.
“나 옷 갈아입게 나가 있어줄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던 그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갑자기 멈추고 시선을 내게 툭 던진다.
“갈아입어.”
“너 있는데?”
“나가 있을 데도 없잖아.”
나는 코트를 벗다 말고 잠시 벙했다. 원래부터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았던 건지, 내게 지나친 연기를 하는 건지. 내가 알던 김유을은 팔려나가고 딴사람으로 바꿔치기한 기분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일부러 발가락 끝을 까닥댔다.
“스타킹도 벗어야 해.”
이런데도 네가 안 나가고 버틸 것이냐, 묻는 의도였다. 그러나 철판이 두꺼워진 김유을은 피식 웃었다.
“벗겨줘?”
“네가?”
단언컨대 농담인 줄 알았다. 김유을은 태연자약 웃고 있었다. 내 신장에 안착하고 남은 알코올들이 물었다. 쟤가 이 상황에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애였느냐고.
어디까지 변하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술 한 모금 안 마신 그의 변화가 당황스러우리만치 웃겼다. 나도 농담에 어울려주고 싶어서 발을 들었다. 이쯤 하면 손을 털고 나갈 줄 알았으나 김유을은 벽에 기댄 몸을 떼었다.
“진짜로?”
그가 거침없이 내 발을 들었다. 치마가 올라가 속옷이 보일 각도였다. 요즘 퇴사 문제로 정신이 빠져서 속바지도 깜빡한 차였다. 어차피 검은 스타킹이니 문제가 될까 싶었지만.
“내가 할게. 장난이었어.”
그의 손길이 야릇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작 김유을은 아랑곳하지 않는데 말이다. 도리어 잘 벗기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얘의 마음을 신께 자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마 내가 시간을 갖자고 해서 토라진 것인가? 단순히 그 말 때문에 틀어질 정도로 좋아하긴 했었나, 의문이 든다. 절간 수도승만치 담백한 우리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렇게 담백했던 김유을의 손이 내 발을 움켜쥐었다. 그가 무릎을 굽히고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굽어진 허벅다리에 내 발이 올라갔다. 손길은 과일의 껍질을 깎아내듯 무신경했다. 허벅지의 끝에서 스타킹을 긁듯이 벗겨낸다.
살을 감싸고 있던 스타킹이 사르르 끌려간다. 급할 것 없이 천천한 움직임이었다. 살짝 얼어 불그스름한 허벅다리를 지나쳐, 오늘 하루 고됐을 종아리를 쓸어내리며, 이내 종착점처럼 불거진 복숭아뼈에 닿았다. 조금만 더 벗겨내면 끝이었다.
침 한번 꿀떡 삼킬 수가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 그 때 김유을의 눈은 애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내 왼쪽 다리는 덩그러니 남겨져 있고, 오른쪽 다리는 김유을의 허벅다리 위, 그리고 그 어두운 사이는 말려 올라간 치마가 가려주고 있었다. 김유을의 시선은 명백히 사이에 머물렀다.
“보지 마!”
그 말을 외치는데 눈가가 시렸다. 뇌에 찬 눈물이 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수치심이 극에 달할 때마다 이런다. 설마하니 화가 난 김유을은 이런 것일까. 나를 창피에 빠트리고, 수치에 물들이고, 기어코 내게서 사과를 끄집어낼 요량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김유을의 눈을 가렸다. 스타킹을 벗기기로 했으면 다 벗기기나 할 것이지, 중간에 살그머니 멈춘 손도 불만이었다. 나는 거부하듯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김유을이 입술을 움직였다.
“눈을 왜 가려.”
그가 내 손을 떨쳐내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의 손이 내 발을 위로 올렸다. 김유을은 허리를 숙이고, 내 종아리에 입술을 내렸다. 쪽. 말캉한 감촉에 눈이 질끈 감겼다. 얘가 오늘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먹었나 보다. 차라리 윽박지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탐색하듯 나를 놀리는 건 온몸이 간지러웠다.
