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Degree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혈제(血祭)의 비밀
청음원에 도착하자 몽산사우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가 분분히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그들이 권하는 대로 상석에 앉은 한립이 입을 뗐다.
“왕 총관은 뭐라더냐.”
네 사람의 시선이 오가자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아실 듯 합니다만,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이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말을 시작하며 노인이 한립을 힐끗 보았으나 어떤 기색도 읽어낼 수 없었다.
“왕 총관이 흑살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늘어놓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흑살교 교주가 뜻밖에 황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당대 월국 황제가 그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일 뿐이라니 이제 황궁은 흑살교의 소굴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황궁의 궁내총관인 이파운 환관이 현재 폐관 수련 중인 교주라 했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이야기를 할수록 더 어두워졌다. 수도자들이 범인을 깔보는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범인 세상의 통치자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립도 속으론 수없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황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당대 황실이 칠대선파가 공동으로 만든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각 문파는 불문율처럼 제자들이 황실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어느 한 세력이 황실을 장악하면 다른 문파에게 불리하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월국 황성 내엔 단 한 명의 칠대선파 제자도 발을 들인 적이 없었으며 황실이 크게 불경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수선계도 그들 일에 관여하지 않아왔다. 이 틈을 노려 흑살교가 황실을 접수한 것이다!
이미 소왕야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그도 아직까지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수백 년간 이어온 관례를 깨고 황실을 함부로 침입했다간 흑살교 교주의 진면목을 만천하에 드러내고도 도리어 중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일이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정황이나 사정도 참작해 주지 않고 규정을 앞세워 벌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 애써 고생하고는 두들겨 맞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흑살교 교주의 정체를 파악한 것은 의외였다.
이것은 모두 한립의 운이라 할 수 있었는데 흑살교 교주의 진짜 얼굴은 축기기에 이른 단주들조차 본 사람이 없었다.
방금 잡아온 둘은 교주와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그의 신분을 아는 극소수에 속해있었다.
한 명은 교주의 당형으로 그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유일한 교주의 기명제자로 크게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친밀한 관계를 가진 둘이었기에 교주의 신분을 노출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교주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거대한 월경 지역을 연기기 수사들에게 맡겼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노인의 말은 이어졌다.
“……흑살교 교주의 법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으나 오늘 본 혈시(血侍)와 같은 이들이 넷으로 교주의 신변을 지키는 호법들이라 합니다. 아무래도 저희의 힘만으론 감당할 수 없을 듯하니 먼저 그들을 치기 보단 원병을…….”
“걱정 말거라. 흑살교 교주는 기껏해야 축기기 후기의 수준으로 결단기 수사는 아닐 것이다.”
한립이 노인의 제안을 끊고는 확신에 차 말했다.
그 말에 노인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으며 나머지 셋도 긴장이 조금 가신듯했다.
방금도 상대의 교주가 결단기 수사라면 어찌해야 할까를 논의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칠대선파에서 원병을 보내도 웬만해선 그들을 건들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선배님 혹시 왜 그런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심문한 왕 총관도 교주의 수준에 대해서는 일절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다섯째 누이가 달아난 일에 얼이 빠져 있던 넷째가 이젠 정신을 차렸는지 한립을 향해 또박또박 질문을 던졌다.
“버릇없기는, 한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
노인이 바로 청년을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립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랄 것도 없으니 설명해주마. 흑살교 교주가 수련을 위해 축기기 수사를 제물로 써야 한다는 데서 유추한 사실이다.
황풍곡이 마공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나 인신공양을 해 성취를 앞당기는 사공 정도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 다른 수도자의 피를 빨아들여 성취를 높이는 마공은 예전 마도문파에선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대부분의 세월을 수련으로 날릴 것 없이 단시간에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어서 그때는 마도가 아니라 정도인들도 몰래 그런 마공을 익히기도 했다더구나.”
한립이 입 꼬리를 들어 올리며 비웃었다.
