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52
〈 152화 〉 북부, 후일담(下)
* * *
북부에서 떠나기 이틀쯤 전, 라니엘은 마지막으로 라크와 훈련에 나섰다. 라크의 성장을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성지의 끝에서 다시 마주해야 할 것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성지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라니엘은 예상외의 결과에 놀라움을 느낀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라크를 바라봤다.
“···진짜 많이 늘었네?”
첫 훈련 당시 한계였던 곳이, 지금 라크가 서 있는 곳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때보다 한참을 나아간 곳에서 라크는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다.
그뿐이 아니다.
“주문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숨을 짧게 내뱉으며 라크가 팔에 힘을 준다. 팔뚝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주문이 라크의 몸을 감싼다.
근력 강화(EnhanceStrength).
툭, 투둑 소리를 내며 밧줄이 끊어진다.
라니엘은 혀를 내두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돈 아니었는데.’
놀라운 결과다. 정말인지.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늘었다. 예상외의 결과는 놀라움과 동시에 기쁨으로 다가온다. 툭, 하고 라니엘이 라크의 머리를 손등으로 건드렸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제법인데.”
그 뒤로도 라크는 한참을 버텼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라크는 탈진하듯 쓰러졌다. 그것이 라크가 오늘 겪은 첫 번째 기절이었다.
“읏챠.”
라크를 등에 업은 채 성지를 빠져나가며 라니엘은 생각한다. 며칠 사이에 이런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다면··· 무언가 계기가 있는 법이다.
‘···계기라 쳐봐야, 뭐.’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다.
‘검귀, 드라카와의 조우.’
초인이 죽일 각오로 휘두른 검.
자신을 덮치는 죽음을 상대로 라크는 저항했다. 초인이 쏘아낸 검기(??)의 한 가닥이나마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분명한 위업이었다.
다가오는 죽음.
생과 사의 경계선.
그 틈새에 놓였을 때, 생(?)을 위해 저항하는 이는 한 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한 줌의 인간은 깨달음을 얻는 법이다.
‘무언가 깨달은 거겠지.’
달리 말하자면······.
‘벽을 보았다.’
라니엘은 벽이란 걸 체감해본 적이 없기에, 그것이 어떠한 형상으로 보이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초인들에게 들은 말로 어렴풋이 그 형상을 그려볼 뿐이다.
이제 막 벽을 마주한 소년.
그리고, 소년이 벽을 넘어 도달할 영역.
그것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북부에서의 여정에 또 다른 보람을 느끼며 라니엘은 중얼거린다.
“···기대되네.”
그리 중얼거리며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볍고 경쾌하게.
* * *
성지의 바깥에 라크를 눕혀둔 라니엘은 다시 성지의 안쪽으로 향했다. 이미 한번은 지나쳤던 길목이다. 한번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건 쉬운 일이었다.
턱.
얼마 안 가 라니엘은 성지의 중심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그친 중심, 다시 보아도 적응이 안 되는 신비로운 초원 위를 라니엘은 걷는다.
“······.”
부서진 석상의 앞에서 그녀는 멈춰 선다.
멈춰 섬은 잠시다. 별빛을 머금은 물길을 넘어, 그녀는 호수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으로 향한다.
섬의 한가운데에 꽂힌 검.
죽음의 칼과 놀랍도록 닮은 검.
라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검을 바라본다. 처음 이 대검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다. 잊힌 과거의 역사를 깨달은 지금, 이 한 자루의 칼은 라니엘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최초의 성검(??).”
검의 초인과 한평생 함께한 검.
그것에 별빛이 깃들어 만들어진 별의 검.
‘···별빛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성검이라 하였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용사들.
그들이 사용한 무구는 제각각이었으나, 당대의 최강이라 불린 용사는 언제나 성검을 들었다. 그 덕에 성검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별의 형태라는 말이 돈 적도 있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네.’
진실을 알게 된 라니엘은 쓴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검에 깃들기 위한 별빛이었으니까.’
눈앞에 놓인 이 검을 라니엘은 과거의 역사에서 보았다. 초대 용사였던 가니칼트의 손에 쥐어졌던 이 대검은, 그 어떤 주문보다 위력적이었으며, 그 어떤 주문보다 날카로웠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전황이 뒤바뀌는 검.’
저주의 군대를 가르고.
하늘을 가린 어둠을 베어내며.
태양을 삼킨 그늘마저 참(?)한 검.
최초의 초인이자, 용사였던 그의 손에 들렸던 이 대검은 가히 완벽이라 부를만한 무기였다. 라니엘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검은, 검사의 반신(半?).”
