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6)
시노자키 린이 주인공에게 대련 약속을 말했다.
그런 경우의 수도 이미 생각해뒀다.
별로 놀랄 만한 얘기는 아니다.
주인공을 재촉한다.
“본론.”
“너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충고해주고 싶어서.”
라노벨 주인공은 이게 문제다.
말을 빙빙 돌리는 거 말이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고 한다.
올리비아는 예쁘기라도 하지,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노자키 당주를 조심해.”
주인공의 조언이 귓가를 파고든다.
피로에 무거워지던 눈꺼풀이 번쩍 뜨인다.
시노자키 당주.
나는 그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시노자키 이치로.
현역 일본 최강자.
시노자키 린을 도구로 부리는 장본인이자, 주인공의 아버지인 검성이 뉴 월드 리그의 테러로 죽기 전까지 만년 2인자였던 남자.
평생 검성을 뛰어넘지 못했던 그는 쿠로사와 가문에 상상 이상의 집착과 애증,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로는 쿠로사와의 성씨를 가진 주제에 F랭크인 주인공을 경멸하고 있고.’
2권 스토리의 핵심은 주인공이 시노자키 이치로와의 대련을 통해 그에게 검성의 후예로 인정받고, 나아가 시노자키 린의 도구로서의 운명을 해방해서 그녀를 ‘구원’해주는 내용이다.
주인공을 인정한 시노자키 이치로는 라노벨이 다 그렇듯 2권 마지막에 세탁기 좀 돌리고 감성팔이 신나게 하며 선역으로 바뀌는데,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쟤 말대로 위험한 인간이 맞지.’
시노자키 이치로의 직함은 일본 영웅 협회장.
오늘의 유적 탐사 덕분에 그에게 내 정보가 흘러갔을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거기에 하필 시노자키 린을 통해 엮여버린 상황.
일그러진 자존심을 가진 이치로라면, 무언가 수작을 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인공, 쿠로사와 유지는 이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서 내게 조언을 던진 것이다.
“너, 좀 쓸만한 조언도 할 줄 아는군.”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다더니.
“내 주제넘은 충고가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지만······. 정말 조심해.”
그가 당부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뭐 거창하게 얘기는 했지만 시노자키 이치로가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여기는 슈오우 영웅 학원.
그와 대등한 수준의 강자인 이사장 때문에 수작에도 한계가 있다.
도를 넘는 수작질은 이치로의 일그러진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을 거고.
기껏해야 린을 시켜서 날 짓누르려는 수작이겠지.
그 정도쯤이야, 뭐.
해볼 만하다.
“그래. 그러지.”
“응.”
주인공의 대답을 들으면서 불을 끄고 눈을 감는다.
길었던 하루가 이제 끝이다.
*
다음 날.
6교시 수업.
봄이라 그런지 나른한 바람이 창가에서 들어온다.
“이계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져요. 일반 이계종과 상급 이계종. F랭크부터 S랭크까지의 일반 이계종은 헌터 전력만으로 충분히 퇴치가 가능한 상대예요. 하지만 제타 랭크 이상의 상급 이계종부터는 마력장의 방어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모든 마력장을 뚫는 초상병기의 존재 없이는 퇴치가 불가능······.”
마유즈미 선생님의 강의가 들린다.
이런 기본 개념은 설정집에 있는 거라 이미 아는 내용이다.
그래도 다시 들어서 나쁠 건 없다.
나는 상태창이 없으니까. 시발.
사각, 사각.
노트에 요약해서 필기를 한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화면이 반짝인다.
잠금을 해제하자, 알림의 정체가 드러난다.
올리비아가 보낸 메시지다.
[이제 곧 수업 끝이네요.] [오늘은 뭐 시킬 일 없으신가요?]쓸데없는 부분에서 전속 시녀 캐릭터에 충실하네.
[없어]오늘은 정말로 올리비아에게 볼일이 없다.
다른 할 일을 해야 한다.
[왜 없죠? 어제처럼 외출할 일 또 없어요?] [유적 말고요!]메시지가 계속 깜빡인다.
이마를 짚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패턴.
당연히 공략법도 알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 있는데] [뭐죠? 이 제가 필요한 일이?]올리비아의 답장이 신속하게 돌아온다.
[백염검식] [그건······.]올리비아의 메시지가 끊긴다.
[아직 생각 중이에요.] [기한은 내일까지야]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다구요!]이 정도 했으면 됐다.
올리비아의 성격 상 이제 백염검식 고민에 빠져서 다른 생각은 나지도 않을 터.
기지개를 켜는 척 하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대각선 뒷자리에 앉은 올리비아가 휴대폰을 바라보며 볼을 부풀린다.
‘얄미워.’