“미친 듯이 실력이 느는 대신 악랄하게 대량의 수사들을 학살해야 했으며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방법이지. 축기기까지만 효과가 있을뿐더러 일단 제물을 받쳐 법력을 늘리는 순간 영원히 결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야.
그 시절 수많은 이들이 마공을 익혔지만 단 한 명도 결단기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혈제(血祭)를 통해 빼앗은 타인의 법력은 수시로 폭발해 조금만 소홀히 하면 주화입마에 들어 죽게 된다. 사악한 공법이 지금은 종적을 감추다시피 한 원인 중에 하나라 할 수 있었지.
또한 타 수사의 법력을 빼앗아 성장하는 사악한 수단은 수도계를 뒤 흔들었고 정도나 마도 할 것 없이 사공을 익힌 이들은 추살 되었다.
혈제처럼 바로 피를 통해 수행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혼백에 손을 쓴 것이 혼제(魂祭)인데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결단을 못하거나 법력이 요동치는 위험을 없앤 것으로 혼제에 관해선 본문의 경전에도 적혀있는 바가 많지 않았다.
다만 혼제의 연구가 성공했으며 마도의 극소수 상류층만이 그것을 독점한다 하더군. 수도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겠지. 혼제 역시 상당히 많은 제한이 있다고 하고 말이야.”
한립이 단숨에 혈제의 비밀을 늘어놓자 몽산사우로서는 신세계를 엿보는 기분이면서 동시에 그가 흑살교 교주의 수준을 확신하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저희가 흑살교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도망친 대머리 혈시에게 정체를 들키기도 했습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마른 사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그들이 당장 쳐들어오진 못할 게다. 소왕야에게 들은 바론 흑살교 교주는 폐관수련 중 중요한 고비에 있는데다 황궁의 모처에 마련된 밀실에서만 공법을 완성할 수 있다더군.
이번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수년을 공을 들였는데 이리 쉽게 포기할 리 없겠지. 그들은 분명 최대한 역량을 모아 우리가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한립의 말투에서 흑살교 교주에 대한 분명한 조소가 묻어났다.
그 말에 몽산사우도 긴장이 조금 풀어진 듯했다.
“선배님 그럼 저희는…….”
노인이 확실한 지침을 듣기 위해 운을 뗐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이 원병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상대는 우리가 어찌 생겼는지는 알아도 숨어있는 곳은 모르는데다 월경성을 담당하던 인물들까지 우리 손에 떨어졌으니 쓸 만한 이를 보내 우릴 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게지.
그러나 모두 근시일 내로는 외출을 삼가고 몸을 회복하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일단 본문의 사람이 오면 그때 다시 계획을 세우겠다.”
한립은 코를 문지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묘한 생각을 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머지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월국 황성(皇城)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 것이 바로 휘황찬란한 황궁이었다.
옥으로 조각된 황궁의 층층은 복잡한 회랑과 화원 등이 흩어져 있어 수년을 궁에서 머문 환관이나 궁녀들조차 종종 길을 잃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늦은 밤, 원래는 수많은 환관과 궁녀가 총총거리며 돌아다닐 궁궐이 삼엄한 경비를 제외하곤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거대한 피풍의로 온몸을 가린 인물이 금패를 내보이며 각 초소를 지나쳐 황궁 버려진 전각으로 다가섰다.
그의 체구는 멀리서 보아도 놀랍게 컸다.
음산한 눈빛으로 전각의 문을 바라보던 그가 피풍의를 벗어 던져 빛나는 머리를 드러냈다. 바로 한립에게서 달아난 대머리 거한이었다.
이제 요괴가 아니라 일반인의 형상으로 돌아온 그는 얼굴이 창백해 원기가 크게 상한 모습이었다.
“누구냐.”
그가 막 걸음을 때려는데 문 안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빙요, 나다.”
