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53
〈 153화 〉 우연, 어쩌면 필연(1)
* * *
한여름의 햇살은 뜨겁다.
푸르른 하늘 아래 쨍하니 내리쬐는 햇볕은 보도블록을 뜨겁게 달군다. 공기도 제법 후끈해져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은 가벼워져 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늘 껴입고 다니던 조끼나 케이프는 집에 두고 나왔다. 셔츠 맨 위의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소매는 걷어붙였다. 목덜미에 땀이 차 머리도 한 갈래로 묶어 뒤로 넘긴 참이다.
팔락.
그러고도 조금 더운 것 같아, 나는 옷깃을 괜스레 잡아당겼다. 눈보라가 쌩쌩 몰아치는 북부를 돌아다니다 한여름의 수도를 걷고 있자니, 기온 차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기분이다.
냉각 마법이라도 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어차피 곧 그늘인데 하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덥긴 하네.”
사계절이 죄다 지랄맞은 마계와는 다르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날이긴 한데, 워낙 비정상적인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정상적인 날씨가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다.
하여간, 하고 한숨을 내뱉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골목길에 접어든다.
차게 식은 보도블록을 밟으며 나는 골목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여름날의 정오. 한번 외출하는 게 고역인 이 시간대에, 내가 수도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들려야 할 곳이 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고.
골목길을 걷다 말고, 나는 잠시 왼눈을 깜빡였다.
“···음.”
왼쪽 눈동자가 조금 뻑뻑한 기분이었다.
첫날보다야 낫긴 하지만, 아무래도 며칠은 더 갈듯싶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죽음의 칼, 가니칼트.
상식으로 재단되지 않는 괴물을 훔쳐본 대가로, 한쪽 눈이 며칠 흐릿한 것 정도야 뭐···.
‘충분히 감내할만한 대가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긴다.
음산한 공기가 감도는 골목길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한산한 골목길을 바닥에 새겨진 문양에 주의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낡아 해진 마도구 상점.
“······.”
상점의 문 앞에 서서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이 상점의 주인, 속을 알 수 없는 고대 엘프와 마주한 것은 여러 번이나··· 그 정체를 알게 된 지금은 이전과는 좀 상황이 달랐다.
‘카르디.’
나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카르디, 반 아르미엘.’
잿빛 마탑의 초대 마탑주.
최초의 용사파티의 대현자.
물론, 카르디란 이름을 곱씹자면 꼰대 끼가 충만한데다가, 어딘가 나사 빠진 엘프의 모습이 떠오르는 까닭에 좀처럼 매치가 되진 않지만······.
‘···대단한 인물이지.’
초대 마탑주 아르미엘.
내가 존경했던 인물이고, 닮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아르미엘님이, 카르디···.’
그 정체가 카르디란걸 알게 된 지금, 잿빛의 역대 마탑주들을 훑어보며 눈을 빛냈던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라 속이 쓰리긴 했지만··· 아무튼 대단한 인물임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만났던 사람 중, 두 손가락에 꼽지.’
그 정도 업적을 이룬 이는 정말로 드물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역사상에서 카르디가 세운 업적에 비비려면··· 고대용의 마법사 정도는 데리고 와야 했다.
낯선 기분이었다. 무척.
몇 번이고 만난 사람인데, 익숙한 사람일 텐데···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
“후우···.”
나는 짧게 숨을 뱉으며 문고리에 손을 걸었다.
끼이이익.
낡아 녹이 슨 경첩이 삐걱거린다. 문에 달린 허름한 종이 짤랑, 하고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가게 안에 있던 인물이 반응한다.
“응? 빨리 왔네?”
들려온 건 카르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목소리.
콰직.
그 목소리에 의식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문고리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들려선 안 될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가속, 그리고 근력 강화.
순식간에 완성된 주문이 빛을 뿜는다.
콰앙!
문짝을 잡아 뜯을 기세로 나는 가게 안으로 박차고 들어갔다. 카르디가 앉아있어야 할 곳. 그곳에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백색 머리칼.
녹 빛의 눈동자.
배교자(?者), 글레투스.
