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55
55. 각시 수업
“태화루주 홍연, 창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세요.”
청풍각 계단을 뛰어내린 창은 어색해하는 홍연을 반갑게 맞이했다.
“혼례를 도와주신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저는 어제 비단장에게 듣고서야, 제가 맡은 혼례가 부인의 혼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태화당 행사를 주관하는 은혜원 대신 혼례를 맡게 되어 기뻐했던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혹여 소녀가 준비하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태화루에 갔을 때 무릉도원 같았습니다. 옷도 음식도 예쁘고 맛나니 루주께서 준비해 주시면 아주 다복한 잔치가 될 듯합니다.”
허례허식과 거리가 먼 창에게 잔치는 그저 즐겁고 배부르면 그만이지만, 홍연의 표정은 덫에 걸린 사슴 같다.
“경사스러운 혼례를 천한 기녀가 준비하여도 되는 것인지, 누가 될까 걱정입니다.”
“전혀요. 각시는 낭군 눈에만 예쁘면 장땡 아닙니까.”
아침 일찍 찾아든 장호도 돌려보내고, 바느질에 푹 빠져 있던 창은 홍연이 마냥 반가웠다.
“제가 어제 비단장님께 반짇고리함을 선물받았는데, 오늘부터 배워 보려던 참입니다.”
“그러하십니까.”
바느질 잘하는 참모들을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선 홍연은 서둘러 창의 치수를 재라 일렀다.
이리저리 바닥에 흩어진 비단 조각들을 훑어보던 홍연이 방 한복판에 놓인 자수대로 걸음 했다.
자수대에 끼워진 새하얀 명주 천에는 불그스름하고 길쭉한 모양의 털 달린 지렁이가 구불구불 뻗어 있다.
‘지렁이에 뿔이 달렸을 리도 없고, 뱀……인가?’
심오한 형태에 집중하는 홍연에게 총총이 다가섰다.
“아씨께서 자수를 배우고 계시는 중입니다.”
“혼자서 배운단 말이냐?”
“서고에서 자수법을 적어 놓은 서책을 빌려왔습니다.”
“너도 같이 하나 보구나.”
동그란 대나무 자수대를 내미는 총총의 표정은 더없이 뿌듯해 보였으나, 역시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알록달록한 색실이 뒤엉킨 것이 꽃인 것도 같고…….
“나비?”
“예! 금세 알아보시네요.”
“아씨께서 수놓으시는 것은 무엇이냐.”
“용이요.”
‘지렁이도 용은 용이지. 토룡.’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가린 홍연이 가림막 너머로 치수를 재고 있는 창을 돌아보았다.
“용의 팔다리는 어디를 가셨을까.”
“몸통이 손에 익으면 팔다리 만드신대요.”
‘곧 팔다리 생긴 토룡이 탄생하겠구나.’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치수 재기를 끝낸 창이 탁자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
“어제부터 자수를 시작했는데, 새끼손가락만 한 바늘이 영 뜻대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밤을 꼬박 지새우신 겁니까.”
방바닥에 널려 있는 자수들은 전부 뿔 달린 지렁이지만, 예닐곱 개가 넘어 열흘 치는 될 성싶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지라 그리되었습니다.”
“밑그림부터 그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루주께서도 자수 좀 하시나 봅니다.”
“요양 최고의 태화루 기녀들 대부분이 귀족의 첩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 자수는 기본이랍니다.”
“하루 이틀 해서 될 일이 아니었네.”
창의 혼잣말에 웃음을 참던 홍연이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자수는 숙련된 솜씨를 요하는 작업입니다. 옷을 만드는 상방에도 침방과 수방을 따로 두고 있지요. 수방 시녀 대부분이 십 년 넘게 바늘을 다뤄 온 침모들입니다.”
심각해지는 창을 응시하던 홍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화당 상방에 둥족 출신 차란이 솜씨가 좋으니 불러다 배우시면 될 듯합니다.”
“루주께서 가르쳐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마주 앉아 있는 것도 가시방석인 홍연이 정색을 했다.
“소녀는 부인을 가르칠 만큼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루주께서 가르쳐 주셔야지요. 쇠붙이를 좀 다루어 보니, 수준에 맞게 배우는 것이 좋더이다.”
“쇠붙이라 하심은…….”
“창칼은 좀 다룹니다. 바늘도 쇠붙이이니 다루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듯한데요?”
‘어찌 창칼에 바늘을 비할까.’
멍하니 쳐다보던 홍연이 고개를 저었다.
“같은 쇠붙이여도 바늘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요.”
“곧 죽을지도 모릅니다.”
소매를 걷어붙인 창이 천을 싸맨 손가락을 내보였다.
창에게 지은 죄가 있던 홍연은 거절도 못 한 채 뜨거운 차를 벌컥였다.
‘오기 싫더라니…….’
“루주님.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지, 지금 말입니까.”
“빨리 시작할수록 빨리 늘지 않겠습니까.”
창에게 발목이 잡힌 홍연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루하루 일취월장하는 바느질 솜씨를 증명하듯 소소한 물건들이 소용각으로 배달됐다.
‘하루 이틀 지나면 때려치우겠거니 생각했거늘…….’
창이 바느질에 빠져들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장호는 고운 나비 두 마리가 수놓인 버선을 움켜쥐었다.
웃음 짓던 총총을 떠올리던 장호는 손에 든 서책을 집어 던지고 청풍각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창의 방문에서 옥구슬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서너 명은 들어앉은 듯한데.
‘바느질이 저리 웃어 댈 정도로 즐거운 일이던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해 대자 방문이 벌컥 열리며 벌게진 얼굴의 총총이 달려 나왔다.
