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08
‘하지만 태화는 그럴 이유가 없지.’
그들이 태화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는 간단했다.
크랭크 업 당시까지 정체가 들키지 않음으로써 인지도 상승이 보장되어 있던 배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배역을 맡은 배우.
상황이 변해도 순수하게 작품에 집중해 주는 동료의 존재는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시청률이 아주 순조로워. 이대로라면 시즌3의 기록을 갈아 치우겠는걸? 같이 힘내자고.」
크리스틴은 잔을 높게 들며 건배를 외쳤다.
그에 맞춰 다른 이들도 각자의 잔을 올렸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모임이 파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태화.」
분위기와 술기운에 달아오른 몸을 식힐 겸 밖에서 현규를 기다리던 태화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한국식으로, 태화의 성을 리가 아닌 ‘이’라고 정확히 발음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애덤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
애덤은 얼굴을 찡그린 채 시선을 내렸다.
복잡한 표정이 처마 옆으로 흐르는 빗물과 겹쳐져 진중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현규 형은 길이 막혀서 5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시간은 괜찮나?’
머뭇거리는 태도가 답답할 법도 했으나, 태화는 그를 재촉하는 대신 힐끔 시간을 보고 아직 여유가 있음을 확인했다.
애덤이 자신을 붙잡은 이유가 오늘 그가 이곳에 참석한 목적임을 깨달은 탓이다.
「······말하기 힘든 내용이면 굳이 할 필요 없는데.」
태화는 애덤에게 불만이 없었다.
자신을 싫어하고 무시하려는 태도가 은연중 보여도 그걸 작품에 드러내거나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답게 연기를 잘했다.
인간적으로 친해질 기분은 안 들어도 동료 배우로서는 인정할 만한 괜찮은 인물.
태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촬영에 지장을 줬던 일부 배우들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평가가 올라갈 정도였다.
‘날 이태화라 부른 걸 봐서 대충 내용이 짐작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결심을 굳힌 듯, 굳은 표정을 한 애덤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지금까지의 내 태도······. 미안했다.」
「그래.」
그렇게 어렵게 나온 사과에, 미리 예상하고 있던 태화는 ‘그래(Okay)’란 가벼운 단어로 대응했다.
흔쾌하다 못해 경쾌하기까지 한 반응을 보고 애덤은 잠시 멍한 얼굴로 태화를 쳐다봤다.
「그럼 남은 촬영도 힘내자. 난 이제 매니저가 와서.」
「······잠깐, 그게 전부야? 나한테 화난 게 없어? 할 말 없냐고?」
「뒤로 수작 부린 것도 아니잖아. 동료로선 괜찮다 생각하고 있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지.」
당황하는 애덤에게 태화는 담담히 답했다.
태화도 인간적으로 질색하는 인물이 몇 명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승우가 그러했고, 그 밖에도 술자리나 시상식 등에서 만나 사이가 벌어진 배우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과 공동 출연을 무조건 거절할 것이냐 묻는다면, 답은 아니었다.
그들의 연기력이 받쳐 주고, 그들의 연기에 사감이 섞이지 않는다면, 속에 품은 감정은 태화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랑 친해지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럼 사과로 충분하니까 마음 쓰지 마.」
애덤은 미묘한 시선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싫어했던 배우의 본래 모습을 조금 엿보게 된 까닭이다.
연기만 잘한다면 개인의 성품이나 인간관계엔 무심한 성격.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얌전한 척해도 본질은 상당히 비틀린 인물.
선 안에 들어간 이들에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애덤이 볼 때 태화는 한 가지에 미쳐 주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간이었다.
‘관계가 개선될 일이 없을지도.’
그렇게 결론이 나자 애덤은 조금 편해진 얼굴로 태화를 바라봤다.
동양인을 좋아하지 않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그는 시즌5를 찍으며 ‘인종이 아닌 사람을 보는 게 중요하다’란 기본적인 사실을 천천히 배우고 있었다.
「······네 천갈궁 연기를 봤다. 굉장하더군. ······좋은 배우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긴장이 탁 풀린 얼굴로 태화에게 전하고 싶었던 감상을 뱉었다.