그녀의 입 모양이 보인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던 그때.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린다.
도내 최고 랭크 미소녀라는 설정의 주황색 트윈테일이 인상적인 내 짝꿍, 니시자와 에리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의 주황빛 눈동자가 떨린다.
“기분 나빠.”
니시자와가 작게 중얼거리며 책상을 드르륵 옮긴다.
근데 잠깐.
우리 책상 원래 띄워져 있지 않았나?
니시자와 에리의 설정을 복기한다.
편모 가정 출신, 학교의 아이돌, 세계관 최고 미녀,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남자를 싫어하게 됨, 반대급부로 강한 여자를 동경하게 됨.
그녀가 원작에서 가장 동경하던 상대는.
‘흑태자의 후계자, 백금의 기사공주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설정집의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였나보다.
갑자기 책상을 붙이고, 내 문자 내용을 힐끗힐끗 훔쳐본 건.
그녀다운 반응이다.
‘돌겠군.’
머리가 어질어질하던 그때.
수업 종이 울린다.
오늘의 수업이 끝난 거다.
“······그럼 다음 시간에 봐요. 생도 여러분.”
마유즈미 선생님의 인사를 들으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해야 할 일, 별 거 없다.
일본 청춘 학원물의 정수, 빠질 수 없는 클리셰.
부활동 가입이다.
2호기 탄생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선다.
등 뒤에서 니시자와 에리가 노려보는 것 같긴 한데, 뭐 상관없다.
올리비아 광팬인 그녀가 할 만한 일이야 뻔하니까.
‘원작에서처럼 올리비아와 나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겠지.’
3권 초반 내용이 대부분 그런 스토리다.
1권과 2권의 에피소드를 겪으며 친밀해진 주인공과 올리비아를 용납할 수 없는 니시자와 에리.
결국 동경하던 올리비아를 증오하는 남자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주인공에게 대련을 신청하는데.
같은 내용.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 같긴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올리비아가 내 전속 시녀인지 뭔지를 자처하는 덕분에, 니시자와의 끓는점이 한없이 내려간 게 분명해.’
안 그래도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남자를 싫어하는 그녀다.
그런데 자신이 동경하는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님이 한낱 약소국 생도의 전속 시녀로 전락했다?
금발 태닝 양아치에게 청순 소꿉친구를 네토라레당하는 모습을 벽장 속에서 몰래 지켜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망가 주인공의 심정으로 분노하고 있을 게 뻔하다.
‘어쨌건 니시자와 에리 쪽도 이제 대비해야지. 슬슬.’
대비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설명이야 심각해 보이지만, 라노벨 분위기 특성상 별로 심각한 일도 아니고 개그 에피소드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귀찮은 일이 생긴 건 사실이다.
‘둘 다 히전죽 마렵네.’
뉴 월드 리그, 그 또라이 아포칼립스 광신도 집단만 아니었다면.
진작 전부 손절하고 행복 빙의자 라이프를 누리면서 원래 세상으로 귀환할 방법이나 찾고 있을 텐데.
하지만 뉴 월드 리그와 최종 보스인 메사이어를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조연 캐릭터가 필요하다.
한 명도 빠지면 안 된다.
왜냐하면 라노벨의 최종 보스란, 주인공, 히로인, 동료들의 뜨거운 우정, 노력, 청춘, 유대, 사랑, 인간 찬가 등등의 힘으로 물리치는 존재기 때문이다.
씨발!
‘선역보다 흑막 조직이랑 최종 보스가 더럽게 쎈 밸런스 좆망 세계관 같으니.’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만약 빙의한 세상이 라노벨이 아닌 웹소설이었다면!
혼자 다 해 먹는 웹소설 특성을 200% 활용해서 주인공의 사이다를 위해 안배된 수많은 기연과 인맥을 싸그리 독식하고 최종 보스를 바로 쓱싹했을텐데.
하지만 여기는 웹소설에서 금지어나 다름없는 ‘아프니까 시련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주인공이 된다’ 따위를 다루는 정통 왕도 배틀물 라노벨의 세계.
주인공도 기연 없이 맨땅에 헤딩으로 쎄지는 이 염병할 세상에서는 빠른 공략을 통한 사이다는커녕 기연조차 사치나 다름없다.
내가 이만큼 찾아 먹은 것만 해도 용한 수준이다.
‘이러니까 요즘 한국에서 라노벨이 하락세지.’
사이다가 부족해, 사이다가.
그래도 볼 때는 꽤 재밌었다.
원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법이니까.
“시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진짜 주인공 포함해서 하렘 구성원들, 동료들, 조력자들 전부 다 등골까지 뽑아서 이용해 먹어야 수지가 맞다.
그래야지.
그러라고 지금 부실이 가득 들어찬 제1별관에 들어온 거니까.
