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Tyrant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내 딸한테서 떨어져
나는 서둘러 상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는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메이블?”
“오쯔까.”
“오스카? 그래, 그 녀석을 안 본 지도 오래되었군.”
이 정도로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붙잡은 옷깃을 사정없이 흔들며 외쳤다.
“오쯔까가 바께 이떠!”(오스카가 밖에 있어!)
“그래, 지금 훈련 중인가 보구나.”
“아니……!”
답답해서 돌아가실 것 같다. 나는 이마를 붙잡고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틀렸어.’
상황제는 오스카가 황성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대신 그는 내 몸 이곳저곳 행여 긁힌 곳은 없는지 샅샅이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정말로 황자를 출입금지 시키지는 않을 테지만, 가문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신경 쓰인단 말이야.’
고지식한 병사들이라면 진짜로 오스카를 가로막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말해야겠다.
“오쯔까. 항성 바께-.”(오스카. 황성 밖에-.)
그리고 그때, 구스타프가 나타났다.
“상황 폐하.”
“아, 벌써 그 시간인가.”
미리 이야기된 일정이라도 있었는지 상황제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넘어지느라 먼지가 묻은 옷을 살짝 털어 주더니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죠, 죠기!”(저, 저기!)
서둘러 불렀지만 어찌나 다리가 긴지 금세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중이었다.
어느새 홀로 남은 나는 가만히 뺨을 긁적였다.
“오쪼지…….”(어쩌지…….)
***
드디어 도노반 공작과의 면담이 끝났다.
“휴.”
오스카는 한숨을 내쉬며 셔츠 단추를 끌렀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메이블 보고 싶네.”
뚱한 얼굴의 동생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좀처럼 웃지 않는 황자의 미소를 본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흠칫하며 못 본 척 걸음을 바삐 옮겼다.
오스카는 곧바로 대기해 놓은 마차를 찾았다.
“황성으로 가자.”
“아무 데도 안 들르십니까?”
“시간 없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부는 얼른 말을 몰았다.
오스카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생각에 잠겨 들었다. 어머니와의 식사자리를 가장한 면담이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예, 어머니.”
“훈련은 어찌 되어가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로는 안 된다. 네가 황위를 포기하고 황제의 기사가 되겠다 다짐하였으니 늘 완벽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오스카는 어머니인 파시피카 도노반에게서 한 번도 모성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날 때부터 메이블을 황제위로 올리는 사안이 결정될 때까지 오스카를 그저 ‘후계자’로서 양육했다.
그래서 그에게 어머니란 ‘엄한 스승’이었다. 다정했던 외숙부 리산드로가 교육을 담당하면서부터 오스카는 숨 쉴 곳을 잃었다.
‘어쩌면 후계자가 아니게 된다면 태도가 바뀔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도노반 공작의 태도는 전과 같았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루 종일 꽉꽉 들어차 있던 훈련과 수업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뿐.
“전하. 곧 황성에 당도합니다.”
그 목소리에 오스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메이블. 설마 울고 있지는 않겠지.’
가끔 리산드로가 가까이 다가가면 크게 울음을 터트릴 때가 있었다.
혹시 제가 없는 사이 리산드로가 메이블에게 접근할까 봐 초조했다.
서둘러 옷매무시를 단정하게 정리한 오스카는 내릴 준비를 끝마쳤다.
이윽고 황성 문 바로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뭐지?’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마차가 다시 출발하지 않았다. 어쩐지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도 같았다.
오스카는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근위병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마부가 보였다.
“무슨 일이냐?”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를 알아본 근위병들이 서둘러 예를 차렸다. 오스카는 짧게 고개를 까딱여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왜 마차 통행을 방해한 것이지?”
“방해한 것이 아닙니다. 상황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부황께서 내 황성 출입을 금하라는 명이라도 내렸단 말이냐?”
“예.”
오스카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문으로로 가득 찼다.
도대체 자신의 출입을 막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유를 추측하려 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다른 근위병이 앞으로 나섰다.
“상황 폐하께서 5세부터 15세까지의 모든 남자아이의 입궁을 금지하신다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가문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
대충 상황은 이해가 되었다. 며칠 전부터 온갖 가문의 영식들이 입궁하여 메이블에게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 탓에 기어코 이 사달이 났구나.