‘히어로즈’ 속 태화의 연기를 보고 애덤은 자신의 고집을 버렸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이 아집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태화의 이름을 ‘태화 리’가 아닌 ‘이태화’라 부른 것도, ‘타인에게 칭찬을 건네거나 사과를 할 땐 그 상대의 문화에 맞춰라’란 에이블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칭찬 고마워. 아, 거북하지 않으면 앞으로 촬영 전 합을 맞출 때 적극적으로 임해 주면 좋겠어. 작품은 함께 만들어 가는 거잖아?」
「······그래.」
끝까지 작품을 걱정한 뒤 마중 나온 차로 향하는 태화를 보고, 애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변한 태도에 현장 스텝들이 소리 없이 경악하게 된 건 다음 날 생긴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
“시청률 8.7퍼센트 축하해.”
“고마워요.”
태화는 나래에게 감사를 표하며 젖은 옷을 털었다.
표면에 고여 있던 물방울들이 먼지처럼 떨어졌다.
“운이 겹쳤다곤 해도 천팔백이라니······. 굉장하더라.”
‘잃어버린 고리’는 원래부터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는 드라마였다.
무료 유선 방송인 베이직 케이블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높았고, 시즌3때 미국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갈아엎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시즌4때 주춤했다고는 하나 다른 인기 드라마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거나 비슷했을 정도.
태화가 천갈궁 역할을 맡았다는 걸 밝혔어도 제작자가 시큰둥한 구석이 있던 건, 그러한 이유도 없지 않았다.
“이번에 내기가 과열돼서 그런 것도 있지.”
“······내기요?”
“아, 응. 네가 떴잖아. 그걸로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지 주변에서 내기하는 이들이 좀 있었어.”
스마트폰을 보며 ‘내기’란 단어를 중얼거린 나래는, 의아해하는 태화에게 존재하지 않는 주변인을 들먹였다.
크리딧에서 일어난 과격한 내기를 배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건 모르는 편이 낫기도 하고.’
팬과 안티 사이의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
하지만 아무리 도발당했다 해도, 태화의 팬이 상대의 신원을 빌미로 내기를 걸었다는 상황은 그리 옹호될 만한 사실이 못 됐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런 일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후일 일이 크게 벌어졌을 때 제삼자로 빠지기 좋았다.
‘그래도 꽤 재미있단 말이지.’
크리딧에 접속한 나래는 ‘잃어버린 고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누르며 미국 유저들의 반응을 살폈다.
└소설 속에서 데릭 묘사 봤을 때 데릭은 누가 해도 망했다 여겼거든? ‘강하지만 여려 보이는, 소년과 청년의 사이에 있는 위태로운 남자’랬잖아. 그런데 쟤 누구냐? 끝내주게 잘 어울리네.
└쟤가 요즘 걔잖아, 천갈궁 맡은 한국인. 너 딴데서 왔냐? 지금 크리딧 이것 때문에 미칠 정도로 시끄러운데.
└눈 옆에 있는 눈물점은 임의로 찍은 것 같은데 신의 한 수(a stroke of genius)네. 남자의 눈물점(beauty mark)이 정말 아름다움을 맡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내기를 수락한 아이디 ‘qefwil_14’가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을 가지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리딧 유저들은 온전히 데릭을 맡은 태화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동양인이 데릭을 맡는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던 이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오히려 ‘올해 머리 스타일은 데릭 컷이다’, ‘옆구리 문신이 섹시하던데 무슨 뜻이냐’ 등 그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아, 얘 왔네.’
그렇게 즐거운 심정으로 크리딧을 읽던 나래는 ‘qefwil_14’란 작성자를 확인하고 글을 클릭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파쿠르는 좀 쩔었지만 전문으로 배웠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다음 주를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아니, 솔직히 13화까지 있는데 반은 보고 평가해야지.]
변명으로 가득한 게시 글 밑에는 졸렬하고 구차하다는 댓글이 ‘Looool’이란 비웃음과 함께 줄을 이었다.
그리고 처음 선전 포고했던 팬의 ‘협상은 끝났다, KY에 사는 JT. 24시간 준다’라는 살벌한 댓글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재미있긴 한데 설마 큰일로 번지진 않겠지.’
나래는 찜찜한 마음을 넘기며 다른 글을 열었다.
여론은 따로 손을 얹을 필요 없이 호의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만에 하나의 경우도 무시할 순 없었다.
나래가 열심히 팬 반응을 체크하는 사이 태화는 팔로우해 뒀던 록셀의 파랑새를 확인했다.
대부분 손녀 자랑이나 동료들 이야기로 채워졌던 그의 타임라인에, 영화관 앞에서 포스터와 함께 찍힌 사진이 올라왔다.
‘히어로즈’를 봤다는 인증 사진이었다.