검의 초인, 쿤텔이 입이 닳도록 말한 말이다.
“검에는 검사의 영혼이 깃든다.”
우스갯소리라며 흘려들었던 말이다.
어쩌면 미신일지도 모르는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 한 자루의 검에 있어서 검사들의 말버릇은 사실이 된다. 라니엘이 눈을 가늘게 뜬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목함이 쥐어져 있었다.
사락.
목함에서 흘러나온 별빛과, 칼날에 넘쳐흐르는 별빛이 공명한다. 라니엘의 시야에 일시적으로 별빛이 깃든다.
‘보인다.’
라니엘이 손을 뻗는다.
손을 뻗어서, 칼자루를 쥔다.
치이이이익.
손바닥이 타들어 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검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검에 고인 별빛의 흐름을 읽는다. 그녀의 눈동자가 백금색으로 번들거렸다.
눈에 핏발이 선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다.
‘영혼의 파편.’
쪼개진 영혼의 파편이 그곳에 남아있다.
라니엘이 그것에 제 영혼을 끼워 넣은 순간이다.
쩍, 쩌적.
라니엘의 시야가 갈라진다.
시야에 일시적인 혼선이 일어난다. 쪼개진 영혼은 다른 영혼을 쫓는다. 어느 검사의 버려진 반신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향한다.
“···아.”
라니엘이 무심코 탄성을 내뱉는다.
무언가와 시야가 이어졌다. 왼쪽 눈과 혼선된 시야로 라니엘은 주변을 본다. 사방이 어둡다. 안개가 자욱한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 무언가 있다.
「······.」
어둠 속에서 검은 안광이 빛난다.
쪼개진 투구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은 낯이 익다. 라니엘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딱, 따닥하고 이가 맞부딪친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언젠가 마주했던 죽음.
‘시야가 연결된 건··· 죽음의 검.’
본래 가니칼트가 쓰는 칼.
그늘이 흐르는 검과 시야는 연결됐다. 쪼개진 영혼과 영혼이 공명한다. 그사이에 낀 자신은 이물질과도 같다.
「검사가 아닌 이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일류의 검사는 이물질의 존재를 눈치챈다.
「검사를 흉내 내지 마라.」
그것이 천천히 손을 뻗는다.
뻗은 손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긋는다.
“읏···!”
검에서 손을 놓은 라니엘이 제 왼쪽 눈을 감쌌다.
주륵, 뺨을 타고 핏방울이 흘렀다.
“저, 미친···.”
누가 괴물 아니랄까 봐.
라니엘은 그리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별빛까지 빌려 가며 영혼을 끼워 넣었으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맥없이 튕겨 나갔다. 흐르는 핏물을 닦으며 라니엘은 왼쪽 눈을 감았다.
‘그래도.’
얻은 건 있다.
위험을 감수한 보람은 있었다.
“···이거였구나.”
무슨 수를 써도 찾을 수 없던 방법.
별빛을 무력화하는 죽음의 칼을 사냥할 방법.
‘수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라니엘은 그것을 발견한다.
하늘 위의 존재를 땅으로 떨어트릴 방법을.
2.
“···선배님? 눈은 왜 그러십니까?”
“며칠 있음 다 나아.”
“아니, 왼쪽 눈이 좀 심각한···.”
칼트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짐을 챙겼다. 사실, 북부로 올 때보다 갈 때 챙겨야 할 짐이 더 많았다.
「어머, 벌써 돌아가시게요?」
「그럼 이거랑, 이거랑, 또 이것도···.」
페일리아 부인께서 챙겨주신 선물의 양이 제법 되는 탓이었다. 전사들이 준 선물도 꽤 있었고. 내가 짐을 싸고 있자니 칼트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수도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죠?”
“그래야지. 너는 좀 더 있다가 간댔나?”
“예, 기사단에서 한 분을 파견 보낸지라···.”
“···분?”
한 분. 그 말에 나는 칼트를 돌아봤다.
칼트가 ‘분’이란 이름을 붙여 부르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나는 칼트에게 넌지시 물었다.
“기사단장 아저씨가 올 일은 없을 거고, 그럼···.”
“용사, 갈라할 님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하긴. 갈라할이면 믿을 만 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할이 온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툭툭, 칼트의 어깨를 두들겼다.
“갈라할 한 테는 안부 잘 전해주고.”
“···그, 선배님?”
“엉. 왜?”
칼트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선배님은 공식적으로는 은퇴한 데다가, 현재 신원 불명의 상태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그렇지?”
“본래대로라면, 제가 선배님과 연락이 닿는 것도 극비사항이란 말입니다. 좀, 그으···.”
