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41
041. 신동 (4)
“······너무 멋지시다, 진짜.”
리허설이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나서도 채이연은 여전히 몽롱한 표정이었다.
한세경이 스케줄 때문에 급하게 떠나기 직전까지 줄줄 흘리던 동경의 눈빛이 아직도 눈동자에 남아 찰랑거린다.
“나, 내 파트 끝나고 나서부턴 입 벌리고 봤어.”
“나도 봤어. 너 헤벌레하는 거.”
픽 하고 웃었다.
채이연이 슬쩍 눈을 흘기며 ‘나도 안다고···’라며 중얼거리기에 내가 덧붙였다.
“근데, 너만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 다 그랬어.”
채이연과 한세경.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마치 한 사람처럼 겹쳐지는 순간부터.
채이연의 목소리가 줄어들며 오롯이 한세경이 짧은 순간 수년이 흐르고.
재능이 무르익은 주인공을 표현할 때까지.
모두가 자신들이 찍을 영화의 한 장면을 미리 본 얼굴들이었다.
채이연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끄덕였다.
“아무튼. 한세경 선배님 정말 최고신 것 같아, 연기도 엄청 잘하시는데, 노래까지 말도 안 돼 진짜.”
“대단하시긴 하더라.”
이건 나도 진심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볼프강에게 편지가 쓰고 싶단 생각을 했을까.
물론 과거 볼프강이 찾아낸, 무려 밤의 여왕 아리아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장 음역대가 넓은 소프라노)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음역대가 넓다고 더 좋은 악기가 아니듯, 이 영화에서만큼은 한세경의 목소리가 내 최고의 악기인 건 분명했다.
“근데,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잖아.”
툭 던진 말에 채이연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이내 입 끝을 말아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생뚱맞은 말을 듣고 당황하다가 이내 농담인 걸 알아챈 사람처럼.
“에이~.”
근데 난 농담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난 네가 그 이상도 될 것 같은데?”
“······진심이야?”
진심이다. 그리고 진실이기도 하다. 칸느를 갈 정도로 성공한 여배우이자, 뮤지컬 배우로서도 대단한 성공을 했던 채이연이니까.
이미 미래가 바뀌었지만, 그래서 더 이 얘길 해주었다. 본인도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끄덕이자 채이연이 황당한 눈으로 웃었다.
“호익이가 왜 맨날 너한테 이상하다 하는지 알겠다.”
“그런 얘길 이호익한테 듣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데.”
내 말에 한참을 웃던 채이연.
그녀가 어느 순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이번 영화 진짜 잘해보려고.”
저번에도 잘 하지 않았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그런 말이 실없게 느껴질 정도로, 채이연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미 미래가 변해버린 건 분명하지만,
만약 미래의 결과를 상황이 아닌 사람이 만드는 거라면.
훗날, 채이연은 어김없이 예전과 같은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왜, 왜 그렇게 빤히 봐.”
“기대돼서.”
툭 대답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채이연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자, 덩달아 나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도 점등되었다.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한계를 정하는 게 아닌, 궁금해하는 자문을 던지며 나는 창밖을 보았다.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살만으로도 얼어붙었던 날씨가 서서히 녹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콩쿠르의 영상 심사가 있는.
#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사실상 예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상 심사.
영상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은 간단했다.
차이코프스키 곡 하나를 포함한 곡들로 30분을 채우면 되는 것.
나는 새로운 작업실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상 통화를 걸었다.
이윽고 임진규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 작업실 정말 좋아 보인다. 이번엔 녹음 부스도 따로 있네?
“네, 좀 넓어졌어요.”
-좀이 아닌데? 근데 훨씬 낫다. 솔직히 이전 작업실에 네 콘서트용 피아노는 너무 갑갑했어.
그렇긴 했지.
지금은 그냥 녹음실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크고, 룸 시스템도 잘 되어있다.
