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168
특히 그 시련이 ‘스승의 죽음’이란 점에서, 나는 한 글자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을 때였다.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빅, 삐빅, 삐빅.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몇 자 더 쓰다 보면 잘 시간이겠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구나.
밥 차릴 여력이 없어 대충 한식을 배달하기로 했다.
지훈은 저녁 생각이 없다 해서 일 인분만.
그렇게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지훈이 태블릿 피시를 가지고 나왔다.
윽, 저 태블릿 피시 꺼내는 건 일하자는 건데.
“형.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일이지?”
경계 가득한 투로 묻자, 지훈이 웃었다.
“아니에요. 리브레 쪽에서 메일이 왔거든요. 그쪽 문학잡지에 <지팡이>에 대한 비평이 발표됐나 봐요. 그거 번역본을 보내 줬는데… 내용이 정말 좋아서요.”
일은 일이되, 기분 좋은 일이었군.
나는 태블릿 피시를 받아서 그 내용을 읽었다.
제목은… <재가 된 시>.
―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국의 작가 이상. 그가 발표한 <지팡이>가 우리 프랑스 문단에서 적잖은 호평을 이어 가고 있다. 특히 <지팡이>는 2부로 넘어오며 그 감정적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역사와 개인적 운명에 천착해 있던 세계관을 ‘스승’이나 ‘연인’이라는 타인과의 관계로 확장하여 넓힌 덕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하융과 두 연인의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나온 <지팡이>의 내용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을 것임이 틀림없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찬사였다.
내 눈길을 잡은 부분은 이어지는 글이었다.
― 하융과 두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라. 먼저, ‘희’는 하융의 마음이 ‘심’에게로 떠났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녀의 질투 어린 캐릭터에 맞게 ‘심’에 대해 쓴 하융의 글을 모조리 태워 버린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놓고 떠난다. 전통적 동양의 관점에서 ‘여인의 머리칼’은 서구 사회가 짐작하는 감정의 깊이를 넘어선다. ‘희’가 남기고 온 것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융과 자신이 사랑했던 ‘한 시절’이자 떠나간 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기도 하다. ‘희’는 그 시간과 마음을 결코 자신이 품지 않으며 그것을 하융에게 떠안게 하며 복수를 완성한다.
반면 ‘심’과 하융의 사랑은 보다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하융이 ‘심’에 대해 표현하는 마음은 사후적이다. 하융의 마음은 ‘심’이 떠난 후 작품으로 형상화되며 깊어지며, ‘심’과 함께 했던 과거를 ‘문학’ 속에 가둬서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영원함을 거부하는 게 사랑의 태생적 운명이기 때문일까. 그 글들은 ‘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리고 결국 재로 남는다. 하지만 이 사라진 글들이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 작품이 하융 그리고 <지팡이>를 읽는 독자들에게 남는다는 것이다. ‘심’을 형상화한 하융의 작품이 소설 속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독자’에게 남는다는 것. 그것은 <지팡이>가 끝난 이후에도 독자만큼은 그 작품을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 즉, 이마저도 ‘치밀하게 계산된 구조’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연애 소설’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재로 변한 글과 머리카락을 보라고. 우리는 그것을 ‘여운’이라고 부른다고 말이다.
…좋은 글이었다.
하융과 두 여자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승화시킨 글.
<지팡이>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글.
“이거, 누가 썼어?”
나는 좀 흥분해서 물었다.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가 썼대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지훈은 내게 이름을 말해 주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이거, 우리만 볼 글이 아닌 것 같아.”
“네?”
“리브레에 연락을 좀 해 줄래? 혹시 괜찮으면 이 글을 신―문학 웹페이지에 올려도 되겠냐고 말이야. 나도 신라문학 측에 얘길 해 볼게.”
“어? 그렇게까지 하시게요?”
“응. 지금 한국 문단엔 그런 글이 필요해.”
한국 문단의 비평 수준은 뛰어나다.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지.
하지만 한국 문단의 경향은 독일과 비슷하다.
한 작품에서 인간 감정과 역사의식이 동시에 보이면, 감정보다는 역사의식에 집중을 한다.
<지팡이> 역시 그렇다.
스승에 대한 이야기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나, 비평들은 대체로 그것을 역사적 맥락으로 풀어 간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의미들도 물론 가치가 있지만… 인간 본연의 ‘감정’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배달시킨 저녁을 가볍게 먹은 후.
나는 더 늦기 전에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전화를 했다.
프랑스에서 온 비평에 대해 설명을 하니, 그 역시 그 취지가 좋다고 했다.
― 리브레 출판사에서 허락을 하면 바로 글을 주시죠. 신―문학 웹페이지에 올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마 리브레 쪽도 싫다곤 하지 않을 거다.
신라문학에서 비평을 영리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니.
그 비평가 역시 거절할 이윤 없을 거고.