대머리 거한은 대답을 하면서도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어느새 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임무를 나갔던 철라구나. 허약한 걸음걸이를 보니 원기라도 상했나보군? 도검불침의 몸이라더니 어찌 고생 꽤나 한 모양이야?”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처음엔 약간 놀란 듯 했으나 들을수록 고소하다는 느낌이 드러났다.
“흥, 만년 싸늘한 표정 밖에 못 짓는 네가 무얼 알겠느냐. 내가 마주한 놈은 우리 둘이 협공했어도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자였다! 내가 민첩하게 살요(煞妖)로 변하지 않았다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을 테지.”
“살요로까지 변했단 말이냐? 어쩐지 그러니 원기가 이리 상했지. 한달은 요양을 해야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겠구나. 어디 얼마나 대단한 상대였는지 이야기나 들어보자.”
냉랭한 철라의 말에 빙요도 호기심이 동한 듯 했다.
“일단 교주께 죄를 청하고 말해 주마! 교주님의 기명제자 조차 그들 손에 떨어졌으니 어떤 벌이든 받아야겠지.”
“철라, 우린 다른 이들과는 달리 교주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일 정도면 기껏해야 꾸지람이나 듣고 말게야.”
빙요가 철라의 말에 반박하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전각의 문이 열리고 칠흑 같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요수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철라가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청문과 엽사는 어디 갔느냐?”
그가 막 문을 들어서며 희뿌연 사람의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이곳은 잠시 내게 맡기고 혈뢰로 연공을 하러 갔다.”
하얀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백색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 원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었다.
“청문 녀석은 벌써 축기기 중기면서 그리 수련에 매진하다니 진원이 날뛸까 두렵지도 않다더냐? 그리고 엽사는 언제부터 그리 부지런을 떨었다고.”
대머리 사내는 조금 의외인 듯 했다.
“듣고 질투나 말거라. 엽사는 중기로 들어설 조짐이 보인다며 그 길로 혈뢰로 갔다. 자질이 좋아 노력 없이도 우리 둘을 앞서나가니 어쩌겠느냐.”
하지만 빙요의 말투에 이미 그를 시기하는 마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엽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날 도발해 그와 싸움을 붙이려는 구나!”
“히히, 그럴 리가 있나? 이제 교주님을 뵈어야겠지.”
대머리 거한 철라가 눈을 부릅뜨자 하얀 그림자가 속내를 들켜놓고도 그저 화제를 돌릴 뿐이었다.
철라는 상대의 의도를 알기에 그저 콧방귀를 뀌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이리 저리 길을 따라가다 보니 눈에 잘 띄지 않는 정원의 인공산 앞에 당도했다. 거한의 얼굴에 공경심이 어렸다.
“속하 철라 교주님을 뵙습니다!”
거한의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부상을 당했더냐?”
중년인의 자비로운 목소리가 그 인공산의 먼 곳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흑살교 교주가 뜻밖에 이런 지하에서 폐관 수련 중일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속하, 살요(煞妖)로 변하느라 원기를 좀 상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교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번 임무는 실패한 게로구나. 성공했다면 내 기명제자 또한 함께였을 것이니.”
“속하 소주와 이호식을 지키지 못했으니 교주님께 벌을 청합니다!”
거한은 유유히 들려오는 교주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내 어찌 너를 벌한단 말이냐? 살요로 변하는 법술까지 썼다면 그만큼 적이 강하고 넌 최선을 다했다는 뜻. 겨우 제자와 호법일 뿐이다. 만일 네가 그들 수중에 떨어졌다면 골치가 아팠겠지만 말이야.”
“교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속하 이후 전심전력을 다해 이번 실패를 보상하겠습니다.”
흑살교 교주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데 능숙해 몇 마디 말로 거한의 충심을 이끌어냈다.
“그래, 기대하마! 이제 어찌된 일인지 세세히 고해 보거라. 어느 문파의 수사가 그리 대단한지 알고 싶구나.”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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