처음 도안을 받았을 땐 너무 과하지 않냐고 말하자 아버지가 단호하게 고갤 저으셨지.
이제 회사 남는 방에서 개인 작업하는 학생이 아니라면서.
‘하긴, 백한길 회장에게 클래식 앨범 낸다고 큰소리친 마당이니······.’
콩쿠르가 끝나면 그것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임진규가 통화의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어떤 거 연주할지 생각해 봤어?
풀풀 웃으며 끄덕였다.
쉽지 않았다. 그거 정하느라 아직도 머리가 아픈 것 같다.
무조건 차이코프스키의 곡으로 정해놓으니 오히려 곡이 적어서 선택이 어려웠지.
어디 들어보자는 듯한 임진규의 표정에 내가 말을 이었다.
“우선 피아노는 사계(四季)를 연주할까 해요.”
-사계라······몇 월을 하려고?
“3월이요.”
-굉장히 우울한 곡을 골랐네?
“최대한 러시아 느낌을 물씬 낼 수 있는 곡이라 골랐어요.”
러시아의 3월은 아직 음울한 겨울이다.
그러니 그것만큼 러시아스러운 곡이 어딨겠나.
곰곰이 생각하던 임진규가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다음으로 넘겼다.
-그리고, 바이올린 곡은?
“왈츠 스케르초요.”
조성이 계속 바뀌는 게 특징인 곡이었다.
심지어 후반부에 마이너로 전환되며 밝은 분위기부터 음울한 느낌까지 모두 담고 있는 바이올린 협주곡.
-둘 다 완전히 러시아 느낌의 곡들을 선택했네? 뭐, 차이코프스키 곡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유난히 그런 곡들인 것 같은데.
“네. 나머지 곡들이랑 느낌을 확 다르게 가고 싶어서요.”
여기서 나머지 곡이라 함은 차이코프스키의 곡이 아닌,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곡이었다.
임진규가 느릿하게 주억거린다.
-다양한 느낌을 보여줄 수 있으면 그것도 좋지. 그래서, 나머진 어떤 곡들을 하려고?
그 물음에 내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쪽이야 명확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하이든과 바흐를 아우르는······
“고전 곡들이요.”
······요새 볼프강에 대한 단상을 자주 떠올린 탓일까.
고전 곡들을 두고 여러모로 고민한 끝에, 그의 피아노 소나타와 바이올린 소나타를 한 곡씩 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곡도 정해졌겠다, 충분한 연습 후에 영상만 찍으면 되는 상황.
대략적인 연습 일정을 짜고, 언제 녹화할지를 정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작업실로 들어왔다.
회사 이전이 끝나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참 다행이지.
“어때, 작업실 괜찮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최고예요.”
격렬한 반응에 흐뭇하게 웃은 아버지가 의자 하나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슬그머니 얘길 꺼냈다.
“좀 전에 회사로 취재 요청이 하나 들어왔어.”
혹여 무슨 심각한 일일까 걱정했던 나는 내심 안도하며 답했다.
“잘됐네요. 기사 같은 게 나면 아무래도 회사에 도움이 될 거 아녜요.”
“그렇긴 한데··· 취재하고 싶다는 대상이 서호, 너야.”
“···?”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회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뚱맞게 나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내가 ‘어······’하고 말을 끌다가 물었다.
“어디서요?”
“월간청중이라고 국내에선 가장 큰 클래식 음악 잡지사야. 거의 유일하기도 하고.”
월간청중···.
박동진 감독에게 이미 들은 바 있는 잡지사였다. 그곳에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기자가 있다는 얘기까지도.
그가 곧 연락이 갈지도 모른다고 귀띔해주었었지. 근데 그 이후로 딱히 연락은 없어 잊고 있었는데······.
“어떡할래?”
“인터뷰를 해야 하는 거예요?”
“취재니까 당연히 인터뷰도 하고, 그리고 네가 음악 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더라.”