김유을의 입술은 녹녹하니 부드러웠다. 혀로 살짝 내 종아리를 핥았다가, 조금 더 나를 끌어당긴다. 저항 없이 나는 그에게 끌려갔다. 종아리는 다 맛본 듯 무릎으로, 무릎에서 입술을 비비고, 조금씩 위에 허벅다리로. 그의 눈을 가린 손은 밀리고 밀려 어느새 내 가슴 앞까지 왔다. 힘을 줘 그를 밀어보지만 사시나무처럼 떨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자꾸만 다가온다.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김유을의 입술이 내 허벅다리에 닿아, 양옆을 천천히 오가며 문질러진다. 그의 숨이 퍼지고 퍼져 음습한 곳까지 전해졌다. 속옷이 바로 그의 코앞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머리칼을 밀어내고, 예의 없는 시야를 가렸다. 그래도 그는 한쪽 입매를 비튼다.
“아까 봤어.”
“유을아.”
“짙은 분홍색.”
내 팬티 색깔이었다. 우리는 세월에 비해 잠자리 횟수가 적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충분히 김유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김유을은 쉽사리 흥분하는 법이 없고, 무엇보다 제어를 아는 남자였다. 지금껏 내가 겪은 김유을이 쌍둥이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정말 이럴래?”
기어이 허벅다리를 깨문 그를 강하게 밀쳤다. 김유을은 고민하듯 입술을 쓸더니 느릿느릿 물러섰다. 퍽 아쉬운 눈초리였다. 나는 재빨리 두 다리부터 오므렸다. 그의 허벅다리 위에 놓인 다리도 내렸다.
“술은 네가 마셨나 봐.”
그의 눈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한쪽 발만 빠져나간 스타킹이 허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갑작스레 현실이 눈에 들었다. 손발이 못 견디게 어색해졌다. 나는 쑥스러워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갑자기 왜 그래.”
“너는.”
“응?”
“왜 갑자기 시간을 갖자는 건데.”
김유을은 편히 앉고, 굽히고 있던 무릎을 세웠다. 그의 눈빛은 나를 산산이 쪼갤 듯했다.
“시간 갖자 한 다음, 취중진담처럼 고백하다니. 어디 도망이라도 가려고?”
피할 데 없는 정곡을 찔렀다. 명백히 말하면 도망은, 아니, 명백히 말해도 도망이었다. 나를 허물어뜨릴 기억이 있는 이 빌라, 이 골목, 버스 정류장, 지하철. 그런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김유을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거짓말을 일삼는 나, 너덜너덜해져 초라해진 나. 김유을을 보면 구저분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김유을은 깍지 끼운 손을 흔들었다.
“왜 그렇게 눈치를 봐.”
뭐? 나는 휙 고개를 들었다. 김유을은 나를 비웃고 있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가 날카롭게 나를 꿰뚫고 있었다.
“네 부모님 돌아가신 거. 네 잘못이야?”
“김유을.”
“네가 죽였어?”
한쪽 스타킹이 벗겨진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째려보려고 그런 건 아닌데 눈물을 막으려면 별수 없다. 물론 그걸 일일이 설명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씨발, 네가 말해주길 기다렸다고.”
말해주길 기다렸단다. 나는 펴진 손끝을 죄인처럼 모았다.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아까 내 종아리에 살갑게 입술을 맞추던 김유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분한 사람처럼 이를 갈았다.
“유을아.”
김유을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온갖 게 담겨 있었다. 나는 때늦은 물음을 삼켰다.
너 나 사랑하니?
그럼 김유을은 대답할 것이고, 나 또한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아직 물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볼품없는 내가 이런 허름한 곳에서 묻고 싶지 않았다.
“손해우.”
“응.”
“너 내가 부모님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네 눈치 보고 있으면 어떨 것 같은데.”
우선 그를 마음껏 위로해 준 뒤, 고아가 된 아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차츰차츰 밥이라도 떠먹을 수 있는지, 제삿날에는 무얼 차려야 하는지, 그리움은 어떻게 달래볼 수 있는지.
하지만 우리는 경우가 달랐다. 나와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속였고, 그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김유을은 내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손해우. 난 네가…….”
김유을은 말을 하다가 말고 입 안을 훑었다. 이어질 말이 있는데 삼키는 듯했다. 7년 동안 우리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치민 적은 드물었다. 심지어 유을이 군대에 가고, 이따금 휴가차 나와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떻게 먹고사는지에 대해 간략히 말했고, 나는 팍팍한 일상을 전시하지 않았다. 나 또한 잘 살았다고 할 뿐이었다.