망막에 비춘 그녀를 향해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2.
“···벨노아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클로에는 오늘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녀는 볼을 부풀린 채 괜한 플라스크를 툭툭 건드린다. 찰랑, 하고 플라스크 안에 담긴 포션이 요란스레 너울 친다.
“빨리 온다고 했으면서.”
의자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흔든다.
할 일이 없어 책상에 엎드린 채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활동적인 클로에에게 있어 썩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얼마만의 휴일이던가?
모처럼 흑색 마탑주가 내준 휴일이다. 1분 1초가 아까울 지경인데, 벨노아는 약속 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올 생각이 없다.
‘카르디 할아버지도 안 오잖아.’
클로에가 오자마자, 잘됐다며 가게 좀 보고 있으라며 영감님이 바깥으로 나간 지가 한참이다. 그 덕에, 클로에는 달콤한 휴일을 손님이 찾아오지도 않을 가게를 지키며 보내고 있었다.
“이런 가게에 대체 손님이 누가 온다구···.”
사람의 발길도 끊긴 골목길.
후미진 골목길에서도 특정한 서순을 지켜 길을 밟지 않으면 들릴 수도 없는 가게다. 이런 가게에 들르는 사람이 자신과 벨노아 말고 어디 더 있겠는가.
‘있어 봐야 순 괴짜겠지!’
정상적인 사람일 리가 없다.
클로에는 투덜거리며 플라스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플라스크는 기우뚱, 하고 기울었다가 오뚜기처럼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째 보다 보니 재밌는 거 같기도 하다.
참으로 쓰잘데 없는 일에 재미를 붙여 클로에가 플라스크를 툭툭, 건드리기를 반복할 무렵이다.
“앗.”
우연한 힘 조절 실수일까, 아니면 닥쳐올 불운에 대한 경고일까.
챙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플라스크가 깨졌다.
클로에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급하게 닦을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였다.
짤랑.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클로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카르디가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클로에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럴 때만 빨리 와···!’
그래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
클로에는 평온을 가장한 채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뱉는다.
“응? 빨리 왔네?”
그 말을 뱉은 순간이다. 클로에의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별의 직감이 클로에에게 경고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경고에 클로에가 눈살을 찌푸린다.
‘···죽는다고?’
그 경고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문의 활짝 열린다. 낡은 가게에 가라앉은 먼지가 공중으로 뜬다. 밀려드는 바람에 클로에가 눈을 깜빡인 순간이다.
한번의 눈깜빡임.
찰나의 불과한 순간.
그 잠깐의 순간에 무언가 몰아친다. 클로에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클로에는 무심코 숨을 헛삼키고 말았다.
“으힉···!”
밀려드는 바람과 함께 다가온 것은 주먹이다. 클로에의 눈 바로 앞에서 주먹이 멈춰 있었다.
후웅!
뒤늦게 바람이 짓쳐 든다.
클로에의 새하얀 머리칼이 너울 친다. 가지런히 내린 앞머리가 전부 뒤로 넘어간다.
“어, 으어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놀라면 할 말을 잃는다고 하였던가? 지금 자신의 상태가 딱 그랬다. 너무 놀란 나머지 클로에는 제대로 된 말조차 하지 못한다.
“히끅.”
이제는 딸꾹질마저 나온다.
윗니와 아랫니가 딱, 따닥 하고 맞부딪친다. 클로에는 코앞에서 멈춘 주먹의 너머를 본다.
섬뜩하리만치 푸르른 눈동자.
맹수와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클로에는 공포를 느낀다. 형용할 수 없는, 깊고 두려운 공포를.
“히, 히끅.”
찔끔, 클로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클로에는 달달달 떨며 입을 열었다. 힘겹게 단어와 단어를 짜 맞춰 발음했다.
“저, 저저저한테 왜 그러세요···?”
무척이나 떨리는 목소리지만, 그 누가 그녀를 탓할 수 있겠는가. 불의의 습격자를 향해 클로에는 용기를 쥐어짜 물었다. 나한테 왜 그러냐고 대체.
“어···.”
