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96
37화 일군사 (3) >
왼손에 들려있는 바둑알에 놀라워하고 있는 장명.
이 정도면 충분히 승부가 나지 않았을까.
북영도성 곽형직의 제자인 장명도 실력이 뛰어났지만 나는 그보다 두 수 위의 기량을 보여줬다.
미간에 주름이 가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곽형직.
“손으로 잡아보게.”
그가 바둑알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촤르르르!
오른손에 남천철검을 잡고 있기에 왼손에 쥐고 있던 바둑알들을 놓고서 왼손으로 이를 잡아냈다.
곽형직의 눈동자에 이채가 띠었다.
“왼손을 다룰 줄 아는군.”
“그렇습니다.”
보통 무인들과 나의 차이점이다.
팔뢰단검술과 섬영비도술을 다루기 위해 나는 왼손도 연마를 했다.
그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내가 자신의 제자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것이 불만스럽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그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호 형이 제자를 잘 키웠구나.”
방금 전처럼 무뚝뚝한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옛 지인을 대하듯이 살가워진 말투였다.
“네가 모자란 것이 아니니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곽형직의 말에 장명이 내게 포권을 취하더니, 경탄스러워하며 말했다.
“대단한 검술 솜씨입니다. 소 형께서는 바둑알 구분하기를 처음 해보셨을 텐데 저보다 잘 하시다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실력 차를 깨끗이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어느 누구랑은 다르네.
소담검의 말에 나도 그 녀석이 떠올랐다.
열왕패도 진균의 손자인 진용.
조부의 명성과 스스로의 실력에 취해 오만하기 짝이 없었었다.
그에 비하면 장명은 그야말로 군자였다.
곽형직이 내게 말했다.
“초면에 시험해서 미안하네. 옛 벗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을 종종 보았기에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군.”
사과하는 그에게 예를 갖춰 답했다.
“아닙니다. 어찌 제가 스승님과 교분이 있는 곽 대협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호기로움이 그 스승의 그 제자로군.”
곽형직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천검객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악천과 더불어 남천검객 호종대는 내게 스승이다.
제자가 어찌 스승의 명예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아쉽군. 제자를 육성하는 것만큼은 노부가 호 형을 앞선다고 자부했건만.”
곽형직은 제자들 간의 간접적인 대결의 패배를 아쉬워했다.
사실 장명 정도면 동년배 후기지수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상대가 나빴을 뿐이다.
장명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제자가 미진하여 스승님을 욕보였습니다.”
“절대 우위라는 것은 없느니라. 위에는 또 다른 위가 있으니, 이를 교훈삼아 정진토록 하거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전형적인 올바른 사제 관계의 본보기였다.
해악천이었다면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난리가 났겠지.
그나저나 역시 예상대로구나.
-뭐가?
‘자신의 제자와 나를 비교하려고 했던 거.’
굳이 나만 시험할 수 있었는데, 자신의 제자인 장명까지 나서게 했다.
누가 더 후인을 잘 양성했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북영도성은 예전부터 종종 전주인과 비견되곤 했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도 전주인을 호적수처럼 여겼었다.
호적수라.
남천철검의 말대로라면 호승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고 보면 참 안타깝다.
둘 다 차세대 팔대고수나 새로운 구대고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각광받던 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불운한 결말을 맞이했다.
“본 군사도 사죄를 해야 겠네. 그려.”
제갈원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내게 포권을 취했다.
“자리가 자리에 있는 만큼 직접 확인하는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게.”
사실 어느 정도 각오했었다.
16년 가까이 자취를 감춘 남천검객의 제자임을 내세운다는 것은 많은 의심을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림 연맹의 군사이자 정보를 총괄하는 자였다.
그런 만큼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자네는 일 년이 넘게 행방불명되었다가 나타났다고 들었네. 단전마저 파훼되어서 가문에 내쫓아졌던 친구가 사라진 남천검객의 후인이 되어 나타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
제갈원명의 말에 나는 내심 긴장이 됐다.
역시 그 짧은 새 나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수집했다.
“형산일검이 신원을 보장했지만 본 군사로서는 의심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밖에 없었다네.”
형산일검 조청운에게도 물었었구나.
괜히 일군사가 아니었다.
형산일검과 미리 익양소가에서 접선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이렇게나마 의구심이 풀렸다니 스승님의 명예에 금이 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그리 말해준다니 감사할 따름이네.”
그 말을 끝으로 제갈원명의 시선이 사마영에게로 향했다.
역시 꼼꼼한 성격이구나.
형산일검과 달리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나에 관한 정보야 워낙 알려져 있으니 구하기 쉬웠을 거다.
하지만 사마영은 달랐다.
그녀는 인피면구도 썼고 본명을 쓴 것이 아니라 알 도리가 없었다.
“마영이라고 합니다.”
나의 눈짓에 사마영이 포권을 하며 다시 소개를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형제는 어찌 호종대 대협의 문하가 되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운남성 애뇌산 인근에 약초꾼으로 살다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미리 신분을 준비해뒀다.
명산이라 불리는 애뇌산 근방에는 수많은 약초꾼들이 살고 있다.
남천검객의 고향이 운현현이라는 것까지 감안해서 준비해뒀기에 사람을 파견해서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고는 파악하기 힘들다.
“흐음. 그런가.”
제갈원명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의구심이 많은 자다.
“스승님께서 몸이 편찮으실 때, 사제가 많이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문에 받아주셨지요.”
“남천검객께서 몸이 많이 편찮으신가?”