끝을 결심하고 나서야 우리는 진심을 토로했다. 웃기지 않은데 한편으로 웃기는 상황이었다.
잠금장치가 고장 난 창문이 야단스럽게 흔들렸다. 바람이 세게 불면 깨질 듯 흔들리곤 한다. 마치 침묵을 지키는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여기서 오순도순 밤이라도 샐 작정이냐고.
“곧 동생 올 것 같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 네 번의 전자음이 울린 뒤에 발소리가 따라온다. 누나아. 비닐봉지 흔드는 소리도 들렸다. 근래 들어 험악해진 남매 사이를 풀고자 해경이 아양 떠는 목소리였다.
그가 퇴장할 순간이 온 것이었다.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김유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도 한쪽 다리에만 끼어 있는 스타킹을 마저 벗었다.
“누나.”
해경이 봉지를 들고서 내 방에 고개를 쑥 내밀었다. 단조로웠던 해경의 표정은 김유을을 보고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누나. 누구야?”
사귀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나서서 유을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해경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곧 알아차린 듯 제 입을 틀어막고 방방 뛰었다.
“대애애박. 누나 남자 친구죠? 유을이, 유을이, 맨날 그러더니. 어? 진짜로 집에 데려왔네. 우리 누나 절대 아무도 안 데려오는데.”
안 그래도 밉상이던 동생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했다. 나는 김유을의 등을 밀었다. 동생이 큰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필히 내보내야겠다. 김유을은 내 뜻을 알아차린 것처럼 서서히 발을 옮겼다.
“왜요. 더 있다가 가지.”
해경은 나가는 김유을을 졸졸 쫓아다녔다. 김장독에 파묻힌 것 같은 누나의 인간관계를 이참에 아주 속속들이 알아내자는 심보 같았다. 나는 난장 피우는 해경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아! 누나!”
크게 데기라도 한 것처럼 등을 과장해서 긁는다. 며칠간 냉담했던 남매 사이를 생각하자면 해경의 오버도 이해가 갔다. 자연스레 내 감정까지 풀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실 티는 안 냈지만 화는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나오지 마.”
따라나가 배웅하려는 나를 김유을이 멈춰 세웠다. 그는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면서 제 핸드폰을 꺼내서 보였다. 연락하라는 뜻인가.
“이거. 난 잊었어.”
그의 핸드폰에는 내가 남긴 문자가 있을 것이다. 시간을 갖자는 문자. 그는 그걸 잊으라는 뜻이었다.
“너도 잊어.”
김유을한테 말해야 했다. 할머니 댁으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해 두었다고.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경위까지도. 김유을이 원하는 건 내가 그걸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것일 터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일이다. 타인에게 내 감정을 말하는 일, 위로해 달라고 전화 거는 일.
현관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래도 할머니 댁으로 가는 걸 미뤄야겠다. 날을 잡고 한번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묻어둔 과거, 벅벅 지우려 한 현재까지. 오늘 보니까 김유을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야기하자고 한 것 중에 속 시원히 풀린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매해 둔 버스표를 취소하려고 하는데 해경이 말을 걸어왔다.
“누나. 라면 먹을래?”
막내라서 넉살이 좋은 건지, 걱정할 머리가 없는 건지. 김유을이 사라지고 나니까 해경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해경은 ‘누나도 먹을래?’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라면 봉지를 찢는 손가락이 은근히 얄미웠다.
“나 오늘 퇴사했어.”
콧노래 부르며 봉지를 치우던 해경의 등이 굳어졌다.
“그만두겠다는 얘긴 한 달 전에 했고. 퇴사는 오늘 했고.”
생활비는 내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대낮에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당연했다. 저 녀석은 작년에 고삼이었다. 올해 1월에 겨우 스무 살이 됐다.
“이제 어떻게 살래.”
“왜 그만뒀어?”
“힘들어서.”
단 한 번도 해경이 내 발목을 잡는다거나, 영영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부모님 그렇게 되시고, 마땅한 친척이랄 것도 없는 우리였다. 해경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울고불고한 게 벌써 몇 해인가.
