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66
이 인간과 함께 지내고 나면서 조금씩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자신이 마시는 맥주를 아들이 마시는 줄 알고, 늘 냉장고에 맥주가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두는 박여사.
옆에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뒹굴고 있으면 나른하고 배부른 느낌이 드는 지연이.
조그만 생에 뭐그리 한이 많은지 꽉꽉 메워 가둬둔 슬픔을 자신의 도움으로 터뜨려 낸 수연이.
귀鬼와 달리, 인人의 삶은 관계로 이루어진다. 관계 속에서 가치를 증명받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타인이 소중해질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과 타인이 기대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힘겨워진다.
그러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그 둘의 접점을 찾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한 10년 해보고도 안 됐으면 접을 생각도 들었어야 할 텐데…그러지 못했던 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네버랜드에 살고싶은 피터팬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그런 나의 이기적인 부분을 최대한 분리해내서 피터팬을 만들어 보려고.’
{캐릭터와 비슷한 부분에 감정 이입하는 건 좋지만, 그걸 핑계로 네 인생을 자조하지는 마랑. 피터팬은 어른이 되어서 발생하는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거고, 너는 연기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니깡. 그리고 그 때 어렵게 쌓은 15년의 경험이 지금의 네 자산이 되었잖앙.}
‘응···’
{그만큼 노력했던 과거의 너를 인정해 줘랑. 대단한 녀석이잖냥.}
유명의 마음이 폭신하게 젖어들었다.
저 귀여운 외양과 삐죽한 말투때문에 자꾸 잊게 되지만, 그는 천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영물. 한 번씩 놀랍도록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여러 번 자신을 구해온 현명함과 따뜻함은,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일깨운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맥주로 해랑.}
‘그래. 캇스? 하잇트?’
미호는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이해의 범위가 늘어가고, 정이 쌓인다.
자신이 원하는 길과 유명을 위하는 길.
‘타인’을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지극히 ‘인간스러운 짓’을 결국 자신도 하게 될 것인가.
왠지 맥주의 끝맛이 썼다.
*
생각보다 다큐의 규모가 커졌다.
유명의 인터뷰를 따서 기존 작품들과 적절히 조합하려고 했던 다큐는, 반순호피디의 열정 하에 연극 제작과정을 겸한 내용으로 확장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류신과 수연, 세미에게도 출연료 및 부차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길어질 촬영에 양해를 구했다. 의외로 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던 이유는, 지금의 이 가치있는 시간들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이 기꺼웠기 때문이었다.
“기획사들과 협의한 바로는, 방송 나가기 전에 관계자 시사회 할 거고, 민감한 부분이나 연극 내용이 스포되는 파트가 있을 경우 재편집하기로 했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넵!” “저도요.”
그리고 유명이 말을 덧붙였다.
“피디님. 촬영에 필요한 장면을 따는 날은 며칠 따로 뺄 테니까, 평소 연습은 촬영으로 방해받지 않게 신경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되니까요.”
“당연하죠. 저도 신경쓰겠지만, 불편한 부분들은 바로바로 알려주세요.”
반순호는 스텝을 많이 끌고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손발이 맞는 소수의 팀원들과 공을 들여 깊게 취재하는 스타일.
카메라감독과 조감독이 능숙하게 카메라와 보조카메라들을 현장에 배치했다. 다큐팀이 연습장에 나오는 시간 외에도, 관찰 카메라 두 대는 종일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어떻길래 그렇게 흥분했어?”
“보면 알아, 보면.”
반순호와 오래 합을 맞춘 카메라감독 박유선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반pd가 연예인 홍보용 다큐를 찍으라는 외압을 받았다고 씩씩거리며 흥분하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런데 3일 전 갑자기 뭔가에 꽂힌 표정으로 나타나더니, ‘이건 대박이다, 다음 기획 준비하던 걸 잠시 접어두고 이거부터 찍어야겠다’고 침을 튀기며 신을 내는 것이었다.
