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33
133. 5월 (3)
-불편한 건 없어?
내가 머무는 방. 침대에 걸터앉아 엄마의 물음에 답했다.
“네, 워낙 잘 대해주셔서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어요.”
-다행이네. 단원분들은 어때?
“다들 친절하셨어요.”
-그것도 다행이네.
가진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통화 내내 다행인 것들뿐이다. 뭐, 그것마저 다행이랄까.
“아빠는요?”
-출근하셨지. 요즘 엄청 바쁘······은 것 같진 않더라.
요상한 대답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왜 저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바덴바덴에 오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지만, 그걸 나한테 말할 순 없었던 거다.
나는 엄마의 뜻대로 모른 척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모든 걱정을 해소해드리고 전화를 마쳤다.
내일이면 걱정 쿨타임이 다시 돌아오겠지만.
나는 그게 귀찮지도, 번거롭지도 않았다.
휠체어를 타고 다닐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걱정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냥 대화 주제쯤 되리라.
푸근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식탁에선 프랑코가 아내와 함께 와인잔을 흔들고 있었다.
······.
-서호!
식탁 위에 올려진 프랑코의 핸드폰 너머에서
알렉스가 경쾌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 —! ——!)
“엄청 바쁘신 것 같은데요? 손님 많은 게 여기까지 느껴져요.”
빈말이 아니라 스피커폰을 해두니 건너편의 웅성거리는 소음이 함께 넘어오고 있었다.
-말도 마라.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파트 타임 한 명 더 고용했어.
-그 파트 타임이 나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와 함께 중년의 끄트머리 걸쳐있는(-알버트, 프랑코, 데이빗은 이 둘이 노인의 시작점에 있다고 한다) 니콜라이였다.
그 목소리에 옆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던 프랑코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자네, 스케줄이 없어?”
-그럴 리가요. 엄청 바쁩니다. 그래서 교수직 제안도 거절했다니까요?
“근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만하임 대학에 특강 왔다가··· 교수직까지 거절했는데 왜 여기서 서빙을······.
-이거 3번 테이블. 3번이다?
-저 다녀올게요!
알렉스의 재촉이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쟤 바쁘다는 거 다 엄살이에요. 요즘 장 오슬로 부르지 누가 전 세대의 노인을 부르겠어요.
“노인인걸 이제야 인정하는 건가?”
-니콜라이가 저보다 생일이 6개월 빠릅니다.
슬쩍 발을 빼는 알렉스에 프랑코와 내가 마주 보며 웃었다.
프랑코가 텅 빈 와인병 대신 가져온 맥주병을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그래서 왜 전화했어?”
-서호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요.
“저요?”
-응. 서호야. 우리 악보 발견했을 때, 뮌헨에서 온 교수 기억나지?
“네. 밀란 교수님이요.”
-그래 맞아. 그 교수가 널 좀 만나고 싶다면서 다리 좀 놔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어떡할까? 초연 준비로 바쁠 거 아냐. 내가 잘 둘러서 거절할까?
알렉스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아뇨. 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래? 나 때문이면 진짜 거절해도 돼.
“아녜요. 마침 저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 잘됐네요.”
-흐음. 그래? 그럼 만나볼래?
그러자 프랑코가 갑자기 끼어들어 확인한다.
“서호가 뮌헨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그 친구가 베를린으로 갈 겁니다. 언제가 괜찮아? 얜 빠를수록 좋은 것 같던데.
“마침 내일 연습을 쉬는데, 괜찮으신지 여쭤봐 주세요.”
알겠다며 친구의 부탁을 들어줘 고맙다는 알렉스.
그에게 프랑코가 축객령을 내리듯 말했다.
“이제, 일해라. 니콜라이만 일 시키지 말고.”
-서호랑 얘기하는 데 방해된다 이거죠?
“장사를 하더니 눈치가 늘었네.”
-흐, 그렇더라고요. 또 고전에 관해 얘기하면서 밤새우시겠네요. 서호 너무 오래 괴롭히진 마세요.