“오 나리 오셨어요?”
“아씨는 아직도 바느질 삼매경이냐?”
“지금은…… 화첩 보고 계세요.”
“화첩?”
“아……. 자수 놓을 꽃 고르세요.
“내가 좀 보잔다고 일러라.”
후원으로 향한 장호는 은행나무 주위를 거닐며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호야를 위한 돌탑에 얹었다.
“오라버니, 왜? 왜 또 왔어?”
가슴을 움켜쥐고 달려온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호가 동그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있는 게냐?”
“아닌데.”
“하면 얼굴이 어찌 이리 붉을까?”
“바느질하려면 호흡이 중요해. 호흡이.”
미심쩍은 그의 시선에 창이 휙 주위를 둘러본다.
“해동이 안 보이네?”
“서고에 심부름 보냈다.”
그녀의 방에는 늦은 밤까지 여인들이 득실거리고, 그에겐 해동이 붙어 다니니 단둘이 얼굴 볼 새가 없다.
“오전 일찍 온 루주는 왜 아직 안 가고 있으며, 무슨 바느질을 석 달 열흘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겨우 사흘인걸? 뭘 하든 부지런해야 빨리 늘어.”
“침모가 될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열성일까.”
“낭군님. 머리만 올린다고 각시 되는 거 아니거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했거늘, 무엇을 위해 이리도 애쓰는지 모르겠구나.”
“부지런히 배워서 좋은 아내 되려고 그러지. 바느질 끝나면 음식 만드는 것도 배우려고.”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고 간다 했던가. 음식까지 배운다는 말에 장호는 가슴이 답답하다.
“내 생각에 그리 중하게 느껴지지 않는구나.”
“맛난 음식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러지.”
“마주 앉아 먹으면 나무뿌리도 맛난 법이다.”
“미인 소박은 있어도 음식 소박은 없다는 말 몰라?”
“네게는 해당 사항 없다. 내가 너를 소박 놓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음식 또한 조선에 가서 배우면 된다.”
“조선에 가서 누구한테 배워?”
“내 당골할매를 뵈었을 때, 그 정도도 못 가르칠 정도로 연로해 보이진 않았다.”
호야들도 안 먹는 장국과 같은 자리가 터져 나가던 버선을 떠올린 창이 고개를 저었다.
“그 할매가 굿하고 부적은 참 잘 쓰는데, 살림에는 재주가 없으시다고요.”
“한성 곱단네에게 배우면 된다.”
“곱……단네?”
그와 말싸움하여 이겨 본 적이 없던 창은 장호의 손을 꼭 잡고 토닥였다.
“오라버니도 뭔가 다른 일에 집중을 좀 해 봐.”
“내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너다.”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창은 미심쩍은 듯 바라보는 장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바닥에 떨어진 오라버니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가기는 하는 거야?”
“아직 무릎께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머리로 내려앉는 숨결에 창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혼례 치르면 매일 함께 있을 거잖아.”
“저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가 보구나.”
“이렇게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으니까. 사는 이야기도 하고 그런 거지. 평범한 여인처럼.”
“태화루주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기녀다.”
순간 그의 얼굴을 붙잡은 창이 까치발을 디뎠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장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는 찰나 잽싸게 몸을 튼 창이 후다닥 달린다.
“오라버니 나중에 봐. 응?”
아쉬운 마음에 주먹을 움켜쥔 장호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 말고 불이 켜진 그녀의 방을 응시했다.
아까는 웃음소리가 들리던 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무언가 수상한데…….’
“나리?”
등불을 들고 선 해동의 부름에도 창의 방문을 응시하는 장호는 미동이 없다.
한편, 가슴을 움켜쥐고 방으로 뛰어든 창은 콩닥이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찻잔을 연신 들이켰다.
“총, 낭군님 가셨는지 내다봐.”
“오 나리랑 눈 마주치면 어떡해요.”
“조선에서 자라신 운장이시니, 기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진 않으실 겁니다. 조용히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연의 말에 가지런히 앉은 기녀들 역시 방문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선희야. 창문 좀 내다보거라.”
차분한 홍연의 목소리에 소리 없이 일어선 선희가 구름처럼 창문으로 다가섰다.
살짝 문을 열어 정원을 살피던 선희가 미소 지었다.
“가신 듯합니다.”
그녀의 말에 도자기 인형처럼 앉아 있던 기녀들이 저마다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홍연의 말에 성문을 지키는 무장들처럼 서 있던 기녀들이 침상 가운데 가득 쌓아 놓은 비단 자락을 헤쳤다.
기녀들이 야릇한 그림들로 가득한 춘화도를 접어 비단보에 올리자 홍연이 손바닥만 한 화첩 하나를 집었다.
“내용이 과하지 않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듯도 한데, 들키지 않고 보실 수 있겠습니까?”
작은 춘화첩을 노려보던 창이 잽싸게 낚아챘다.
“물론입니다. 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곰이 쑥하고 마늘만 먹고 여인이 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음양의 결합을 돋우는 음식에 대해선 더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의지를 다지는 창의 모습에 홍연이 웃음 지었다.
“음양의 조화에 대한 공부는 아무래도 태화루로 장소를 옮겨 계속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내일은 청풍각에 들지 마셔요. 제가 상방에 들렀다 오후에 태화루로 가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구름처럼 방을 빠져나가는 홍연과 기녀들을 쳐다보던 창이 작은 춘화첩을 꼭 움켜쥐었다.
‘백날 들어 봐야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더니!’
달과 구름, 꽃과 나비, 이슬 어쩌고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그림들이었다.
“소춘풍이 영흥으로 오라던 이유가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