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08
208. 누가 틀렸는지 (2)
······어수선한 마음으로 술자리를 마쳤다.
나는 들릴 곳이 있다며 모두를 먼저 보내고, 나는 은은하게 올라오는 취기와 함께 계속 걸었다.
고적한 밤. 공장들이 문을 닫아 어두컴컴해진 거리를 술집들이 밝힌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회귀 전의 내가 아마 5, 6년 후부터 줄기차게 다녔을 출근길. 그리고, 꿈속의 내가 거리 공연을 했던 대한 극장 앞까지.
작은 공터 중앙에 걸음을 멈춰 서서 조금씩 움직이며 위치를 가늠해본다.
‘······이쯤이었지.’
꿈속에서 내가 무대에 올랐던 것 말이다.
그건, 정말 내 미래였을까?
브리너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하게 되고, 결국엔 음악을 시작해 작은 무대에 오르는 나, 말이다.
3개월 전에 했던 생각이 다시 한번 떠오르며, 지난 시간들이 하나씩 들춰진다.
그때,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 ‘꿈’이란 곡을 쓰며 남은 시간은 전부 백한길 회장과 함께 보냈지.
정말 오랜만에 길게 이어가는 쉼표. 그 속에는 물음표가 계속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쉬고 나면, 이제 뭘 해야 할까?’
브리너도, 한서호도 음악을 간절히 원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뭘까?
만약 두 사람이 음악을 할 수 있었거나, 혹은 음악을 일찍 만났더라면.
다음엔 어떤 꿈을 꿨을까?
그 고민 끝에 선택한 게 지휘였다.
그들이라면 분명 더 많은 소리를 만지고 싶었을 테니까.
더 많은 소리로 연주하고 싶었을 테니까.
이미 내가 피아노부터 바이올린, 그리고 기타에 이르기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언젠가 전화로 지휘를 사사(?)해준 발터에게 연락했다.
빈 필하모닉으로 가, 그들의 연습을 지켜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수많은 음악가들이 지휘에서 종착했는지.
그야말로 음악에 파묻힌 삶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나도 함께 거기에 파묻혀 낮에는 그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악기를 함께 연주도 해보고.
또 저녁엔 집무실에서 발터와 음악에 대해 밤새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웠지.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주머니 속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귀에 가져갔다.
내가 아까 전에 보냈던 메시지에 대한 회신.
······발터 슈몰저였다.
#
“그럴 리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랬나.
“말도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도 말했었나.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라 하셨었잖아요.”
-어느새 받아들였으려나···?
능글맞게 말꼬릴 올린 발터가 낮게 웃는다.
나는 황당한 마음에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랬는데, 왜 하이든의 교향곡들을 그렇게 바꾸신 거예요?”
-글쎄. 왜일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느릿하게 답했다.
-내 고집은 곱씹을수록 고루했고, 네 말은 되새길수록 일리가 있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덧붙인다.
-무엇보다, 듣기에 좋았다. 음악이잖나. 나도 음악가인지라 듣기 좋은 길 두고 차마 다른 길로 가진 못하겠더라고. 설령 다른 길이 맞더라도.
“······.”
-물론 우리 모두는 결코 알 수 없겠지. 하이든이 어떻게 이 곡을 연주했을지. 뭐가 정답인지. 애초에 그런 게 고전이니까.
“······.”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삼키며 침묵했다.
빈 필하모닉의 연습을 보고, 집무실에서 그와 그토록 싸웠는데, 정작 지금에 와선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의 선택이 맞았다. 그 길이 분명 옳았다. 내가 봤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내 말이 옳았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면 조금만 바꾸시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전부 바꿔버리시면 당연히 눈에 띄잖아요. 안 그래도 요즘 클래식의 전성기다 뭐다 해서 잔뜩 신난 평론가들인데.”
말 그대로였다. 학원에 원생이 많아지면 선생들이 호황이듯, 클래식에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클래식 연주를 평가하는 평론가들의 발언들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발터는 그런 평론가들 사이에서 다소 밉보인 경향이······.
-특히나 난, 평론가들 중에 싫어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지. 필요할 땐 그들과도 싸워왔으니까.
“그렇죠.”
-내가 이 얘길 했던가?
주억이자 발터가 갸우뚱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네? 아 네.”
-난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
“······하, 하셨던 것 같은데?”
-로날드군.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로날드가 발터에 대해 정말 많이 알려주었지. 절대 마에스트로껜 자신이 얘기했다고 말하지 말라며. 쩝···미안하네.
찝찝해진 내 반응에 푸흐 하고 웃은 발터가 말을 이어간다.
-뭐, 어쨌든.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허점이지. 고전에 대한 해석은 자유롭다지만, 훼손은 얘기가 달라지니까.
“훼손씩이나 될법한 것들을 마에스트로께선 저 같은 애송이가 하는 말만 듣고 하신 거고요?”
-그냥 애송인 아니니까. 3대 콩쿠르의 정점에 선 애송이면 충분히 귀를 기울여볼 만하지 않겠어?
“그럴 거면 애초에 저랑 싸우질 마시지.”
-싸웠기 때문에 설득된 거다. 내 지식만 믿고 네 말 따위 콧방귀 뀌고 말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거야.
고집이 느껴지는 발터의 말에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한 달 겪어봐서 안다. 저 고집이 쉽사리 꺾이지 않는다는 걸.
그렇기에 알고 있다. 하이든의 곡들을 그렇게 연주한 발터는, 절대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란 걸.
