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92
〈 192화 〉 각자의 무대(6)
* * *
라니엘은 틈새를 향해 걷는다.
그녀는 바닥에 새겨진 온갖 그을음을 본다.
그것은 주문적인 그을음이다. 주문과 주문이 맞부딪쳐서 바닥을 할퀸 흔적. 라니엘은 이곳에 서서 분전하였을 마법사를 떠올려본다.
광인, 켈르할름.
그는 자신의 몸을 바쳐 그늘을 삼켰다.
그늘에게 노려진 아이들을 지켜냈다.
이어서, 라니엘은 바닥에 새긴 검흔을 본다.
검흔을 따라 이어진 핏자국들을 향하다 보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칼트가 보인다. 그를 바라보며 라니엘은 생각한다.
기사, 칼트.
그는 목숨을 걸어가며 재앙을 상대했다.
재앙에게서 시간을 벌어내는 데 성공했다.
“···위업이지.”
켈르할름도, 칼트도.
그들 모두가 제 역할에 충실했다. 저마다의 무대에서 이뤄야 할 것을 이뤄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벌어낸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그들의 각오가 짓밟히지 않도록.’
‘그들의 위업이, 빛이 날 수 있도록.’
마침표를 찍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역할이리라.
“······.”
라니엘은 그늘이 새어 나오는 틈을 바라본다.
저 너머에 자신의 무대가 있었다.
2.
어둠에 깔린 아플리아를 아일라는 걷는다.
기품이 느껴지는 동작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내디디는 우아한 발걸음도 아니다. 아일라는 여타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4 왕녀가 아니다.
별에게 사랑받는 아이 또한 아니다.
그저 아일라란 이름을 가진 소녀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별의 예언은 들려오지 않지만, 별은 여전히 아일라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다.
터벅.
한걸음, 다시 한걸음.
불안하지만 멈추지 않고 내디딘 걸음마다 빛이 깃들었다. 그녀의 걸음이 찍힌 곳마다 새어 나오는 빛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악몽에서 깨어날 이들을 위한 이정표.
뒤따라올 이들을 위한 빛.
그렇게 발자국을 남기며 아일라는 제단으로 향한다.
「지금의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하려면, 제단을 반드시 부숴야 합니다. 그게 핵심일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단을 부술 수 없습니다.」
아일라는 부탁받은 것을 떠올렸다.
「제단을 둘러싼 특수한 결계, 그 안에서 저는 버티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럴 겁니다. 그 안에 있는 건, 마나를 오염시키는 독(?)이니까요.」
그녀는 아일라에게 말했다.
「하지만 왕녀님은 다릅니다. 왕녀님이 가진 별의 가호는 주변의 흐름을 장악합니다. 결계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왕녀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네게 부탁하겠다.
그녀는 아일라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 말을 남긴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가.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렇게 불리는 여인에 대해 아일라는 떠올린다. 첫 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힌트는 많았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말을 뱉었고, 자신을 익숙하다는 듯이 쳐다봤으며··· 허물없는 태도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일들이었다.
‘그래서, 계속 의심만 했었는데.’
지금까지 별은 아일라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일라의 직감이 ‘틀렸다’라고 못 박았다.
별에 의지해 살아왔던 아일라였기에, 아일라는 그 사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별이 틀렸다면 틀린 것일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제 발로 앞으로 향하기를 선택한 오늘만큼은 아니다. 아일라는 자신의 직감을 긍정한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아일라는 결론을 내렸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잿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교수는.
‘라니엘 반 트리아스.’
자신이 동경했던 은인과 같은 인물이다.
유년기의 유일한 색(色)이 되어주었던 그 마법사다.
“···정말이지.”
아일라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
스승이 되어주었고, 말동무가 되어주었으며, 언제나 허물없이 자신을 바라봐 주었던 사람. 그에 대해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일라는 웃을 수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었고.
우상이었으며.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에 담았던 사람.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그것은 아일라에게 천금의 가치를 지닌 말이다.
‘단순히 지켜줘야 할 대상이 아니야.’
그때와는 달랐다.
함께 할 조력자로 자신을 봐주었다.