동생 기죽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메이커 신발에, 메이커 패딩에, 메이커 지갑에. 요즘 애들은 브랜드를 더 따진다더라. 해서 무조건 값나가는 것으로 사줬다. 학원 못 다니면 왕따라기에 학원도 보내줬다. 이렇다 할 성적은 없었지만 대학 근처라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 녀석 학부 졸업까지 시키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실까. 그 마음에 힘든 일도 어찌어찌 참아 넘겼다.
“누나. 아직도 화났어?”
해경이 사고 친 것을 안 건 두 달 전이었다. 그러니까 수능 날이었다. 해경은 수능을 보지 않았다. 최저를 맞추기 위해 꼭 필요한 성적임을 똑똑히 아는 녀석이, 수능 대신에 학자금 모아둔 통장으로 연습실을 계약했다. 드럼을 샀다. 기타를 샀다. 다 제 친구라는 녀석들이랑 저지른 짓이었다.
나는 한창 과장에게 깨지고 있을 때였다. 동시에 이직도 알아보고 있었다. 해경이 대학을 다니면 자취방도 구해줘야 했고, 달마다 생활비도 보내줘야 했다. 당시 월급으론 어림없는 소리였다. 이직을 해서 펑크 난 돈을 채울 작정이었다. 나처럼 알바만 하다가 스펙 못 쌓는 허송세월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우리가 꼭 갚을게. 경우 알지. 오늘 경우는 편의점 야간 면접 보고 오고, 재민이는 pc방, 나는 그 옆에 노래방…….”
“하.”
제대로 된 소속사랑 계약한 것도 아닌 녀석들이 모여서 밴드를 만든다고. 아이돌이 되겠다고 해도 기가 차는데 주제는 알았는지 밴드란다. 이 시대에 기타 튕기는 밴드라니. 유명한 밴드를 줄줄 알고 있는 나도 요즘 밴드 노래는 듣지 않는다. 그것도 내가 아는 밴드는 전부 외국인이었다.
“내 꿈이잖아. 누나.”
“너 무슨 청춘 영화 찍니?”
“누나는 돈이 문제인 거잖아. 갚을게. 친구들도 누나한테 미안하대. 나도 누나가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둔 건 아는데…….”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머리를 질끈 묶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어놓고 숨을 고르는데 바깥에서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저 녀석이 배고픈가 보다, 왜 라면 같은 걸 먹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심사가 제대로 뒤틀렸다. 송별회는 무슨 송별회냐고 비웃으며 나갔던 그 야비한 얼굴, 묵묵히 서서 받았던 오욕과 수치. 오늘의 할당량을 채운 악의가 몰려와 나를 비틀었다. 라면 물 올리는 소리가 왜 그렇게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는지.
나는 의미 없이 틀어진 물을 잠그고서 화장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손해경.”
비겁한 손해우. 너는 왜 바깥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굴고, 안달 나도록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은 건데. 왜 바깥에서 주운 상처를 가장 만만한 동생에게 뿌려대고 있는 건데. 머리로는 아는데. 잘 아는데.
“너 노래 거지같이 못 불러. 제발 현실을 직시해. 밴드든 뭐든, 티브이에 나와서 노래 부르고 싶으면 얼굴이 우선이야. 차라리 네가 그 돈으로 성형외과를 갔다면 이해하겠어. 연습실? 드럼? 기타? 진짜 힘들게 모은 돈으로 가지가지…….”
“누나.”
해경의 눈시울이 붉었다. 상처받은 얼굴로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덩치 큰 녀석이 자존심 상해 씩씩거리고 있었다. 내 말에 적잖이 베인 모양이었다. 안다.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한 말이었다. 고르고 골라서 부싯돌에 낱말을 갈았다.
“난 누나처럼 살기 싫어.”
상처받은 쥐는 같은 쥐도 물 수가 있다. 쥐굴에 사는 우리는 바깥에 고양이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이 좁은 굴에서 서로를 물어뜯었다.
“나같이 사는 게 뭔데.”
“존나 가식적인 거. 누나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 안 데려왔지? 여기 쪽팔리니까. 엄마아빠 죽은 것도 절대로 말 안 했다며. 나한테도 하지 말라고 그러고.”
쥐는 쥐의 약점을 안다. 평상시 서로 핥고 보듬어주던 상처가 약점이 된다. 싸울 때는 상처가 약점이 된다.