아버지의 얘길 듣고 잠시 고민해 보았다.
취재가 오면 회사에도 도움이 될 테고, 앞으로 클래식 앨범도 내야 하는데 아는 기자 한 명 만들어 두면 여러모로 좋을 것도 같았다.
게다가, 그런 사업적인(?) 마인드를 차치하더라도 잡지사 기자라면 음악가들을 엄청 많이 만나봤겠지?
······꽤 흥미로운 얘기가 오갈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딱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취재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아버지가 알겠다며 덧붙여 묻는다.
“언제가 편하겠어? 그쪽에선 언제든 불러만 달라는데.”
음.
···음악 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했지?
이왕 보러 오는 거, 나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근데, 평소에는 연습하며 오선지에 스케치하는 게 전부.
그리고 소프라노 녹음은 대외비라 보여줄 수가 없으니······.
연습 일정을 짜던 캘린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음 주쯤에 콩쿠르에 보낼 영상을 녹화할까 하는데, 그때가 괜찮을 것 같아요.”
#
클래식의 위상이 거들떠도 않는 동상처럼 되어버리고, 근 몇 년간 호황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 몇 주 사이 업계가 전성기 때처럼 들썩이고 있다.
피아노 신동 김세진이 국제 콩쿠르에 첫 출사표를 던지면서부터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실력으로 미루어봤을 때, 수상을 넘어서 우승까지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의견이 쏟아졌고.
화제성의 냄새를 맡은 대형 언론사들도 앞다투어 기사를 내 기대감을 부추겼다.
그러자 몇몇 예능을 통해 김세진을 알고 있던 이들과 작년 쇼팽 주니어 콩쿠르의 우승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 취급받던 콩쿠르에 대중들의 이목이 점점 더 몰리고 있었다.
덕분에 월간청중 사무실도 아주 오랜만에 겨울잠에서 깬 듯 활발했다.
“누구 말이 딱 맞네. 클래식이 우리나라에서 사양된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못 해서라고. 김세진처럼 잘 하는 애 나오니까 관심이 불처럼 번지잖아.”
이 상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할 수 있는 기자가 헛웃음을 삼켰다. 최성령의 옆자리. 김세진의 인터뷰를 했던 기자였다.
이에 뭔가를 기다리듯 시계만 바라보던 최성령이 말했다.
“올림픽 비인기 종목에서 우승이 유력한 선수가 튀어나오면 갑자기 관심이 쏠리는 것 같은 효과지. 편집장님이건 사장님이건 김세진 우승하면 다시 한번 클래식이 날아오를까 은근 기대하시는 눈치더라.”
그러자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건너편 수습 기자가 은근한 기대를 내비치며 물었다.
“그래도 예전으로 돌아가긴 어렵겠죠? 옛날엔 국제 콩쿠르 입상만 해도 돌아오는 순간 완전 영웅 대접받았었다는데······.”
최성령이 다시 한번 시간을 슬쩍 확인하더니 답했다.
“영웅 대접이야 받겠지. 근데 그걸로 클래식이 다시 인기를 되찾냐? 그건 김세진 혼자만 잘해선 힘들 거야. 또 다른 제2, 제3의 신동이 나와서 같이 콩쿠르를 휩쓸고, 또 우리도 열심히 장작을 지펴야지. 사람들 관심이 식지 않도록.”
그리곤 묵직한 가방을 메고서 일어나는 그녀.
옳소! 옳소! 거리며 호응하던 옆자리 기자가 갸웃거렸다.
“어디가?”
“인터뷰 좀 따러.”
“누구?”
자신을 올려다보는 옆자리 기자를 보며 최성령이 씩 웃었다.
“그··· 나도 잘 모르겠네.”
“엥? 누군지 모르는데 인터뷰를 따러 가?”
뭔 소리냐는 듯 의아해하는 표정에도, 그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최성령이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 툭 내뱉었다.
“제2의 신동··· 일 수도 있는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