그 말을 들은 불의의 습격자, 라니엘은 무척이나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천천히 주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닌가?”
도대체 뭐가 아니란 말인가.
클로에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벨노아, 제발 빨리 와줘···!’
이제는 짜증 같은 건 내지 않는다.
클로에는 속으로 제 소꿉친구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3.
낡은 가게에 찾아온 손님과, 가게의 주인에게 잠시나마 대리 점주의 역할을 맡은 소녀는 서로를 바라본다. 둘 사이엔 무척이나 어색한 기류가 감돈다.
“그, 그러니까.”
“응.”
“저를 되게 나쁜, 만나자마자 주먹으로 후려쳐도 될 만큼 나쁜 사람으로 착각해서 주먹을 휘두르셨다구요?”
“그런···거지.”
손님이라기보단, 손놈이라 불러야 할 여인을 앞에 두고 클로에는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손놈 되는 분의 입장을 들어보자면 이와 같았다.
‘무척이나 나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하고 엄청 닮은 데다가··· 목소리도 똑같아서 일단 주먹을 휘두르고 봤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본인 스스로 심성이 곱고, 인내심이 크다고 생각하는 클로에지만··· 눈앞의 여인에게는 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싶었다.
“후우, 후우···.”
간신히 분노를 삭이며 클로에는 입을 열었다.
“손님분께서 말씀하시는 나쁜 사람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간, 만나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정론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정론이란 게 으레 그러하듯··· 그건 상식의 범주에 속한 인물에게나 먹히는 말이다.
“아니, 그 미친년은 그래도 돼.”
“···네?”
“만나자마자 쥐어패도 된다고. 오히려 보이자마자 초전에 박살을 내지 않으면 굉장히 성가셔지는···.”
그리고, 눈앞의 여인은 정상이 아니었다.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서는, 속에는 웬 정신병자가 들어차 있다. 클로에는 제 관자놀이를 꾹, 꾸욱 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는 그 정체 모를 분이 아닌데다가, 아무런 연관도 없단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클로에의 항변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인의 표정인 무척이나 미묘했다. 사실, 그녀··· 그러니까 라니엘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제법 많았다.
‘진짜 너무 닮았는데.’
동일 인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배교자보다 앞머리를 조금 길렀고, 그녀보다 조금 어려 보이긴 하지만··· 차이점은 그게 전부였다.
눈동자, 머리카락 색, 피부.
심지어는 목소리마저 닮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는가?’
거기에 두른 분위기 자체도 비슷하다.
눈앞의 소녀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마나를 가지고 있다. 소름이 끼치는 마나에 라니엘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만났을 때 상황은 또 어땠고?’
카르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것도 한 손에는 깨진 플라스크를 든 채. 다른 손에는 붉은 액체를 덕지덕지 묻히고선.
바닥에 흐르는 검붉은색의 질척한 액체.
깨진 플라스크.
그리고, 약품 특유의 톡 쏘는 냄새.
라니엘의 입장에선 그 상황에서 오해하지 않는 편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제 입술을 우물거리던 라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착각했나 봐.”
“···그래도 때리지는 않으셨으니까, 저도 넘어가 드릴게요. 다음부터는 꼭 조심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녀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다. 그건 라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라니엘은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네?”
“이름이 뭐냐고.”
라니엘의 물음에 소녀가 답했다.
“클로에에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라니엘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클로에. 자신이 미리 점찍어둔 용사 후보생. 라니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 용사면 이질적일 수도 있지.’
경계가 반가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라니엘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 네가 클로에야?”
“···누군데 아는 척 하세요? 저 아세요?”
“응, 알지. 잘 알지.”
라니엘이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다.
그 웃음에 클로에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한순간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뒤바꼈다. 그 이유를 모르는 클로에로서는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나를 잘 안다고?’
방금까지 했던 말들은 다 뭔데 그럼?
‘···뭐라는 거야.’
신종 사기꾼인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응? 너 뭐 하니?”
“거기서 이야기하세요. 좀··· 좀 거리를 두고 이야기해요. 우리.”
클로에는 라니엘에게서 조금 거리를 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