“그게 서호한테 친구 좀 만나 달라는 네가 할 소리냐.”
-쩝 그러네요. 아무튼, 서호야. 우리도 곧 보자.
“네, 곧 봬요.”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고서, 전화가 끊어졌다.
그러고 보니 니콜라이가 다녀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자연스레 중간에 끊겼던 음악이 재생되었다.
내 앨범의 타이틀 격이었던 ‘가족’이 거실에 있는 원목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대선율을 흥얼거리던 프랑코가 문득 궁금해졌는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밀란 교수한테 궁금한 건 뭔가?”
나는 며칠 전에 본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나에겐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고, 거기서 밀란 교수의 이름도 보았지.
“최근에 브리너 백작의 편지가 몇 개 더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좀 궁금해서요.”
#
다음날.
프랑코의 저택이 있는 베를린 근교의 크레멘.
인적이 드물고 초원이 많은 이곳에도 카페는 있었다. 물론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두 다리가 있다.
‘여기까지 30분을 오는데 집이 하나, 둘, 셋······여섯 채 정도뿐이었네.’
10분만 걸어도 아파트 여섯 단지는 지나칠 수 있는 곳에서 살던 나로서는 이런 풍경조차 옛 생각이 나고 정겨웠다.
그리고 파크베르크(-독일의 전통 건축 양식) 건축물 1층에 위치한 이 작은 카페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자 슈톨렌(-독일 전통 빵)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자연스레 빵이 진열된 곳에 잠시 시선이 끌렸다가 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없는 테이블 중 그나마 한 자리에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중 나이가 많은 쪽은 이미 바덴바덴 도서관에서 악보를 찾았을 때, 한 번 본 얼굴이었다.
모자챙을 살짝 올렸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그제서야 두 남자가 날 알아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뮌헨 대학의 역사학 교수 밀란이라고 합니다. 아주 잠깐 만났었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선명히 기억난다. 악보를 눈으로만 감정하며 설마 하던 표정이.
그길로 자신의 가방에 고이 모셔서 부랴부랴 뮌헨으로 향했었지.
그와 악수를 하고서 고갤 돌리자 눈을 반짝이고 있는 내 또래의 남자가 보였다.
밀란 교수가 얼른 그를 소개했다.
“아 여긴 제 조수, 폴라입니다.”
“안녕하세요!”
내 손을 양손으로 잡는 밀란 교수의 조수.
나도 덩달아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악보를 통째로 외우셨다면서요? 그 얘길 듣고 너무 멋져서 서호님에 대한 영상을 찾아봤는데,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어색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강렬한 시선을 피해 눈을 굴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제가 듣기론 연주자님도 저희를 만나길 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떤 거죠?”
“브리너 백작의 편지가 더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봤는데, 그걸 감정한 것도 교수님이시더라고요.”
“맞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브리너 백작과 관련된 감정들에 전담이 되었더라고요. 하하. 뭐, 사실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발견된 편지들처럼 후원자와 피후원자 간의 안부 인사 같은 거였어요.”
“그렇군요···.”
내가 느릿하게 주억거리자, 밀란 교수가 덧붙였다.
“물론 이상한 점이 있긴 했습니다. 아직 밖에 얘기하기엔 여러모로 정보가 부족하지만, 연주자님은 알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네요.”
“어떤······?”
“브리너 백작의 몸이 좀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편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편지마다 다들 브리너 백작의 건강을 걱정하더군요. 처음엔 그게 그냥 후원자에 대한 립서비스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지금까지 브리너 백작의 필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집사의 일기장이 발견되면서 전부 뒤집어졌거든요. 브리너 백작의 글씨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셈이죠. 근데 전 그게 과연 우연일까 하는 의문이······ 하하핫. 지루하셨죠?”
밀란 교수가 날 보며 웃었다.
멍해진 내 표정 때문인 것 같았다.
“전혀요.”
“네?”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진심이었다.
모두 아는 내용인데.
심지어 나에 대한 이야기인데.