고민하고 연구하고, 또 확인한 끝에 내 해석의 손을 들어준 것이겠지.
서늘한 밤공기를 쭉 들이쉬었다가 내뱉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시려고요?”
내 물음에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듯,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연주해야지. 오케스트라잖냐.
“정말······ 마에스트로답네요.”
평론가들의 몰매를 맞는 게 꼭 남 일 같다.
아니 정말, 그에겐 남 일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 멋진 사람이고.
······그 후, 발터는 다음 공연 준비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귀에서 핸드폰을 내려 주머니에 꽂아 넣고서, 생각을 이어간다.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현재의 연주들 중 많은 부분들이 내가 기억하는 작곡가들의 연주와는 다르다는 걸.
하지만 해석도 결국 현대의 몫. 그래서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려니 했지.
악보에 남아 있는 영감과, 그것을 연주하는 이의 고민이 부딪혀 또 다른 영감이 탄생하는 순간을.
곡을 창조해낸 작곡가들도 바랄 테니까.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답이 없으니, 틀린 자들이 도리어 틀렸다고 소리친다. 클래식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고, 거짓 성배를 지킨다. 그렇게 선을 긋고 그것을 벗어나면 비난한다. 고전은 이래야 한다며.
그건 적어도······.
베토벤이 혀를 찰 정도로 고지식 하지만, 늘 농담을 달고 살았던 하이든이.
자신은 영원할 거라며 스스로에게 취해 사는 듯 보였지만, 정작 자신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던 볼프강이.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 했던 파가니니가.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음악가들이.
악보를 적어내려가며 바랐던 미래는 분명 아니었다.
#
며칠 후, 예술의 전당.
오랜만에 윤 교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왔지만, 나는 어느새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자유로운 해석에는 큰 맹점이 있지. 결국,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기준이 필요했을 거야. 어떤 상황에서든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 말이야. 가령 이번 사건으로 봤을 땐, 하이든은 이런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음악을 이렇게 표현하진 않았을 것이다 같은.”
어제 시작된 고민의 연장선이었다.
“그것도 결국엔 추측일 뿐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콩쿠르도 의미가 없겠지. 뭐가 답인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어려운 클래식이 더욱 복잡해질 테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클래식의 존재 이유가 애매해져. 종교가 명확한 기준 없이 파생되면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가요······.”
내가 안타까운 마음에 고갤 푹 숙이자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이는 윤 교수.
“사실 나조차도 의아하긴 했어. 이번 발터의 연주는······조금 과할 정도로 경박했으니까. 그게 제법 잘 어울린다는 거에 놀랐고.”
그의 말을 들으며 내가 아주 작게 답했다.
“······놀다가 만든 곡이었으니까요.”
그것도 바덴바덴 성. 우리 집 정원에서. 휴가를 즐기며 하이든이 만든 곡이었으니까. 그게 당연하잖아.
“음? 뭐라고?”
“아녜요. 그러면··· 평론가들에게 인정받긴 아무래도 힘들겠죠?”
“아마도 그럴 거다. 그 선을 많이 벗어났으니까.”
“아니, 인정이 아니라 비난만 좀 안 해도 좋을 텐데요.”
“그걸 깨는 건, 오로지 증명뿐인데······증명해줄 하이든이 이 세상에 없는 걸 어쩌겠냐.”
“그쵸. 없······.”
그 순간,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릴 스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작곡가인 하이든이 입을 열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건데!
눈을 부릅뜨고서 윤 교수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하이든이 증인이 되면 되잖아요?”
그러자 윤 교수가 갸우뚱한다.
“그래. 방금··· 그게 불가능하단 얘길 하고 있었잖냐?”
······.
나는 예술의 전당을 나서며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이 끊어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내가 얼른 그를 불렀다.
“회장님.”
-네. 아니, 그래.
······아무래도 박 실장과 함께 있나보다.
지난번에도 저랬다가 박 실장이 주치의 장 교수에게 달려가 회장님께서 언어 문제가 있으신 것 같다며 엄청 걱정하셨다던데.
또 비슷한 일이 있겠거니 하며 용건을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요.”
내 말을 들은 백한길 회장이 ‘잠시만 기다려라.’라고 말하더니, 이윽고 철컥-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중후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좀 전과는 사뭇 다른 말투로.
-박 실장이 나갔네요.
내가 어색함에 몸부림치며 말했다.
“그냥 말씀 편하게 하는 거로 통일하시는 게······.”
-두 영혼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라서요.
백한길 회장의 대답에 내가 피식 웃었다.
두 영혼 사이의 균형을 잡고 싶다는 말을 언젠가 내가 먼저 했었으니까.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공개 오디션을 보실 계획이라고요?
그가 내게 물어왔다.
불과 며칠 전 ‘더 클래식’에서 얘기한 게 벌써 거기까지 들어갔나 보네.
“그러려고요.”
-멋지겠네요. 기대됩니다. 백작님의 오케스트라.
흐뭇한 목소리였다. 오랜 소망과 기다림이 담겨있는.
일페르소는 할 수 없었던, 하지만 이제 백한길 회장은 할 수 있게 된 말.
불쑥 콧잔등이 시려오는 찰나에 그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부탁하실 게 뭘까요?
“어딜 좀 가고 싶어서요.”
그러자 곧바로 시원한 대답이 넘어왔다.
-전용기를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네.”
-가실 목적지는 어딘가요?
도리어 내가 묻고 싶다. 나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니까.
그것들을 찾고, 전부 사들인 그대가 알겠지.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백한길 회장에게 말했다.
“제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