화제를 돌린 보람이 있었다.
제갈원명이 그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많이 쾌차하셨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다는 말에 제갈원명의 시선이 내가 아닌 곽형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서로 전음으로 대화를 하는지 목젖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제갈원명이 무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허허. 이것 보게. 손님이 왔는데 차조차 내어주지 않다니, 참 각박한 사람이라 생각하겠구만. 앉게나.”
제갈원명이 비어있는 객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북영도성 곽형직의 맞은 편 자리였다.
나와 사마영이 자리에 앉자, 밖에서 미리 준비한 것처럼 시종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차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면 애초에 이 시험에 통과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측을 한 듯 했다.
‘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북영도성 곽형직은 회귀 전에도 무림 연맹과 관련이 없었다.
한데 그 짧은 사이에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이곳에 왔을 리가 만무했다.
-왜 또 뭐가 바뀐 것 같아?
‘그럴지도.’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제자까지 데려왔을 정도면 이번 후기지수 논무에 참석시킬 지도 몰랐다.
그때 제갈원명이 손짓을 하자, 그의 집무실에 있던 호위무사들을 비롯해 시종들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심지어 층 전체가 비워지고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자 제갈원명이 말했다.
“왜 자리를 비우게 하는지 궁금하겠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할 분위기군요.”
그런 나의 말에 제갈원명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누구도 들어선 안 되지.”
그 말에 내심 복잡해졌다.
누구도 들어서 안 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한다라.
신분을 증명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첫 만남에 이런 식으로 은밀한 자리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마영의 전음에 나는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원명에게 포권을 취했다.
“송구합니다. 그런 부담스러운 이야기라면 제가 들을 만한 자리가 아닌….”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닐세.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어떻겠나? 자네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면 자리에서 일어나도 좋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당최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의문을 대변하듯이 곽형직이 내게 말했다.
“자네 스승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이야기이네. 정히 원한다면 집무실을 나가도 좋네.”
남천검객과도 관련이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하게 되었다.
여기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굴면 오히려 의심받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
이런 식으로 걸고 넘어갈 줄이야.
남천검객의 제자라는 이름이 발목을 붙잡은 격이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질문을 듣고서 엮여선 안 될 일이라고 판단되면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면 된다.
자리에 앉자 제갈원명이 나와 사마영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물었다.
“혹시 자네 스승에게서 한쪽 눈이 금안인 자와 겨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
전혀 예상지 못한 이야기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금안의 사내가 거론되다니.
-운휘.
남천철검이 급격히 관심을 보였다.
당연했다.
자신의 전주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정체불명의 사내가 아닌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제갈원명과 북영도성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한데, 이들과 정보를 공유해도 될지 말이다.
-어차피 별 정보도 없잖아.
별 정보가 없다니. 소담아.
남천검객을 살해한 자에 관한 정보다.
다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발설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운휘…..나를 의식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현 주인인 네가 그 위험한 자와 엮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남천철검의 말에 왠지 가슴이 찡해졌다.
이제는 이 녀석들이 친 형제나 가족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배려한다고 그러니 괜히 더 신경 쓰였다.
고민하던 나는 일부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스승님께 들었습니다.”
“역시!”
그 말에 북영도성 곽형직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일군사 제갈원명이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혹시 자네 스승께서 몸이 불편하셨던 것과 관련이 있나?”
그의 말속에서 나는 어째서 두 사람이 남천검객의 건강에 신경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새로이 거짓말을 만들 필요없이 맞춰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그런 내 말에 제갈원명이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허어. 과연 그랬군. 북영도성과도 같구려.”
“북영도성과 같다니 그게 무슨?”
나의 말에 북영도성 곽형직이 자신의 헐렁한 오른팔 소매를 슬쩍 내밀었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자가 노부의 팔을 이렇게 만들었지.”
“아!”
그 불운한 대결이라는 것이 금안의 사내였었나.
어쩐지 누구와 겨뤘는지에 대해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곽형직이 내게 물었다.
“혹 자네 스승도 그 자를 찾아다니셨나?”
‘…….그 동안 북영도성이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금안의 사내를 찾아다녔던 거였구나.’
그의 물음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남천검객은 대결 후에 목숨을 잃었다.
찾아다니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런 나의 말에 곽형직이 인상을 쓰고서 중얼거렸다.
“결과에 승복한 것인가.”
곽형직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일까?
남천검객이나 비도살왕 한지상의 일화를 들어보면 그 자는 누군가를 살려둘 만큼 인정이 많은 자가 아니었다.
“자네 스승이 그 자에 관해서 언급한 다른 무언가는 없던가?”
“없었습니다.”
“조금도 말인가?”
“네.”
그런 내 말에 곽형직이 굳은 얼굴로 제갈원명을 쳐다보았다.
제갈원명이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내게서 뭔가 조금의 단서라도 듣고 싶었던 듯 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 상황을 전부 지켜본 남천철검마저도 아는 게 없었다.
“혹 왜 그러시는지 여쭤 봐도 될련지요?”
나의 물음에 턱수염을 지그시 쓰다듬고 있던 제갈원명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본 맹에서도 장로급 이상만 알고 있는 기밀사항이네. 자네 스승과도 관련이 있기에 말하는 것이니 부디 비밀을 지켜주게나.”
“…….알겠습니다.”
그 정도 기밀이라면 내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것은 없었다.
나의 대답에 제갈원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조만간에 혈교가 다시 일어설 것 같네.”
‘……어…..라?’
끝
ⓒ 한중월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