<재가 된 시>가 한국 독자들에게 오픈이 되면, <지팡이>를 보는 관점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역사성에 치중해 있던 그 관점들이 아마 자연스럽게 사랑이란 감정에 집중하게 되겠지.
잠시 후, 지훈이 방에서 나왔다.
“형, 메일 보냈어요.”
“그래? 수고했어.”
주방 스툴에 앉아 있던 내 앞에 지훈이 앉았다.
“작업은 잘 되어가요?”
“응. 나쁘지 않아. 다음 내용도 정해졌고.”
“오, 역시. 다음 내용은 뭐예요?”
지훈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방금 리브레의 메일을 보고 나 역시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앞으로 쓸 내용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싹 정리가 됐다고 해야 하나.
“스승이 죽을 거야. 일제에 의해서.”
지훈은 내 말에 깜짝 놀랐다.
“스승이요…?”
“응.”
“캐릭터가 너무 아까운데… 왜요?”
“1부에서는 역사와 개인에 대해 다뤘잖아.”
“그렇죠.”
“2부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감정에 대해 다루고.”
“네. 그리고요?”
“이제 그걸 동시에 다루는 거지. 하융은 역사와 개인의 감정, 그 두 가지가 어떻게 엮이게 되는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 경험은, 하융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테고.
166회
역사를 다루는 소설은 많다.
개인의 감정을 다루는 소설도 많고.
그리고 어떤 소설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룬다.
어느 소설이 더 위대하다곤 할 수 없다.
소설이란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니까.
뭘 선택하건, 설득력과 미학을 갖추는 게 관건이지.
그리고 난… <지팡이>를 통해 이 세 가지를 다 해 보려 한다.
단편이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장편이었어도 무리였겠지.
난 이럴 때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해 볼 때마다, 내가 대하소설을 선택한 게 퍽 만족스럽다.
반골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던 하융의 어린 시절.
사랑이라는 감정을 앓은 하융의 청년기.
하융은 이런 경험으로 적잖은 성장을 했다.
그리고 지금 하융이 가장 활력 있고 자신만만할 때.
역사가 그의 소중한 이를 앗아갈 것이다.
또 한 번의 성장을 위해.
나는 <지팡이> 2부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희’와 ‘심’을 만나느라 바빴던 하융.
오랜만에 스승의 다방에 찾아간다.
하융과 두 여자의 스캔들은 이미 문단에서 유명하다.
글쟁이들이란 말로도 찧고 빻는 걸 좋아하니까.
여자에 미쳐 문학을 버려 놨었구나.
하융은 스승이 이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스승은 하융을 별말 없이 받아 준다.
탓하지도, 놀리지도, 심지어 묻지조차 않는다.
무심함일까 배려일까.
하융이 생각하기에도 스승은 참 속 모를 인간이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 하융이 발표하는 소설들에 대한 논의였다.
하융은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래야 많은 지면에 글을 발표할 수 있으니.
일본 당국에 그런 ‘태도’를 취해 줘야, 쓸데없고 귀찮은 사상 검증을 당하지 않으니.
스승은 그 점에 대해서도 하융을 탓하지 않았다.
정작 자신은 절대 일본어로 글을 쓰지 않음에도.
대신 그는 하융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네가 좀 더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네가 일본어로 소설을 쓴다고 욕을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어떤 언어를 쓰건,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하융은 그때 그 말의 의미를 더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하융은 그 말을 그냥 위로 정도로 넘겨 버렸다.
스승은 거기서 한마디를 더 했다.
하융이 그 후 오랜 시간 잊지 못할 한 마디를.
― 중요한 건 네가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 거야. 나는 그럴 재주까진 없지만, 넌 가능해.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
‘언어를 빼앗는 게’ 뭔데?
그들의 언어라면, 일본어일 텐데.
그럼 일본어를 빼앗으라고?
말이 되는 소린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하융은 그게 무슨 말인지 물으려다가 말았다.
자신의 힘으로 좀 더 생각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며칠 후 스승은 사상범으로 체포가 됐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끌려간 지식인들이 모두 그랬듯, 살아서 경찰서를 나오지 못했다.
하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존경하는 이가 날벌레처럼 죽어도,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 게 식민지인이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았다.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다’는 것.
그 말의 해답을 아직 듣지 못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이제 스승은 없었다.
그 답은… 하융 스스로 알아 나가야 했다.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팀 이상’ 회의였다.
금홍을 볼 수 있어 좋은 것도 있지만,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지팡이>를 소개하고 싶었다.
오늘의 회의 장소는 우리 집.
평소 같았으면 기분 전환도 할 겸 밖으로 나가지만, 오늘은 회의 후 특별한 행사가 있다.
바로 어제.
지훈이 이렇게 말했다.
― 리브레에서 낭독회가 벌써 열렸나 봐요. 장 스테판 씨가 영상 보여 줬는데. 내일 회의 끝나고 같이 볼까요?