[지난 겨울에 만난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러 왔는데, 태화! 이 친구 정말 대단한데? 사인을 해 주기만 하고 받지 않은 게 후회되고 있어. 뉴욕에 다시 와 주면 좋겠군.]
록셀의 팬은 세계 각지, 다양한 분야에 퍼져 있었다.
다양한 만큼 개중에는 히어로 영화 같은 상업성에 치중한 작품에 손대지 않는 팬들도 존재했다.
그렇게 불호를 나타내던 이들조차 ‘자신의 우상이 하는 말을 믿고 처음으로 히어로물을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는 글을 그 밑에 연달아 올렸다.
물론 그들의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연락해도 괜찮나?’
파랑새로만 가끔 하트를 누르던 태화는 자신의 폰에 잠들어 있는 록셀의 번호를 떠올리고 머뭇거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 동시에, 올해도 열정적인 무대를 펼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태화가 록셀을 떠올리며 주머니 속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폰이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설마 마음이 통한 건가 싶어 화면을 켠 그는 예상과 다른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작게 실망했다.
‘하긴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날 리 없지. 근데 브라이언은······. 어?’
태화는 브라이언에게서 온 장문의 문자를 확인하고 멈칫했다.
사전 경고 없이 ‘괴물’을 선물한 것에 대한 타박.
가족과 관람하고 놀랐다는 잔소리.
마지막으로 딸에 관한 자랑과 그녀의 관심을 받은 남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
그것은 지금껏 알았던 브라이언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서, 태화는 인간의 반전미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몸소 느끼고 소름이 난 팔뚝을 쓸었다.
끝
ⓒ 마늘소금
18.2/8.7퍼센트로 스타트를 끊은 ‘잃어버린 고리’의 시청률은 그 후 9화, 즉 8주가 지나도록 큰 변화의 폭은 보이지 않았다.
최저 시청률 17.9/8.5퍼센트, 최고 18.6/8.9퍼센트.
시즌 첫 화와 마지막 화에서 높은 시청률을 찍고 그 사이를 완만한 U자 곡선으로 채우는 것이 일반적인 업계에서, ‘잃어버린 고리’가 보이는 그래프는 참 기묘하고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오르락내리락하며 미세하게나마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태화가 원인이었던 터라, 태화에게 관심 없던 이들조차 그를 주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일주일만 촬영하면 이번 시즌도 크랭크 업이네. 힘내자고.」
크리스틴의 격려에 태화는 자신의 배에 있는 피 주머니를 만졌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은 다른 배우들에 비해 그는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로 데릭이 죽으니까.
‘박수 칠 때 잘 떠난 경우지.’
가까이에서 보면 데릭은 매력적이고 호감 가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는 폭력 조직 CyX 보스, 프레딕의 신임을 받는 부하였으며, 마약 운반책이자 폭력을 사용하는데도 거리낌 없었다.
주인공인 마커스가 FBI의 요원이니 결국 사건이 종결된 후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관계.
때문에 작가는 후반 주인공 보정을 위해 망가질 수 있는 데릭의 매력을 영원에 묻는 것으로 유지시켰다.
죽음을 통해 데릭의 희생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추리와 액션이 적당히 버무려진 게······. 미국에서 인기 있는 장르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
사실 살인마 페트릭은 데릭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
페트릭의 취향도 아니었거니와 데릭은 멀대같이 키만 큰 페트릭보다 몸도 좋았고 위압적인 인상을 가졌으니까.
누가 봐도 체격과 완력이 차이가 확연하다.
약물과 도구를 이용해 희생자들을 처리했던 페트릭에게, 데릭은 버거운 먹이였다.
살인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페트릭의 인내심이 닳지 않았다면, 그래서 평소의 그다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데릭이 장소를 찾아내고, 페트릭과 다툼을 벌이다 사망하는 사고는 없었으리라.
「태화는 오늘 끝나고 바로 한국으로 간다고 했지?」
「응. 미국에서 두 작품을 하긴 했지만 난 한국인이니까.」
「아쉽다······.」
필립스의 물음에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태화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제작사와 감독은 많았다.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미국 내 커리어가 적기에 실력에 비해 가격마저 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인지도뿐.
그러나 천갈궁, 데릭과 같은 주요 역할을 연달아 맡으면서 태화의 인기는 전미가 아는 ‘대중적인’ 수준까진 못 갔어도 이 바닥의 표준 관객들에게는 충분히 어필되어 있었다.
티켓 파워가 있다고는 못해도 ‘이번엔 어떤 변화를 줬는지 가서 확인해 볼까?’ 정도의 기대감은 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