‘그런데 왜 나까지……!’
근위병들은 무뚝뚝한 얼굴로 멀뚱히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얼굴이었다.
“휴…….”
오스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결국 원인을 따지고 본다면-.
“우리 메이블이 너무 귀여운 탓일까.”
“……?”
마부를 비롯한 근위병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빨리 메이블을 보러 가야겠다는 마음만 강해졌다.
어쨌든 상황 파악이 끝났으니 해결해야 할 때였다.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명령은 잘 알겠으니 아무나 들어가 상황 폐하께 내가 돌아왔음을 알리거라.”
“예, 전하.”
근위병 한 명이 성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겸 마차로 돌아가려던 오스카가 문득 멈춰 섰다.
“-까!”
아득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메이블의 모습.
“……메이블?”
울상을 짓고 있는 메이블이 자신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메이블이 마중을 나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순간 오스카는 꿈인 줄 알고 제 뺨을 꼬집었다.
‘꿈이 아니야?’
거기다 메이블 뒤로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리산드로가 있었다.
리산드로와 메이블이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조합이 아닌가.
“오쯔까!”
메이블의 외침에 오스카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보는 눈이 많아 오스카는 메이블에게 예를 갖췄다.
“……황제?”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처음 황제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근위병은 물론이거니와 출입하는 여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분홍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깜찍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황제 폐하라니!
귀엽다는 말은 소문으로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귀엽잖아!’
소문이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심각하게 축소되어 있었다.
메이블은 작은 보폭으로 열심히 걸어와 오스카 앞에 섰다.
“메이블. 황제는 이렇게 황성 밖에 나오면 안 돼. 위험하단 말이야.”
“대꾸, 빤니 와!”(됐고, 빨리 와!)
“어, 어?”
오스카를 뒤에 달고 황성 문을 다시 통과하려던 메이블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근위병을 올려다보았다.
“무오시냐.”(무엇이냐.)
“상황 폐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기다료? 내가?”(기다려? 내가?)
“예?”
“비쿄.”(비켜.)
“예?”
“나눈 항제다. 나에 명이 상항제 명부다 우손한다.”(나는 황제다. 나의 명이 상황제의 명보다 우선한다.)
“예?”
‘에효.’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만 반복하는 근위병을 한심하게 올려다보던 메이블은 그냥 무시하고 성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타박타박.
터벅터벅.
그리고 기척이 없는 발걸음 하나까지.
오스카는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놓고 뒤를 따르는 리산드로를 흘긋 쳐다본 후 메이블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그나저나 메이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웅? 책에소 일거떠.”(응? 책에서 읽었어.)
“책을 읽었다고……?”
‘아차.’
헤헤, 메이블이 웃었다.
“짜비에가 일거 조떠.”(자비에가 읽어 줬어.)
당연히 메이블이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었기에 오스카는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궁금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메이블.”
“웅?”
“외숙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이블이 따라오고 있던 리산드로를 휙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점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 처음 메이블을 봤을 때처럼 잔뜩 울상을 짓기까지 했다.
“메이블?”
“혼자 가 꾸야.”(혼자 갈 거야.)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메이블이 쾅쾅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콩콩거리는 모양새임을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크하하! 하하하하!”
리산드로는 이제 아예 배를 붙잡고 웃고 있었다. 오스카는 잔뜩 화난 메이블과 평소보다 열 배는 더 신이 난 리산드로를 번갈아 보았다.
‘대체 뭐지?’
***
한 시간쯤 전.
에스테반이 영식들의 황성 출입을 금했던 그 공간에 당연히 리산드로도 함께 있었다.
상황이 보좌관과 함께 떠난 이후로 그는 평소처럼 메이블에게 눈을 떼지 않고 호위했다.
그리고 그다음, 메이블의 입에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리산두로.”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메이블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리산두로. 나아 바.”(리산드로. 나와 봐.)
“찾으셨습니까?”
“웅.”
투명하리만치 맑은 연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했다.
리산드로는 몇 개월 만에 마주하는 가까운 메이블의 모습에 흥분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써야 했다.
메이블은 침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되도록 타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황제궁 근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안전이라는 명분 하에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부타기 이떠.”(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이십니까?”