좋은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낭독회가 어떻게 열렸을지 궁금했는데.
― 그런데 어디서 보지? 그냥 휴대폰으로 보면 심심하잖아.
― 저한테 다 생각이 있죠.
라고 말을 하더니.
회의날인 오늘, 어디선가 빔프로젝터를 꺼내 왔다.
하여간 없는 게 없다니까, 송지훈.
“그건 또 어디서 났어?”
“집에서 영화 보는 거 좋아해서요. 벽에다 쏴서 보고 싶어서 샀죠. 뭐, 하도 바쁘니 모셔만 두고 있었지만요.”
지훈은 거실에서 빔프로젝터를 척척 설치했다.
연결된 노트북으로 뭔가를 설정하자, 벽에 노트북 바탕화면에 커다랗게 떴다.
“신기하네.”
“이 정도로 뭘요.”
띵― 동―
“금홍 샘이다.”
나는 일어나려는 지훈의 어깨를 꾹 눌렀다.
“내가 나가볼게. 넌 설치 마저 해.”
“어, 저 다했….”
나는 지훈의 말을 못 들은 척 현관으로 달려갔다.
묻지도 않고 문을 여니, 금홍이 날 보고 배시시 웃었다.
“왔어요?”
“네.”
하지만 미소도 잠시.
금홍은 지훈이 볼 새라 새침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훈이 손을 흔들었다.
“금홍 샘, 하이.”
“하이. 이따 낭독회 보려고 설치하는 거예요?”
“네. 오늘 금홍 샘 뭐 이리 신경 쓰고 왔어요?”
“아, 어디 다녀오느라고요.”
두 사람이 사담을 나누는 동안, 나는 주방에서 회의를 위한 커피를 세 잔 내렸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다는 건, 지훈에겐 비밀이었다.
굳이 숨길 일은 아니지만… 같이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밝혀서 좋을 게 없으니.
적어도 <지팡이>가 끝날 때까진 비밀로 해 두기로.
우리는 거실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지훈아, 넌 어떻게 읽었어?”
“이번 원고는 좀 슬프던데요? 형이 역사와 개인의 감정을 엮어서 표현한다고 했을 때, 말로는 이해하긴 했는데 그게 어떻게 구현될지는 몰랐거든요. 그런데 하융의 스승이 일본 경찰서에서 죽임을 당하니까 알 것 같아요. 하융은 스승이라는 소중한 사람을 일제에게 빼앗긴 거잖아요.”
“그래. 그 차이가 굉장히 중요해. 누군가 역사적 부조리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면… 남겨진 사람은 굉장히 혼란스럽거든.”
“어떻게 혼란스러운데요? 구체적으로.”
금홍이 물었다.
“이런 거예요. 슬픈데,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는 거죠. 스승을 죽인 이들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를 테니까. 하지만 그런 화를 분출하기엔… 또 너무 슬픈 거죠. 이런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고통을 줘요. 슬픔과 분노, 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감당해야 하잖아요.”
“….”
“소중한 이가 죽은 후에 미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경우들을 잘 보면, 그 죽음들이 대부분 이런 식이에요. 보낸 게 아니라 빼앗겨 버리는 경우. 그 황당함과 억울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거리감을 지키기 어려운 이야기라 그런 거겠지.
“금홍샘이 냉철하게 번역의 길을 잡아 주세요. 너무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이런 얘기는 오히려 객관적으로 쓸수록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끼거든요.”
“네. 알았어요.”
금홍이 글씨를 꾹꾹 눌러 썼다.
“아, 그리고 형. 이 스승의 죽고 난 후에 하융의 미래를 한두 줄 정도 더 넣어 주는 게 어때요? 하융의 혼란스러운 내면은 잘 보인 것 같은데… 앞으로 하융이 나아갈 길이 좀 더 잘 보였으면 해요.”
“음… 일단 하융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게 돼. ‘그들의 언어를 빼앗는 일’ 말이야.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지팡이> 2부도 끝날 거야. 네 말대로 한두 줄 넣어 보자.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
“아, 그리고 저 그거 진짜 궁금하던데요. 언어를 빼앗는 일이 뭐예요?”
지훈이 물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안 가르쳐 줘. 좀 기다리면 나중에 나올 거야.”
“치사하네요.”
“유추해 보든가. 넌 평론가잖아.”
“됐어요. 전 기다릴래요. 안 그래도 <지팡이>가 일이 되는 바람에 순수하게 즐기지도 못하는데.”
뭐, 그래도 지훈 정도면 ‘일’을 즐기는 편이지.
취미가 일이 되면 애정이 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어쨌건 회의는 계속 진행됐다.
관건은 스승의 죽음 이후의 내용.
“이 부분….”
금홍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하융의 세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잖아요.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금홍의 말이 맞다.
하융은 스승의 죽음 후 말 그대로 ‘막 나간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