제1별관 현관 게시판.
부활동 홍보 포스터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퀄리티가 천차만별인 포스터를 살핀다.
‘여기 있군.’
게시판 구석.
포스트잇보다 작은 종이에 차분한 글씨체로 쓰인 쪽지가 있다.
[독서부] [함께 서가의 바다를 노닐 동지를 모집합니다.] [입부 희망자는 제1별관 121호로 와주세요.]목표를 찾았다.
포스터를 떼어내 품에 넣고는 121호로 향한다.
독서부 부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름에 맞지 않게 비어 있는 책장.
한쪽 구석에 놓인 PC, 가운데 놓인 테이블.
거기에 책을 읽고 있는 미소녀가 있다.
하얀 머리띠를 찬 단정한 보라색 롱헤어와 별을 품은 듯 반짝이는 자수정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순하고 신비한 미소녀.
4권의 타이틀 히로인.
‘별빛의 마녀’ 호시노 카스미.
팬덤에서의 애칭은 ‘카스미 센빠이’다.
표지에 커버를 씌운 책을 읽던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어라. 후배 군이네?”
카스미가 눈웃음을 짓는다.
내 노란 명찰을 보고 1학년인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여긴 무슨 일로 왔니? 혹시 문예부를 찾으려다 잘못 온 건 아니니?”
따뜻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귓전을 포근하게 감싼다.
햇살 같은 웃음,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 인상적인 흉부까지.
치유계 연상 히로인처럼 보이는 그녀는 사실.
‘이계종 유전자의 인체 이식을 시도한 비밀 실험의 부산물이자 뉴 월드 리그가 학원에 심어 놓은 끄나풀이지.’
라노벨이 늘 그렇듯, 4권에서 그녀는 뉴 월드 리그의 압력으로 주인공을 어쩔 수 없이 배신하며 독자에게 고구마를 안겨준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정을 눈치챈 주인공의 손에 의해 4권 마지막에 끄나풀의 운명에서 해방되어 ‘구원’받는다.
그렇다. 또 구원이다.
아무튼 아직은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없다.
나밖에는.
그러니 내가 눈앞의 고구마를 처리하고, 사이다를 창조해야 한다.
드르륵.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아뇨, 맞게 찾아왔는데요?”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테이블 위에 올린다.
“이거, 선배가 붙인 거죠?”
스윽.
그녀 쪽으로 쪽지를 밀어낸다.
“응. 맞네. 내가 붙인 포스터.”
쪽지를 본 호시노 카스미가 눈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우리 후배 군은 왜 독서부에 가입하려 하는 걸까? 부원도 나 혼자밖에 없고, 부실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독서부도 아닌걸?”
그녀가 포스터를 다시 돌려준다.
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완곡한 거절.
뭐, 당연한 일이다.
독서부는 호시노 카스미가 혼자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든, 간판만 내건 유령 부활동.
포스터를 굳이 잘 안 보이는 구석에 작은 쪽지로 붙인 것도, 부활동 모집 의무에 형식적으로 응하기 위해서다.
신입 부원을 받아줄 리가 없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부활동이 아닌 선배한테 흥미가 있으니까.”
“후, 후배 군?”
호시노 카스미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녀가 읽던 책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 마, 말은 고맙지만······. 후배 군이랑 나는 오늘 초면이고······.”
뺨이 붉게 물든 카스미가 횡설수설을 시작한다.
그래.
이 세계에서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바랐던 내가 잘못이지.
“그 뜻이 아니라······. 뉴 월드 리그의 스파이면서 용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키메라인 호시노 카스미. 당신한테 흥미가 있다고.”
그녀의 캐릭터 프로필을 읊은 순간.
카스미의 뺨에서 핏기가 싹 가신다.
책을 들고 있던 그녀의 섬섬옥수가 파르르 떨린다.
“하하하하······. 나는 후배 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걸······.”
“다 알고 왔으니까 밑장 빼기는 그만하셨으면 좋겠는데.”
의자에 앉아 카스미가 돌려준 쪽지로 비행기를 접는다.
하여간, 하나같이 다들 연기 더럽게 못 한다.
“후배 군은 대체 무슨 근거로······. 나한테 그런······. 폭언을 하는 거야?”
대답 대신 쪽지로 만든 종이비행기에 제법 강한 마력을 담아 날린다.
검게 물든 종이비행기가 카스미의 정면을 향해 날아간다.
“지금 무슨······.”
카스미가 정색하며 마력을 운용해 전면에 방어막을 만들던 그때.
그녀의 신경이 전면에 쏠린 틈을 타 기프트를 은밀히 사용한다.
카스미의 그림자가 창 형태로 변해 그녀의 목덜미로 날아든다.
“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