“뭐,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갈라할 정도면 괜찮지.”
“뭐, 그렇기야 합니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갈라할이다.
눈치껏 이해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채.
“그럼 수고하고.”
“예, 수도로 복귀하면 연락 한번 드리겠습니다.”
“어야.”
나는 적당히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북부에서의 모든 일정은 끝마쳤다.
이젠, 수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3.
가벼운 송별회와 배웅을 받으며 나는 수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라크는 개학 시기에 맞춰 올라온다고 하였기에 수도로 내려가는 길은 혼자였다.
“북부에서의 여정은 즐거우셨는지···.”
“마냥 즐기기엔 사건이 많긴 했죠.”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긴 했군요. 다음에 오실 때는, 온전히 북부의 아름다움을 체감하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혼자였긴 하나, 이제는 친해진 집사 세바스가 말동무가 되었기에 그리 지루한 귀향길은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에 걸려 나는 수도 인근의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내 고향에.
“으하악···.”
늘어져라 기지개를 피며 나는 들판을 걸었다.
야트막한 언덕, 살랑이는 푸르른 풀.
숲과 맞닿은 스승님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와 같다. 이제는 여름이 되어 조금은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나는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연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스승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달그락,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스승님이 입을 여셨다.
“왔느냐, 라니엘.”
“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그리 말하며 나는 양손 가득 든 짐을 스승님께 보이며 웃어 보였다.
“선물 잔뜩 가져왔어요.”
* * *
“소식이 둘 있구나.”
로셀이 차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로셀의 말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간식거리를 오물거리던 라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식이요?”
“네가 북부에 가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이지. 자잘한 사건이 몇 있긴 했지만, 네가 알아둬야 할만한 일은 이 두 개 밖에 없겠구나.”
로셀은 두 장의 편지를 꺼냈다.
그 중 한 장을펼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하나는, 잿빛 마탑에서 원로 하나가 ‘불미스러운 일’로 하여금 은퇴했단 소식이다.”
“···불미스러운 일이요?”
“그래. 그 원로가 빠지며 만들어진 공석은, 앞으로도 공석으로 남을 예정이라더군. 그리고 이 편지를 보내온 것은···.”
로셀이 편지의 발신인을 가리켰다.
“차기 마탑주, 레스티 엘레노아구나.”
기둥 하나가 공석이 됐다.
그리고, 앞으로도 공석일 것이다.
그것은 차기 마탑주가 다른 원로들을 향해 건네는 일종의 경고였다. 이번 마탑주는 아주 공격적으로 마탑을 장악할 거라는 경고.
“꽤 당돌한 일을 벌였더구나.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일이지. 원로가 너무 많긴 했으니까.”
줄일 필요가 있다.
잿빛 마탑이 나아가기 위해서, 여섯의 원로는 그 수가 너무 많았으니까.
“미뤄두고 미뤄둔 과제지만······.”
“그 애가 전부 몰아서 해치울 생각인가 보네요.”
라니엘은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에 로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귀띔을 준 것이냐?”
“덫을 선물해주긴 했죠. 그걸 어디에, 어떤 식으로 설치할지, 어떤 사냥감을 잡는 데 쓸지는 그 애가 선택하도록 내버려 뒀고요.”
쿡쿡, 라니엘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갈피를 잡은 모양이네요.”
그럼 다음 소식은요? 그렇게 묻는 라니엘에게 로셀은 남은 한 장의 편지를 펼쳤다.
“왕가와 흑색 마탑에서 비밀리에 공문이 내려왔더구나. 아플리아의 학사 진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한해서 말야.”
극비사항이 적힌 편지.
로셀은 그것을 한 줄씩 읽어 내렸다.
“다음 학기에 위장 신분으로 편입되는 학생 ‘클로에’란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클로에, 그 이름에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위장 신분상으론 특이 체질을 타고난, 흑색 마탑의 비호를 받는 소녀이지만···.”
로셀이 편지지를 툭툭 건드렸다.
편지지에 가미된 문양은 흑색 마탑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그것도 흑색의 주인만이 사용하는 문양.
“그 정체는 각성을 앞둔 차기 용사 후보. 이번 시대의 네 번째 용사라 왕가에선 설명했다.”
로셀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별빛 그 자체를 제 마나(Mana)로 타고난 최초의 위자드 클래스의 용사. 수백년만에 나타난 이례적인 경우. 왕가와 흑색 마탑에선 그 특수성을 감안해······.”
로셀의 손가락이 라니엘을 가리켰다.
“그 아이의 교육을 네게 맡긴다더구나, 라니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