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13
13. 오라버니
마지막 힘을 다해 호야에게 소리치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창의 팔목을 거머쥐었다.
“떡?”
“하아. 하아. 창…….”
거친 숨결이 뚝 끊기며 장호의 코끝에 달린 땀방울이 그녀에게로 떨어지는 찰나 몸이 번쩍 들렸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창은 숨이 막히고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뿌리칠 수가 없었다.
들썩이는 장호의 가슴에 짓눌린 얼굴엔 파도처럼 들이치는 심장이 북처럼 울어 댔고, 그녀의 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에서 펄떡이는 맥박이 느껴졌다.
‘숨도, 안 쉬고 달려온 거야?’
체구가 작은 창을 안느라 한껏 웅크린 그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땀에 젖은 등을 감싸자 그녀의 귓가를 두드리던 심장 소리가 잦아들었다.
“괜, 찮은 게냐.”
뜨겁게 내려앉는 숨결에 고개를 든 창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
대꾸 없는 창을 꼭 끌어안은 장호가 작은 머리에 뺨을 댔다. 발목까지 올라와 잘 벗겨지지도 않는 멱신*은 어디 가고 흙투성이 버선이 쉴 새 없이 꼬물거린다.
“신발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달렸더냐.”
커다란 손이 흙투성이 버선을 감싸자 화들짝, 놀란 창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뭐, 뭐 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에 창의 발목을 잡아당긴 장호가 찢어진 버선을 벗겨 버렸다.
아기처럼 앙증맞은 발가락들이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쫙 벌어졌다.
“놔! 뭐 하는 거야! 놓지 못해?”
“가만히 좀 있거라.”
미친 듯이 바동거리는 그녀를 팔꿈치로 누른 장호가 발가락을 더욱 꼼꼼히 살폈다.
특별한 외상은 없는 듯한데.
“아픈 게냐.”
“뭐 하는 거야. 더럽게.”
“더럽다?”
“바, 발이 더럽지. 바닥 딛고 다니는데.”
‘왜 이렇게, 미쳐 날뛰나 하였더니.’
시뻘게진 창의 콧등에 주름이 잡히자 장호는 터지는 웃음을 삼키느라 고개를 숙였다.
‘화가 날 정도로 부끄러웠더냐.’
천둥벌거숭이처럼 굴던 아이가 부끄러워하니 세상 반갑다.
“더럽다 생각했으면 밤새 품지도 않았다.”
‘품지도 않았다. 밤새. 품지도…… 않…….’
자욱한 안개 같은 음성이 창의 머릿속을 맴돈다.
터질 듯 쿵쿵거리는 심장이 산삼 토할 때처럼 입에서 쏟아질까 봐 입술을 뗄 수가 없다.
“발이 작아 딱 맞는구나.”
엽전을 넣었던 비단 주머니를 발에 씌워 매듭지은 장호가 쌕쌕거리는 창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그의 손을 잡아뗀 창이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귀까지 빨개진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장호는 코끝이 간지러웠다.
‘앙증맞은 발 좀 만졌다고 저리도 부끄러운데, 간밤에 내 몸에는 어이 올라탔을꼬.’
창의 손목을 낚아챈 장호가 사지를 뻗대는 그녀를 둘러업었다. 봇짐 끈을 목에 걸고 창의 봇짐으로 손을 뻗자 호야가 날름 물고 따라나선다.
“왜 이래! 진짜! 내려 줘.”
“폐가에 가면 내려 주마.”
“걸을 수 있어.”
“여기서 구르면 또 정창으로 빠진다.”
정창을 돌아보는 창의 뒤통수를 나뭇가지가 후려쳤다. 뒤통수를 문지르던 창은 머리를 스쳐 가는 나뭇가지를 피해 뻣뻣하게 세웠던 몸을 널찍한 등에 댔다.
손바닥도 아프고, 뒤통수도 아프고, 으슬으슬 떨리는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나무뿌리를 움켜쥐고 용을 써서 그런 거야. 발 만져서 그런 거 아니야.’
정창에서 벗겨진 멱신이 눈물 나게 그립다. 지금쯤 죽은 멧돼지 옆에 나란히 누워 있겠지.
발을 감싼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좀 해.”
“추울까 봐 그랬다.”
“하나도 안 추워.”
발을 놓아준 장호는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에 땀이 식어 가던 몸이 다시 더워지기 시작했다.
‘멱신을 어디서 떨군 걸까.’
호망을 지나는 그의 눈에 멱신 대신 소복하게 눈 쌓인 통나무 활대가 보였다. 정창과 호망, 벼락틀까지 무더기로 설치된 덫들은 범에 대한 증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호야인 줄 어떻게 알고…….”
범을 보고도 짖지 않는 호야건만, 장호는 산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폐가를 지나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달리던 장호는 눈 위로 미끄러져 내려간 흔적에 멈춰 섰다. 나무에 박힌 낫자루에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산에 익숙한 네가 덫에 걸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서.”
목소리까지 기운이 없으니 장호는 마음이 덜컥거렸다.
얌전하면 어디가 아픈가 걱정이고, 지랄맞으면 지랄맞은 대로 어디 가서 맞아 죽을까 걱정이니, 이래저래 마음이 착잡하다.
“지리산보다 여기 덫들이 더 사악해.”
“파손된 지리산 덫들 중에 몇몇은 네 솜씨 같던데.”
“단이가 그랬겠지.”
“범은 정창을 피해 가지 구덩이 속에 돌을 던져 나무창을 부러트리지 않는다.”
“우연히 굴러떨어진 걸 수도 있거든?”
가시 돋친 음색에 장호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창,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너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창귀를 믿게 하는 것이다.”
“창귀를 믿어?”