그 사실이 아일라는 기껍다.
‘그러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리라.
턱.
아일라가 걸음을 멈췄다. 회오리치는 결계의 앞에 서서 그녀는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남겨둔 발자국이 길게 찍혀있다.
어둠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이정표.
악몽을 헤매는 이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을 따라올 수 있도록 남겨둔 한 줄기의 빛.
그 빛을 더듬으며 다가오는 이가 둘 있다.
어둠에 가려져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보지 않더라도 아일라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남겨둔 별빛을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 아플리아에는 단둘 밖에 없었으니까.
“어서 와요.”
아일라가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스스로 나아가기를 선택한 왕녀는, 자신의 힘이 되어줄 사람을 마주한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두 명의 소녀다.
레스티 엘레노아.
별의 맥락을 읽는 이, 와쳐(Watcher).
클로에.
별에게 선택받은 아이, 용사(Brave).
어둠 속에서 빛을 따라 이곳으로 도착한 이들. 그들을 마주한 채 아일라는 설명을 시작한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이곳에 모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네요.”
레스티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일전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마주한 적이 있다. 있기에, 중심이 되는 핵을 깨트려야 함을 그녀는 단숨에 이해한다.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어요.”
클로에는 확실하게 제 의사를 전한다.
“그게 제가 별에게 선택받은 이유일 테니까요.”
아직은 어리고, 성숙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이해하고 있다. 이해하기에 그녀는 기꺼이 아일라의 곁에 선다.
“그래요.”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회오리치는 결계를 가리킨다.
“함께 갈까요.”
그녀를 중심으로 별 무리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봉오리가 진 꽃이다. 수년 전부터 아일라의 별빛은 줄곧 그런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일라는 개화(?花)를 맞이한다.
파앗.
봉우리 진 꽃망울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별의 꽃이 아일라의 곁을 장식한다. 환히 빛나는 꽃이 아니다. 화려한 꽃도 아니다. 그저, 은은한 빛을 품은 꽃이다.
“제 곁에 서주세요.”
은은한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그녀의 주변은 이미 별세계다. 어둠에 깔린 아플리아에서 작은 빛이 태어난다.
별의 사랑을 받아온 아이, 스텔라(Stella).
그러나, 아이는 어른이 된다.
별의 사랑을 맹신하지 않으며, 스스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제 발로 별의 보호를 벗어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제 삶을 살아가길 선택한다.
그 의지에 별이 반응한다.
별은 그녀의 앞길을 더 이상 점지하지 않는다.
예언(??)을 들려주는 대신, 별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가 선택한 길에 빛을 비춘다.
설령, 그것이 오답일지라도 상관없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그 자체로 정답일지니.
“따라오세요.”
별의 아이는 가장 앞에 서서 걷는다.
누구보다도 앞에 서서 걷는다.
그런 이를 세상은 지도자라 부른다.
3.
비틀린 공간의 틈을 찢고 이계(??)로 들어선다.
세상은 한순간에 색을 잃는다. 무채색의 세계로 들어선 라니엘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그녀는 바닥을 흐르는 검은 안개를 따라 걸었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심장이 거세게 뛴다. 심장에 고인 저주가 안개와 반응한다. 그 사실이 그닥 놀랍지는 않다.
‘이미 예상했으니까.’
바닥에 깔린 안개는 마왕의 편린이다.
마왕의 저주가 고인 심장이 그것과 반응하리란 사실은 이미 예상했다. 라니엘은 가슴팍에 새겨진 회로를 과열시켰다.
육체에 부하가 걸린다.
망가진 육체가, 조금 더 망가진다.
일순 다가온 고통에 라니엘이 헛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또한 한 번뿐이다. 금세 균형을 잡은 라니엘은 계속해서 걸었다.
긴 시간이었다.
마왕과 조우한 날을 라니엘은 떠올린다. 수명의 절반을 저울에 올렸던 그날의 기억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날 느꼈던 무력감을 라니엘은 지난 몇 년간 몇 번이고 곱씹어야 했다.
마왕(?王).
이해할 수 없는 개념.