“두러 주 꼬야?”(들어 줄 거야?)
리산드로는 미친 듯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적장의 목도 베어올 수 있지만.
‘쉬운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리산드로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 번 들어 본 후에 판단하겠습니다.”
“오쯔까. 못 두로오면 오또케?”(오스카. 못 들어오면 어떡해?)
“예?”
“상항이 구래짜나.”(상황이 그랬잖아.)
아. 그제야 리산드로는 메이블의 말뜻을 이해했다.
저 착하고 상냥한 꼬마 황제 폐하는 자신의 오빠가 상황의 명령으로 황성에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리산드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능청을 떨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근위병이 막아서면 전하께서도 곤란하실 테지요.”
메이블은 오스카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로 보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나면서 혹독한 후계자 수업을 무리 없이 수행해내던 천재였다.
어폐가 있는 상황의 명 정도는 금방 헤치고 돌아올 수 있는 아이였다.
메이블의 눈에 오스카는 아직 영락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리산드로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오쯔까 두러오게 해죠.”(오스카 들어오게 해줘.)
“제가 말입니까?”
“웅.”
“힘없는…… 고작 호위기사일 뿐인 제가 말입니까?”
메이블은 그가 상황의 신임을 받고 있는 뛰어난 기사인 데다 도노반 공작가의 위세까지 등에 업은 나름 권력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쯔까눈 리산두로 제자자나.”(오스카는 리산드로 제자잖아.)
“원래 저는 제자를 강하게 키운답니다.”
“…….”
“부탁을 하나 들어주신다면 오스카를 황성에 들어올 수 있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물론 성문까지 폐하가 가실 수 있도록 도울 것이고요.”
메이블은 얼굴을 찌푸렸다.
“몬데?”
“제 뺨에 뽀뽀를-.”
“윽. 시로.”
메이블은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리산드로가 슬픈 듯 흑흑거렸다.
“오스카가 안쓰럽지도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오스카는…… 바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다시 공작가로 돌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도라가눈 것두 나뿌지눈 안케따.”(돌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돌아갔다가 나중에 상황제를 만나서 이야기하면-.
“참고로 오스카는 제 누님, 즉 도노반 공작을 아주 어려워 한답니다?”
“윽.”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오스카는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다가 힘겹게 걸음을 떼었으니까.
사실 오스카 사정 같은 거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잔뜩 흐리던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뽀뽀 한번 해 주자.’
뽀뽀한다고 입술 닳는 것도 아니니까.
메이블이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리산드로가 헤벌쭉 웃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메이블은 몸을 한껏 낮춘 리산드로의 뺨에 얼른 뽀뽀를 한 후 뒷걸음질 쳤다.
살포시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리산드로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폐하가…… 나한테 뽀뽀를……!”
“협바케짜나…….”(협박했잖아…….)
***
그것이 바로 메이블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정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오래지 않아 에스테반의 귀에 들어갔다.
“상황 폐하께서 끌고 오라신다.”
리산드로는 동료 기사들에게 팔을 한 짝씩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갔다.
“크하하!”
하지만 한껏 들뜬 기분에 취한 리산드로는 신나게 웃을 뿐 저항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리산드로는 에스테반의 앞에 대령되었다. 싸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가운데 해맑은 건 오로지 리산드로뿐.
“하하. 상황 폐하를 뵙습니다.”
스릉.
에스테반이 검을 뽑아들었다.
“네 놈이 내 딸을 희롱했다지.”
“예?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폐하께서 직접 제게 뽀뽀를-.”
서늘한 검이 리산드로의 목에 바싹 가까워졌다.
“입에 담지 마라.”
“예에.”
분노로 형형하게 빛나는 에스테반의 눈이 리산드로를 뚫어 버릴 듯 선연했다.
‘확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이미 죽였지만, 그러기엔 도노반 공작과의 관계가 걸렸다.
푹.
검기로 둘러싸인 검이 바닥에 깊게 박혔다. 결국 에스테반은 리산드로를 처벌하지 못했다.
“나가라.”
“옙.”
“근신이다.”
“옙?”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리산드로가 에스테반을 돌아보았다.
에스테반은 그 멍청한 얼굴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내 딸한테서 떨어져, 이 파렴치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