‘순진한 떡 같으니라고.’
침묵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창이 귓가에 속삭였다.
“창귀야말로 진짜 덫이야.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이 만들어 내는 덫. 그리움은 죽어야 빠져나올 수 있거든.”
폐가를 향해 묵묵히 걷는 장호의 목덜미로 창의 숨결이 미풍처럼 살랑였다.
“창…….”
“으응.”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는 줄 알았다.”
“애틋하게 작별 인사 할 사이는 아니잖아?”
“마음 상하게 하여 미안하구나.”
계집인 것도 충격인데 사내에게 익숙한 듯 구는 언행이 못마땅했다. 낭창하게 굴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이른다는 것이 도가 지나쳤던가. 앞뒤 구분 안 간다는 말이 못난이 꺼병이보다는 덜 속상할 듯한데…….
사과를 했건만 창은 대꾸가 없다.
‘화가 덜 풀린 걸까.’
슬쩍 고개를 돌리자 등에 붙은 머리가 까닥인다. 설마.
“잠든 게냐?”
“아니.”
머리를 곧추세운 창이 두 눈을 부릅떴지만 눈꺼풀이 태산처럼 무겁다. 따뜻하고 넓은 그의 등이 비단 이불처럼 포근했다.
“생각하는 거야.”
“무슨 생각.”
“폐가……. 이렇게 멀었나?”
“폐가를 지나온 지가 한참이다.”
“그렇지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목소리에 잠이 가득하다.
“내가 달리기는 조옴 하지이. 그지.”
죽다 살아서 잠이 올까 싶지만, 횡설수설 옹알대는 소리가 귀여워 장호는 웃음이 나왔다.
“오라비라 부르기 싫으면 떡이라 불러도 된다.”
“…….”
“어쩌다가 떡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또한 이유가 있겠지.”
“오라버니 해. 그리 부른다고 진짜 오라비 되는 것도 아닌데…….”
‘나도 사나운 누이가 생겨서 좋구나.’
몸이 굳은 그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쓰던 창을 생각하니 한숨이 깊어진다.
함께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길이기에, 나무 뒤에서 떠나는 그녀를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거늘.’
이렇게 오누이처럼 길을 걸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어깨를 틀어 미끄러지는 창의 머리를 치켜올리자 그의 등에 코를 박으며 웅얼거렸다.
“단이는 옷을 안 입어.”
“그렇지.”
“옷고름이…… 없어.”
멈춰 선 장호는 새근거리는 숨결에 심장이 주저앉았다.
“내가 푼 거 아닐 거야.”
어젯밤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은 장호가 곱단이를 업었을 때처럼 몸을 살살 흔들었다.
‘자라. 잠들어라. 깨지 말고 자라.’
추워하는 것 같아 옷고름을 풀어 덮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웅피 조끼는 호야가 깔고 앉아 어쩔 수 없었노라. 구구절절한 변명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아늑한 토굴 안에는 모닥불 위로 걸쳐 둔 꿩이 아름다운 자태로 노릇하게 익어 갔다.
타닥타닥.
잘 익은 꿩고기 냄새가 소리 없는 암살자처럼 창의 배 속으로 파고들었다. 죽은 듯 누워 있던 그녀가 살며시 배를 움켜쥐었으나 굶주린 내장이 장닭처럼 울어 댔다.
꼬르르르르륵.
‘옘병! 동굴 무너지겠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던 창은 토굴 입구에 앉은 장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들, 켰나?’
“잘…… 잤느냐.”
오묘한 그의 시선에 창이 두 눈에 힘을 빡 줬다.
“왜? 내가 또 만졌어?”
“아니다.”
장호가 시선을 돌려 버리자 창은 움츠러든 어깨를 쫙 펴곤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모닥불로 다가앉았다.
‘그러게 상대를 봐 가면서 놀려야지.’
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능글맞게 웃어 주고 싶지만, 참는다. 오늘 구해 준 것도 있고, 떡이라 부른 것도 들켰고, 이래저래 참는 것이 옳다.
떡이라 부르라는 말에 잠이 싹 달아났지만, 수습 불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는 척해야 했다.
비록 가슴은 더듬었을지언정, 옷고름을 풀어 헤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되었다.
‘그렇게 흔들어 대면 잠이 들 줄 알았나 보지?’
큼직한 꿩 다리를 뜯어 호호 불던 창이 모닥불 너머에 앉은 장호를 힐끗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멱신 만든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천을 감고 다니는 것보다야 낫겠지.”
“새것 같은데 그냥 둬. 대충 싸서 묶고 가지 뭐.”
듣는 둥 마는 둥 장호는 멱신을 풀어내느라 바쁘다. 여분으로 가져온 그의 멱신을 풀어 만들려 하는 듯하다.
‘인간이 미안하게 만드는 데 아주 타고났어.’
몽글몽글 피어오른 마음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오, 호라버니. 고기 안 먹어?”
어색한 오라버니 소리에 장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오라비라 부른 적 없던 창이 자는 척하며 일부러 옷고름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의심이 든다.
깨어 있었냐 물으면 시치미를 뗄 테고, 반대로 깨어 있었다 하면 옷고름 이야기가 대두될 것이다.
“왜 그러고 쳐다봐? 고기 안 먹냐니까?”
“배고픈 누이나 많이 먹거라.”
고개 숙인 장호는 풀어낸 볏짚을 손으로 비벼 가며 조리 엮듯 멱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데 나는 어쩌다 떡이 된 것인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창이 남긴 옘병할 떡의 정체가 풀린 날이었다. 멱신을 엮으며 여러 종류의 떡을 떠올리던 장호는 끝내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멱신: 볏짚으로 발목까지 올라오게 만든 방한용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