“그렇게 살고 싶냐? 그때도 생각했지만 너 진짜 독하다, 독해. 아마 아까 그 형한테도 말 안 했을 텐데 여긴 어떻게 데리고 왔냐.”
“너? 지금 누나한테 너라고 했어?”
“그래, 너. 내가 멀쩡한 대학 안 가면 동생 취급 안 해줄 거잖아. 나도 그럼 누나 취급 안 하면 되지. 생활비? 야. 내가 벌어서 먹고살면 돼. 왜. 지금까지 먹여주고 키워준 것도…….”
씨발. 여기서 울고 짜기 싫었는데. 혀를 깨물고 별 지랄을 다 해도 내 뺨이 축축해졌다. 막 물어뜯던 손해경도 움찔한다.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손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를 반복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떻게든 들이마신 숨으로 눈물을 눌러보려고 했다.
이판사판이었다. 상처받을까 봐 감췄던 이야기까지 다 끄집어 나왔다.
“부모님 돌아가신 거 고삼 담임은 알았어. 원래 이학년 때 나 되게 예뻐해 주던 선생님이었거든. 그래. 나 그런 거 좋아해. 칭찬받고, 너 대단하다고 해주는 거. 그게 나빠?”
“누나.”
“그런데 그 선생이 나 학비 지원받는 거 신청할 때마다, 급식비, 수학여행비, 하다못해 뭐 나라에서 라면 받는 거까지. 나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알아?”
“…….”
“그래, 불쌍하다. 쯧쯧, 어쩌다가. 에휴, 내 자식은 절대 저렇게 안 되게 해야지, 다행이다. 그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죽고 싶게 하는지……. 나는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 너는 모르게 하고 싶었어.”
해경이 손에 든 라면 봉지를 내려놓았다. 나를 달래려는 듯 해경의 손이 다가온다. 나는 마구잡이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같이 살기 싫다고 했지. 맞아. 나 너, 나같이 살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내 가족이니까. 내 동생이니까.”
“누나…… 내가.”
“이 나쁜 새끼야.”
나한테 상의 한마디도 없었다. 제 이름으로 해준 통장을 손대기 전에 이 녀석은 나를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제야 알겠다. 해경은 나를 가식적인 누나에, 남 눈치나 보는 독한 년으로 알고 있었다.
방금까지 취소하려고 했던 고속버스 앱에 다시 들어갔다. 제대로 시간을 확인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가장 큰 가방을 꺼내서 마구잡이로 옷을 담았다. 한시도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짐을 얼추 싼 뒤, 눈을 감고 문에 기댔다. 한동안 해경은 방문 밖에서 서성이며 나를 불렀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누나, 누나 한다. 쟤도 울긴 울었나 보다.
왜 잘 포장했던 감정이 쓸데없이 뻗어 나와 나를 망가트리는지. 꾹 눌러 담아서 납작해진 줄 알았는데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목구멍으로 탈출한다. 혀 밑에 묻어둔 말까지 상대에게 전달한다.
손해경. 꿈도 있으셔서 좋겠다. 나는 꿈이 없었다. 잃어버렸는지, 안 태어난 건지 모른다. 내 꿈은 동생을 대학 보내는 거였나 보다. 그것도 부모님에게 나는 이만큼 해냈다고 칭찬받기 위해서. 이럴 때마다 쓰일 가치 없는 나에 대해 놀라고 만다.
그리고 놀란 내가 하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다. 내 배경을 아는 사람들한테서 도망쳐, 나는 초라하지 않다고 자위하고 싶은 걸까.
손해경이 계속 전화를 거는 바람에 핸드폰이 요동쳤다. 끄려는데, 갑자기 김유을이 생각났다. 핸드폰을 수시로 열었다가 닫으며 고민했다. 김유을은 아직 연락이 없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김유을은 나를 찾아 헤맬까.
고민하던 엄지가 딱 한 번 용기를 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 연결되는 신호음에 내 간이 쪼그라들었다. 용건 없이 전화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연결은 나를 애달프게 한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종료 버튼. 그리고 곧바로 핸드폰을 껐다. 내 마지막 용기는 거기서 다 쓰고 말았다.
송별회도 없는 퇴사 날. 최악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