원래 뭐에 꽂히면 눈돌아가는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방방 뛰는 반pd는 오랜만에 보았다. 유선은 카메라 시야각을 좀 더 조정한 후 그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1막 1장 연습 한 번 해 볼까요?”
1막 1장. 동화 피터팬.
대본의 제작과, 이미 만들어진 장면들의 연습을 병행 중이라고 한다.
오늘 그들은, 그 중 가장 빠르게 완성된 ‘동화 피터팬 장면’의 연습을 시작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신유명이 무대로 달려 들어온다.
역동적인 자세로 휙 달려들어와서 세 번 덤블링을 펄쩍펄쩍 넘는다.
유선은 순식간에 입을 헤- 벌리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안녕? 나는 피터팬. 아름답고 멋진 생각을 하면서 날아야 떨어지지 않아!”
엄청난 신체 밸런스.
고난도의 동작을 아주 쉽게 해내며 뛰어다니는 피터팬의 두 발은, 한 번도 무대에 함께 닿지 않는다. 그 가벼움이 정말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보인다.
“웬디- 이쪽이라구! 이쪽-”
그가 소리를 크게 지르자, 웬디가 무대로 비틀비틀 등장한다.
“나는 너처럼 멋지게 날 수가 없어-”
“요정 가루를 좀 더 뿌려줄게.”
피터팬이 뭔가를 뿌리는 시늉을 하자, 비틀거리던 웬디의 몸이 조금 균형을 찾는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멋지게 나는 것을 뽐내고 싶은지 온갖 묘기를 부리며 웬디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자 이제 다 왔어, 여기가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섬, 네버랜드야!”
“우와~ 그럼 정말로 인어도 살고 있어?”
“그럼그럼, 헉- 해적들에게 들킨 것 같아. 조용히 해.”
웬디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꾸욱 막았고, 무대 반대편에서 서류신이 등장했다.
흉흉한 기세로 칼을 휘두르는 후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터팬! 네 놈에게 복수하고 말겠다! 저 놈이 내 팔을 잘라 악어에게 먹여 버렸어!”
왼팔의 소매가 펄럭인다. 그는 왼 손이 없는 대신 무시무시한 갈고리를 달고 있다.
“웬디, 도망쳐!”
“저 무시무시한 사람은 누구야!”
“하하하, 멍청이 후크선장이야. 내가 그의 팔을 베어버렸지.”
“헉···”
그가 뒤쫓아오자 웬디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후크가 달려오는 기세를 피터팬은 쉽게 따돌리며 저 멀리로 벗어났지만, 웬디는 그러지 못했다. 허우적거리며 반대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후크에게 옷자락을 잡히기 직전의 바로 그 때-
똑딱똑딱-
시계소리가 났다.
“앗! 큰일이다! 악어가 왔다!!”
후크가 허둥지둥대며 무대 반대편으로 몸을 피했고, 악어라는 말에 웬디가 더욱 겁에 질려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짠- 하고 나타난 것은 피터팬이었다.
“피터-!”
“하하하하- 악어가 아니야! 나라고!”
그가 혀로 똑딱똑딱 소리를 냈다. 시계소리를 감쪽같이 흉내낸 소리였다.
피터팬이 배를 잡고 웃고, 후크는 한 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리고 웬디는 양손을 꼬옥 잡고 동경의 눈빛으로 피터팬을 바라보았다.
그 때,
텅-
효과음이 들렸다.
조연출이 재생한 효과음.
그 소리에 세 명의 동작이 정지했다.
“하하하하- 이건 또 무슨 놀이야. 내보내 줘, 내보내 달라고.”
피터팬이 무대 앞을 바라보고 벽을 두드리듯이 빈 공간에 주먹을 쾅쾅 찍어댔다.
박유선이 침을 꼴깍 삼켰다.
‘벽···? 갇혔나?’
정교한 손동작으로 표현하는 마임은 분명, 배우들의 눈 앞에 세워진 투명한 벽을 의미하는 듯 했다.