다른 이의 입으로 듣는 나여서일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편한 진실이 반갑기까지 했다.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셨다고요?”
이번엔 내가 묻자, 밀란 교수가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폴라, 그 자료 좀 줘봐.”
“여기 보시면······.”
“······혹시 이 일기장에서 제가 보지 못한 걸 본 건 없으신가 해서요.”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감정이 차오른다.
“연구할수록 브리너 백작이 참 미스터리하네요.”
“맞아요. 그래서 재밌지만요.”
조수가 이어 말하자, 밀란 교수가 픽 하고 웃는다.
“얜 사실 음악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문화재를 발굴하고, 감정하고 그런 게 배우고 싶어 제 밑에 있었던 거죠. 근데 요즘엔 클래식 사에 푹 빠져 있습니다.”
나도 웃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마치 날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뉴스에서 수업이 얼굴이 비춰지고, 영상도 돌아다니며, 앨범까지 있는.
음악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 한서호가 아닌 브리너 백작을.
그를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궁금해하며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고마웠다.
나를 알아줘서.
나에 대해 알아가 줘서.
‘이상한 일이지.’
브리너는 평생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본성이 내성적인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몸이 불편한 이유가 가장 컸다.
전염이라도 될까 봐 경멸하는 시선도, 동정 어린 시선도 모두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 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이 대화를 통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왜 죽음 직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를.
눈이 어둠으로 물들어가던 죽음 직전에 나는 음악을 떠올렸다.
죽으면 몸이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음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아마도,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두려웠어.’
맞다. 무서웠다. 정말 미친 듯이 무서웠다.
예전엔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행복한 때를 노리다가 비로소 히죽거리며 들이닥친 듯한.
서늘해지는 몸뚱어리의 구석구석이 공포로 가득 차는 느낌.
결국, 그 순간에도 나에겐 기댈 곳이 음악뿐이었다.
그래서 악마 앞에 선 신부처럼 주문을 외웠던 거다.
음악이 또다시 나를 구원해주리라고.
“그래서 브리너 백작이······.”
“브리너 백작의 성에서······.”
“그가 남긴 편지가······.”
그런데 지금 보니 알겠다.
공포의 정체를.
그토록 불멸을 부르짖던 볼프강처럼.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신도 머지않았음을 암시하던 하이든처럼.
그저, 나도.
잊혀지기 싫었음을.
······.
“브리너 백작과 집사. 두 사람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면 너무 멋질 것 같지 않나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실없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물론 기획안을 꺼낸 조수는 몹시 진지해 보였다. 영화가 제작된다면 투자라도 할 기세다.
“위대한 후원자와 그를 보좌한 집사!”
그의 설레발을 들으며 나는 아까부터 불편했던 부분을 짚었다.
“일페르소.”
“네?”
내 말에 조수가 갸웃거렸다.
미소를 띄운 채 커피잔을 입에 가져가던 밀란 교수도 날 바라본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으니까.
나는 다시 한번 잊혀진 그 이름을 말했다.
“일페르소예요. 그 집사의 이름.”
“······.”
“······.”
꽤나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서 브리너 백작의 전담 학자가 되어버린 교수는 되려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나는 가져온 가방에서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둔, 빛바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집사의 고향인 뤼데스하임의 작은 미술 골동품점에서 발견했어요.”
신기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든 밀란 교수가 뒷면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보낸 이의 이름이 일페르소군요. ‘보낸 이’라. 꼭 편지 같네요.”
편지 같은 악보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
그들을 보며 내가 끄덕였고. 이윽고, 밀란 교수가 종이를 뒤집는다.
“그리고 곡의 제목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닫아버린 밀란 교수.
옆에 있던 조수의 표정은 더욱 기이하다.
입으로 손을 가리는 그. 팔뚝에 오소소 돋은 닭살이 내 눈에 보일 정도로 바짝 서 있었다.
뭘까? 왜 저런 표정들이지?
나는 밀란 교수의 손에 들린 악보로 시선을 내렸다.
···저 제목에 무슨 문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