존재 자체가 섭리를 부정하는 무언가.
라니엘이 쌓아온 모든 것은 마왕의 앞에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라니엘의 삶은 그곳,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것의 앞에서 자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
‘하지만.’
라니엘은 자기 자신을 잊지 않았다.
자신은 마법사다. 쌓아온 모든 것이 부정당한다 한들,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니엘은 답을 갈구했다.
‘답을 찾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다.
상대할 수 없는 것을 상대한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야 한다.
“그래.”
라니엘은 걸음을 멈춘다.
“너도 그랬겠지.”
그녀는 앞을 바라본다.
그곳은 검은 안개의 시작점이다. 그곳에는 검은 안개를 품은 인간이 서 있었다.
“답을 찾으려 했던 거겠지.”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인간.
광기에 몸부림치며 답을 찾아온 초인.
반드시 답을 찾아야만 했던 마법사.
“그렇지 않아?”
라니엘은 그를 바라본다.
“켈르할름.”
광인, 켈르할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이성을 잃은 눈동자가 라니엘을 향한다. 그를 기점으로 새어 나오는 안개가 바닥에 짙게 깔렸다.
끼긱, 끼기기직.
켈르할름의 주위에 비틀린 회로가 떠오른다.
수십의 회로 속에서 켈르할름이 입을 연다.
“나를 알고 있나?”
들끓는 듯한 광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그 모습은 라니엘의 예상대로였다.
‘제약이 전부 박살났네.’
켈르할름은 모든 제약에서 해방되어 이성을 잃은 상태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적으로 여긴다. 심지어 그 곁에 그늘마저 함께하니, 상대하려면 제법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리라.
“···알지.”
물음에 답하며 라니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기고 튄 놈 이름은 기억하거든. 솔직히 말해서, 그 결투가 좀 그랬잖아? 승부라 하기도 좀 그렇고···.”
투덜거리며 라니엘이 켈르할름의 간격으로 들어선다.
그 순간 켈르할름이 반응했다. 그가 손을 휘둘렀고, 완성된 주문이 빛났다. 주문에 녹아든 검은 안개가 일대를 사납게 할퀴었다.
촤아아아아악!
거센 폭풍과도 같은 주문이다.
그늘을 품은 주문은 모든 마법적 영향을 무시한다. 마법사가 가진 어떠한 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뚫고 지나갈 수도 없다. 그러니, 주문이 할퀴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광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예상한다.
“그러니까 말야.”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만다.
“재대결인 셈이지.”
그늘이 할퀴고 지나간 곳.
검은 안개가 몰아치는 곳을 정면으로 뚫고 걸어 나오는 인간이 있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와 같은 푸른색의 마나가 빛나지 않는다.
“너도, 네가 품고 있는 것하고도 말야.”
잿빛 마법사, 라니엘.
그녀의 손에서 빛나는 것은 잿빛의 마나다.
“패배로부터 4년.”
누군가는 좌절로 낭비했을 4년.
하지만, 누군가에겐······.
“답을 찾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승리를 위한 답을 찾기에 충분한 시간.
짝, 하고 라니엘이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녀의 전신에 새겨진 회로가 불타올랐다.
쩌억.
맞부딪친 손바닥에서 피어오른 잿빛 마나가, 스톡(Stock)된 수백의 주문을 모조리 집어삼킨다.
“주문은 주문으로.”
그녀가 입가를 틀어 올린다.
“저주는 저주로.”
저주의 마나(Cursed Mana).
자신을 좀먹는 저주 속에서도 살아남은 마법사는, 저주를 상대할 방법을 손에 넣었다. 이것이 라니엘이 찾아낸 답이다.
“재대결이다, 켈르할름.”
마법사와 마법사.
초인과 초인.
인간과 재앙.
그리고, 다시 인간과 인간.
결착을 내기 위해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주문과 주문이 충돌하며 이계가 뒤흔들린다. 저주와 저주를 삼키는 마나가 뒤섞이며 공간을 찢어발긴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
세상에서 한걸음 빗겨선, 무대의 뒤편.
그곳이 그들에게 주어진 무대였다.
* * *