“엄마- 엄마아아-”
웬디는 아주 좁은 공간 속에서 한 발짝씩 움직여보다가 쪼그리고 앉아 울기 시작했고,
“뭐야- 이건. 누가 감히 나, 바다의 지배자 후크 선장의 앞길을 가로막느냐-”
비명을 지르다 정신을 차린 후크 선장은, 갑자기 거드름을 피우며 소리를 꽥꽥 지른다.
웃음. 울음. 고함.
세 가지 소리가 점차 섞여 의미가 불분명한 소음으로 섞이며,
1막 1장이 끝났다.
박유선은 얼이 빠졌다.
자신도 모르게 중간부터 피터팬의 이야기에 푸욱 빠졌던 유선은, 그들이 갑자기 감금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반pd, 뭐야 이건 도대체···”
“죽이지? 1막 1장부터 흡입력 오진다, 그치?”
“피터팬이라며?”
“응. 피터팬을 비튼 창작극이야. 저 친구들 지금 정신과 병동 CR(*격리실)에 갇힌 거야.”
“뭐?”
박유선은 ‘무대 연기’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이 이렇게 과도할 정도의 에너지를 단숨에 뿜어내는 것인지 몰랐다.
“어우씨, 소름돋아. 나이도 어린 배우들이 뭐 저렇게 영혼을 갈아넣듯이 연기를 하지. 덕분에 그림은 잘 빠지겠다.”
반순호의 말에 동감한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1막 1장.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 카메라를 잡은 자신조차…기대가 되니,
반pd가 왜 저렇게 꽂힌 것인지, 그녀는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
“후크와 피터팬은 격리되어 있어야 해요.”
어느 날, 류신이 의견을 내어 놓았다.
“한 병원에 수용되어야 사건이 생길 텐데요?”
“같은 병원에 병동이 여러 개인 경우는 없나…?”
“아…있어요! 병동이 두 개나 세 개로 나누어지고, 다른 병동에는 못 들어가게 분리 수용되는 병원들이 있어요.”
“분리병동이라는 설정을 따면 되겠네. 아무리 ‘극적 상황’이라지만, 후크의 팔을 자른 피터팬을 같은 공간에 수용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 말에 세미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긴 한데…‘사건’은 어떻게 일으키죠?”
당연한 얘기지만 ‘사건’은 주요 인물들이 만나야 발생한다.
“피터팬이 몰래 후크의 병동으로 잠입하면 어떨까요? 관리가 소홀하다는 설정이 있어야 겠지만. ‘웬디’를 이용해도 좋겠군요. 웬디는 두 병동을 통과하는 것이 자유로운데, 피터팬의 부탁을 받고 통과시켜 준다든가?”
“아···”
“피터팬이 자신의 대단함을 과시하고 싶어서, 웬디를 데리고 몰래 후크의 병동에 잠입해서, 후크가 기겁하는 시계소리를 내면 어떨까요. 그걸 계기로 호전되어가던 후크가 다시 악화되는 ‘사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오…그거 좋은 것 같아요.”
유명이 류신의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요즘 그는 조금 더 말랐다. 후크에 이입해 가는 것인지 평소보다 우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연기와 아이디에이션은, 칼이 날을 바짝 세우듯이 더욱 예리하고 정교해졌다. 가끔 저러다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좀 되긴 하지만.
“1막이 각 환자에 대한 브리핑과 캐릭터간 관계의 설정이라면, 2막이 피터팬의 난입과 그로 인해 얽히고 악화되어가는 각자의 증상을 보여줄 수 있겠군요. 클라이막스는 뭘로 할까요?”
“음…트라우마를 강화시키는 방법은 어떨까요?”
“…동일 경험의 반복?”
수연의 대답에 류신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피터팬이 후크의 팔을 한 번 더 베는 거죠. 병동 안에서 벨 만한 도구가 없다면 팔을 부러뜨려도 되고.”
그 말에 듣고 있는 백이신과 반순호가 흠칫 등을 떨었고,
유명이 눈을 빛내며 아이디어를 보탰다.
“반전은…이걸로 하면 되겠군요.”
“…?”
“웬디가 죄를 뒤집어쓰는 겁니다.”
끝
ⓒ 글술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